"도덕관이 충돌할 때 하나의 근본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J.S. 밀 공리주의』에 대해서



삶이란 무수한 선택의 과정이며, 사회적 사건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연속을 요구한다. ' J.S.밀'의 직관주의처럼  "인류는 경험에 의해 행동의 경향을 익혀왔기"에 대부분의 일상적 선택에서 사람들 개개인은 즉각적으로 도덕적인 옳은 방향의 선택을 하지만, 그것이 그 개인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 아닐뿐아니라 타인이나 사회라는 집단적 측면에서는 그른 행위가 될 여지가 있다. 특히 도덕관이 충돌할 때에는 어떤 도덕관이 보다 우위인가, 즉 모든 도덕의 뿌리가 되는 하나의 근본원리 혹은 법칙의 필요성이 절실해 진다. 두 옳음 중에서 현재의 인간 사회가 합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도덕기준의 '제 1원리'로서 공리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계보를 잇는 실용주의자들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 이라는 '공리(utility:;효용, 유용)'를 주장한다. 즉 '행복이 도덕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하나의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한 것 혹은 유일하게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 것"이라는 의미이다.  J.S. 밀은 그의 저술 『공리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옳은 행동이 되며, 만약 불행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른 행동이 된다. (...)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이와같은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밀은 "긍정이 부정을 압도하고, 전체 삶의 밑바탕으로서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들, 바로 그런 만족의 순간들을 가리켜 행복이라 하는 것이며",  "만족하는 인생의 두 가지 주된 요소는 '평온(tranquility)과 흥분(excitement)'이라는 충분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행복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즉 사회효용의 극대화를 이루는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최대 행복 원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행복은 쾌락(즐거움)이며, 이에더해 밀은 "유익이 곧 유쾌함이요, 장식이다."라고까지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도덕관만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도 충돌하는데, "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쾌락을 측정할 때 (...) 오로지 수량에 의존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며, "양과 질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쾌락의 질적 차이란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질적 우수함"이라고 질은 수량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결국 공리주의의 도덕 근본원리는 다수가 좋아하는 쾌락이라는 의미이다.



1. 공리주의에 내재하는 도덕적 한계들


(1) 만족 총량주의의 문제


개인의 공리와 다수의 공리가 합치하지 않아 다수의 쾌락으로 사건의 판단이 이루어질 경우 개인은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쾌락이 개인의 불쾌를 훨씬 상회하므로 도덕적 옳음이 된다. 여기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의 불균형한 분배로 인한 양극화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사회전체의 부(쾌락)가 증대하지만 개인의 부는 감소하는 이 현상에 대해서 공리주의는 '옳음'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름'이지 않은가? 개인의 만족을 소외시키고 최대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2) 편의적, 직관적 도덕으로서의 문제


밀은 편의(expediency)란 "어떤 즉각적인 목적 또는 일시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유익함을 낼 수 있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이것은 "문명과 미덕 등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을 퇴화시킨다."고 비난하면서 공리주의는 결코 '편의적 부도덕한 도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무엇인가』의 한 사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망망대해에 조난당한 네 사람이 있으며,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이 없어 쾌락의 총량이 큰 선택으로 동료 한 명을 살해하여 식용하였다. 이 공리주의적 선택이 도덕적 올바름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아마 공리주의의 편의성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피살된 희생자 가족의 고통, 나아가 식인이라는 인간 존엄에 대한 문명적 파괴라는 인류전체에 대한 도덕적 상처 등 세 명의 생존이라는 쾌락이 인류전체의 고통으로 인해 최대행복을 최대고통으로 역전시키고 만다. 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편의적 부도덕성의 외피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3)쾌락의 성격이 지닌 문제


쾌락의 순수 잔여량 극대화가 도덕의 근본원리라면 자유를 구속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다른 사람의 손실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공리주의 도덕기준에서 옮음이며, 노동 착취를 통해 자본가의 부의 독식 또한 옳음이 된다. 행복의 총량주의에 기초한 공리가 뉴노멀, 새로운 가치와 표준을 창출해야하는 오늘의 인류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퇴화와 소멸의 도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인간을 최대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와 같이  공리주의는 무수한 도덕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우리들을 위한 진정한 도덕 근본원칙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2.  진정한 도덕율 제1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나?


J.S.밀은 그들의 도덕율 제1원리인 공리와 충돌하는 도덕가치들에 대한 비판과 폄하를 위해 그의 책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미덕',  '정의',  '자유',  '안전'에 대해 이들 모두는 '행복(쾌락)'의 종속적인 도덕가치에 불과하다거나, 그 도덕 가치의 자기 제재 내용이 애매모호하며, 수학적 논증에 의문이 있다는 식이다. 특히 정의(justice)에 대해서는 혹독할 만큼 도덕원리가 될 수 없다는 증명에 많은 지면을 채우고 있다. 


아마 '존 롤스'가 그의 책 『정의론』에서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옳음의 우선성' 논리에 의거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이라는 도덕의 기본구조에 대한 이해를 상기한다면 왜 쾌락이 아니라 정의가 도덕의 근본원칙, 도덕 최고의 기준이어야 하는지 오랜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덕은 결코 쾌락과는 무관한 심리적 동인을 지닌 도덕적 가치이며, 안전(safety, security)은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매순간 살아갈 수 없는 중대한 가치이다. 만일 안전이 상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면 인간의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부인되고 만다. 안전의 욕구는 절대적 욕구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작금의 세계에서 안전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쾌락, 최대행복 이상의 논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무리 ; 2020년 오늘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수구집단과 진보집단은 저마다의 도덕관을 들이밀며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시민을 설득, 자기 집단화하려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물론 집권세력이 되겠다는 권력의 욕심이 있겠으나 차치하고, 순수한 도덕적 대결로 좁혀 이 사회에 들끓는 갈등 이슈들을 보면, 그 기반 논리, 혹은 표면적 주장에는 자신들의 믿음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잣대가 있다.  이를테면 고위 공직자 자녀의 군복무 의무에 대한 시비, 위계를 이용한 성 추행 또는 성 폭행에 대한 시비, 국가적 재난에 따른 재난지원금 지급이나 향후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시비의 근저에는 명료한 도덕관이 있다.


거대도시 서울의 시장이 직원 성추행 고소일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과 성추행 인과관계의 진의는 논외로 하고, 장례와 관련하여 그 형식에 대한 갈등에서 진영마다 내세우는 도덕적 잣대의 다름에 촛점을 맞추어 보면 우린 어떤 결정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오랜 헌신과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복지의 증대,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행정적 수완등 그의 공적 행적에 마땅한 형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인의 미덕과 생명의 소실이라는 안전이라는 도덕가치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고소인인 성추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의, 즉 공평성에 근거한 인간존엄의 도덕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어떤 도덕관이 더 우월적 도덕가치를 지니는가? 


한 인간의 죽음과 성적 추행이란 사실에서 한 사회가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미래를 낳는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정의인가? 아니면 성추행 피해 주장자를 위로하는 것이 정의인가? 무엇이 우위인가? 전체 쾌락의 크기로 도덕적 우위를 결정하는 공리주의자는 애도 집단과 미투 집단의 수를 비교해서 많은 쪽이 옳다고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와 같은 인간존재의 서사성이라는 삶의 이야기, 즉 우리 공동체가 써왔으며 쓰려고하는 서사축에 무게를 두게되면 우리가 오늘 어떤 이야기, 어떤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면 될 것이다. 망자를 두고 시비를 가리는 것에 외람됨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여전히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행동의 경향일 것이다. 이 직관적 도덕율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도덕원리이다.


도덕율의 근본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 되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은 그 사회의 합의이다. 밀이 비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칸트의 도덕의 보편적 제 1원리인  "그대 행동의 바탕이 되는 법칙이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발아들일 수 있는 보편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 는 정언명령을 새기면서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합리적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 법(法, 規則, 制度) 아니겠는가? 도덕이 법에 물어야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음에 거북한 흥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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