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예술 -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
조 리폰 지음, 김경애 옮김, 국제앰네스티 기획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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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쳐들고 몇 페이지 읽어가니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과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아마 미술을 전공하셨던 것 같다. 학교의 환경미화 작업이나 다른 반 미술시간에 가끔 시간을 내 가르쳐주시곤 했던 게 생각나서다. 그 미술 수업 때 포스터 그리기 시간이 있었다. 주제는 가장 흔한 자유였지만 대개 어린 마음에 가장 무서운 게 '불'이었던가? 상당수 많은 아이들이 '불조심' 포스터를 그렸다. 포스터를 그리기 전에 약간의 설명을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주제를 정하고 한눈에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있도록 쉽게 그려라는 이야기였다. 아마 '간결하게' 표현하란 말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 같다. 독자는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편이라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때 가스 밸브를 잊지 말고 잠글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글자 한 자 '꼭!'이란 말을 썼던 것 같다. 옆에 공중에는 화재난 집을 표현했고...

기분 좋은 기억까지 순식간에 소환해준 이 책 『저항의 예술』이 포스터가 담긴 화보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재 지구상의 가장 큰 이슈인 7개 문제를 다룬 포스터다. 1920년대 여성 참정권(이전에는 여성들이 투표권이 없었다)부터 최근 기후변화 문제까지 최근 100년 간의 포스터가 이슈별로 들어 있다. 이 책을 펼치자마자 세계적인 예술가 아니시 카푸어(Anish Kapoor)의 포스터와 「추천사」 겸 「서문」을 마주한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내용은 예술의 정의에 가깝지만 이 책에 담긴 포스터를 대변하기도 한다. “예술은 명령하지 않으며, 단지 참여를 유도하는 다리와도 같아서 관객의 경험과 감성에 의해 의미가 완성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폐쇄된 특이성이 아니라 참여로 완성되는 공동체 행위로서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의 말처럼, 예술은 “목소리를 담은 이미지”이며 고립이 아닌 연결의 행위이고, 우리에게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시대정신을 품는다. 인상적인 서문을 뒤로 하면 앞서 밝힌 주제별로 무려 140여장의 포스터가 큰 판형에 걸맞게 펼쳐진다.

 


 

이 책은 100년 전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재해오고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들을 총 7개 장으로 나뉘어 담았다. 물론 작품 설명과 시대적 배경, 공간적 배경, 지역적 배경 설명도 곁들여지지만 주제 설명이 이 포스터 감상의 주된 일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저항'이라는 이미지에 맞게 각 장이 시작할 때마다 '구호'가 하나씩 등장한다. 대개 각 챕터에 관계해 저항했던 인물들의 말이나 작품 속 주장, 세계 주요 인물의 말도 담겨 있다. 각 장의 주제를 따로 확인할 필요 없이 그냥 한 장씩 넘기며 필요한 설명을 눈으로 읽고 감상에 주력하면 된다. 익숙지 않는 독자들은 설명을 조금 더 자세하게 읽는다면 감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이 책은 ‘난민, 기후변화, 페미니즘, 인종차별, LGBTQ, 전쟁과 핵무기 반대’ 등 20세기 초반의 참정권 운동으로 시작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격변기,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각종 저항 시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정치·사회 활동의 여정이 감동적인 글과 그림으로 펼쳐진다. 책에 담긴 140여 개의 이미지들은 모두 국제앰네스티와 조 리폰 작가가 함께 선정한 것들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사진, 포스터, 구호, 현수막부터 길거리 예술가들의 벽화까지 매우 다채롭다. 다른 지역, 다른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어떻게 대신 싸워주었고, 어떻게 기꺼이 무기가 되어주었는지, 흩어진 목소리를 어떻게 상징적인 작품으로 결집시켜주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불법인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구호로 시작되는 1장은 ‘난민과 이민자, 모든 지구시민이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장이다. 1차 세계대전 때 폐허가 된 도시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미국 식량 관리국이 만든 포스터 「프랑스는 격렬한 전쟁에 휘말려 있습니다」(1917년)부터 20세기 초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피해 망명한 난민들을 위한 포스터 「우리를 살려주세요」(19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시 미국의 이민자 배척 정책을 반대하며 만들어진 국제앰네스티의 「금지 없이, 장벽 없이」(2017년) 포스터까지 한 세기 동안의 전 세계 이민, 난민, 이주노동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전쟁을 피해 4년 동안 영국에서 거주하다 귀국한 보스니아계 이슬람교도 난민이다. 그의 귀향은 환희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니라 상실을 암시하는 황량한 흑백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몇 개의 짐을 들고 홀로 서 있는 남성은 화면 밖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비에 젖은 도로 위로 남성의 그림자가 비치고 뒤로는 아직 덜 지어진 집이 한 채 보인다. ‘유럽의 성역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누가 우리 집에 살고 있나요? 집을 잃어버린 난민의 역경’이라고 쓰인 글귀가 눈에 띈다. 이 포스터는 1997년 국제앰네스티가 발표한 보고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누가 우리 집에 살고 있나요?” 집을 잃은 난민들은 왜 고향으로 안전하게 돌아가지 못하는가』와 함께 제작되었다."(p.22~23)

 


 

저항 예술에서 '여성'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은 티백과 같은 존재이다, 티백이 뜨거운 물을 얼마나 잘 견디는지 직접 넣어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라는 구호로 이어지는 2장은 ‘여성의 해방과 자유, 참여’를 위한 장이다. 영국의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에서 발표한 매우 유명하고 뜻깊은 포스터인 「나팔수 소녀」(1908년)부터 이후 30여 년에 걸쳐 미국(1913년), 독일(1914년), 러시아(1932년) 등에서 만든 여성 참정권을 위한 포스터들이 이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의 동등한 임금, 출산휴가 등 또 다른 권리들을 위한 「프랑스 노동자 연합 전국대회」(1958년) 포스터, 여성의 낙태와 피임을 위한 사진 「자녀, 내가 원한다면, 내가 원할 때」(1970년), 여성의 무보수 가사노동을 규탄하는 「평등은 가정에서 시작된다(1974년) 등은 지금 보아도 현재진행형 문제들이다. 여성 운동의 역사가 한눈에 잡힌다.

 

당시의 상투적인 농담은 다음과 같았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여성들은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들은 집에 머물러야 하며 쇼핑을 다니거나 요리와 가사 노동을 하거나 자녀를 돌본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하의 여성들은 자유롭다. 온종일 일할 수 있고 일이 끝나면 귀가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요리와 가사 노동을 하기도 하며 자녀를 돌보기도 한다.”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데이킨의 포스터 글귀는 다음과 같다. “3월 8일은 일하는 여성이 부엌의 노예직에 저항하는 날이다. 반복되는 집안일과 억압에 ‘아니요!’라고 말하라.” 포스터의 삽화는 한 여성이 솥과 냄비 등의 가재도구 더미에 깔린 다른 여성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을 보여준다.

 


 

성 소수자 권리 주장도 어느덧 6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이 책 포스터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캘리포니아 최초의 게이 정치인 하비 밀크의 구호로 시작되는 3장은 ‘성 정체성이 금지와 장벽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한 장이다. 미국의 초기 동성애자 인권단체로서 상징성을 지닌 매터친 소사이어티 뉴욕지부의 포스터 「동성애자는 다르다」(1960년)부터 ‘광부를 지지하는 동성애자 모임’이라는 다소 독특하고 특별한 작품 「광부와 성소수자」(1984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을 기념하는 사진 「나의 모국에서는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면 범죄자가 됩니다」(2018년 작)까지 60여 년에 걸친 다양성 운동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독자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문제이기도 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독자를 놀라게 했다. 책에 따르면 2015년 미국에서는 기록적인 숫자의 트랜스젠더가 살해당했으며 그중 대부분은 유색인종이었다. 같은 해 이라크와 시리아의 게이들은 극단적인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라믹 스테이트’, 즉 IS의 명령에 따라 옥상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았다. 그다음 해 미국 올랜도 주의 게이 나이트클럽에서는 49명이 총격당하고 53명이 부상을 입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앰네스티 미국지부는 이 같은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이 포스터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포맷과 디자인 덕분에 SNS에서 쉽게 공유될 수 있었고 폭넓은 대중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이 박해받고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많은 국가의 지도자나 정부 당국에도 빠르게 유포될 수 있었다.

 


 

베트남과 최근 중동,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에만 있었던 '반미' 운동의 역사도 꽤나 길다. 어쩌면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 후 최강국으로 등장하면서 세계인들의 눈에는 미국에 의한 독재라는 인식이 깊게 심어졌나 보다. 독자에게 미국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게 한 고마운 나라로만 생각해 왔는데 다른 곳에선 전쟁 등 만행을 저지렀는지 유독 반미 포스터가 많다. 우리에겐 과학자로 익숙한 아인슈타인이 무분별한 권위를 비판하면서 던진 구호로 시작하는 5장은 ‘사상과 이념이 감옥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한 장이다. 20세기 초 미국 광부들의 인권을 위한 포스터 「콜로라도는 과연 미국인가?」(1904년)부터 프랑스 68운동의 상징 같은 포스터인 「경찰은 미술 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은 거리로 내몰리다」(1968년),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구금된 이들을 위한 풍자물 「미국을 믿지 말라」(1970년), 빈곤계층과 유색인종을 더욱 가혹하게 형벌하는 미국의 형사체벌 제도를 지탄하는 「너무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2016년) 등 갖가지 사상과 이념, 지위로 차별·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붓을 든 투쟁가들의 분투가 담겨 있다.

 

"포스터는 흑백으로 황량하게 표현되면서 절망감을 더하고 단순한 선으로 그려져 좌절감을 더 구체화한다. 아키야마 카즈오가 그린 원화는 작품 속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히로시마 평화 기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어머니는 투하 지점에서 1,300미터 떨어진 텐마초에 있었는데, 폭탄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지만 바닥에 쓰러졌고 온몸에 화상을 입으면서도 두 자녀를 보호하려고 했다. 세계 보건 기구에 따르면 핵전쟁에서 의료 지원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내용도 쓰여 있다."

 


 

이 책은 예술이 어떻게 '반인류', '비인간', '비민주'에 저항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포스터이니만큼 선동적 모습과 다소 폭력적인 그림도 있지만 이를 예술적으로 소화시키는 것은 예술가들의 몫일 터, 잔인한 폭력은 포스터보다 훨씬 냉혹하게 저질러질지도 모른다. 힘 없는 다수는 소수의 정의에 연결되면 엄청난 폭발력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예술이다. 서문을 쓴 조 리폰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저자 : 조 리폰(Jo Rippon)

“예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를 도전하도록 만들며, 새롭게 연결시킨다.” 작가이자 편집자. 영국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과 크리에이티브 아트 대학을 졸업했다. 11살 때 처음으로 행동주의에 참여했으며, 우연한 기회에 황폐해진 열대 우림을 보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삼림을 마구잡이로 개간하는 대기업에 맞선 것을 시작으로 환경과 인권, 소수자 권리를 위한 활동에 오랫동안 힘써오고 있다. 예술이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이끄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역자 : 김경애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 졸업하였으며, 현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세계 문화 여행: 프랑스』,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전략적 UX 라이팅』이 있다.

 

기획 :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국제앰네스티는 국제적으로 인권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비정부 인권기구다. 인권의 침해와 정의를 연구하는 기관이다. 국제 인권 기구 분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61년 노동법 변호사인 피터 베넨슨 변호사가 설립하여 폭넓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77 년에는 고문 반대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1978년에는 국제 연합 인권 상을 받았다. 한국에는 1972년에 지부가 설립되었다.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받거나 반정부 시위로 갇히고 고문받는 등 국가 권력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세계 최대의 인권 단체다. 전 세계 160개국, 1,000만 명의 회원과 지지자들이 함께하는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이다. 존엄성을 해치는 위협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모든 인권을 누리는 세상을 위해 국적·인종·종교를 초월해 활동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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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준 PD·이민 작가의 제주도 랩소디 - 아름다움과 맛에 인문학이 더해진 PD와 화가의 제주도 콜라보
송일준 지음, 이민 그림 / 스타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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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은 제주를 잘 안다. 물론 아직 못 가본 사람도 있겠지만, TV 등 대중 매체가 제주에 주목한 것은 오래 된 일이다. 제주는 기후가 한반도 본토보다 따뜻하고 아열대 식물인 귤 등이 조선시대부터 재배되어 온 기록도 있어 천혜의 절경과 함께 관광지로서 발전돼 왔다.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엔 신혼여행지로 제주가 보통이었으니 당시에도 결혼한 사람은 대부분 제주를 갔다온 경험이 있었다고 봐야 할 정도다. 관광지로서 제주도를 재단장하는 일도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이로 인해 제주도의 가치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을 시작으로 2007년 세계자연유산 등재,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까지 UNESCO 3관왕을 달성해 더욱 커졌다. 한반도의 관광지가 세계의 관광지로 비약적 발전을 이룬 셈이다. 제주도는 동서로 약 73㎞, 남북으로 41㎞인 타원형 모양의 화산섬으로, 섬 중심부에 높이 1,950m의 한라산이 우뚝 솟아 있다.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 박물관'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화산 지형을 자랑한다. 땅 위에는 크고 작은 360여개 오름(*오름 : 소규모 화산체를 뜻하는 제주어)이 펼쳐져 있고, 땅 아래에는 160여 개의 용암동굴이 섬 전역에 흩어져 있다. 작은 섬 하나에 이렇게 많은 오름과 동굴이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런 제주에 푹 빠져 제주의 속속들이를 탐색해 널리 알리려는 사람도 많다. 이 가운데 광주MBC 사장을 퇴임한 송일준 전 MBC PD가 있다. 그는 제주를 사랑해서 제주도 사람보다 제주를 더 잘 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제주 사랑' 의 아이콘이 됐다. 그가 이번에 제주 '한 달 살기'를 했다.

 


 

이 책 『제주도 랩소디』는 저자 송일준이 제주도가 숨겨둔 억겁의 비밀과 전설, 그리고 너무도 아름다운 비경과 젊은이들이 찾는 카페와 음식점의 맛과 멋을 PD의 시선과 화가의 상상력을 더해 제주도를 온전히 그림으로도 감상하고, 글도 재미있어 술술 읽히는 여행서를 펴냈다. 화가 이민의 그림이 함께했다. 저자는 얼마 전 광주MBC 사장을 퇴임하고 며칠 뒤 전격적으로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단행했다. 수시로 제주를 '제집 드나드는' 것처럼 했지만 마음 먹고 한 달을 여행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다녔던 곳은 물론, 일정상 미뤘던 곳까지 구석구석을 탐방하하기 위해 꽤 시간을 들여 스케줄도 짰다.

아무리 제집 드나들 듯했지만 그래도 구석구석의 전설이나 잘 알려진 비경은 남아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 제주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전설들을 다 알 수는 없을 거란 상식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게다가 새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많은 새로운 문화나 시설물들이 들어서고 발전했을 테니 변화한 것도 많을 것이다. 변화한 풍경에서 오는 느낌도 다를 것이다. 저자는 매일 매일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해 글로 옮겼고, 흔한 사진보다는 감성이나 느낌이 더 반영되는 화가의 그림으로 대체했다. 그림은 이민 화가가 맡았다. 이민 화가는 매일 매일 쓴 글에 나오는 장소의 핵심을 담아 스케치를 포함해 103편의 작품을 내놓았다. 37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마음 편히 쉬거나 놀아본 적이 없었던 방송 PD가 일에서 해방되어 처음으로 갖게 된 여유와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념의 의미도 담았으니 제주 여행을 대신하기에는 이 책처럼 마땅한 책은 찾기 힘들 터다.

 


 

저자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좀 더 알차게 탐방을 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자료도 찾고 만나는 사람에게 이야기도 듣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글은 송일준 PD가 오랜 방송생활에서 익힌 습관대로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써서 이해하기도 쉽고 술술 읽힌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또 남다른 애정과 열정으로 내용도 알차고 여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깨알 정보'도 가득 들어있다. 제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읽고 나면 배우는 내용도 쏠쏠하고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화면에 비치는 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저자의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 글과 함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 이민 화가 역시 제주 사랑엔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판화와 서양화를 접목시킨 판타블로(PAN TABLEAU)라는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화가로 제주도의 매력에 빠져 2년째 제주도에 살면서 작품 활동 중이다.

일본 도쿄 다마미술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1995~2001년까지 도쿄의 이우환 작가 전속화랑인 시로타 화랑의 전속작가로도 활동한 작가는, 1984년 삼성문화재단 작품소장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영국 대영제국 박물관. 광주시립미술관, 일본 동경 오페라시티. 일본요코하마 미술관, 미국포트랜드미술관. 각국 대사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전국무등미술대전 판화부분대상, 한국판화가 협회 공모전 우수상을 수상한 화가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등에서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올 4월 화가로는 유일하게 1억을 기부하고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한 화가이기도 하다. 이 책 제목에 들어 있는 랩소디란 형식·내용·작법이 비교적 자유로운 단악장의 악곡을 말한다. 열정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성악곡과 기악곡에서 발견되지만, 피아노곡과 관현악곡이 많다. 우리말로 ‘광시곡(狂詩曲)’이라 한다. 여행, 그것도 제주 여행에 알맞은 제목의 음악 용어가 제주 바다를 쳐다보는 눈에 부드럽게 잡히는 듯하다.

 


 

이 책은 김정희 유배지를 방문한다든가, 나주에서 건너온 뱀이 제주도의 신이 된 이야기라든가, 4.3 평화기념관 방문기라든가,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의 사연이라든가 하는 내용을 담아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여행 에세이나 잡지, 관광책자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픈 역사의 현장도 찾고 관련 사건에 대한 기록도 찾아 글에 담았다. 그냥 보는 관광보다 알고 탐구하는 여행지는 달라도 한참 다른 느낌의 여행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필요한 독자에게는 인문학적 지식도 함께 제공된다. 제주는 비경만큼 역사적 비극을 안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웠던 비극적 사건의 현장의 모습도 글로 담기도 했다. 4.3 제주항쟁의 현장, 더 멀리는 고려 원나라(몽골제국) 때 침략에 대항한 삼별초의 흔적, 조선시대 유배지 중 가장 멀고 험한 유배지가 제주였으니 그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눈물과 한이 맺혀 있을 법한 제주지만 오늘도 천하 비경의 제주 바다와 한라산은 말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독자도 이 글을 읽기 전에는 '제주 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부끄러움만 잔뜩 안고 고개를 숙였다. 저자는 기대가 컸던 ‘본태박물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쿠사마야요이는 젊었을 때 호박에 꽂혀 평생 호박을 테마로 작품 활동을 해왔고 호박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3전시관은 호박 한 점과 ‘무한거울의 방-영혼의 광채’가 전부였다. 야요이의 호박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커졌는데, 호박 위에 찍은 무수한 검은 점들은 반복과 집적이라는 쿠사마야요이 특유의 표현방식이고, 그녀가 끊임없이 고민해온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고 설명문에 쓰여 있었다. 음. 썩 와 닿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환각증세를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시작했다는 쿠사마야요이. 머릿속 환상을 밖으로 쏟아내는 작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작품이 좀 더 많았더라면 이해도가 높아졌을 텐데, 아쉽다."

 


 

또한 또 다른 재미, 제주도 지질 탐방에서는 이렇게 썼다. "젊은 연인 한 쌍이 출입금지선 앞에서 용머리해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야, 도대체 언제 와야 볼 수 있는 거야. 우리 벌써 네 번째 허탕이다 그치.” 뭍에서 여행을 그렇게 많이 오진 않았을 테고, 아마 제주도에 사는 청춘들일 것이다.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남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발길을 돌린다. 하멜기념비와 산방연대는 올레길 10코스가 지난다. 오르막 경사 길을 걸어야 한다. 길가에 올레길 표지판과 리본이 보인다. 하멜의 표착 스토리, 하멜기념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마치 옆 사람에게 조근조근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듯하다. 그의 글솜씨도 남다르다. 읽다가 조금은 갸웃거리게 하는 제목도 있다.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고」. 이건 무슨 뜻인가. 쉴 새 없이 읽어나간다.

"잔디 깔린 마당에 놓인 나무 테이블과 의자. 두 여자가 앉아 돌담 너머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멍 때리기 좋은 곳이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이 환장할 봄날이다. 카페 안. 낮은 천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구불구불 대충 다듬은 나무 기둥, 서까래, 하얗게 회칠한 천장. 간소, 질박, 자연… 옛집을 고친 카페들이 흔히 그렇듯 가파리212도 그런 곳이다. 주방에서 두 여자가 바쁘다. 키가 큰 한 여성은 머리를 짧게 잘랐다. 스포츠 스타일. “남자인 줄 알았네.” 목소리를 듣더니 일행 중 한 명이 말한다. “들리겠네. 목소리 낮추시오.” 남들은 미숫가루를 시키는데 나는 카페라떼를 시켰다. 바로 후회했다."

이렇게 저자의 글은 우선 재밌고 읽기도 편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구어체로 쓴 것이 방송 PD로 익힌 습관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내용이 부실하고 정보가 빈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잘 읽혀 순식간에 읽는다는 뜻으로 독자가 한 말이니 저자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읽고 나면 너무 쉽게 읽어서 머리에 남는 게 없으면 어떡하지 할 정도로 쉽게 읽힌다는 의미이다.

 


 

미술관 아래 쪽에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집이 있고 일대는 ‘이중섭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작은 초가 한 칸. 정방동 주민이 이중섭 일가를 위해 내준 집이다. 생각보다 작다. 열려 있는 방 안. 무척 좁다. 화가의 사진과 ‘소의 말’이라는 글이 정면과 측면 벽에 걸려 있다. 창남 현수언이라는 분이 이중섭의 글을 붓으로 쓴 것이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소의 말이지만 이중섭 자신의 말이다. ‘소가 이중섭이고, 가족이고, 우리 민족이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가 아래 쪽은 밭과 공원이다. 벤치에 앉아 있는 이중섭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병과 가난으로 마흔 살에 삶을 마감해야 했던 천재 화가. 매주 주말 오후 1시. 해설사와 함께 하는 작가의 산책길 탐방이 이중섭공원에서 진행된다. 이중섭거리에서 다양한 가게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p.71~73)

「또 다른 재미, 제주도 지질 탐방」 중에서

 

엉또폭포 근처에 ‘무인카페’라 쓰인 건물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뜨거운 물이 나오는 물통, 인스턴트 커피, 과자류, 유자차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마시거나 먹고 싶은 사람은 돈통에 1,000원을 넣고 직접 만들어 먹으면 된다. 집 뒤에는 멀리 마라도까지 볼 수 있다는 전망대가 있다. 무인카페 안 사방 벽에 잔뜩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다녀간 사람들이 적어서 붙여놓은 글들이다. 무인카페 주인한테 감사하다는 글, 연인들의 사랑 고백, 가족들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글 등등. 무인카페가 있는 집 이름은 ‘엉또산장’ 또는 ‘석가려(夕佳廬)’라고 한단다. ‘해질 녘 더 아름다운 오두막’이라고 매직으로 크게 써놨다. 려(廬)는 농막집이다. 그러고 보니 폭포에 더 가까운 쪽에 있는 작은 정자 이름이 비슷하다. 석가정(夕佳亭). ‘해질 녘이 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겠다. 석가(夕佳)라는 말은 원래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나오는 말이란다.(p.156)

「석부작, 엉뚱한 폭포 그리고 제주도에 정착한 부부」 중에서

 


 

저자 : 송일준

1957년 영암에서 태어나 나주로 이사했다. 나주초등학교에 입학해 나주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주중학교로 진학했다. 나주중학교 1학년 때 상경, 덕수중학교(야간부), 양정고등학교, 고려대학교(사회학과), 한국외대 통역대학원(한영과)을 졸업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 능통하다.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신문방송학과)에서 언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일본의 테레비』, 역서로 『거대 NHK 붕괴』 『미디어리터러시 접근법』 등이 있다. 1984년 MBC에 입사, 3년 간의 AD생활을 거쳐 PD로 승격했다. 〈출발 새 아침〉 〈취미여행〉 〈인간시대〉 〈PD수첩〉,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국제협력팀장, 도쿄PD특파원, 외주제작센터장을 맡아 떠나 있기도 했지만, 〈PD수첩〉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위험 미국쇠고기수입 무제한 허용 방침을 비판한 방송 후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보수정권 내내 제작현업에서 쫓겨나 사내 유배생활을 했고, MBC PD협회장, 한국PD연합회장이 되어 언론자유 회복 투쟁의 일선에서 싸웠다. 2018년 1월 광주MBC사장으로 부임하여 지역성과 보편성을 겸비한 글로벌 수준의 프로그램 제작, 지자체와 협력하여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문화사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홍어를 180도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본 11부작 다큐멘터리 〈핑크피쉬〉(연출 백재훈 최선영)로 많은 상을 받았다. 나주정미소를 리모델링한 공연장 ‘난장곡간’, 광주 양림동 펭귄골목 입구의 라디오 오픈스튜디오, 담양에 추진 중인 LP뮤지엄 등으로 지역의 쇠락한 원도심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방송에 PD저널리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PD수첩〉의 대표적 얼굴 중 한 명으로 〈PD수첩〉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림 : 이민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일본 동경 다마미술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뒤 1995~2001년 일본 동경의 이우환 작가 전속화랑인 시로타 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했다. 1984년 삼성문화재단 작품소장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마찌다판화박물관, 영국 대영제국박물관, 광주시립미술관, 일본 동경 오페라시티, 일본 요코하마미술관, 미국 포틀랜드미술관,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 주호주 한국대사관,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전국무등미술대전 판화부문 대상, 한국판화가협회 공모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미술대전, 무등미술대전, 구상전 등에서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또한 초대개인전을 85회 하였으며, 인문학 강의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판화와 서양화를 접목시킨 판타블로(PAN TABLEAU)라는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 호평을 받고 있으며 지금은 제주도에서 작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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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클래식 - 천재 음악가들의 아주 사적인 음악 세계
오수현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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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어렸을 때 음악 시간에 배운 클래식(기본적이고 성악곡 몇 곡 정도)으로 클래식을 배웠다고도, 안다고도 말할 정도는 안 된다. 그 당시에는 클래식은 일반 대중들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류사회(이 말도 당시에는 없었고, 사회 고위층 모임 정도)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때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일주일에 한 시간 유지되던 음악시간도 2학년 때부터는 대학 입시 체제로 교과 과정이 짜여져 그마저도 사라졌다. 독자 개인으로서는 고 1 때의 음악 시간이 '마지막 수업' 이 된 셈이다. 그래도 당시 음악 선생님은 요즘 말로 일류대인 서울대 음대 출신이어서 성악으로 자주 불리는 '오 솔레 미오' '라 스파뇨라' 등 대여섯 곡을 수업 시작 전에 부르고 본격 수업에 들어갔다.

클래식과는 거리가 먼 음악(당시엔 포크송과 팝송)과, 악기라고 해봐야 기타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클래식을 대여섯 곡씩 부르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도 그때 불렀던 당시 클래식 노래 몇 곡은 눈 감고도 부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클래식 관람료는 일반 서민들이 부담하기에는 엄청나게 비쌌다.(물가 환산을 해 따지면 지금보다 너댓 배는 되는 것 같다. 또 음악대학에서 클래식을 공부하는 데에도 돈이 많은 집안의 자녀가 아니면 꿈꾸기 어려울 정도의 학비가 든다고 들었다. 물론 대학의 학비가 비싸다기보다는 학교에서의 공부 이외의 이른바 '교습비'가 엄청나다고 했다. 기악하는 사람들의 악기 또한 상상을 초월했으니 부잣집 자녀가 아니고서는 꿈꾸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만의 교육으로는 흔히 말하는 '무대'에 서기도 어려워 당연히 해외 유학비까지 있어야 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력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서양처럼 예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서양도 그랬다고 한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부자들이 예술가들의 그림을 주문해서 생산하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후원을 받기를 희망했다는 것. 생계 걱정 없이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도 '메세나'라고 해서 기업들의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도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당시 예술 지원 가풍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메디치가(Medici family)는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지배했던 가문으로 15~17세기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고 한다. 이 집안은 4명의 교황을 배출했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후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메디치라는 이름은 1230년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메디치(Medici)'는 이탈리아어에서 '의사'를 뜻하는 '메디코(medico)'의 복수형이므로, 이들의 조상이 의사나 약제사, 염료 상인 등의 직업을 가졌던 데에서 그러한 가문의 명칭이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 시대에는 직물을 염색하는 데 쓰이는 염료가 약재와 함께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메디치 가문에서는 '코시모(Cosimo)'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의사와 약제사의 수호성인인 '성 코스마스(Saints Cosmas)'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지난 여름, 우리 신문·방송은 이른바 ' K-클래식' 열풍으로 뜨거웠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부터 첼리스트 최하영,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등. 특히 임윤찬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어마무시한 곡이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그는 외국 유학 경험이 없는 국내에서만 음악을 배워 최고의 성공을 거둔 K-클래식 '천재 피아니스트'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이 책 『스토리 클래식』의 저자 오수현은 ‘과연 우리는 세계가 극찬한 임윤찬의 연주가 주는 감동을 200% 느꼈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한다. 임윤찬의 기교가 뭔가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일반인 중에는 대체 이 곡의 어느 지점에서 감동의 눈물이 나와야 하는 건지, 이 곡이 얼마나 어렵고 특별한 곡인지는 체감이 어렵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사실 클래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음악시간이 생각나서 우연히 들은 클래식 전문 방송을 듣다가 아는 노래가 나와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지금은 클래식 애호가(이렇게 칭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성공적 연주를 직접 들어보지도 못했고 아직 그 음반(시판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도 구매하지 못했지만 독자는 여전히 가벼운 일처리를 할 때는 여전히 클래식 방송이나 클래식 CD를 틀어놓고 듣는다. 저자의 지적대로 임윤찬의 피아노에 감동한 게 아니라 당시에 친 라흐마니노프도 잘 모르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는 처음 듣는다. 이 책 『스토리 클래식』은 클래식 애호가로서 깊이 있는 지식의 탐구를 채우고 싶은, 반대로 클래식을 알고 싶지만 도무지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클래식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집필했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술술 풀어가는 이 책의 스토리텔링은 이제껏 없던 클래식의 몰입을 선사한다.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해 가장 사랑받는 천재 음악가 16인의 중요한 생의 순간들을 포착,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삶의 이야기로 클래식의 이해를 돕는다. 위대한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이 그때 그 시절엔 하인이었다는 사실, 일평생 60번 넘게 이사 다녀야 했던 베토벤의 사연, 지휘하다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올 정도였던 워커홀릭 말러, 악마의 피아노 연주라는 별명을 가진 리스트의 사교계를 뒤흔든 연애 스캔들 등. 그동안 클래식 음악이 주는 왠지 모를 근엄함에 가려져 있던, 이들의 어딘가 이상하고 요상한 파란만장 삶의 현장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서 피어난 명곡의 탄생 과정과 함께 300년 가까이 이어온 그들 작품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거장들의 혹독하면서도, 현재의 우리와 별다른 것 없는 희로애락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리는 클래식 이야기는 그간 높게만 느껴지던 클래식의 장벽을 확 낮춰준다. 또 각 음악가들의 출생 순서에 맞춘 구성을 통해 자연스레 세계사의 흐름을 익히며, 동시대를 살았던 음악가들의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독자처럼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애호가'를 위한 적절한 책이다. 독자는 그동안 클래식을 좋아하는 과정에서 입문서, 음악감상법이 적힌 책, 서양음악사 책, 기악이나 관현악 이론서 등 꽤 많은 책들을 읽었다. 클래식 음악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러나 이론서나 음악사 책은 딱딱하고 지루했다. 음악 감상 해설서는 너무 뻔한 이야기의 중복이다. 한 번쯤 들어봤던 유명한 그 곡을 쓴 음악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클래식 감상에도 클래식 지식 보완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자 오수현은 어떤 마음으로 곡을 만들었는지 해당 음악가의 삶을 중심으로 써 내려가기에 누구나 쉽게 내용에 빠져들고,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 세계관과 곡 감상하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본문 속 작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지점마다 QR코드를 넣어 명곡의 감동을 책 끝까지 이어주고, 역사적 사료를 더해 내용의 손쉬운 이해를 돕는 것은 실체 그 자리에서 바로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 클래식 용어를 쉽게 풀이한 ‘클래식 Q&A’와 함께 각 음악가의 특징과 함께 엄선한 주요 작품, 감상 팁을 정리한 ‘클래식 노트’를 담아 누구나 쉽게 클래식의 기초 지식을 정비하고 습득할 수 있게 썼다. 삶의 치열한 번민 속에서도 주옥같은 명곡을 만들어낸 천재들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 위대하지만 조금은 요상한 그들의 음악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제껏 아무리 해도 들리지 않던 클래식이 절로 들리게 될 것이란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젠 가을이다. 가을이면 누구나 감상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가끔 느낀다. 그 요인이 음악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은 다른 무엇보다 가을과 잘 어울리는 예술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특히 가을은 색으로도, 언어로도 미처 표현하지 못한 소리로 표현하는 클래식에 한 번 빠져들기 좋은 계절이다. 『스토리 클래식』이 그 길을 안내해 주리라 독자는 믿는다.

 

쇼팽은 옆에 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여자는 정말 질색이야. 진짜 여자이긴 한 걸까!” 예술사에 길이 남은 커플인 쇼팽과 상드의 첫 만남은 이렇게 비호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19세기 유럽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세기의 커플이 될 수 있었을까요.(p.115) - 「프레데리크 쇼팽, 사랑을 갈구했지만 허약하고 불완전했던 남자」 중에서

 


 

독자는 책은 조금 읽었지만 클래식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못했고, 공부하지도 않았다. 클래식을 조금 들었다고 클래식 전문가가 쓴 책을 칭찬하기에도 버겁고, 비평을 할 지식도 못 갖추고 있다. 독자 같은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잘 알지 못한 독자들에게 가장 멋진 추천평을 해준 분의 말을 여기에 대신 싣는다.

"열네 살, 가족을 떠나 낯선 땅 오스트리아 빈에서 맞은 첫 겨울은 무척 어둡고 추웠습니다. 어느 날 동네를 터벅터벅 걷다가 발견한 슈베르트의 생가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저에게 반가운 친구의 집처럼 따뜻한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때 받은 위로 때문인지 지금도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하면 제 안에선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샘솟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작곡가와 정서적으로 연결된다는 건 연주자에게 정말 특별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작품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니까요. 제가 어린 시절 슈베르트와 친구가 된 것처럼, 여러분도 『스토리 클래식』을 통해 위대한 음악의 거장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이든, 베토벤, 브람스… 이들과 친구가 된다면 어렵게만 느껴졌던 클래식 음악이 친근하고, 따뜻하게 들릴 겁니다."

- 김정원 (피아니스트, CBS 음악FM 〈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진행자)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일 중독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지휘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 10개의 교향곡을 비롯한 후기 낭만주의의 이정표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오페라단 소속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연주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진되는 직책입니다. 말러에겐 오페라 시즌 후 여름휴가를 알프스에서 보내면서 교향곡 작곡에 매진하는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엄격했고, 가혹하리만큼 자신을 몰아세웠습니다. 말러의 일 중독 성향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는 연습 때 단 1분도 지휘대를 비우는 법이 없는 엄격한 지휘자였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런 말러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죠. 그러던 어느 날 말러가 연습 도중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 1시간만 자리를 비우겠네.” 말러는 1시간 뒤 정확히 자리로 돌아왔죠. 연습이 끝난 뒤 한 단원이 어딜 다녀왔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왔다네.”(p.259) - 「구스타프 말러, 지휘하다가 결혼식 올리고 돌아온 워커홀릭」 중에서

 

저자 : 오수현

 

어릴 적 집에는 클래식 음반이 꽤 많았다. 돌아보면 부모님께선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셨던 것 같은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밴 클라이번 같은 전설적인 연주자들의 명반이 많았다. 부모님 모두 맞벌이를 하셔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마침 집에는 큰 전축이 있었던 터라 ‘이게 뭘까’ 하는 심정으로 음반들을 한 개씩 꺼내 듣다가 또래보다 음악에 일찍 귀가 트였고, 전공까지 하게 됐다.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매일경제>에서 기자로 생활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땐 위대한 작곡가는 아니어도 밥은 음악으로 벌어먹고 살 줄 알았는데, 졸업 후 십수 년째 기자로 살고 있다. ‘음대 나온 신문 기자’라는 독특한 이력을 십분 살려 정치 기사처럼 쉽게 읽히고, 경제 기사처럼 중요한 정보만 추려낸 클래식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쓰게 됐다. 전문 연주자, 음대 교수님들보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어떤 지점에서 클래식 음악을 어려워하고 어떤 의문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보다 딱 반 발짝만 앞서서 클래식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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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되더라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
김완석 지음 / 라곰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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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감정 상태를 말과 태도로 확실하게 표출한다. 가끔은 지나치게 솔직해서 버거울 때도 있다. 감정의 주인은 분명 나 자신인데 내가 주인공이 아닐 때가 많다. 이럴 때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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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되더라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
김완석 지음 / 라곰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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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 『위로가 되더라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의 저자는 현직 아파트 경비원이다. 아파트 경비원이란 직업은 저자가 표현한 대로 '슈퍼 을'의 입장에서 일을 하는 직업이다. 아파트의 경비 일을 하며 월급을 주민들이 주는 구조로 돼 있는 직업이다. 대개 경비원 1인당 100~200가구를 담당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식 직원도 아니다. 용역 회사를 통한 파견 근로자 형식이어서 소속감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주민들이 가구당 3명씩만 있다고 가정해도 대략 500명 가까운 셈이다. 많은 주민들이 있다보니 요구사항도 다양하다고 한다.

그러나 들어줄 수 있는 요구나 가능한 요구를 하는 경우는 해야 하겠지만 부당한 요구이거나 '갑질'의 행패까지는 받아주기 어려울 것이다. 경비원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주민 폭행으로 피해 경비원이 '극한 선택'을 한 일이 사회 문제로 부각된 적도 있다. 부당한 요구를 하고 들어주지 않자 폭행을 하는 바람에 결국 피해 경비원이 극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소 처우가 나아졌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태라고 독자는 들은 바 있다. 이런 어려운 일자리를 생계 때문에 떨치고 나올 수 없는 이유가 경비원들의 나이가 적지 않은 곳이 많아 다른 대체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당한 처우라도 생계를 위해선 놓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일하는 셈이다.

 


 

여느 아파트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젊은' 경비원을 독자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그곳이 생계 유지의 일자리다. 다른 경비원처럼 쉽게 일자리를 놓칠 수 없는 이유가 나이가 아닌 자신의 건강 때문이라고 한다. 희귀병이라니 치료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르긴 해도 치료비도 만만찮을 테니 자신의 입장에서 생계 유지보다 앞선 '생명 유지' 차원의 일자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대단한 것이 삶에 대한 의지를 결코 꺾지 않고 치열한 투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글을 읽기 전에 그의 삶의 의지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박수부터 보내고 싶다. 그는 아마 건강을 고려해 다른 취미를 쉽게 가지지 못하고 '글스타그램'을 운영하는 취미가 유일한 낙인 것 같다.

이 책도 30만 글스타그램이 추천했다고 하니 글솜씨도 상당하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어쩌면 글솜씨보다 '진정성'이 더 중요하겠지만. 매 글마다 수십 개의 공감 댓글이 달리는 것이 진정성 때문이리라. 희귀성 난치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삶의 의지와 열정으로 경비 일을 하며 따뜻함을 잃지 않는 작가로 거듭난 셈이다. 책의 제목부터 현장에서의 삶의 체취가 물씬 풍기고 그가 쓴 글이 위로의 글이었다는 글의 정체성도 말해주는 것 같아 감탄스럽다.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의 희귀성 난치병 환자의 힘듦을 이겨내며 글로 남을 위로하는 데까지 이르다니, 대단한 노력과 열정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저자 김완석은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경비원이 됐다고 밝힌다. 저자는 다른 경비워들처럼 소란스러운 일을 자주 겪는다. 아파트 경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감정 표현은 과격하기 하기 때문이다. 많지는 않겠지만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거나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부분 담담하게 받아내지만 가끔은 버거울 때도 있다. 감정의 주인은 분명 나 자신인데 내가 주인공이 아닐 때가 많다고 말한 데서 참기 힘든 모욕적인 언행도 겪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이 책은 저자가 지난 몇 년간 경비원으로 일하며 쓴 글을 모은 것이다. SNS에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써온 저자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기분에 맞춰 살아야만 하는 이들의 격한 공감을 받으며 단 며칠 만에 5,000여 명의 팔로워를 늘리는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은 척하며 살아왔던 지난날들, 이제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아닌 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다짐이 담긴 이 책은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경험과 사색, 그리고 글을 쓰면서 승화시킨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데 충분할 정도로 농익은 감정 순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울면서 출근해야 했고, 부당해도 삼켜야 했으며, 허겁지겁 달리다 수차례 넘어져야 했던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글에서 문득 '의인'의 향기도 난다.

 


 

책을 읽다 보니 분노가 치밀 때도 있고, 감사하게 생각될 일도 있고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들이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자 자신은 이 일을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 부끄럽게 여긴다면 이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을 터다. 나이가 아직 젊은데 찾아보면 일자리 없을까 하는 생각이 독자에게도 있다. 다른 경비원들과 마찬가지로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것이 일상이고 가끔은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는 말엔 연민의 정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어린 학생의 손편지에 감동하고 남몰래 요구르트를 챙겨주는 할머니에게 감사함을 느낀다니 조그만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아주 선량한 사람이란 느낌이다.

이 일은 저자에겐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만나며 더 단단해지고, 수많은 감정들을 마주하며 더 깊어지도록 자신을 단련시킨다. 이것이 자신의 일을 조금이라더 더 열심히 더 잘해낼 수 있는 이유이다. 독자도 아파트에 산다. 여러 명의 경비원과 얼굴을 마주하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물론 친구처럼 다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속 깊은 얘기를 들을 때는 오히려 독자가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더욱이 저자는 한참 나이 스물아홉 살이라니, 그 나이에 일반 청년들은 참기 어려운 일이 많을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욕설, 술주정, 심지어 폭행도 경우에 따라서는 참고 넘어가는 일도 있을 것이다. 경비원이 겪는 세상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은 얼마 전 주민 폭행 사건 때 많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어느 아파트나 그런 사람이 꼭 있나보다. 새벽에 만취한 입주민의 술주정을 받기도 하고, 층간 소음 민원을 해결하려다 욕세례를 받기도 한다는 저자가 경비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굳이 그의 입을 빌리지 않아도 이제는 다 아는 사실이 되었을 정도로 일반화된 '갑질'들이다. 저자는 쉬는 시간 경비실에 들이닥쳐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는 경비실장의 잔소리는 덤이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경비원으로 일하는 그에게 “왜 실패하셨어요?”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실패자'가 되기도 한다.

사실 '나의 호의가 누군가의 권리가 되어 돌아올 때, 나의 최선이 누군가에게 실패로 비쳐질 때' 우리는 좌절한다. 좌절감에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넘길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남에게 건넸던 위로의 말들을 자신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했음을, 충분히 잘 살았음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는 것. 대단한 삶의 내공이다. 힘든 경험은 더 나은 삶의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스물아홉 나이에 겪지 않을 일들을 미리 겪어서 일찍 내공이 쌓인 것일까? 저자가 매일매일 써내려간 글들이 책이 된 이 내용들을 곱씹다 보면 독자도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나도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며, 꽤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득 이 책을 읽은 이유가 이런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인가? 하는 기분 좋은 느낌. 이 책은 그런 깨달음을 통해 지금까지 독자를 갉아먹었던 불필요한 감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시간을 갖도록 힘과 의지를 갖도록 메시지를 준다. 이것이 저자의 진정성에서 비롯됨을 독자는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지친 하루 끝에 “고생했어”라는 말 한마디를 들었을 때 마음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린 대개 사소한 것들로 위로받는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때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pp.38-39)

 

어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도 참아야 했고, 힘든 감정도 숨겨야 했다. 참고 또 참다 보니 어느새 행복까지 참게 되었다.(pp.50-51)

 

저자 : 김완석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희귀성 난치병도 앓고 있다.

인스타 @kimwanseok33

카카오스토리 wanseok3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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