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의 탄생
신주희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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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호감을 갖게 된 소설이다. 아주 딴딴한 지면 같은 견고함, 그리고 어쭙잖은 희망을 남기는 부류의 관습적 형식의 틀을 벗어버린, 있는 세계 그대로의 날 것. 그래서 은폐된 우리네의 자기 기만성에 대한 예리한 심연을 드러내 보이는 통쾌함이랄까? 스냅 사진에 포착된 찰나들의 연속?, 혹은 잠재되어있던 무의식이 폭발하여 의식의 언어로 던져지는 순간의 그야말로 외설적이며 추하고 우스꽝스럽기조차 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짧게 이어지는 그런 느낌.

 

우리는 세상의 욕망을 모방하기도 하지만 혐오와 증오도 모방한다. 어쩌면 이것은 같은 것의 이면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내면화시키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자기만의 독자적인 주체가 있는 것처럼 말하며 행동한다. 이것의 부정성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자기기만일 것이다. 자기기만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로 축조된 세상은 강고하다.

 

작품집의 첫 수록작인 당신은 말한다는 세상의 소음을 자신의 불안으로 내면화시킨 여자의 편협한 시선의 끊임없는 자기 되먹임을 통한 믿음의 강화가 진행되는 영상을 보게 된다. 여자의 행위를 지켜보는 당신이란 시선을 말하는 화자(話者)의 진술은 기만적 진실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선족 베이비시터, 그 다름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라는 부정의 이미지가 공존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해 가는지, 또한 자신까지도.

 

이것은 네 개의 이름에서 변주되어 반복되는데 탈북자인 림미정(美停)이란 여성에 대해 동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녀가 북한말을 썼다는 것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혐오의 낯선 무엇이었을 뿐, 여전히 오늘 우리들은 타자성이 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의 혼란에 적대감을 지우지 못하는 미성숙의 상태에서 한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이 네 개인 것은 그녀의 탈북과 정착 과정에서 추가 된 고통의 현상들이다. 푸셰, 이일구(219), 임미정.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타인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섣부른 호기심, 관음증이 아니라 진짜배기로 안다는 것. “개 사육장 냄새를 알아요? 그 냄새를 안다는 건 사람이 찢기고 부서지면서 나는 냄새를 알고 있다는 얘기예요.” 역시 우리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아마 이 다름의 구분, 범주화의 폭력성만큼 같아지기의 욕망과 차별의 극히 모순적인 기만성이 깃든 것도 없을 것이다. 브라질리언 왁싱, 신체의 자연성을 조절, 통제, 개선하는 곳, 위계와 위선을 관리하며, 쾌락까지 제고시키는 곳, 즉 자기관리를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여자들이 드나드는 왁싱숖이 무대인 단편이다. 아마 이 작품의 백미는 브라질리언 왁싱을 위해 다이아몬드 형으로 다리를 벌리고 누운 여자가 주절거리는닭 이야기와 이를 듣고 있어야만 했던 왁싱 디자이너 정나나의 이어지는 행위와 입 밖으로 뱉어지는 언어의 짜릿함일 것이다. 누군가 내려다 볼 존재가 필요한 인간들의 그 외설스러운 욕망의 세계가 누추하고 천박한 당혹의 알몸과 욕지거리의 기막힌 궁합을 보여 준다. “명치와 같은 것이 있어서 이따금씩 툭, 하고 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더러운 기분이 널리 알려지기를.

 

공원 벤치가 들려주는 이야기인 네 개의 이름처럼, 사막의 뼈는 섹스돌이 화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앎을 얻는 과정은 구체적인 경험을 넘어서 관념적으로 있는 어떤 실존하는 존재라는 이해에서 이것들은 보다 인간적인 무엇으로 여겨진다. 편견도 선입관도 배제된 원형의 사유, 그래서 이들에게는 아무런 차별도 구별도 없다. 아비는 세상의 상식에 편입될 수 없는 정신지체적인 아들을 컨테이너에 가두고 지속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곤 섹스돌(Sex Doll)을 던져준다. 인형이 포장된 상자 속 사용설명서와는 달리 아들은 엄마를 부른다. 엄마, 엄마, 이 간절한 외침은 다르게 이해된다. 이 대상이 그렇게 불려지는 것은 아비에게 용납될 수 없는 무엇이다. 소통될 수 없는 서로 다른 관념의 세계는 고통이다. 진정 우리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에어백에 처박혀 심호흡과 함께 요가동작을 하는 여자에게 떠오르는 교차되는 기억의 통증을 얘기하는점심의 연애는 헤어진 연하의 청년 케이의 절망과 자신의 좌절된 자기위로의 고통, 그 원형의 본질을 성찰하는 데까지 이른다. 여자가 도달한 곳은 마침내 어디 일까? 삶이란 것이 어찌 모든 것이 충족된, 완전무결의 그것일 수 있겠는가? 요가와 케이의 눈과 몸을 회상하는 여자를 채우고 있는 것의 결핍은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는? 무엇이 우리들을 불안케하고 불만족스럽게 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이 소설은 자꾸 내게 질문을 퍼붓게 한다.

 

나는 소녀의 자궁 안에 있다.”자신이 느낀 최초의 감정은 싱거움이었다고 발칙한 주절거림을 하는 태아가 관찰하는 모태인 소녀의 이야기인 소녀 의 난은 오늘 우리들이 앓고 있는 신경증, 분열된 정신적 징후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것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어떤 자극이란 분명 외부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 자극을 수용하여 내면화하는 것은 자기이다. 소녀는 고통이 된 세계의 소음, 삶을 견뎌내기 위해 외부에서 그 긍정성을 찾는다. 윤이라는 유부남과의 만남이 고통을 유예시켜주지만 그의 홀연한 떠남은 동년배인 그의 딸 치아를 발견하게 하고 그녀를 통해 다시금 삶의 지속적 에너지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 또한 빗나간 진단임을 우리는 안다. 아니 추상하고 추론하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태아는 이를 알고 있다. 소녀는 를 긁어낸다. 이제 나는 소녀의 자궁 밖에 있다그리고 비로소 나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그림자가 되어 소녀를 따라간다.

 

이 장면은 은폐시키고 억누른 무의식,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인 자기를 둘러보라는 권고처럼 들린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만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자기에 대한 이해는 오류와 왜곡과 무지를 바로잡고 내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일 게다. 신경증 환자처럼 분열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은 언제나 타자만을 비방한다. 이 소설집은 꽤나 날카롭다. 예리하게 선 날이 우리 자신을 해부해보라고 권유한다. 그래 이 소설집은 오늘 우리네 인간성의 해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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