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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부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품이다. 극단적으로는 등장인물의 ‘심리변화’가 곧 주제라 할 만큼, 행동을 중심으로 한 이전의 서사문학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또한 현대의 여느 소설에도 비길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 묘사의 절제와, 객관적 서술에서 내면적 분석, 그리고 독백에 이르는 세련된 구조를 지닌 소설로써 오랜 시간을 견뎌온 문학적 가치가 인정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영향은 라클로, 스탕달, 라디게 , 그리고 루소와 지드, 카뮈로 이어지는 프랑스 현대문학 계보의 중요한 줄기를 형성케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학적 위치와 가치를 뒤로하더라도 주목케 하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진부한 이야기에 놓여있던 남성중심의 시선이 17~8세기의 시대성에도 불구하고 와해되거나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토리는 온갖 이해관계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앙리 2세 재위 말년(1558~1559)의 궁정 사회를 배경으로 구성원인 왕족과 명문 귀족들의 쾌락과 사랑의 줄다리기에 얽힌 한 여인의 자기 지키기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영화 <클레브 공작부인>의 한 장면, 1960년작
야심과 정사, 술책과 쾌락이 어우러진, 그런가하면 어느 누구의 사적인 비밀도 유지되기 힘든 위험천만한 궁정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질투,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애의 이야기다. 궁정 최고의 미모로 꼽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은 영국 여왕과의 결혼문제가 오가던 느무르 공(公)에 남편인 클레브 공작에게는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고, 무수한 여인들을 편력하던 느무르 공 역시 한 번의 마주침에서 공작부인을 잊지 못한다.
그런가하면 클레브 공작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지고하기만 하다. 그 사랑은 존경과 신뢰와 배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자기 가문에 대한 명예는 느무르 공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은폐하게 하지만 느무르 공의 은밀한 구애의 암시와 표시들은 그녀를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에 시달리게 한다. 소설은 이렇듯 유부녀의 흔해빠진 자기 갈등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사랑의 기쁨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클레브 부인의 심리적 기복의 묘사는 지연과 전진을 오락가락하며 결말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그야말로 최고의 서사 미학이 주는 쾌감을 만끽하게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진수는 이렇게 빼어난 심리적 묘사의 세련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근대 소설의 효시로 불리게 되는데 기여한 요인이랄 수 있을 것인데, 소설의 출현이란 사적(私的)생활이라는 개념의 출현이 전제됨으로써 가능했다는 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사생활, 사적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개인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특히 (남성에게)보여지는 여성이라는 시선에 대한 집요한 저항의 얘기라는 점이다.
소설에는 사적인 편지가 공개적으로 돌려가며 읽히며, 궁정의 어떤 인물이든 개인적 비밀이 유지되지 않는 적나라한 세계이다. 게다가 느무르 공이라는 남성의 집요한 시선은 여인의 내밀한 공간을 지속적으로 침범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시골의 별장으로 도피해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을 느무르 공이 몰래 엿보는 장면은 풍부한 은유적 상징들로 가득 차있다.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느무르 공은 울타리를 따라 살금살금 다가갔다.
긴장된 나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창문 그늘에 숨어서 클레브 부인의 모습을 엿봤다.
부인은 혼자였다. ...부인은 매우 진귀한 인도산 지팡이에 그 리본을 묶고 있었다.
그 지팡이는 전에 느무르 공이 사용하다가 여동생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렇게 느무르 공은 황홀경에 빠진 채 “이것은 일찍이 그 어떤 연인도 맛본 적 없는, 또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분이었다.”라며, 은밀한 관찰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잊을 정도라고 중얼거린다. 이것은 궁정사회라는 공적 공간에서 남용되는 사적 생활의 침입과 아울러 남성 시선이 여성의 은밀한 공간인 사적 영역으로 침입하는 것에 숨겨진 관음증적 쾌락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또한 ‘열린 창문’, ‘지팡이’, 그리고 그것에 리본을 묶는 클레브 부인의 행위는 다분히 성적 암시의 도구로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이 지점을 통과하면서 소설은 잔뜩 독이 오른 독자에게 결말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급격히 내닫는다. 시종을 통해 느무르 공작을 미행하게 했던 클레브 공작은 이러한 상황의 질투로 병을 얻게 되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른다. 남편의 깊은 사랑을 알고 있는 클레브 공작부인은 궁정 출입을 멈추고, 시골의 별장에 은둔하며, 외부의 모든 시선을 차단한다. 그래서 느무르 공은 “모든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샤르트르 주교대리의 은밀한 주선에 의해 마주한 느무르 공에게 건네는 클레브 공작부인의 말은 당대 여성들의 시선을 대변하면서 그것을 전복하는 선각적인 의식을 내보인다.
“전 호의를 단순히 보기만 한 게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봐주기를 원한대로 보아왔어요.”
남성중심의 시선에 길들여졌던 여성의 수동성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들의 시선에 담긴 욕망의 이기심을 꿰뚫는다.
“지금까지 당신이 변심하지 않은 건 당신의 정복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장해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무심결에 드러난 제 행동이나
우연히 들킨 모습이 얼마간 희망을 주어 그 정복욕을 계속 불태웠던 거고요.”
그녀는 궁정 생활에 이별을 고하지 않고 요양을 핑계로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린다. 느무르 공의 구애와 궁정 생활 둘 다를 거부하는 것인데, 클레브 공작부인은 사적 영역의 본질, 그리고 그것을 범하려는 기도와 본질까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아마 소설 쓰기라는 공적 행위를 통해 당대 귀족들의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사적 영역의 귀중한 가치를 얘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는 후대 해설자들의 평가처럼 명문 귀족가문의 여성이었던 작가‘라 파예트 백작부인’의 이 소설은 시대의 변화상황에 대한 뛰어난 인식능력을 발견하게 한다. 여성을 대상화하려는 남성적 시선에 대한 최초의 저항을 말한 문학 작품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