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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그 남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달콤하고 부드럽다. 두 번 다시 귓가에 들릴 리 없는 목소리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지금도 가슴속 깊은 곳에 살아 숨쉬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평생, 그 남자를 잊을 수 없다. 새삼스레 확신한다. 그 남자의 환영을 좇으면서, 이렇게 남은 인생을 무위하게 보낼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남자의 포로다. 돌멩이처럼 차갑고 무거운 죄를 품은, 무참한 포로다. 행복 따윈 이제 없다. 그때 잃은 것이다. 모든 것을 전부. 그러니까 나는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몇 년이 지나도, 정신이 들고 보면 여기에 돌아와 있다. 그때 그 남자에게 “선택해도 돼”라는 말을 들은, 바로 이 장소에. 그리고 나는 선택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지만 지금도 그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다. (p.8)
“거실 창문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저곳에 저의 귀여운 아이들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아주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시체를 묻을 때마다 정원수를 바꿔 심었습니다. 그 나무를 셀 때마다 성과를 확인할 수 있어서, 매일 처리하는 잡무의 스트레스나 업무 피로가 깨끗이 씻겨 사라졌죠. 으음, 그 정도의 즐거움은 또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그 한때를 맛보기 위해서 살인을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p.38)
마사야 군이 옛날 그대로라서 기뻤습니다. 당신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겠습니다만, 그 무렵의 당신은 특별한 존재이며,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자마자 곧바로 법학부에 들어갔다던 당신의 존재를 떠올린 것은 마사야 군에게는 불운이었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눈으로 꼭 판단해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사형을 받을 만한 인간입니다. 누구보다 스스로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에 풀어놓아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이렇게 적습니다. 저는 입건된 8건의 살인으로만 재판을 받고, 사형대에 매달려야 합니다. 결코 9건의 살인으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라는 인간이 법을 근거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불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회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p.41)
너무나 바보 같은 부탁이다. 응해야 할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해보고 싶었다. 나를 믿어 의심치 않는 하이무라의 저 두 눈. 그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 잊었던 그 시절의 만족감이 되살아난다. 게다가 그는 명백히 뭔가를 감추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의뢰는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기묘한 애정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의뢰에 어떤 비밀이 있는가. 그것을 알고 싶다. (p.67)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대학생 마사야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것은 5년 전 체포된 희대의 연쇄살인마 하이무라 야마토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였다. “내 죄는 인정하지만, 마지막 한 건만은 누명이다.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겠나?” 연쇄살인범은 마사야에게 유난히 친절히 대해주었던 어릴 적 동네 빵집 주인. 긴 고민 끝에 살인범의 요청을 수락한 마사야는 하리무라의 주변 인물과 사건 관계인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조사를 이어나간다.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젓는 친적,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감싸는 동네 주민들, 빵집의 단골들과 그와 데이트를 즐겼던 여성들까지. 연쇄살인범의 인생을 추적하면서, 마사야는 서서히 그에게 매료되어 가고, 어느 날 문득 자신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살인은 정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것일까?
이야기는 단 한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24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연쇄살인범이 평범한 대학생에게 보낸 편지. 어느 소설로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지막 그 여자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이 말 한마디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한 건만이 무죄가 인정되더라도 내 사형 판결은 뒤집히지 않아. 실제로 나는 살인자야. 몇 사람을 죽였는지 다 기억하지도 못해. 하지만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쓰는 건 사양하고 싶어.” 자기 자신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년 소녀를 감금하고, 고문한 끝에 죽여서 마당에 묻고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삼아온 남자. 책을 읽는 동안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정도로 깊게 빠져들었다. 흡입력이 진공청소기급! 실제 연쇄살인범들을 모델로 한 이야기라 그 충격은 이로 말할 수 없이 크다. 연쇄살인범들은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생각으로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동기와 심리 상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심리 조작의 기술까지 저자는 이 한 권의 책 속에 모두 밀어 넣었다. 피해자 or 피의자? 어린 시절 그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해서 그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정말 무서운 세상! 그 잔혹함에 오소소 닭살이 돋을 만큼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