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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망각. 그것은 내가 순례의식에 대해 가진 최고의 의문이기도 해. 만약 내게 일기를 쓰는 습관이 없었다면 나 역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거야. 매년 순례의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면 나는 일기에 적어둔 그 질문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흔적을 되새겼어. 그러면서 어쩌면, 소피 너도 한 번은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망각의 약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한 모금의 음료가 우리에게서 지워버렸을 그 질문을. 어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_ p.12)
할머니는 스카이랩의 서른세 번째 생물학자로 탐사선에 올랐다. 엄마는 그때 아직 어린아이였고, 할머니는 엄마가 어른이 되기 전에 꼭 돌아오겠다고 엄지를 맞대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얼마 뒤, 탐사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자 추진체의 결함으로 도약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회사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공방 끝에 결국 추진체의 설계 결함을 인정했다. 사라졌을 때 할머니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스펙트럼 _ p.60)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 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_ p.181)
2017년, 「관내분실」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 대상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가작을 동시에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초엽 작가. 그녀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이렇게 총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자는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세계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담아낸다. 저자만이 가진 특유의 감각으로 정상과 비정상, 성공과 실패,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넘나들며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단편을 소개해보자면, 우선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뛰어난 과학자 릴리 다우드나로 인해 완벽한 유전자의 선택이 가능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완벽함의 범주에 속하지 못해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년이 되면 1년간 시초지로 떠나는 아이들, 하지만 그중에 돌아오는 이들은 떠난 사람에 비해 늘 그 수가 적기만 하다. 나머지 순례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스펙트럼>은 언어를 주제로 하여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인공은 할머니 과학자. 우주에서 조난 당해 외계인과 조우한 할머니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도 할머니 과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우주에서 재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그리고 있다. 흥미롭다.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다. 곱씹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독창적이다. 왜 그녀를 일컬어 SF의 우아한 계보라고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장편도 아닌 단편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까.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