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피쉬
대니얼 월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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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노인을 바라봤다. 생이 저물어가고 있는 시간에 늙고 하얀 발을 흐르는 맑은 물에 담그고 있는 나의 늙은 아버지. 나는 불현듯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한때 소년이었던, 어린애였던, 그리고 젊은 청년이었던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봤다. 내 청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한때 청년이었던 것을,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아버지는 현재와 과거-은 모두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순간, 아버지는 잚으면서도 늙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 태어나고 있는 아주 기괴한 존재로 변했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9)

 

“진정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니?”

나는 한동안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심 아버지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을 잊기 바라면서. 그의 정신은 오락가락 방황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보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지금 그 질문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질문에 집착하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엇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다. 그러나 지금 같은 때에는 ‘모르겠는데요’ 같은 대답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은 뭔가 떠올려야 할 때다. 나는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p.37)

 

내가 들어가자 그는 미소를 짓는다.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때때로 보이는 눈빛,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지쳤으면서도 영적으로 축복받는 듯한 그런 눈빛을 띠고 있다. 나는 그런 눈빛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죽을때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약한 목소리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남기고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사뭇 희망적이다. 죽음을 그렇게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울어버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르다. 그는 의연하지도 않고 희망을 가지는 척하지도 않는다. 사실 그는 걸핏하면 “내가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오래 전에 죽었더라면 좋았을걸”이라고 말해왔다. (p.100)

 

그는 평생 거북이처럼 살아왔다. 감정의 등껍질 속에 숨어서 완벽한 방어를 한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이 마지막 순간에나마 그가 그 딱딱한 껍질 속의 연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내가 바보다. 처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가 뭔가 의미 있고 진지하며 예민한 주제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그는 농담을 한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아버지는 정말 삶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알고 싶다. (p.108)

 

 

 

세일즈맨으로 밖으로만 떠돌다가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 아버지는 머리 둘 달린 여자를 만나고, 거인을 정복하고, 아름다운 인어와 사귀었으며, 진실을 꿰뚫어 보는 유리 눈의 노파를 만나고, 홍수를 잠재우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모든 이의 영웅이었다. 집 밖에서는 그런 대단한 모험을 하는 영웅이지만 정작 집에만 오면 왠지 왜소하고 낯설어 보이는 아버지. 이제 어른이 된 주인공 윌리엄은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이제껏 아버지와 한번도 진정한 대화를 해보지 못한 사실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아버지가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발견하려고 한다.

 

작가의 상상력을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겠다. 매 순간이 새롭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그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작가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아버지라는 존재에 절로 마음이 기운다. 집에서는 그냥 평범한 남자, 직업도 없고 마땅히 할 얘기도 없는 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밖에서 만큼은 모험으로 가득 차고 영웅적이었던 아버지의 삶. 아버지의 젊은 시절 무용담은 너무나 많아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얘기만도 셀 수 없을 정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를 향한 아들의 느낌,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다른 이들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아들이 자라는 과정을 전혀 지켜보지 못한, 아빠를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남자. 그 미안함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린다.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아버지. 매번 시작되는 아버지의 말장난을 애써 부정하려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아들. 그에게 아버지는 위대했고 마지막까지 유쾌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과 감동. 손에 꼽을 정도로 결말이 참 아름다웠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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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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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그것은 내가 순례의식에 대해 가진 최고의 의문이기도 해. 만약 내게 일기를 쓰는 습관이 없었다면 나 역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거야. 매년 순례의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면 나는 일기에 적어둔 그 질문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흔적을 되새겼어. 그러면서 어쩌면, 소피 너도 한 번은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망각의 약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한 모금의 음료가 우리에게서 지워버렸을 그 질문을. 어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_ p.12)

 

할머니는 스카이랩의 서른세 번째 생물학자로 탐사선에 올랐다. 엄마는 그때 아직 어린아이였고, 할머니는 엄마가 어른이 되기 전에 꼭 돌아오겠다고 엄지를 맞대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얼마 뒤, 탐사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자 추진체의 결함으로 도약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회사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공방 끝에 결국 추진체의 설계 결함을 인정했다. 사라졌을 때 할머니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스펙트럼 _ p.60)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 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_ p.181)

 

 

 

 

2017년, 「관내분실」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 대상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가작을 동시에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초엽 작가. 그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이렇게 총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자는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세계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담아낸다. 저자만이 가진 특유의 감각으로 정상과 비정상, 성공과 실패,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넘나들며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단편을 소개해보자면, 우선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뛰어난 과학자 릴리 다우드나로 인해 완벽한 유전자의 선택이 가능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완벽함의 범주에 속하지 못해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년이 되면 1년간 시초지로 떠나는 아이들, 하지만 그중에 돌아오는 이들은 떠난 사람에 비해 늘 그 수가 적기만 하다. 나머지 순례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스펙트럼>은 언어를 주제로 하여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인공은 할머니 과학자. 우주에서 조난 당해 외계인과 조우한 할머니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할머니 과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우주에서 재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그리고 있다. 흥미롭다.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다. 곱씹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독창적이다. 왜 그녀를 일컬어 SF의 우아한 계보라고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장편도 아닌 단편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까.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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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조천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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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지구에 상처를 냈지만, 지구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무위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인류는 지구에 가한 흔적을 모든 곳에 남긴다. 우리 주변만이 아니라 깊은 바다의 퇴적물에도, 심지어 인공위성 궤도에도 인간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대기 안에는 온실가스와 오염먼지를 채운다. 이는 인류의 삶을 안정과 지속에서 혼란과 변화로 바꾼다. (p.53)

 

자연 순환이 지속해서 변함없어야 우리 삶에 질서와 안정감을 준다. 여기에 맞춰 인류는 각기 다른 생활양식과 문화를 누려왔다. 이처럼 기후에 맞추어진 우리 삶과 문명도 기후가 바뀌면 불안정해진다.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실제 기후는 줄곧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고, 그 변화가 좋은 쪽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쁜 쪽이라는 점이 문제다. 변해야 할 것은 변하고 지속해야 할 것은 지속해야 한다. 즉, 날씨는 변해야 하고 기후는 지속해야 한다. 날씨가 변해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기후가 변하면 우리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p.62)

 

기후변화는 명백하다. 그러므로 “기후변화가 없어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질문하기 보다는 우리가 기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가 지구온난화를 일으켰고, 이는 최근의 극한 날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지구는 인간이 가하는 온실가스라는 충격을 받아 인간에게 극한 날씨로 되돌려준다. 비정상이라고 간주했던 극한 날씨는 이제 우연이 아니라 정상이 된 것이다. (p.82)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경기장에 불으르 피워놓았다. 오늘날 새로운 불인 화석연료는 인류 문명의 동력이므로 우리는 화석연료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위험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우리는 무한한 욕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 마지막에 멸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결정 능력을 지닌 종으로서 욕망을 억제해 미래에도 생존할 수도 있다. 상반되지만 밀접하게 얽힌 이 두 힘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미래에도 지속할 수 있으려면 지구위험한계는 여러 돌파구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p.116)

 

 

 

 

책은 과학적 데이터를 제시하며 기후변화가 일어난 원리를 설명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기후변화가 일상이 된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나 사회 시스템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인간과 문명이 가능했던 조건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유지해갈 수 있을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미래의 기후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의 생존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걱정거리가 아니다. 기후변화는 이미 많은 것을 바꿔놓았고, 그에 따르는 피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주로 보고 있다. 환경오염! 특히 그중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미세먼지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오죽하면 나라에서도 이에 대처하고자 발 벗고 나섰을까. 예전에는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인식이 확연히 달라졌다. 거리에서 방독면을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리 현재의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자연재해는 막을 수 없다. 기후변화의 주범은 바로 지구 온난화! 하지만 그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가 따뜻해지도록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지구는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기후 조건에서 벗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태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리케인, 지진, 폭염, 폭우 같은 기상 이변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지구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 그건 누구보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기후변화가 모든 걸 바꾸는 시대, 이제는 문명이 만든 삶의 방식을 다시 한번 생각할 때. 원인을 제공한 우리가 그 책임을 져야한다. 제때 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위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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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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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달콤하고 부드럽다. 두 번 다시 귓가에 들릴 리 없는 목소리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지금도 가슴속 깊은 곳에 살아 숨쉬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평생, 그 남자를 잊을 수 없다. 새삼스레 확신한다. 그 남자의 환영을 좇으면서, 이렇게 남은 인생을 무위하게 보낼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남자의 포로다. 돌멩이처럼 차갑고 무거운 죄를 품은, 무참한 포로다. 행복 따윈 이제 없다. 그때 잃은 것이다. 모든 것을 전부. 그러니까 나는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몇 년이 지나도, 정신이 들고 보면 여기에 돌아와 있다. 그때 그 남자에게 “선택해도 돼”라는 말을 들은, 바로 이 장소에. 그리고 나는 선택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지만 지금도 그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다. (p.8)

 

“거실 창문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곳에 저의 귀여운 아이들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시체를 묻을 때마다 정원수를 바꿔 심었습니다. 그 나무를 셀 때마다 성과를 확인할 수 있어서, 매일 처리하는 잡무의 스트레스나 업무 피로가 깨끗이 씻겨 사라졌죠. 으음, 그 정도의 즐거움은 또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그 한때를 맛보기 위해서 살인을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p.38)

 

마사야 군이 옛날 그대로라서 기뻤습니다. 당신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겠습니다만, 그 무렵의 당신은 특별한 존재이며,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자마자 곧바로 법학부에 들어갔다던 당신의 존재를 떠올린 것은 마사야 군에게는 불운이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눈으로 꼭 판단해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사형을 받을 만한 인간입니다. 누구보다 스스로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에 풀어놓아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이렇게 적습니다. 저는 입건된 8건의 살인으로만 재판을 받고, 사형대에 매달려야 합니다. 결코 9건의 살인으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라는 인간이 법을 근거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불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회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p.41)

 

너무나 바보 같은 부탁이다. 응해야 할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해보고 싶었다. 나를 믿어 의심치 않는 하이무라의 저 두 눈. 그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 잊었던 그 시절의 만족감이 되살아난다. 게다가 그는 명백히 뭔가를 감추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의뢰는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기묘한 애정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의뢰에 어떤 비밀이 있는가. 그것을 알고 싶다. (p.67)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대학생 마사야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것은 5년 전 체포된 희대의 연쇄살인마 하이무라 야마토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였다. “내 죄는 인정하지만, 마지막 한 건만은 누명이다.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겠나?” 연쇄살인범은 마사야에게 유난히 친절히 대해주었던 어릴 적 동네 빵집 주인. 긴 고민 끝에 살인범의 요청을 수락한 마사야는 하리무라의 주변 인물과 사건 관계인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조사를 이어나간다.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젓는 친적,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감싸는 동네 주민들, 빵집의 단골들과 그와 데이트를 즐겼던 여성들까지. 연쇄살인범의 인생을 추적하면서, 마사야는 서서히 그에게 매료되어 가고, 어느 날 문득 자신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살인은 정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것일까?

 

이야기는 단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24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연쇄살인범이 평범한 대학생에게 보낸 편지. 어느 소설로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지막 그 여자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이 말 한마디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한 건만이 무죄가 인정되더라도 내 사형 판결은 뒤집히지 않아. 실제로 나는 살인자야. 몇 사람을 죽였는지 다 기억하지도 못해. 하지만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쓰는 건 사양하고 싶어.” 자기 자신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년 소녀를 감금하고, 고문한 끝에 죽여서 마당에 묻고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삼아온 남자. 책을 읽는 동안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정도로 깊게 빠져들었다. 흡입력이 진공청소기급! 실제 연쇄살인범들을 모델로 한 이야기라 그 충격은 이로 말할 수 없이 크다. 연쇄살인범들은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생각으로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동기와 심리 상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심리 조작의 기술까지 저자는 이 한 권의 책 속에 모두 밀어 넣었다. 피해자 or 피의자? 어린 시절 그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해서 그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정말 무서운 세상! 그 잔혹함에 오소소 닭살이 돋을 만큼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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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일 - 지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스탠리 피시 지음, 오수원 옮김 / 윌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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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존 던의 말대로 한 문장은 “교묘히 창조된 작은 세계다.” 이 짤막한 책에 내가 쟁여 넣은 작가들이 기막힐 정도로 교묘하게 창조한 작은 세계로 여러분을 모셔가고 싶다. 내 의도는 미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다. 나는 독자 여러분이 이 책에 실린 문장들을 곱씹으면서 내가 느낀 기쁨과 경외감을 함께 느꼈으면 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위대한 문장까지는 아니어도 꽤 괜찮은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면 한다. 약속건대, 이 책을 통해 문장이 주는 기쁨과 문장의 기교, 좋은 문장을 음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빚어낼 수 있는 능력을 드리겠다. 문장을 음미하는 능력과 빚어내는 능력은 서로 접점 없이 따로 굴러간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 이들은 나란히 습득되는 능력들이다. 기억에 남는 문장을 만드는 요소를 습득한다면 문장을 판별하는 법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장을 보고 감탄한 이유를 분석함으로써 문장의 메커니즘까지 알게 된다면 어느 정도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길로 한 걸음 더 들어설 수 있다. (p.20)

 

모든 기술이 그렇듯 문장을 읽고 쓰는 기술도 서서히 발전한다. 소박하게 세 단어짜리 문장에서 시작해, 필요에 따라 문장 구조를 줄줄 말하는 단계까지 능력을 키운 뒤에, 그다음 단계의 연습을 실행하면 된다. 짧은 문장-잠결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간단한 문장-을 연습하고 나서, 열다섯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그다음에는 서른 단어짜리 문장, 또 백 단어짜리 문장으로 확장해가라. 그러는 동안에도 ‘행위자-행위-행위 대상’의 관계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런 다음(다시 힘든 부분인데), 추가한 모든 요소를 분석하라. 그 요소들이 문장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데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장이 다루기 불편할 만큼 거추장스러워져도 마찬가지다. 분석은 꼭 필요하다. (p.40)

 

언어는 현실을 전하거나 반영하거나 비추어주는 기능을 한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언어의 힘은 훨씬 더 크고 위험하다. 언어는 현실을 형성한다. 물론 문자 그대로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실 세계와 말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언어가 현실을 형성한다는 것은 문장이 세계의 한 조각에 부여하는 질서가 수많은 가능한 질서 중 하나라는 의미다. 문장을 고칠 때 어떤 일을 하는지 떠올려보자. 뭔가를 보태고, 빼고, 시제를 바꾸고, 절과 구를 재배열한다. 변화를 줄 때마다 독자에게 제공하는 ‘현실’도 바뀐다. 가장 소소한 순간의 행동을 언어로 바꾸려는 시도조차도 그 행동에 포함된 것 이상을 반드시 남긴다. 문장이 긴건 짧건 상관없다. 도입할 수 있는 다른 세부 사항이나 견해나 강조점은 늘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사항들은 문장이 제시하는 현실의 스냅 사진을 언제든 바꾸어놓을 수 있다. (p.62)

 

 

잘 짜인 문장은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기쁨의 감정을 준다. 반대로 엉성한 문장은 어떤 감정을 전해줄까? 배관공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꽉 막힌 글을 보면 어떻게 시원하게 뚫을 것인지 평생 고민해왔다는 저자 스탠리 피시. UC 버클리, 컬럼비아, 존스홉킨스, 듀크 등 유수의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법학을 가르친 그는 대학 입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에 충격을 받고 ‘문장 제대로 읽기, 문장 제대로 쓰기’에 대한 쉽고 명료하며 실용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문장의 일』이다. 문장의 기본을 알고 싶은가? 문장을 잘 쓰고 싶은가? 바로 이 책에서 인생의 스승을 만날 수 있다.

 

 

책에는 문장의 개념부터 각종 문장 형식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쓰는 법까지, 글쓰기 방법이 단계별로 나와 있다. 다만, 스탠리 피시의 문장 강의는 그 효과가 확실한 요령이나 팁을 제시하는 가이드북이나 매뉴얼이 아니다. 위대한 작가들이 쓴 문장들을 실례로 들며 왜 그 문장이 인상적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문장을 읽는 안목을 키워주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문장 쓰는 힘을 길러준다. 제인 오스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허먼 멜빌, 버지니아 울프, 존 업다이크, J.D. 샐린저 등 형식미를 갖춘 거장들의 문장을 분석하고, 첫 문장, 마지막 문장, 종속과 병렬 문장, 풍자 문장을 쓰는 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준다.

 

 

시작은 한 문장이다. 누구나 마음속 깊이 간직한 문장 하나쯤 있다. 왜 그 문장이 마음속에 남았을까? 왜 나는 그런 문장을 쓰지 못할까? 문학 교수들의 스승 스탠리 피시가 그 답을 알려준다. 스탠리 피시의 방법론은 간단명료하다. 뛰어난 문장을 많이 읽고, 왜 뛰어난지 알아내고, 그런 문장을 쓰기 위한 모방 훈련을 지속하라는 것. 많은 교사와 글쓰기 지침서들은 예시보다는 규칙에 의존한 글쓰기를 강조한다. 하지만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읽어야 한다. 좋은 문장을 많이 읽고, 그 문장이 왜 좋은지 분석하는 과정이 선행된 다음 꾸준히 써보며 실력을 쌓아나가야 한다. 원론적으로 들리지만, 그게 시작이다. 문장은 생각을 담은 최소 단위이며 가장 핵심 단위이므로, 문장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문장의 형식만 제대로 알아두면, 무한한 내용이 산출된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어려운 듯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있다. “모든 것은 문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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