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병은 스스로 고칠 수 있다
후지카와 도쿠미 지음, 김단비 옮김 / 베리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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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 『모든 병은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제목만 살펴본다면 자칫 '사이비 의사'의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명의의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의사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독자의 의문은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가면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압축적으로보여준 잘 지어진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의사처럼 진단과 약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식생활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웬만한 병은 예방할 수 있고, 설령 병에 걸렸다해도 먹는 것으로 치료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먹는 일상의 식품에서 고치지 못할 병은 없다고 한 히포크라테스의 말까지 연관된다. 저자 후지카와 도쿠미는 정신과 의사로 의학박사 학위도 갖고 있다. 분자영양학자라고 한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그가 전공해 지금까지 환자를 치료해오면서 경험에 의한 의학적 결론이고, 이론으로서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그의 이 주장은 '균형 잡힌 식사'다. 우리가 만성질환이라고 말하는 성인병(당뇨병, 고혈압 등)에는 특효적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그의 치료 원칙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데도, 많은 현대인이 왜 만성질환에 시달릴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미 채식, 자연식물식 등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식단에는 단백질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백질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영양소이지만, 많은 사람이 탄수화물과 채소 위주의 잘못된 식단으로 ‘질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이는 만성질환의 원인이 된다.

단순히 밥을 제때 챙겨 먹는 것으로는 몸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 및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분자영양학에 근거하여 체계적인 영양 섭취를 설계해야 할 때라는 주장이 성립한다. 이 책에서 그는 질적 영양실조, 즉 ‘당질 과잉+단백질 부족+지방산 부족+비타민 부족+미네랄 부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책에 따르면,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 중에는 스스로 터득하여 영양소를 제대로 섭취하는 것으로 증상이 호전된 경우가 많았다. 이 책에서는 영양소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수많은 임상과 진료를 통해 축적된 합리적인 영양요법을 전한다. 고단백·저당질 식사를 통한 식생활 개선과 건강기능식품을 통한 적절한 영양 섭취만으로도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균형 잡힌 식사로도 단백질과 철분을 충분히 보충하지 못한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여성의 약 50%는 심각한 단백질 부족으로 프로틴 규정량(1일 20g씩 2회)을 섭취하지 못하며, 20~40대 일본 여성의 약 70%는 페리틴 수치가 30 이하인 철분 부족 상태였다. 남성이라도 단백질이 결핍된 식단을 오랫동안 먹어 왔거나 큰 병을 앓은 이후 단백질 부족 상태가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식단으로 인한 ‘질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식단을 바꾸고 건강기능식품을 챙겨 먹는다고 하더라도, 영양 불균형을 제대로 짚어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작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 같은 질환이 단백질이나 철분 등의 영양부족과 관련 있음을 밝혀낸 저자는 이 책에서도 알맞은 영양 섭취로 만성질환을 치료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만성질환 외에도 쉽게 화가 난다거나 손발이 차갑고 또는 날씨 변화에 민감한 등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증상이 있다면, 단백질과 철분 부족이 원인일 수 있다. 이 책은 영양 섭취의 연결 고리를 명확히 짚어낸다. 프로틴 규정량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면 철분제 복용이 가능해지고 메가비타민 요법을 시작할 수 있다. 당질 제한과 더불어 메가비타민 요법으로 비타민을 보충해야 몸속 에너지 대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각종 검사나 의사의 진료는 증상을 살펴볼 뿐이라고 말한다. 환자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공부하고 분자영양학을 통한 분자영양요법을 실천할 때 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그의 치료 경험과 연구 실험 분석의 결과여서 믿을 만하며, 문제는 꾸준히 해야 한다는 환자들의 인내심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이 책의 구성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자신이 곧 치료자(의사)라고 생각하고 읽고 익혀 습관적인 올바른 영양 섭취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책은 이에 따라 4개의 본장(本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적절한 단백질 섭취를 위한 기초 다지기」에서는 '균형 잡힌 식사가 영양실조를 불러온다'고 본문의 내용을 시작한다. 즉 균형 잡힌 식사란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는 습관을 들이며 만일 부족한 부분이 발견될 경우(의사가 진단하면 잘 파악될 것) 이를 보충하는 기능식품 등을 예시해준다. 이어 '올바른 단백질 섭취 방법'도 알려주어 자신이 스스로 맞춰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를 위해 '올바른 단백질 섭취 방법'에 대한 세심한 설명을 곁들인다. 예를 들면 '왜 프로틴 규정량은 1일 20g×2회인가'에 대한 설명과 '시중에 출시된 프로틴의 단백질 함유량'까지 밝혀 올바른 섭취 방법을 일러준다.

 


 

2장 「메가비타민 요법을 통한 자가치료의 실천법」에서는 '현대인에게 철분 보충이 중요한 이유'와 대한 설명과 'ATP 생성을 촉진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ATP란 다양한 생명 활동 유지의 에너지가 되는 물질로, '아데노신3인산'을 일컫는다. 이것은 아데노신이라는 성분에 3개의 인산기가 결합한 작은 물질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Adenosine Tri-Phosphate'며 이를 줄여서 ATP라고 한다. 우리가 하는 에너지 대사의 목적은 이 ATP의 생성이다. 저자는 철분 부족이 우울증을 불러온다고 강조한다.

철분 부족은 주로 여성에게 나타나며, 서양에 철분 부족이 드문 이유도 밝혀준다. 또 철분은 혈색소침착증을 해결하는 물질이며 페리틴 수치가 증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대책도 상세하게 전해준다. 페리틴은 헤모글로빈과 더불어 체내에서 철의 주요한 저장물질인데, 비장, 간, 골수 등 세망내피계에 많이 존재한다고 한다. 페리틴은 거의 구상(球狀)의 단백으로서, 가운데에 미셀이 된 3가(價)의 철을 둘러싸고 그 단백부분(아포페리틴)은 분자량 약 46만이며,24개의 폴리펩티드서브유니트로 되어 있다. 이는 전문적인 사안이어서 굳이 우리들이 알 필요는 없지만 원리는 알아야 이해가 되기 때문에 특별한 설명이 전문의가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메가비타민 요법의 시작, ATP 세트'에서는 ATP 생성을 촉진하는 건강기능식품 4종 세트와 남녀 성별에 따른 메가비타민 섭취 방법까지 알려준다. 고용량의 비타민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도 밝힌다. 이와 함께 애드늄 세트가 점막과 피부를 건강하게 한다.

 


 

이 책 후반부에서는 알츠하이머, 조울증, 아토피 피부염, 수면제 의존증 등 다양한 환자의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저자의 병원을 찾아오기에 앞서 영양요법을 실천하고 있었고, 또 진단받은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몸을 관리했다. 저자는 이 책의 설명을 통해서도 단백질·철분 부족을 해결하고 몸의 회복력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수년간의 연구가 담긴 이 책을 통해 만성질환을 극복하고 일상을 더욱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저자 : 후지카와 도쿠미

정신과 의사이자, 의학박사. 1960년 일본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다. 1984년 히로시마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히로시마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신경정신과, 현립 히로시마병원 신경정신과, 카모정신의료센터 등에서 근무했다. 우울증의 약리·영상 연구와 MRI를 이용한 우울증 연구를 수행하고, 노년기 우울증 환자에게 경미한 뇌경색이 다수 발생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2008년부터 후지카와 심료내과 클리닉을 개원하여 우울증을 비롯한 기분장애, 불안장애, 수면장애, 스트레스성 질환, 치매 등을 치료하고 있으며, 고단백·저당질 식사를 중심으로 한 영양요법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다.

저서로는 《우울증·공황장애는 ‘철분’ 부족이 원인이었다》, 《우울을 지우는 마법의 식사(국내 출간)》, 《약에 의존하지 않고 우울증을 고치는 방법》, 《약에 의존하지 않고 아이의 과잉행동·학습장애를 고치는 방법》, 《정신과 의사가 고안한 우울증이 사라지고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식사법》, 《분자영양학에 의한 치료·사례집》 등이 있다.

 

역자 : 김단비

대학에서 일어일문학과 중어중문학을 전공했다. 글밥 아카데미 출판번역 과정을 수료한 후, 바른번역 소속 일본어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독자에게 책을 읽는 기쁨을 전하는 ‘기쁨 번역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언뜻 보기에 좋은 사람이 더 위험해》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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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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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초로 스웨덴 이론철학 분야 교수 자리에 오른 그는 스톡홀름대학교에서 진실의 습득을 방해하는 지식 저항의 원인과 그 해결 방안을 연구해왔다. 이 책은 그 연구가 집약된 대중인문서로, 진실을 좇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 지식 저항 현상을 철학적 관점으로 고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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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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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진실의 조건』을 처음 봤을 때 제목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해서 꽤 어려울 것이란 생각은 했다. 그러나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금세 독서욕이 살아났다. 특히 저자의 이름도 처음 들어본 터라 다소 생소한 문제로 내용을 이끌지 않을까 걱정은 했었다. 더욱이 철학자인 데다 북유럽의 학자인 것도 알 수 있었다.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서 철학교수로 재직중인 것도 독자의 관심을 끌었다. 처음 책 소개글을 볼 때 이 책이 "그의 연구가 집약된 대중인문서로, 믿어 마땅한 진실을 좇는 데 큰 걸림돌이 되는 지식 저항 현상을 철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고 출판사 측에서 설명하고 있어 무척 머리 아픈 것을 각오하고 도전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저라는 점이 확인됐고,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저자는 철학이 지난 수천 년간 논의해온 진실의 정의를 짚어가며 그 해답을 찾아왔다. 그리고 심리, 사회, 언어학의 관점에서 ‘진실의 적’들이 어떻게 우리를 속였는지, 왜 우리가 그들에게 속을 수밖에 없었는지 밝히고 돌파구를 이 책이 제시한다. ‘진실’과 관련한 철학·심리학·사회학·언어학 등 거의 모든 인문학적 지식을 집약한 『진실의 조건』은 스웨덴에서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라 유수의 사회과학상을 수상했다. 또 스티븐 핑커를 비롯한 전 세계 지식인들로부터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탈진실 시대를 헤쳐 나갈 미래 세대의 가이드북으로 선정되어 11만 명의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무상 제공되는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정치적 견해가 극도로 양극화된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이 ‘진짜’ 진실을 구별해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독자는 이 책이 바로 '진짜' 진실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말이 매력적으로 들렸고 대한민국 사회에 양극화, 진영 싸움으로 대표되는 '검찰 개혁' 문제를 적용해보기 위해 책을 읽기로 한 것이다. 저자 오사 빅포르스가 시대를 가장 위협하는 ‘지식의 적’과 맞서 싸우는 철학자란 말도 독자에게는 적잖은 매력 포인트이다. 우선 저자는 지금의 시대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탈진실(post-truth) 시대'로 규정한다. 탈진실의 시대란 말도 독자로서는 생소하다. 처음 들어본 단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독서를 계속했다.

언뜻 다양성을 존중하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탈진실의 사도들이 바라는 바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단순히 속이기보다 사람들에게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 자체를 빼앗으려 한다. 혼란 끝에 피로에 빠진 사람들이 진실과 거짓의 구분 자체를 포기하고 그저 믿고 싶은 것만 믿기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저 믿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싸우는 오늘날 ‘내 편 정치’와 극심한 갈등은 그렇게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어 “진실을 향한 싸움은 점차 출처에 대한 신뢰성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믿음이 진실을 대체해버리는 탈신뢰(post-trust) 시대의 도래를 막기 위해 “철학자가 나서야 할 때”라고 선언한다. 이 책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철학을 주 무기로 삼아 심리학·사회학·언어학 등 인문 분야를 넘나들며 수집한 수많은 사례를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을 구별하는 데 필요한 필수 요소가 무엇인지 저자는 하나하나 규명해 나간다. 그리고 진실을 지키기 위한 대중·언론·전문가 각각의 소임을 규명하고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제시한다. “이 책의 출발점은 철학이다.” 진실을 구별해내기 위해 저자는 먼저 진실이 무엇인지, 또 이와 근접한 개념인 사실, 거짓, 지식 등이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 개념을 살핀다. 이를 위해 저자가 맨 처음 짚고 넘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이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은 계속해서 변화해왔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대응론, 데카르트의 회의적 합리론, 니체의 가치 허무주의를 비롯한 고대-근대 철학자들의 주요 견해를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그 뒤, 현대에 이르러 선동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의도적으로 곡해해 전파하고 있는 사실 허무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이 무기로 삼은 “모든 것은 그저 해석의 문제일 따름이다”라는 사고방식은 ‘사실’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선동가들은 이를 알고도 버젓이 “모든 것이 그저 해석에 불과”하다며 사실의 존재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는 명백한 사실, 가령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조차 의문을 제기할 빌미를 제공한다. 이렇듯 선동가들은 그들의 거짓에 반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사실’을 없애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엄중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수박 겉핥기식 ‘포스트모더니즘’ 사고방식을 단순히 ‘열린 사고’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그편이 보다 객관적이고 포용력 있는 자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사람만의 말이 맞겠느냐” 하는 논리로 접근하는 것인데, 이 역시 선동가들이 파놓은 사고 함정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객관성’과 ‘중립성’을 의도적으로 뒤섞어 대중뿐만 아니라 언론마저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진단한다. “(그들은 사안을) ‘중립적’으로 다루지 않다는 이유로 공영 매체를 공격한다. 하지만 객관적이라는 말은 모든 주장(타당한 근거가 있는 주장과 근거가 없는 주장)을 똑같이 다루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타당한 근거가 있는 주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성이 중립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명쾌하고 날카로운 지적이고 문제 제기라는 데 독자는 공감한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저자는 보편타당한 사실과 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탈진실’ 시대의 도래를 부정한다. “‘탈진실post-truth’ 시대는 절대 없을 것이다. 좋든 싫든 진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사실 허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반박해 “사실은 없다”라는 진술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사실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으며, 무슨 논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논쟁도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에 대해 저자는 “사실 허무주의는 철학의 대량살상무기와도 같다”고 지적한 뒤, 곧이어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이 말했듯 “아뇨, 제 말이 옳습니다. 당신은 틀렸고요!”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진실을 부정하는 그들에게 맞설 “가장 파괴적인 대항 무기는 역선전이 아니라 증거와 객관적 진실과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확언한다. 이 믿음이 선동가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지식’ ‘믿음’ ‘거짓’ ‘증거’ 등 진실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주요 요소들의 철학적 개념을 쉬운 언어와 비근한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동시에 사실 허무주의자들의 무차별적이고 극단적인 공격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뿌리를 튼튼히 구축한다. 『진실의 조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증거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의심은 어디까지 해야 할까?” “객관적 진실은 존재할까?” “‘사실’은 인간이 만든 것일까?” “이해가 중요할까? 암기가 중요할까?” 이를 토대로 진실의 개념과 조건, 그리고 그 추구 당위성을 쌓아 선동가들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다.

독자는 이쯤에서 많은 혼란을 겪는다. 애초에 저자의 논리로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탐색하는 것이 잘못된 시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의 믿음처럼 '안타까운 사람' 축에서 벗어나려면 인내와 끈기를 갖고 이 책을 이해해야 한다는 묘한 근성도 서서히 올라온다. 저자가 여기서 하나의 열쇠를 더 던져준다. "하지만 진실을 좇는 것을 방해하는 상대는 비단 선동가들뿐만이 아니다. 적은 우리 내부에도 있다."는 말이 그 열쇠인 셈이다. 앞서 논의한 진실의 철학적 정의를 토대로 저자는 3장 〈사고는 어떻게 왜곡되는가?〉와 4장 〈거짓말과 가짜 뉴스, 그리고 선전은 우리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서 어째서 선동가들의 그토록 노골적인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하는지를 심리학·사회학·언어학 관점에서 분석해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왜 우리는 그처럼 이상한 것을 믿을까?” 먼저 저자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 확언한 뒤, 인간의 이성을 망가뜨리는 확증 편향, 의도된 합리화, 역화 현상 등 다양한 인지기제를 하나씩 점검한다. 그리고 여느 책에서 다뤄지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이토록 부자연스러운 기제를 갖도록 진화한 것일까? 거짓을 믿는 것보다 진실을 믿는 것이 생존에 분명 유리해 보임에도 말이다. 심지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본능이 ‘진실’보다 ‘소속감’이 생존에 유효하리라 판단했다고 진단한다. 선동가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들이 갈라치기를 통해 선동하는 ‘내 편 정치’는 ‘생존’을 위협한다. 그러나 소속감을 위해 진실을 등한시하는 행위는 결국 인류를 쇄락으로 이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이성을 활용해야만 한다.

여기서 크나큰 착각은 이성이 단순히 내부동력만으로 작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판단의 준거, 즉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타당한 반대 증거를 놓고도 엉뚱한 무언가를 믿는 것은 “자기 믿음에 대한 반론을 이해하고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가 연구한 더닝-크루거 효과이다. 이 현상은 지식 부족이 어떻게 인지 왜곡을 이끄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시험 성적이 낮은 학생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할 지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닝에 따르면 오늘날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의견을 형성하기가 지나치게 쉬워진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 빅포르스는 우리가 인지 기제에 속지 않고 진실을 구별해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보다 타당한 근거를 갖춘 지식이라 설파한다. 저자의 논리는 빈틈없어 보이고 일목요연하게 진전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해하고 읽기만 하면 저자의 말의 내용이 통째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일 것이라고 독자는 판단한다. 물론 선동가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대중들의 지식 습득을 저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들이 전문가들과 전문성을 경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음모론과 같은 타당한 지식의 ‘대안적 내러티브’를 퍼뜨린다. ‘내 편’이 그저 무언가 믿을 수 있도록 ‘가짜 지식’을 건네는 것이다.

끊임없이 확산하는 음모론의 허위성을 모두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데다가 지식인들의 시간을 빼앗아 인류의 발전을 후퇴시킨다. 게다가 음모론은 반대 지적 자체를 음모 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여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또, 이와 비슷한 기법으로 ‘거짓 동일시’라는 것이 있다. 가령 기후학자들이 기후 변화 부정론자들과 ‘논의’ 중에 있다는 설명이 여기에 해당된다. 비록 비전문가가 그 논의를 평가할 수 없다고 해도, 논의 중이라는 사실은 그 사안과 관련해 의견 불일치가 있으며, 양측 모두 증거를 갖고 있다는 인상을 전해준다. 이러한 선동가들의 방해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빅포르스는 두 가지 차원에서 돌파구를 제시한다. 끝으로 빅포르스는 5장 〈지식과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 현장의 과제〉와 6장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향후 우리가 지속·발전시켜야 할 실천 과제를 제시한다. 다만 공론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노고가 빛나는 지점이다.

 


 

저자 : 오사 빅포르스

 

1961년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뉴욕 콜롬비아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언어의 의미와 규칙을 연구한 논문 〈언어적 자유LINGUISTIC FREEDOM: AN ESSAY ON MEANING AND RULES〉를 발표했고, 이후 언어철학과 정신철학을 넘나들며 수많은 글을 작성해왔다. 2002년 스톡홀름대학교 부교수로 임용되면서 스웨덴 이론철학 분야 최초의 여성 부교수가 되었고, 2008년 동 대학의 이론철학 교수 자리에 올랐다. 철학적 관점에서 진실과 거짓, 지식 저항의 원인을 분석하고 돌파구를 제시한 《진실의 조건ALTERNATIVE FACTS: ON KNOWLEDGE AND ITS ENEMIES》은 그의 대표작으로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스웨덴 내 출판상을 다수 수상하였다. 또한 세계적인 팝 그룹 ABBA의 멤버이자 스웨덴의 국민 가수인 비에른 울바에우스가 설립한 출판사 프리 탄케FRI TANKE의 지원을 받아 사회 진출을 앞둔 11만 명의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배포되어 스웨덴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스웨덴을 넘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그는 ‘지식의 적’에 맞서 이성과 진리를 수호하는 대중적인 지식인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9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인 스웨덴 한림원의 평생회원 18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노벨문학상을 비롯한 유수의 상을 선정하고 있다.

 

역자 : 박세연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글로벌 IT기업에서 10년간 마케터와 브랜드 매니저로 일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번역가 모임 ‘번역인’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옮긴 책으로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변화는 어떻게 촉발되는가》, 《행동경제학》, 《열 번의 산책》, 《불만 시대의 자본주의》, 《더 나은 세상》, 《플루토크라트》, 《딥 씽킹》, 《OKR》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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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 - 육필서명 필자, 강인섭 김광균 김광협 김구용 김동리 김문수 김민부 김승옥 김영태 김종길 김태규 김현 김현승 마광수 문덕수 문익환 박남수 박두진 박목월 박성룡 박종구 박화목 박희진 서정주 석용원 송상옥 송수남 신봉승 오규원 이경남 이상보 이승훈 이청준 이탄 이해인 임인수
박이도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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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간행한 출판사는 "이런 형식의 책은 국내 최초이다."고 강조한다. 독자가 생각해도(많은 책을 읽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런 류의 책은 본 기억이 없다. 국내 유명 문학인, 종교인, 사상가들과의 교우 관계를 바탕으로 박이도 원로시인이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연과 얽힌 에피소드를 슬며시 꺼내놓은 에세이다. 특이한 점은 대상 인사들의 친필이 함께 수록됐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인 박이도 시인의 기억을 명징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고, 그가 꺼내놓은 이야기들이 사실적이라는 확증을 주기도 한다.

특히 저자의 기억에 의존한 에피소드들마저 시인의 기억이 맞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 것이라 문단 이면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역할에도 비중을 둘 수 있는 글들이다. 『내가 받은 특별한 선물』에 담겨 있는 인물들은 당대를 대표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시인 작가 화가 평론가들이다. 친필 서명이 모두 공개될 뿐만 아니라 그 서명본을 보내준 분들과의 인문학적 교유의 일화들이 곁들여져 있어 재미를 한층 북돋워준다. 이는 예술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해온 저자만이 집필할 수 있는 내용들이란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 게다가 그 증정본 필자들이 두 분 외에는 모두 작고한 분들이어서 더욱 이런 자료들이 귀중하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시인들의 이름만 들어도 사실 놀라울 정도다. 시인의 연배보다 훨씬 앞인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문인부터 최근까지 활동을 계속하는 문인들이라 연대가 길다. 김광균, 서정주, 조병화, 박희진, 이탄, 오규원, 마광수, 박목월, 김영태, 박성룡, 김광협, 김종길 박화목, 김종길, 이승훈, 조태일, 김현승 등 한 분 한 분이 모두 한국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아닌가. 또한, 이경남, 강인섭, 문익환 같은, 시인이면서 언론인 목회자로 활동했던 분들, 전영택 황순원 이청준, 김승옥 현길언 같은 당대 최고의 작가들, 한 시대 방송가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신봉승, 주태익 선생, 여기에 화가 송수남, 서예가, 박종구, 수녀 이해인 등…은 우리 시대의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다.

독자로서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한국현대문학사에 길이 이름이 빛날 분들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해서 이 책에 대한 애정도 깊어진다. 독자는 단순한 독자로서 20세기 후반기에 태어났지만 그 무렵 교과서나 한국현대문학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들의 문인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다. 문학을 처음 접하게 해준 분들이 그 당시로는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대부분 어려울 때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분들이었기에 더욱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많은 문인들에 대한 기억과 교유의 추억 중 고등학교 후배인 마광수 시인, 요절한 〈기다리는 마음〉의 천재시인 김민부, 평생의 두 분 스승인 소설가 황순원, 시인 조병화, 민주 투사 허명(?)을 남기고 떠난 ‘아름다운 서정시인’ 문익환 목사, 〈민들레의 영토〉에 시의 씨를 뿌린 이해인 수녀, 방송가의 풍운아 신봉승 방송작가 등등... 한 분 한 분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48명의 인연과 비화를 정감 있는 문장으로 불러오고 있다. 독자로서는 오랜만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한껏 맛보고 그들과의 대화를 주선해준 저자 박이도 시인에 감사한 마음 비길 데 없다. 독자가 1980년 대 이후 알게 됐던 문인 중 조정래 작가가 쓴 말도 감동적이다.

"글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야말로 박이도 시인을 위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만큼 박 시인의 인간적 품격과 시의 격조가 혼연일체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성직자적인 고요한 미소로 평생을 살아온 고운 마음의 소유자 박 시인의 시편들은 그 미소처럼 담백하고 고결하며, 그 마음처럼 순결하고 고아하여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를 준다."(작가 조정래)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오랜 세월 문단의 문객들과 나눈 육필서명본을 비롯해 편지 글과 엽서 글을 모아놓은 서첩(書帖)이다. 문단의 큰 어르신들부터 가까운 선후배들까지, 서로 나누었던 나의 사적 교우록이 되는 셈이다. 신문학이 싹트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단의 기라성들의 시화(詩畵)와 육필을 귀감삼아 정면(正面)교사로 삼고자 함이다. 이분들의 시문(詩文)에 담긴 저마다의 문학적 발상법과 시정신에서 많은 교훈을 받은 바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어르신들의 예술과 인격을 기리고 명심불망(銘心不忘)하고자 한다. 특히 친필 육필로 받은 이분들의 함자와 필체를 한 자리에 모아 나 스스로에게 귀감이 되는 서첩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삶과 문학을 배우려는 태도를 가다듬고 있다.

시인이라서 그런지, 혹은 스승인 황순원 작가의 말을 듣고 배운 것인지 문장이 간결해 읽기에도 매끄럽고 이해하기도 쉽다. 오랜 시간 시를 쓰고 늘 우리말을 갈고 닦는 내공이 엿보인다. 저자의 이러한 문학적 재능은 일찍 드러난 것 같다. 「일출봉에서 하늘나라로 사라지다」, - '요절한 천재 시인 김민부'를 회억하면서 "나는 1958년 서라벌예대(2년제)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민부를 처음 만났다. 이미 그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인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에 나는 민부와 같이 부산에서 온 권영근 군의 초대를 받아 부산으로 갔다. 초량의 철길 주변에 있었던 집(두 친구 중 누구네 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음)에서 일박하고 역시 동기생이었던 송상옥 군이 사는 마산으로 이동했었다. 앞에 거명한 세 친구 중 권영근 군은 분당에 살고 있을 때 한두 번 만났으나 지금은 소식이 없다."(p.114)는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 책의 첫 번째 기억나는 인물 김광균이 등장하는 글에서도 저자가 등단한 해가 정확하게 나온다. "나는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황제皇帝와 나」라는 시로 당선했다. 1월 4일자 지상에 작품이 실리자 전국에서 편지가 답지했다. 뜻밖의 서신들이었다. 그 중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소포, 보낸 이의 함자(銜字)는 김광균(金光均). 소포를 뜯어보니 고급 양장본의 『시집 와사등(詩集瓦斯燈)』이 나왔다. 시집의 저자 김광균이란 함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먼 옛날인 듯 마음속에 무한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시집에 편지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봉하지 않은 봉투에서 뽑아 보니 만년필로 쓴 손글씨 편지로, 두 장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그 내용은 ‘우리 시단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요지의 격려의 글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제일 먼저 서정주 선생님에게 보여 드렸다. 그리고 신촌 주변에 몰려 하숙하던 마산 출신 송상옥, 이제하, 강위석 등과 송수남 등의 친구들의 요청으로 이 편지를 건넸는데, 그 후 편지는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읽고 적어 보며 그렇게 암송하던 시 한 편 「설야雪夜」가 동動사진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속 표지에는 머리말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와사등(瓦斯燈)에 처음 불이 켜진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떠나온 지 오랜 내 시의 산하(山河) 저쪽 일이라, 지금도 등불이 살아 있는지 이미 꺼진 지 오래인지 알 길이 없다.(p.13~14) - 「십 년 만에 부치는 글월」 중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문인들 중에서 저자에게는 어느 하나 소중한 기억이 아닐 수 없지만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광수 교수에 대한 글이다. 「누가 마광수를 죽였는가」 - 유서가 된 메멘토모리, 광마 왜 그랬어?란 기억이다. 저자는 그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자연인 마광수(馬光洙)를 사랑한다. 아니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을 거둘 수가 없다. 세상에 태어날 때 자기 스스로의 사유와 행동에 관한 원리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천부(天賦)의 인권이라는데... 문명사회의 법과 제도들은 천부의 인권과 선의의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 광수를 죽였는가? /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음란행위를 하던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를 사랑했던 자들,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설법이다. 여인을 끌어 왔던 무리들은 뒤꽁무니를 뺐다. 이들이나 음행한 여인이나 모두 생래의 선한 양심소유자들이 아닌가. 이들은 율법을 신봉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의 양심과 음행한 여인의 양심을 저울추에 달아본다면 어느 쪽이 법적인 죄가 무거울까. 당연히 현행법인 음행한 여인이 무거울 것이다. 이런 판단에 대해 예수님은 지혜롭게 용서와 사랑의 본질에 의한 판결을 내렸다.

세상과 법정이 마광수에게 내린 조롱과 범법적(?) 판결은 '선한 사마리안 법'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즉각적인 판단이 어렵다. 저자는 마광수 교수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자살자를 위하여」란 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광수의 유언이 된 메멘토모리. 생의 무의식 속에 잠자던 본능의 욕구를 끄집어내어 계속 까발리는 성담론 탐구자. 그가 집요하게 집착한 성담론은 그의 종교가 되었을까. 그를 한 세태, 경박한 호기심 따위를 어떻게 볼 것인지. 이어 저자는 인터넷에 작가 공지영 씨가 남긴 마광수 교수에 관한 기록 한 토막을 찾아내 적는다. '대학 때 부임해 왔던 마광수 교수, 1987년 잠깐 국문과 대학원 진학했을 때 나보고 뻔뻔하다면서 "넌 그렇게 니 얼굴에 대해 오만하냐?" 했다. "여자는 그저 야해야지" 지금 많이 늙었겠지.'라고 마교수를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에는 천천히 읽을수록 맛이 나는 적당히 질기고 촉촉한 글이 많다. '촉촉'이란 단어는 독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기 때문이다. 저자가 많은 문우들과 친분을 맺는 동기는 각기 다른 이유겠지만 후에 되돌아보는 추억으로는 모두가 아름답고 감성 녹이는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저자 : 박이도

 

자유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1959),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62). 시집 <회상의 숲> <폭설> <불꽃놀이>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 <민담시집> <있는 듯 없는 듯> 등 15권, 시선집 <빛의 형상><순결을 위하여> <반추> <삭개오야 삭개오야> <가벼운 걸음> 등 6권, 번역시집 <朴利道詩集.權宅明역>(일어), <Language on the Surface of the Earth.Translate by Kevin O’Rourke/Chang-Wuk Kang번역>(영어).

전집 <박이도문학전집>(전4권)

수필집 <선비는 갓을 벗지 않는다>

평론집 <한국현대시와 기독교>

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편운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등 받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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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과 모든 역량을 결집하지 않으면 인류의 삶을 바꾸어주는 결정적 변화를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량을 지구와의 공존으로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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