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마지막 서점
매들린 마틴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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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런던 대공습(THE BLITZ)이 벌어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시민들이 지켜낸 서점은 불을 밝혔다. 이야기의 힘으로 기적을 만들어낸 런던의 마지막 서점은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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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마지막 서점
매들린 마틴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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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8월, 영국 런던」이라는 소제목 아래 "그레이스 베넷은 언젠가 런던에서 살게 될 날을 매일 꿈꿔 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런던이 그녀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매우 일상적인 일을 아무 감정 없이 주인공 이름과 장소를 밝히고 있다. 다만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어구에서 독자들은 잠깐 생각을 하게 된다. 무슨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이후 전개된 문장은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특히나 이런 전쟁 직전 상황에." 이어 "열차는 패링던 역에 정차했다." 다시 일상적인 분위기다. 도시의 세련된 스타일의 옷차림, 주인공 베넷은 자신이 살던 시골 노포크의 트레이튼과 비교하며 읊조린다. "마음속에서 긴장과 열망이 동시에 요동을 쳤다." 주인공 베넷이 드디어 꿈에 그리던 런던 생활을 위해 패링던 역에 도착하는 상황이다.

그레이스는 『여성과 여성의 삶』이라는 책을 읽으며 사투리를 교정하려고 노력했고 함께 런던에 도착한 친구 비브는 광고에 나오는 모델들처럼 화장법까지 바꿨다. 런던 시내 중심을 벗어나자 광고 전단지마다 남자들에게 군 입대를 재촉하는 문구와 함께 거리 곳곳마다 '공습 대피소'라고 적힌 간판이 걸려 있었다. 1차대전 참전으로 남편을 잃고 외동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엄마의 지인 웨더포드 아주머니의 집에 도착한 그레이스와 비브,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독일 나치군의 폭격이 임박해질 시점에 그레이스는 방공호 바로 입구에 위치한 서점에 찾아간다. 그레이스와 프림로즈 힐 서점의 첫 번째 만남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잘 되리라는 원대한 기대를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신을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렇듯 유럽이 독일의 침공으로 전쟁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직전 런던의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된다. 런던 1939년 8월의 모습이다. 독일은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치고 곧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2차대전의 시작이니까 1939년 9월이다. 그러니까 독일의 폴란드 침공 한 달쯤 전의 영국 런던의 모습이다. 물론 전쟁이 끝나고 밝혀지지만 독일은 전쟁이 진행되면 러시아, 영국도 모두 지배하기를 원하고 전략적 계획표에 따라 독일의 영국 침공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전쟁 후 밝혀지지만 윈스턴 처칠이 영국 총리에 취임했을 때, 런던은 공습 위기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유럽 대륙에 파견된 영국군도 독일 기갑사단에 밀려 퇴각을 거듭했다. 영국 정보부는 전력 면에서 독일 공군이 영국 공군보다 월등하게 우세하다고 자체 판단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처칠은 '피와 땀'을 언급하며 항전 의지를 분명히 다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처칠은 총리에 취임한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육지와 하늘, 그리고 바다를 가리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급박한 상황인데도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전쟁이 터지더라도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희망적인 낙관론을 가졌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펴낸 후 '제2차 세계대전 런던 대공습(THE BLITZ)에서 살아남은 서점들에 영감을 받은 소설'이라고 밝혔다. 또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사의 말」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소설을 쓰는 것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고 말한다. 이렇게 완성된 『런던의 마지막 서점』은 시대를 뛰어넘어 전쟁으로 인한 상실, 사랑 그리고 문학의 영속적인 힘을 표현한 수작(秀作)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히틀러가 무력으로 유럽 전역을 휩쓸자 런던은 전쟁 준비에 착수한다. 그레이스 베넷은 도시에서 살게 될 날만을 꿈꿔 왔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습 대피소와 등화관제 커튼뿐이었다. 게다가 런던의 중심부에 위치한 먼지 자욱한 책방, 프림로즈 힐 서점에서 일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공습이 점차 격렬해지며 등화관제와 공습에 시달리는 동안, 그레이스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를 한데 묶어주는 이야기의 힘을 발견한다. 이는 그녀가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이 없었던, 전쟁으로 인한 가장 어두운 시기마저도 압도해 버리는 강력한 힘이었다.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으로 인해 살고 있는 터전에서 전쟁의 참상을 맞닥뜨린 런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절체절명의 전쟁에 휩싸인 사람들이 그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는지, 특히 암울한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던 문학의 힘이 이루어낸 기적을 사실감 있게 다루고 있다. 무차별한 폭격 속에 기적처럼 살아남은 『런던의 마지막 서점』이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주었는지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레이스가 찾아간 프림로즈 힐 서점은 폭격에 대비해 이층까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서점 내부에 책들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백발에 짙은 눈썹을 한 우둥퉁한 체구의 서점 주인 에번스, 서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레이스 말을 단번에 거절한다. 도시 전체에 짙게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 당장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그레이스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긴 웨더포드 아주머니는 내일 당장 8시까지 서점으로 출근하라며 보조직원으로 채용된 사실을 알려준다. 서점 주인 에번스가 부인을 처음 만난 곳 '프로림즈 언덕' 그곳에 자리잡은 서점에 첫 출근을 한 그레이스는 딱 6개월만 버텨보겠다고 다짐한다.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흡착한 책더미를 정리하기도 전에 손님들이 찾아오고 그레이스는 난생 처음 듣는 책 제목에 당황한다. 그레이스는 손님이 원하는 존 딕슨 카의 <검은 안경>을 찾는데 혈안이 되고 그녀에게 책의 위치를 알려주는 남자 손님 덕분에 무사히 책을 판매하게 된다. 매력적인 녹색 눈을 반짝이는 멋진 외모의 남자 손님의 이름은 조지 앤더슨. 서점 수습 사원 그레이스가 앞으로 어떻게 서점을 만들어 갈지 궁금하다는 말을 하며 떠난다.

폭격이 수일 내로 임박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터져 나오고 런던 시내의 아이들은 정부의 대피 조치로 시골로 이주한다. 등화관제 명령이 내려지고 도시 전체는 암흑으로 변해 버린다. 아이들이 떠난 도시. 어둠으로 가득 차버린 도시의 서점에 찾아오는 손님은 없자 서점 주인은 그레이스에게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온 도시에 공습 임박 경보음이 울려 퍼진 날 그레이스는 서점으로 달려가 등화관제용 커튼을 서점에 달면단 한 권이라도 손님에게 책을 팔기 위해 진열대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아침 11시 15분 영국 수상 처칠은 특별 담화 방송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다. 마침내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게 된 영국, 그레이스와 비브는 웨더포드 아주머니와 그의 외아들과 함께 생필품을 챙겨서 방공호로 대피한다. 방공호로 대피하는 시민들과 달리 서점 주인은 어디에도 대피하지 않은 채 책더미 속을 헤집으며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의 이동이 줄어드는 시기에 서점으로 찾아온 손님 조지 앤더슨은 그레이스에게 찾아달라며 책 목록이 적힌 종이쪽지를 건넨다. 그레이스가 종이 쪽지에 적힌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두 도시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을 찾아내는 동안 조지 앤더슨은 『오만과 편견』 책을 슬쩍 끄집어 낸다 그가 말하는 "독서란 마치 기차나 배를 타지 않고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아요. 새롭고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는 거죠.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의 관점에서 다채롭게 색칠한 것을 볼 기회가 되기도 해요. 실제로 실패를 겪지 않고 배울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책이란, 무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어떤 빈 공간이 있는 곳을 간접적인 경험으로 채워주는 곳, 서점 〈프림로즈 힐〉은 절체절명의 전쟁에 휩싸인 순간에도 문학의 힘을 믿고 마법 같은 세상, 희망으로 가득 찬 내일을 꿈꾸는 곳이 된다. 조지 앤더슨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책 『콘테크리스토 백작』을 그레이스에게 선물로 준다. 남자들은 전쟁터로 떠나고, 도시 곳곳에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불에 타오르고, 사람들은 방공호에서 라디오에 귀 기울이고 책을 읽었다. 대 공습이 점차 격렬해지며 등화관제와 공습에 시달리는 동안 그레이스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를 한데 묶어주는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공포,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버린다. 유럽을 강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바랐던 런던 시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해야 할 곳에 무차별 폭탄이 떨어지는 참혹한 시절을 겪게 된다. 몇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매일매일 방공호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사람들은 무기력한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그 연결고리는 전쟁 중에도 문을 열었던 서점이고, 책을 읽어주는 여인과 책을 찾는 독자들이었다.

 


 

이 책은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군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런던 한복판에서 폭탄을 마주한 평범한 시민들의 이야기이다. 집, 직장, 학교, 백화점, 공원 등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무지, 공포 그리고 이겨내려는 의지와 열망 등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힘을 합쳐 딛고 일어나는 인간애를 잊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 이웃들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만들어 내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만날 수 있다.

 

“독서란……”

그의 눈썹이 가운데로 몰리더니 이마에 들어갔던 힘이 다시 스르르 풀렸다.

“마치 기차나 배를 타지 않고 어디론가 가는 것 같아요. 새롭고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는 거죠. 당신이 태어나지 않은 곳에서 살아 보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의 관점에서 다채롭게 색칠한 것을 볼 기회가 되기도 해요. 실제로 실패를 겪지않고 배울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모두가, 무언가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어떤 빈 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말하는 그 무언가란 책이고 책이 권하는 모든 경험들이랍니다.”(p.102)

 


 

“네 멋진 서점은 어떻게 되고 있어?”

그레이스의 생각이 서점으로 향했다. 세련되고 깨끗한 그녀의 서점. 책이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는 곳. 책장은 폐품으로 만들어서 짝이 맞지 않지만 전쟁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그레이스는 계속 책을 읽었고 이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대공습 이후 그녀가 도움을 준 서점 주인들은 드디어 자신의 서점을 되찾았고 서점마다 감사의 표시로 ‘런던의 마지막 서점’을 위한 선반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그레이스는 ‘에번스 앤 베넷’의 하나하나가 모두 좋았다.(p.451)

 

저자 : 매들린 마틴(MADELINE MARTIN)

 

매들린 마틴은 역사 소설가이자 USA 투데이 베스트셀러인 스코틀랜드 역사 로맨스 시리즈의 작가이다. 현재 플로리다 잭슨빌에 살고 있으며 반전과 모험, 열정적인 로맨스로 가득한 작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저서로는 BORDERLAND REBELS SERIES, BORDERLAND LADIES SERIES, THE LONDON SCHOOL FOR LADIES SERIES, HIGHLAND PASSIONS SERIES, WICKED EARLS’ CLUB SERIES 등이 있다.

 

역자 : 김미선

 

중앙대학교 사학과 졸업 후 미국 마켓대학교 MARQUETTE UNIVERSITY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디즈니 알라딘 소설: 파 프롬 아그라바》,《아홉 시에 뜨는 달》,《딸에게 보내는 인문학 편지》,《바이러스 사냥꾼》,《자연 속 탐구 쏙 시리즈 세트》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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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지음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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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는 현직 의사가 쓴 인간 '죽음'에 대한 보고서이자 고발서이다. 제목처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배려 없이 죽음을 맞고 죽어가는 실태를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한 채 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죽음에 대한 사회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알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마음대로, 원하는 방법으로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은 많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의사들이나 병원 직원들마저 외면하고 있다는 꼼꼼한 폭로는 처음 이 책을 통해 접했다.

이 책은 시종 우리 사회 황폐한 죽음의 문화를 냉정하게 짚어내면서 왜 친절한 죽음이 모든 이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를 의학과 철학, 사회·역사적 근거들과 이론들을 통해 차례로 풀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잘 죽는다는 것이 잘 사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기 삶의 옷깃을 여미게 된다. 저자 박종철은 20년 넘게 수많은 사망 환자 곁을 지켜온 의사로서, 저자는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품위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의과대학, 병원, 그리고 개인이 스스로 죽음에 대한 각박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방법들을 차례로 제시하여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책에 따르면 삶은 자신의 정체성이 지켜지는 결말을 통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인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고통 없이 잘 죽을 수 있는 권리와 스스로 자기 죽음을 살아낼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삶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책은 1997년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증 환자를 의료비 부담에 시달리던 부인의 요청으로 퇴원시켰다가 부인과 의료진이 살인치사와 살인방조죄로 형사 처벌받는 사건을 다시 재조명하고 있다. 이후 병원마다 중증 환자의 퇴원을 억제하기 시작하면서 의료비 부담으로 자살하거나 가족이 환자의 연명의료장치를 제거하는 사건이 빈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4명 중 3명이 병원에서 죽는다고 한다. 병원이 명실상부 죽음의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중증 환자 대부분이 죽음의 시간을 질질 끄는 연명의료의 지옥에 갇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재앙을 겪다가 생애 동안 쓰는 의료비의 대부분을 마지막 1~2년 동안 쏟아붓다가 사망하게 된다. 죽음의 산업화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실상을 알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이제 화려한 장례식장은 있어도 임종실은 없는 병원의 불친절한 죽음의 시스템을 다시 생각할 때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우리 사회 죽음의 문화를 돌아볼 때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철저히 배제시켰던 죽음에 관한 담론을 다시 삶의 공간으로 돌려놓고 현실의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버리고 삶의 연장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사로서의 판단과 인간으로서의 죽음의 존엄성에 대한 사유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품위 있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의과대학, 병원, 그리고 개인이 스스로 죽음에 대한 각박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방법들을 차례로 제시하여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저자의 사유와 고찰, 주장이 합리적이고 설득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삶은 자신의 정체성이 지켜지는 결말을 통해 온전히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인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고통 없이 잘 죽을 수 있는 권리와 스스로 자기 죽음을 살아낼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삶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7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당신의 죽음은 실패한다」, 2장 「우리의 죽음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 3장 「우리가 은폐해 왔던 이야기」, 4장 「죽음의 문화를 위한 발걸음」, 5장 「자연스러운 죽음에 대하여」, 6장 「후회 없는 삶에 도전한다」, 7장 「나는 친절한 죽음이 좋다」로 구성돼 우리의 죽음에 대해 고찰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현상을 보고 사유하고 연구하다 보니 폭로 글이 되어버린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불친절과 무배려가 빚어낸 인간 존엄성의 훼손이 만연돼 있어 사실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폭로'가 된 것으로 이해됟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나 논리는 합리적이고 깊은 고찰이 있었기에 설득력이 크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지금도 병원에서 매일같이 환자들의 죽음을 겪고 있다. 그 경험 속에서 깨우친 것은 인간에게 늙어감과 죽음은 필연이지만, 후회 없는 삶과 평온한 죽음은 선택이자 부단한 노력과 어느 정도의 행운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의사로서의 성공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삶의 마무리를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비참한 죽음의 현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공포심으로 좋은 죽음에 대한 관심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왜 좋은 죽음이 삶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를 내 편협한 지식을 동원하여 의학과 철학, 사회·역사적 근거들과 이론들을 동원하여 인문학적으로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내려고 시도했다.

 


 

저자는 1장에서 미국 듀크대학의 학장이자 정신과 의사인 앨런 프랜시스의 말을 인용한다. "병원 사망보다 더 나쁜 죽음은 없다. 잘 죽는다는 것은 집에서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 병원은 주삿바늘이 쉴 새 없이 몸을 찌르고, 종일 시끄럽고, 밝은 불빛으로 잠들 수도 없고,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낯선 사람들 속에서 외롭게 죽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 수잔 호벤이 『잘 죽는 것: 우리의 사랑과 상실 여행』이라는 책에서 '좋은 죽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는 것'이라고 말한 내용도 인용한다. 즉 병원에서 죽기보다는 집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수잔 호벤은 '미국인의 90%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루는 사람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며 원하는 죽음의 방식에 대한 원칙을 미리 세울 것을 권유했다'고 밝힌다.

오늘날 영국,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많은 수의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이 지역마다 고루 분포해 있고, 비용도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고 있어서 호스피스에 대한 말기 환자의 접근성이 매우 높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영국은 말기 환자의 95%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가장 큰 특징은 국민 대다수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와 병원이 명실상부 죽음의 공간이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도시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우리 문화의 세계화 속에 영국 BBC 뉴스의 페르난도 두르테 기자의 〈오징어 게임〉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여성과 노인 그리고 탈북민 및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심각한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 고질적인 사회적 비리 문제에 대한 지적을 기술하고 있다. 일확천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차피 여기도 지옥, 바깥도 지옥'이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 장에서 의학적 접근뿐만 아니라 사회적 접근과 고찰, 국민 의식 등을 통틀어 접근하는 집중력 있는 '존엄한 죽음' '원하는 죽음의 방식'을 살핀다. 마지막 7장 「나는 친절한 죽음이 좋다」는 표제어가 됐다. 이 장에서 저자는 〈마지막 제안〉을 통해 다섯 가지 과제를 내놓는다.

 

첫째, 종합병원 임종실 설치 의무화

둘째, 물과 영양공급 의무 조항 삭제

셋째,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적극적 확대

넷째, 생애 말기 돌봄에 대한 대책

다섯째, 의과대학과 병원에서 죽음을 가르치자

 

저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개선을 위해 연구하고, 사회적 고찰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거쳐 내놓은 제안들이다. 저자는 이어 "의료인이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하는 죽음이 있다. 때 이른 죽음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이 그렇다. 그뿐만이 아니다. 질질 끄는 죽음과 고통스러운 죽음도 의료인으로서의 사명을 걸고 막아내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비장하게도 느껴질 정도로 강력하다. 일말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서운 것인지에 대한 비극적인 사례는 꽁꽁 감추고 있을 뿐 이미 병원마다 차고 넘친다.

 


 

한국인은 좋은 죽음을 바라면서도 대부분 그 바람과는 달리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인생을 아름답고 품위 있게 마무리하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노화, 또는 질병과 싸우면서 치료 과정 중에 사망하는 것이 오늘날의 흔한 죽음의 모습이다.(p.57)

 

우리는 후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또한 의료인들이 환자의 인간적인 죽음을 지켜주는 것으로부터 보람과 자부심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죽기 전 병원으로 옮겨져 연명의료를 받다가 중환자실에서 삶을 마감하는 자동화된 시스템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p.95)

 

저자 : 박중철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호스피스 의사. 한때 재난지역을 누비는 긴급구호 전문가를 꿈꾸며 국제보건학 석사까지 마쳤다. 그러나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장은 아프리카 오지나 재난지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병원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생명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만들어 낸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된다. 그런 고민에 대한 답을 찾고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행복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인문사회의학 박사과정을 밟는다. 중년의 나이가 되기까지 겪은 한국사회의 왜곡된 성장과 20년 의사로 살면서 겪은 왜곡된 의학적 생명관을 비판하면서 의료현장 속에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질병과 건강의 의미, 그리고 삶의 이유와 가치를 탐구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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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저벨 윌커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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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카스트』는 차별적 신분제도로 인도에서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다고 배웠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과서를 통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내려온 관습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느 국가도 이 같은 제도는 민주국가에서는 없다는 것으로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부터는 그것이 이름만 다르지 어느 국가나 남아 있는 악습이라고 책을 통해 배운 바 있다. 지금까지의 독자의 기억으로는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카스트 제도를 실시하는 없다고 알고 있었다. 독자의 기억은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적이다. 우리나라도 차별금지 내용이 헌법에 담겨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차별금지법 또는 반차별법은 대한민국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대한민국의 법률안 및 조례안으로,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일부 내용을 정하고 있으나 중앙 정부에서는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래 새로 출범하는 국회마다 계속하여 발의되고 있는 법안이다. 외국의 경우 여러가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충실히 만들어 놓거나, 포괄적인 차별문제에 대해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놓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작 법률안을 제출해도 차별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성별·연령·인종·피부색·민족·출신 지역·장애·종교 등으로 국민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내용의 이 법안은 14년째 발의와 폐기를 반복해 왔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차별로부터 자신의 존엄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혐오와 차별이 낭자한 시대,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문해야 한다. 스스로가 쉽게 혐오를 일삼는 가해자는 아니었는지, 차별임을 알고도 묵인하는 방관자는 아니었는지 말이다.

 


 

이 책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미국 언론 역사상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이저벨 윌커슨이 미국의 유구한 인종차별과 불평등의 이력을 밝힌 내용이다. 이 책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조지 플로이드 과잉 진압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1년 넘게 자리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에 이민자들이 처음 발 딛는 순간부터 미국의 불평등이 시작되었다면서, 미국의 권력 카르텔을 인도의 카스트 피라미드에 비유한다. 신성함을 무기로 억압의 역사를 만든 인도의 카스트, 유대인을 극한의 공포로 밀어 넣어 처참히 살해한 나치의 인종주의, 겉으론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계급사회 유지에 일조한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까지, 세 체제 모두 얼토당토않은 기준으로 구성원 일부를 ‘열등한 족속’으로 분류한 뒤, 소수의 이윤 독점과 권력 세습을 위해 그들에게 비인간적 행위를 일삼았다. 이 책은 노예제가 폐지된 지 250년이 된 지금에도 여전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실태를 샅샅이 파헤친 보고서로, 오프라 윈프리, 버락 오바마 등 유명 인사와 〈타임〉, 〈LA타임스〉를 비롯한 다수의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책’으로 꼽히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caste(카스트, 계급)는 '혈통, 품종, 인종(lineage, breed, race)'을 뜻하는 스페인어 casta에서 나온 말이다. 포르투칼어에서도 casta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쓰는데, 포르투칼인들이 1498년 인도에 도착하면서 인도에 이 단어가 수입되었다. 영어에서는 1613년경부터 쓰였다고 한다. 물론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이 단어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2,0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는 1947년 법적으로는 금지되긴 했지만, 인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도 사회에 여전히 강하게 살아 있다. 석가모니도 마하트마 간디도 카스트만은 건드리질 못했다. 간디는 카스트는 각기 다른 인간의 차이에 의한 자연스런 반영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책은 충격적인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제3제국 시절에 찍힌, 유명한 흑백 사진이다. 1936년 독일 함부르크의 한 조선소에서, 햇빛을 받으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근로자 100여 명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들은 총통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표시로 오른팔을 뻗어 경례를 하고 있다. 유일하게 단 한 사람만이 팔짱을 낀 채 마뜩찬은 표정으로 흘겨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트 한트메서다. 그의 행동은 조각배 하나로 대양의 파도에 맞서는 것만큼 무모한 것이었다. 권력의 카르텔에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사람은 바로 나치였다. 그들은 독일의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지배할 방법을 고안하던 중, 미국 남부의 짐 크로 법을 모범 사례로 삼았다. 히틀러는 흑인 노예로부터 백인의 혈통을 보호해야 한다는 미국 우생학자의 책을 가리켜 자신의 바이블이라 칭했다.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안을 채택하고, 순수혈통을 위한 대대적인 학살에 들어가면서도 그들은 미국의 엄정함을 따라가기엔 부족했다고 털어놓았다.

흑인의 피를 눈곱만큼도 허락하지 않는 한 방울 규칙one-drop rule은, 나치가 보기에도 너무 가혹했다는 것이다. 나치의 독일 집권에 큰 역할을 한 전략이 있다. 바로 특정 소수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판단,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판단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전략이 얼마나 유효했는지 알 수 있다. 거짓과 조작으로 특정 사람을 배제하고 구별지으면, 그를 바라보는 대중은 우월감과 거부감을 동시에 갖는다. 이는 소수를 혐오하게 부추기고, 그 차별에 가담하게 만들어 대중들의 자연스러운 차별을 가능하게 한다. 이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 여성, 성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들을 특이하거나, 불편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는다. 주먹을 쥐고 때리지는 않았어도 휘두른 팔에 다친 사람이 생겼다면, 당신은 가해자다.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건 아니지만 생각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면, 당신은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히틀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한 공립학교 논술대회에 출제된 문제이다. 16세의 한 흑인 소녀는 히틀러의 임박한 운명을 골똘히 생각하다 답을 적었고, 단 한 줄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를 검은 피부로 만들어 남은 인생을 미국에서 살게 해야 한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사는 일이 어떻기에 이토록 중벌이 되는 걸까? 검은 피부로 태어난 사람은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아프리카계 조상을 둔 미국인은, 왜 자신의 나라에서 이민자 취급을 받는가? 왜 모두가 이 미친 차별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가?

1865년 노예제는 미국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미국 사회의 밑바닥에 자리했던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아프리카인들을 통해 막대한 권력과 이윤을 얻은 백인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차별을 생산해 내는 이 시스템을 쉬이 폐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 지국장으로 활약하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저벨 윌커슨(Isabel Wilkerson)은, 미국 사회 이면에서 오랫동안 불평등을 견고하게 떠받쳐 온 이 기이한 체제를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 ‘카스트’에 비유한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표어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미국의 카스트는 대들보, 바닥 장선, 샛기둥처럼 하부구조로 작용하며 계급사회를 견고하게 떠받든다. 작가는 이 단단하고 오래된 위계질서가 8가지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자연의 법칙, 대물림, 혼인 금지, 순수혈통, 노동 계층, 우생학, 공포정치, 인간성 말살까지 카스트를 견고하게 지켜온 뼈대를 마치 엑스레이로 촬영한 듯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카스트CASTE; The Origins of Our Discontents》는 노랗고 빨갛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들을 권력과 이윤의 희생양으로, 발판으로, 성장 동력으로 삼아온 백인 우월주의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한다.

 


 

흑인 인권 신장 운동에 앞장선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인도에 방문한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는 인도인 친구의 말을 듣고 큰 충격에 휩싸인다. “여러분, 미국에서 온 불가촉천민 친구를 소개합니다.” 그 말을 곱씹으며 이내 그는 깨닫는다. 흑인은 미국에서 불가촉천민일 수밖에 없으며, 평생 카스트라는 제도에 갇혀 살게 된다는 것을.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위 계급인 불가촉천민은, 신의 뜻대로 태어나자마자 철저히 분류된 채 최하층에서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계급 간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며, 하찮고 더러운 일로 취급받는 노동을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삼아야 했다.

이는 남부의 흑인 노예들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미국에 도착한 아프리카인들은 담배밭과 목화밭을 전전하며 착취와 학대에 노출되었고, 기나긴 노예 생활로 생긴 빚을 소작농이라는 또 다른 노예로 일하며 갚아나갔다. 검은 피부를 타고난 이상 최하층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를 시도하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고문과 폭력이 가해졌다. 이처럼 미국과 인도는 특정 집단(달리트와 아프리카인)을 바닥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무력을 사용해 이탈하지 못하게 막은 뒤, 끊임없이 희생양을 양산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는 카스트가 영화가 상영 중인 어두운 극장, 손전등을 바닥에 비추며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하는 말 없는 가이드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모든 범주의 인간에게 가치를 매기는 카스트는 존엄·권리·자격을 미리 전제하며,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보란 듯이 무시한다.

 


 

1956년까지 미국의 공식적인 표어는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Out of Many, One)’였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를 포장하기 위해 오래도록 여럿을 희생시켜왔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들은 부푼 마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이민자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역량과 가치를 절하했다. 야구 역사상 가장 빠른 투수라 불리는 새첼 페이지는 부상도, 나이도, 도덕성도 아닌 그저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메이저리그에서 배제되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연임에 성공한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임기 내내 그의 출생지와 시민권을 트집 잡는 음모론자들로부터 비난받았다. 검은 피부의 현역 NBA 선수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다리가 부러졌고, 흑인 복서 잭 존슨이 백인인 제프리스 선수를 쓰러뜨리자 뉴욕에서 집단 폭동이 일어났다.

민권과 자유를 수호하는 연방제 공화국의 숨은 권력은, 이민자들의 인권 신장을 저해하는 일에는 유독 하나가 되었다. 작가는 저명한 민권운동 역사가이자 친구인 타일러 브랜치(Taylor Branch)를 만나, 미국이 마치 1950년대로 회귀한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타일러는 말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삶과 백인으로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대다수는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사실 이러한 모순으로 생기는 폐해는 최하위 카스트만 떠안는 것이 아니다. 근거 없는 백인 우월주의는 미국의 백인들을 자승자박한다. 백인의 우월성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어마어마한 무력감을 느끼고, 깊은 우울에 빠졌다가, 자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카스트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고통이었다. 다른 지역 출신의 사람이, 피부가 검은 사람이, 휠체어를 탄 사람이 모두 같은 사람임을 인지하는 사회에서는 발생하지 않았을 참사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로 포장된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의 민권법이 다른 피부색의 미국인을 보호하지 못하듯,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역시 지역감정, 수저론, 성차별, 장애 혐오로 뒤덮인 한국의 시민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K’ 이니셜을 단 채 수많은 아티스트와 콘텐츠가 해외에서 큰 활약 중이라는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와 늘 함께 들려오는 것은 그들에게 향하는 인종차별 소식이다. 이에 비스듬히 거울을 대면, 아프가니스탄 난민 학생들을 거부하는 단체들이 보이고, 장애인 이동권 시위 소식에 달린 혐오 댓글이 보이고, 성차별 논란에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보인다. 이 중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작가인 한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는 것 역시 죄악이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저지른 폭력과 무심결에 방치한 동조에 대해 성찰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만 그동안 침묵했던 차별의 상흔을 꺼내어 서로를 치료할 수 있다.

저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유구한 차별을 단칼에 해결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평범함을 방패 삼아 가해자가 되지 않기를,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방관하지 않기를, 차별과 혐오의 파도에 휘말리는 난파선이 되지 않기를. 격랑의 시대 속에서도 꿋꿋한 조각배가 되기를 바라며 『카스트』는 쓰였다. 이 책은 강력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도 사실상 카스트 체제가 400년 넘게 존속하고 있다는 주장을 대신하는 것이다. 링컨 대통령 사후 1865년 12월 노예제가 공식 폐지됐지만 카스트 체제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도 미국 사회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고발하는 책이다. 미국에 여전히 카스트 체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흑백 사이의 계층벽이 아직도 높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때맞춰 나치를 탈출했다. 아인슈타인이 떠난 다음 달 히틀러는 총리에 임명되었다. 카스트를 피해 달아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또 다른 카스트 체제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방법이 다르고 희생양이 다를 뿐, 뿌리 깊은 증오심은 그가 방금 탈출한 곳과 다를 것이 없었다. “흑인들에 대한 처우는 최악의 질병이다. 성숙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이 나라의 문제가 새삼 부당하다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미국 건국자들의 원칙이 가소로워진다. 합리적인 인간이 그런 편견에 그렇게 질기도록 집착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p.457)

 

저자 : 이저벨 윌커슨(ISABEL WILKERSON)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뉴욕 타임스〉 시카고 지국장으로 활약했다. 미국 언론 역사상 퓰리처상을 받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기도 하다. 첫 책 《다른 태양들의 온기THE WARMTH OF OTHER SUNS》는 출간 이후 2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으며 내셔널 북 어워드 논픽션, 〈타임〉 10대 논픽션, 〈뉴욕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논픽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저술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을 수여받았다. 《카스트》는 출간 즉시 57주 연속 베스트셀러 순위를 유지했으며 오바마 전 대통령이 뽑은 올해의 책,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되었다. 아마존, 〈타임〉, 〈피플〉, 〈워싱턴포스트〉, 〈퍼블리셔스 위클리〉, 〈포천〉 등 2020년에 출간된 작품 중 가장 많은 ‘올해의 책’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2021년 미국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빌린 논픽션으로 조사되었다.

 

역자 : 이경남

숭실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뉴욕 〈한국일보〉 취재부 차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비소설 분야의 다양한 양서를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규칙 없음》, 《폭격기의 달이 뜨면》, 《노 필터》,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불평등의 킬링필드》, 《언제 할 것인가》, 《공감의 시대》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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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전쟁 - 2022년 대선과 진보의 자해극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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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정치 전쟁』은 2022 대한민국 대통령선거 '결산'편이다. 독자가 결산편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전작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을 대선을 겨냥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겨냥'이란 단어도 독자의 얄팍한 정치에 관한 지식 때문인지 모르지만 저자 강준만이 여·야,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흔히 강준만 교수를 진보 정치평론가로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나 정치적 성향을 독자는 잘 모른다. 그를 만난 적도 없으니 그가 진보 성향의 인사인지 보수 성향의 인물인지 가릴 필요가 없다. 그가 쓴 책 몇 권과, 정치평론 몇 편을 읽었을 뿐이고 그의 비판적 지적이 신뢰할 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책을 읽는 정도이다. 그는 이 책에서 2022년 대선이 왜 ‘정치 전쟁’이 되었는지 비판한다.

오늘날 정치가 ‘무혈의 전쟁’이라는 것은 상식처럼 되었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벌어졌고, 가족 내에서도 벌어졌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을 포함한 진보 진영 전체가 "신앙"으로 정치를 대했고, 정치적 삶을 꾸려온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에 따라 그런 신앙으로 인해 빚어진 2022년 대선은 ‘진보의 자해극’이 누적된 결과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자행 경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정치적 신앙이 없거나 비교적 약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유권자들이 오늘의 관점에서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쪽을 벌하는 ‘응징 투표’가 한국 정치의 오랜 전통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독자가 판단할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표지에 부제로 선택할 만큼 자신 있게 주장한 내용이다.

 


 

이번 '전쟁'을 치렀던 양 진영은 ‘저들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쳐댔다. 상대편을 원수처럼 여기는 비난과 마타도어도 난무했다. 이들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오직 반대편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선거는 편 가르기에 근거한 진영 전쟁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늘 열정이 들끓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대선 이후 사회적 갈등과 분열은 더욱 극심해질 거라는 것이다. 정치를 전쟁으로 만드는 것은 승자 독식이다. 그래서 대선은 열정의 수준을 넘어 목숨을 건 전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승자 독식은 이성과 소통과 타협을 가로막는다. 그의 지적은 대선이 끝난 후 다음 정국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독자는 믿는다.

2022년 대선은 진보의 자해극이 누적된 결과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문재인 정권의 원초적 비극은 팬덤 정치에 의한 ‘편 가르기 부족 정치’에 있었다. 팬덤의, 팬덤에 의한, 팬덤을 위한 국정 운영을 하면서 두 개로 쪼개진 나라를 만들었다. 내로남불은 문재인 정권의 DNA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했다. 자신들을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무오류의 존재로 여기면서 대화와 토론을 거부하는 독선과 오만을 범했다. 무엇보다도 문재인 정권은 촛불 민심을 전유하거나 횡령했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은 실패했고, 정권 재창출도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22년 대선이 왜 ‘정치 전쟁’이 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오늘날 정치가 ‘무혈의 전쟁’이라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벌어졌고, 가족 내에서도 벌어졌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을 포함한 진보 진영 전체가 신앙으로 정치를 대했고, 정치적 삶을 꾸려온 것은 아닐까?라고 저자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이 책은 7개의 장(章)으로 이뤄졌다. 각 장마다 한 개의 이슈, 특히 대선 이후의 우리가 이해해야 할 과제들을 다루고 있다. 제1장은 윤석열의 과제다. 2022년 대선에서 승리한 윤석열은 ‘충성 경쟁’을 물리치고, ‘윤석열판 내로남불’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제2장은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상처다. 이번 대선에서도 정치를 ‘이권 투쟁’으로 만든 ‘캠프 정치’와 ‘아무 말’ 대선 공약이 난무했다. 제3장은 ‘정치 교체’는 가능한지 묻는다. 하지만 정치를 전쟁으로 만드는 ‘승자 독식’ 체제를 깨부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요원하다. 제4장은 2022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의 ‘만불독침’에 대해 비판한다. ‘팬덤의 CEO’이자 ‘SNS 대통령’인 이재명의 ‘안면몰수’ 화법은 온당한가? 그리고 이재명은 과연 ‘진짜 실용주의자’인가?를 분석한다. 제5장은 문재인 미스터리다. 한국 정치사에서 레임덕 없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된 문재인이 임기 말까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10가지 비밀을 파헤친다. 제6장은 정치는 끝없는 타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판에는 타협을 불온시하는 교조주의자가 진보 쪽에 많다. 제7장은 책임은 권력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문재인 정권은 ‘최선’을 빙자해 ‘최악’의 길을 열어젖혔다. 특히 무주택자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던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책에 따르면 흐루쇼프는 “정치인은 어느 나라에서건 똑같다. 그들은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2022년 대선에서도 거대 양당의 후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유권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드리겠다고 경쟁했다. 급기야는 ‘공약 베끼기, 물 타기, 숫자 지르기’ 등 낯 뜨거울 정도로 ‘아무 말’ 공약이 난무했다. 선거판이 도박판을 닮아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경쟁이 벌어졌다. 더구나 2020년 4?15 총선의 학습효과도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민주당이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코로나19 긴급 재난지원금 덕분이었다. 하지만 연금 개혁이나 건강보험 재정 문제와 같은 국가적 중대사에는 양당 두 후보 모두 굳게 침묵했다. 한마디로 정치는 없고 싸움만 남은 전쟁이었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번 대선 중의 특징 중의 하나로 ‘캠프 정치’를 꼽는다. 캠프정치는 정치를 ‘이권 투쟁’으로 만든다. 캠프는 공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는 조직이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면 ‘닥치고 승리’ 이외의 다른 사고 능력이 사라지거나 유예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오죽했으면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었던 김종인이 “캠프라는 곳은 이른바 폴리페서, 자리 사냥꾼, 정치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그것을 선거운동이라고 착각하는, 그리하여 정권이 바뀌면 한자리 꿰차려는 욕망에 들뜬 사람들의 임시 정류장과 같은 곳이다”라고 했겠는가? 또 2011년 6월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한 정치 개혁 관련 세미나에서 ‘캠프 민주주의 타파’를 주장하기도 했다.

캠프 정치의 핵심은 ‘세(勢)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캠프로 더 많은, 더 나은 실력이나 스토리를 가진 인사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것이 유권자들의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 시즌만 되었다 하면 ‘인재 영입 쇼’가 벌어진다. 캠프 정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첫째, 캠프 정치는 국정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둘째, 캠프 정치는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의 정치’를 불러온다. 셋째, 캠프 정치는 집권 후 논공행상에 따라 자리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전리품 정치’를 정치의 기본 모델이 되게 만든다. 특히 ‘전리품 정치’는 정치 지망생들마저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 불신과 혐오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긍정적 개념으로 대접받아야 할 ‘정치 참여’가 전리품에 눈독을 들이는 ‘이권 투쟁’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저자는 이 책에서 5개 항목의 소제목 아래 「문재인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문재인의 임기 말 높은 지지율의 비밀」, 「'내로남불'을 미화하는 '피해자 코스프레'」, 「'심기 경호'는 '정직'을 하찮게 만든다」, 「'20년 집권론'의 부메랑」, 「공수처 예찬론자들의 기이한 침묵」의 5개 항이다. 문재인의 취임 초기 지지율은 한동안 80퍼센트대 중반까지 치솟을 정도로 높았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며 지지를 보낸 국민이 80퍼센트를 넘었다. 이런 높은 지지율이 취임 100일까지 이어지자 문재인 지지자들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해’라고 외쳐댔다. 문재인의 임기 말 지지율도 수개월째 40퍼센트대로 전례 없이 높았다. 그래서 ‘문재인은 레임덕 없는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말과 함께 ‘미스터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문재인은 ‘집토끼’를 확실하게 지키는 ‘편 가르기 정치’를 했다.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사를 읽어보면 한 편의 개그 원고를 방불케 한다.

문재인은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고 했지만, 문재인이 한 일은 일관되게 분열과 갈등을 키움으로써 ‘두 개로 쪼개진 나라’를 만든 것이었다. 반면 집토끼 지지율만큼은 임기 말까지 지켜내는 업적을 이루는 데에 기여했다. 둘째, 강력한 팬덤과 노무현 학습효과다. 문재인 지지자들은 “노무현이 우파와 그 언론은 물론 ‘좌파’로부터도 협공을 당하여 실패하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인식”(성균관대학교 교수 천정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면서 문재인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수용하거나 용납하지 않았다. 또 문재인은 노무현의 원혼을 달래줄 역사적 사명을 띠고 대통령에 차출되었기에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고 말한다.

 


 

이어 셋째, 친인척 스캔들과 측근의 부패 게이트 부재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친인척 스캔들이나 측근의 부패 게이트가 없었다. 그러나 친인척 스캔들이나 측근의 부패 게이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밝혀질 수 없는 은폐 시스템이 있으며, 이는 이전 정권들에서는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넷째, 정권 비리를 은폐하는 시스템의 구축이다.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사건과 문재인 사위의 타이이스타젯 취업 의혹 사건을 비롯해 문재인과 직간접적 관련이 있는 사건들은 어떤가? 이런 사건들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대장동 사태를 비롯해 여권에 불리한 사건들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다섯째, 코로나19가 초래한 국민적 위기의식이다. 문재인 정권의 코로나 대응 정책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코로나에 대한 국민적 위기의식은 늘 문재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적 위기가 닥치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위기 프리미엄’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문재인은 ‘코로나 위기’의 최대 수혜자였다.

여섯째, 정당과 대선 후보에 대한 정서적 비교우위다. 문재인은 ‘야당 복’과 ‘여당 복’은 물론 역대급 비호감 대선 후보인 이재명과 윤석열에 대한 정서적 비교우위를 동시에 누렸다. 그러나 문재인의 레임덕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발적 레임덕’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결정을 한사코 외면하는 문재인의 ‘책임 회피’ 성향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일곱째, 욕먹을 일은 하지 않는 책임 회피다. 문재인은 “생색나는 일엔 앞장서고, 고통이 수반되는 폼 안 나는 일은 뭉개거나 다음 정부에 뗘넘긴다”.(『중앙일보』 논설실장 이정민) “검찰 개혁으로 욕먹은 사람은 추미애다. 부동산 실패는 문 대통령보다 김현미가 욕 더 먹었다.”(단국대학교 교수 서민) 문재인에게 법적 책임은 없을망정, 대통령 권력의 속성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자신으로 인해 고위 공직자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수사·재판을 받는 상황이 벌어져도 내내 침묵만 굳게 지키는 모습은 보기에 딱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 ‘증오 상업주의’와 ‘갑과 을의 나라’, 2014년에 ‘싸가지 없는 진보’, 2015년에 ‘청년 정치론’, 2016년에 ‘정치를 종교로 만든 진보주의자’와 ‘권력 중독’, 2017년에 ‘손석희 저널리즘’와 ‘약탈 정치’, 2018년에 ‘평온의 기술’과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2019년에 ‘바벨탑 공화국’과 ‘강남 좌파’, 2020년에 ‘싸가지 없는 정치’와 ‘부동산 약탈 국가’, 2021년에 ‘부족주의’ 등 대한민국의 민낯을 비판하면서 한국 사회의 이슈를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평온의 기술』, 『약탈 정치』(공저),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외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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