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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피쉬
대니얼 월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노인을 바라봤다. 생이 저물어가고 있는 시간에 늙고 하얀 발을 흐르는 맑은 물에 담그고 있는 나의 늙은 아버지. 나는 불현듯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한때 소년이었던, 어린애였던, 그리고 젊은 청년이었던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봤다. 내 청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한때 청년이었던 것을,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아버지는 현재와 과거-은 모두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순간, 아버지는 잚으면서도 늙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 태어나고 있는 아주 기괴한 존재로 변했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p.9)
“진정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니?”
나는 한동안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심 아버지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을 잊기 바라면서. 그의 정신은 오락가락 방황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보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지금 그 질문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질문에 집착하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무엇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다. 그러나 지금 같은 때에는 ‘모르겠는데요’ 같은 대답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은 뭔가 떠올려야 할 때다. 나는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p.37)
내가 들어가자 그는 미소를 짓는다.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때때로 보이는 눈빛,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지쳤으면서도 영적으로 축복받는 듯한 그런 눈빛을 띠고 있다. 나는 그런 눈빛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죽을때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약한 목소리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남기고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사뭇 희망적이다. 죽음을 그렇게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울어버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르다. 그는 의연하지도 않고 희망을 가지는 척하지도 않는다. 사실 그는 걸핏하면 “내가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오래 전에 죽었더라면 좋았을걸”이라고 말해왔다. (p.100)
그는 평생 거북이처럼 살아왔다. 감정의 등껍질 속에 숨어서 완벽한 방어를 한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이 마지막 순간에나마 그가 그 딱딱한 껍질 속의 연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내가 바보다. 처음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가 뭔가 의미 있고 진지하며 예민한 주제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그는 농담을 한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아버지는 정말 삶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알고 싶다. (p.108)
세일즈맨으로 밖으로만 떠돌다가 죽음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 아버지는 머리 둘 달린 여자를 만나고, 거인을 정복하고, 아름다운 인어와 사귀었으며, 진실을 꿰뚫어 보는 유리 눈의 노파를 만나고, 홍수를 잠재우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모든 이의 영웅이었다. 집 밖에서는 그런 대단한 모험을 하는 영웅이지만 정작 집에만 오면 왠지 왜소하고 낯설어 보이는 아버지. 이제 어른이 된 주인공 윌리엄은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이제껏 아버지와 한번도 진정한 대화를 해보지 못한 사실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아버지가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발견하려고 한다.
작가의 상상력을 도저히 따라가질 못하겠다. 매 순간이 새롭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그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작가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아버지라는 존재에 절로 마음이 기운다. 집에서는 그냥 평범한 남자, 직업도 없고 마땅히 할 얘기도 없는 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밖에서 만큼은 모험으로 가득 차고 영웅적이었던 아버지의 삶. 아버지의 젊은 시절 무용담은 너무나 많아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얘기만도 셀 수 없을 정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를 향한 아들의 느낌,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은 다른 이들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아들이 자라는 과정을 전혀 지켜보지 못한, 아빠를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남자. 그 미안함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린다.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아버지. 매번 시작되는 아버지의 말장난을 애써 부정하려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아들. 그에게 아버지는 위대했고 마지막까지 유쾌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과 감동. 손에 꼽을 정도로 결말이 참 아름다웠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