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찬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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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에게 실례되는 표현일 수 있겠지만 이스마일 카다레(), 즉 그만의 독특한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된 또 하나의 걸작이라 하고 싶다. 오랜 관습의 옷을 입고 전승되어오는 신화적 이야기가 발산하는 어떤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 그리고 급작스럽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유발하는, 이를테면 무구한 표정 뒤에 해살을 떨어대는 악마적 심사가 결합하여 묘한 양가적 감정을 자극하며 독자의 정신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 두 요소는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환기시키고 주목하게 하여 그 진실을 사유케 하는 데 최적화된 결합인 것 같다. 그래서 주제가 뿜어대는 진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고의적인 오독을 하려한다. 번역된 제목에서와 같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만찬(Le diner)’에서 비롯된 역사적 기록과 경험 및 증언과 같은 기억이 서로 충돌하여 빚어내는, 우리네의 표현으로 하자면 과거사()에 대한 복잡다단한 기억 전쟁의 작품으로. 발칸반도에 위치한 국가 알바니아는 20세기 내내 주변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의해 복속과 해방, 분열과 연합이 반복되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근대사와 유사한 민족적 고통을 안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이탈리아에 병합되어 억압된 삶으로 숨을 죽이던 알바니아 남부도시 지로카스라 시()에 해방시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독일 기갑여단이 진입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된다.

 

보수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진영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들에게 독일군의 진입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자중지란의 상태에 빠져든다. 기갑여단의 척후병이 시에 진입할 때 누군가 독일군을 저격하고, 성난 전차의 포신이 일제히 도시를 향했을 때 창 밖에 흰색의 항복기가 펄럭인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집안에 들어앉아 숨을 죽이고 있던 대다수의 시민들, 이들이 한 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어둠이 내리고 의문이 더 집요해지는 시간이 왔다. 누가 그 흰 천을 펼쳤을까?

독일 척후병에게 총을 쏜 사람은 누굴까? - P 28 에서

 

이어서 으레 인간이 하는 행동을 서술한다. “후자에 대한 답은 머지않아 밝혀져 어떤 이들의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흰 천을 올린 사람의 정체는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그리고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순백의 항복 신호를 올린 게 사람인지, 유령인지... 9월의 바람이었으니 찾지 못할 

것이다....(中略)...단지 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물주의 손가락이 정해진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 P 28 에서

 

9월의 바람이란다. 조물주의 실행이니 다수가 짊어져야 할 비굴함, 가책은 증발해 버리고 망각의 나락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유머의 문장은 조롱이라는 악마의 모습으로 인간의 저열성에 비수를 꽂는다. 이제 이야기의 축이 되는 역사, 소위 과거사의 기억을 위한 다분히 상징적이며 현실적 사건의 중심인물인 저명한 외과의사 대()구라메토와 그의 환영 같기만 한 소()구라메토가 이 역사적 현장에서 불가피하게 마주하여야만 했던 일화로 옮겨간다.

 

정치인들이 고작 진영 싸움에 매몰되던 시간, 무작위로 잡아들인 인질들이 시청광장에 세워지고, 독일군 기갑여단장 프리츠 폰 슈바베대령은 뮌헨에서의 대학 동창이자 형제보다 나은 친구였던 대구라메토를 불러 알바니아의 손님맞이 법()베사(신의)’를 들먹이며 저격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또한 동태(同態)복수법인피는 피로 갚는다.’라는 관습법 카눈으로 위협한다. 구라메토는 베사에 의해 친구인 슈바베에게 만찬을 제의하고, 죽음의 기다림이 드리운 불결한 광장의 기운과 달리 이윽고 대()구라메토 박사의 집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지며 샴페인을 곁들인 만찬이 벌어진다.

 

슈바베는 구라메토에게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의 이름을 추궁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음을, 별명뿐임이라 반론한다. 그러나 인질들은 모두 무사히 집에 귀가하게 되고, 이 역사적 만찬은 치욕의 만찬부활의 만찬이라는 양극단의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잊혀지는 듯, 알바니아는 또 다른 정세의 변화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독일의 후퇴와 러시아의 우위는 자동으로 세력의 상황이 역전된다. 새로운 체제, 새로운 시대, 재건, ... 소설은 이 시기를 제로(Zero)밑의 시간, ()의 시간이라 부른다. 동요가 항구적으로 쉼 없이 따라다니고 집회가 끝없이 이어지는, 만세와 타도가 번갈아 외쳐지며 살아야 할 것만큼이나 죽어야 할 것이 있다고, 피의 회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다.

 

검은 샤니샤 동굴이여

너를 보니 이성이 달아나는 구나“     - P 148 에서

 

가장 깊고 무시무시한, 악명 높은 고문으로 전설이 된, 그러나 오랜 시간 폐쇄되어 있던 감옥이 구라메토의 심문을 위해, 그 동굴의 문이 열린다. 스탈린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망에 불타는 젊은 판사 아리안 치우는 구라메토의 그 누구도 넘겨볼 수 없는 권위, 그 경외감에 대한 시기심으로 그의 심문에 뛰어든다. 심문 담당자로 선임되는 날, 그는 행복감이 달뜬 도취감과 뒤섞였고, 도취감은 묘하게도 공격성과 뒤섞였다.”고 복수의 갈증을 피력한다. 비겁함, 배신의 의사가 아니라 단지 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조물주의 손가락이 행한 일이라고 백기를 치부하던 대다수의 방관자는 이 지점에서도 그 방관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안전과 영달에 연연할 뿐.

 

이제 공식 문서기록과 사건의 직접 경험인기억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공산당 지도자 청산계획이라는 전 지구 차원의 암살 계획 음모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만찬에서 슈바베와 나눈 대화의 모든 것을 고백할 것을 종용 당한다. 고문과 협박, 회유가 반복되는 참혹한 시간이 흐른다. 사실 첩자에 의해 은밀히 작성된 보관 기록은 물론 이 심문 내용에서 유죄를 확정지을 증거란 것은 없다. 심문의 지원을 위해 독일에서 파견된 판사가 젊은 심문관에게 내뱉는 이 재판의 성격에 대한 의지표명이 어쩌면 진실에 가 닿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 한가운데, 그 무()속에 우리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심을 겁니다.

그들의 수수께끼도 그들의 진실도 우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수수께끼를 심을 겁니다.” - P 197에서

 

이 회색지대에 대한 발설은 역사와 허구,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역사 규명의 곤란에 대한 어떤 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일례로 역사의 기록물이라는 것이 거짓을 어떻게 진실로 둔갑시키는가는 난징 대학살의 살육자인 일본군에 중국 어린아이와 미소를 짓고 놀고 있는 병사의 사진 기록물을 통해 선의자이며 외려 피해자라는 터무니없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왜곡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해자, 방관자가 희생자로 둔갑하여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부조리의 역사를, 그리고 기억에는 모호함을 덧씌워 그 사실능력을 지워버린다. 강제 동원된 종군위안부를 부인하는 일본의 태도에는 선택과 배제라는 기록의 태생적 부정직함이 자리하고 있다. 산자가 죽은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려는 기억이라는 그 진실을 어둠의 지대로,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무엇으로 전락시켜버린다. 그리곤 망각이라는 비열한 나락으로.

 

여기에는 이와 같은 역사의 기록과 기억의 논쟁 외에 또 다른 물음을 제기케 한다. 심문을 담당하는 세력과 심문을 받는 자 중에서 누가 옳으냐는 것이다. 구라메토가 국가를 배반했나? 모든 인간들이 집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방관하던 그 시간에 그는 시청광장의 인질이 살육되는 것을 막지 않았나? 독일에 친구를 가진 것과 나치의 협력은 동일 한 것인가? 독일군에 저격을 하고 숨어든 것만이 애국인 것인가? 무수한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심문관 아리안 치우는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한 행동으로 국가에 봉사한다고 믿는 거요.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있고. 모두가 옳을 수는 없소. ...그러니 누가 옳은지 밝혀봅시다.....”, 권력과 영예의 굶주림이 야기하는 이 광기가 진실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마 인간의 역사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맹랑한 요인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구라메토는 이 야심찬 젊은이의 욕망에 실려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버려진다. 훗날 그의 시신을 회수 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무위가 되어버리는, 당시의 과정을 복기할 그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기억 속에만 존재 할 뿐이다. 기록이라는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있었던 것이 없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기억은 역사의 증명으로 소용이 없는 것인가? 소설은 이 사실에 대해 아마도 죽은 사람이 그 세계의 법과 신호를 가져왔던 것이라고, 그 때문에 온갖 혼란과 오해가 생겨난 것이라고”, 사자(死者)의 초대로 빚어진 그들 신화의 한 이야기를 빌려 영원한 회색지대에 묻어버린다. 그러나 흐릿한 어둠의 지대로 진실을 묻어버리자는 이 말이 내겐 역사적 무능에 빠진 이들을 향한 조롱과 추궁의 말처럼 들린다. 작가의 의지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인간 심연의 무엇을 건드려 수긍과 공감의 의지로 내몰아 두려움과 경계, 폭소와 환희를 번갈아가며 인간 본성의 본질, 역사의 모호한 지대에 은폐된 진실의 이면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솜씨는 과연 독보적임에 손을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역사의 사실에 대해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라는 이분법적 시선을 들이미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 그 복잡다단한 기억전쟁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또 하나의 문학적 정수라 한다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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