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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ㅣ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中略)...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 제 1장 「사람의 개념 중에서」
위의 인용 문장은 책 첫 페이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항시‘사람’임을 인정받고 있는가?, 그리고 국적, 인종, 직업,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타인을 ‘사람’으로 환대하고 있는가를 생각게 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사람이란 외형적, 생물학적 동일성이라는 보편성에 의거한 종(種)으로서의 ‘인간’과는 구분되는, 인간 상호간의 의례(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름이다.
현대 사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의례적 평등 원칙’을 표면적으로는 상호작용 규제 규범으로 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의례교환의 대칭성을 선언하는 대표 원칙이란 얘기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현실 세계에서 지켜지지 않는다. 이 의례원칙이 사라지는 예외지대가, 아니 예외 현상이 오히려 만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1. 모욕과 신분주의
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박은 낡은 신분주의가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여전히 횡행하고 있으며, 배금주의 토양위에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신분주의 또한 의례적 평등주의를 훼손하고 위협하며 파괴하고 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모욕할 수 있는 의례코드 자체의 비대칭성이 차별을 수용한다는 조건하에 상호작용 집단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다는 것은 조건부로 사람됨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이 일상화 되었다는 의미이다.
신분적 의례가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할 때 지배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인간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는 자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사람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상호작용 공동체(집단)의 성원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다시 말해 ‘비가시화’되고, 현상되는 공간의 바깥으로 배제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격,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그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지고 비인격화되어 버리는 것, 모욕 받는 것이다. 모욕은 이렇게 존엄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며, 마침내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포기케 하여 굴종을 정상화하고 사회에 현상하지 않는 존재처럼 지워버린다.
문득 2020년 4월 15일 선거결과가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의례에 만연한 비대칭성, 의례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시민 개개인들의 자각에 따른, 모욕의 상시화에 대한 시정의 외침이 아니었을까하는데 생각이 다다른다. 마치 자신들 이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던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비가시화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고 말이다. 너희들이 비인격화한 인간이‘사람’으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고.
행위자들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의례적 권리/의무가 달라지는 이 사회의 불순함과 물질 우선의 신자유주의 신봉, 양반/노비 타령을 하는 지역적 특성, 가부장적 권위주의 지향의 보수주의자들의 신분주의적 권력과 정치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었을 것이다.(물론 일부 지역의 투표권자들은 어떠한 모욕도 없는 사회에 있다고 해야겠지만)
고관대작도 재벌도 아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수한 모욕을 떠안으며 신분(지위,재산 등등)이 낮을수록 그들에게 행해지는 무례함의 한도가 커질 뿐 아니라 모욕의 질량이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모욕에는 그 고유한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타인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부정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크게 복창해!” 모욕은 이처럼 자기 부정을 강요하여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게 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의례적 폭력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순히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간신히 걸친 사람의 자격을 완전히 박탈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의례적 비대칭성이라는 신분주의는 곧 구조적 폭력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극단적 표현을 빌린다면 신분주의를 숭배하는 보수주의 집단의 한국사회는 근본적 폭력사회를 지향한다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 김현경은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임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 건물 경비원, 백화점 판매원, 골프장 캐디, 전화 교환원. 마트 계산원 등등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그만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뼛속 깊은 신분주의적 가치관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제복 착용을 강요받고 신분적 차별의 대상으로 공시한다. 낙인찍기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스티그마의 한국사회 면모일 것이다. 상호작용의 평등성, 대칭성은 이렇게 파괴되어있고, 신자유주의적 노동세계는 이처럼 신분적 모욕을 일상화한다.
한편 가해자가 있는 ‘모욕’은 이제 가해자 없는 ‘굴욕’의 형태로 변화하여 그 모습을 감추고 더욱 극렬하게 인격을 무너뜨리고 있다. 예고 없는 실직(문자로 날아온 해직 통보), 일한 대가와 무관한 보수, 일방적인 월세 인상... 아무도 굴욕을 당하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주의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 굴욕감은 전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리는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사실 공포 그 자체이다.
2. '절대적 환대'를 생각하며
이 정도에서 ‘사람’의 자격에 대한 객설은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쓰도록 한 동기는 지하철에 탑승한 독일 거주 9년차인 한국인 부부를 향해 독일인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5인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빌미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과 성희롱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는 2020년 4월 27일 뉴스 매체의 영상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관할 독일 경찰은 구타의 흔적이 없으므로 사건 접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무시했으며, 이에 주독일 한국영사관이 항의하자 조사해보겠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저자 김현경은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에 들어갈 권리”라는 칸트의 ‘환대’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됨을 부정하지 않는”것이라는‘절대적 환대’를 주장한다.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러한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표현된다.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조건부로 사람됨을 인정받는 현실에 외국인이라 불리는 이방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내주는 절대적 환대가 가능하겠는가라는 의구심이 앞선다. 그럼에도 사회란 절대적 환대를 통해서 성립했다고, 만일 이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나오는 동시에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조건적 환대는 사회의 기본 원칙”이란 것이다.
그러나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가능한 것인가? 칼을 들고 뛰어드는 강도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비록 범죄자이더라도 그를 사회 바깥으로 두는 순간 그가 더는 공동체의 성원이 아닌, 즉 사람이 아니므로 법의 질서하에서 그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인데 어떻게 범죄가 된다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또한 희생 담론을 인용하면서 ‘사후의 명예’라는 죽은 자의 산자들 사이의 자리에 대한 믿음처럼 자리란 신성한 것, 불가침의 무엇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들려오는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폭력의 뉴스는 계속되고, 하물며 일본,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조차 한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 사건은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절대적 환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사회운동이란 현재 속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서바이벌 로타리의 모순,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을 분리하지 못했다며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 부정론 비판에 따르는 저자의 성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계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람자격의 박탈 소식은 모욕감으로 떨려온다.
이 저술을 이렇게 국한된 사건에 한정하여 서술하는 것은 내 부족함이다. 조건부로만 사람됨을 인정하는 유교의 전근대적 인권의 시각에서부터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과 ‘예외 상태’의 담론을 활용한 사람의 자격에 대한 사유, 공리주의 피터 싱어와 론 해리스의 왜곡된 생명윤리에 대한 시각 비판을 통한 의례대상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통찰적 분석은 가히 인간 존엄에 대한, 사람의 평등에 대한 중대한 시사를 안겨준다. 아마 책 전체가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타인을 대하는 보다 성숙된 지적 풍부함과 아울러 도덕적, 비판적 성찰로 이끄는 사유들로 빼곡하게 차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