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죽이거나 - 나의 세렝게티
허철웅 지음 / 가디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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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평원의 법칙은 간단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이 역설이야말로 이 평원의 모든 존재가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남들이 먹다 버린 뼛조각 하나도 챙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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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죽이거나 - 나의 세렝게티
허철웅 지음 / 가디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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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은 탄자니아 세렝게티평원에 있는 국립공원을 이르는 말이다. 면적은 1만 4763㎢이며, 킬리만자로산(5895m) 서쪽, 사바나지대의 중심에 있는 탄자니아 최대의 국립공원이다. 세계 최대의 평원 수렵지역을 중심으로 사자·코끼리·들소·사바나얼룩말·검은꼬리누 등 약 300만 마리의 대형 포유류가 살고 있다. 강가의 숲에는 영장류의 하나인 동부흑백콜로버스가 살고 바나기 구릉지대에는 희귀종인 로운앤틸로프가 서식한다. 우기가 끝난 6월 초가 되면 150만 마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검은꼬리누 무리가 공원의 남동부에서 북서부로 이동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우기가 지나면 황새·매·큰물떼새 등의 조류도 모여드는데, 현재까지 조사된 종의 수가 350여 종에 이른다. 사자는 2,000여 마리가 살고 있는데, 주로 화강암으로 된 울퉁불퉁한 바위언덕인 카피에서 머문다. 코끼리는 약 2,700마리, 사바나얼룩말은 약 6만 마리, 톰슨가젤 약 15만 마리, 마사이기린 약 8,000마리 등과 함께 6종류에 이르는 대머리독수리, 흰허리독수리 등이 서식한다. 1년 내내 개방되어 있으며 가장 좋은 관광철은 선선한 6∼12월, 또는 기온은 높지만 건조한 12∼3월 중순이다. 해발고도 1525m의 세로네라에는 수렵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 있다. 1981년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두산백과)

이 책 『죽거나 죽이거나』는 세렝게티에서 펼쳐지는 포식자와 먹이동물의 이야기다. 먹고 먹히는 숨가쁜 생존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유일한 목적이 된 야생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저자 허철웅은 이들 동물들을 의인화해 그들의 시선과 그들의 인식으로, 생존을 이어가는 모습을 유기적 구성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 화자는 먹이동물인 누와 포식자인 사자가 벌갈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 책은 배경지가 세렝게티라는 생존 경쟁자들이 살아가는 그들만의 세상이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때뿐이지, 그들의 시선으로 따라가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이로써 이 소설은 단순히 동물의 세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천적 관계인 사자와 누를 의인화함으로써 그들에게 닥친 운명과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존재 방식을 아프리카의 세렝게티를 소설 공간으로 설정하여 이국적인 배경과 함께 독자의 상상력이 최대한 확장되도록 구성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천적 관계에 속한 각 주인공의 영웅적 서사가 큰 뼈대이지만 여기에 자연과 운명, 삶과 죽음, 존재의 문제 등 무거운 주제가 세렝게티의 장대한 풍광 묘사와 잘 어우러져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각 장마다 사자와 누의 서사를 교차하고, 두 주인공이 조우하는 접점을 만들어서 극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치밀한 구성력에서는 저자의 문학적 내공에 감탄하게 된다. 무한의 생존투쟁 현장이 치밀하고 팽팽하게 묘사된 문장력은 독자를 단숨에 대자연 아프리카 초원 한복판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기대된다.

저자 허철웅이 세렝게티의 이국적인 배경과 동물 다큐 중에서 선호도가 가장 높은 천적 관계인 사자와 누를 주인공으로 장편을 써보겠다고 처음 달려든 게 1996년이라고 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자마자 작정하고 매달렸음에도 27년 동안 헉헉대다가 5번을 뜯어고치는 산고 끝에 이 소설 『죽거나 죽이거나 - 나의 세렝게티』가 탄생된 점을 미루어 생존을 위한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문자마다에 박혀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다음 첫 말이 “독자들이 보여줄 시선이 두렵고 낯설지만 코끝에 전해지는 공기는 참 상쾌하다.”였다고 한다. 많은 뉘앙스가 묻어 있는 이 말은 그의 특이한 이력을 보면 이해가 된다

 

 

등단하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꿈꾸던 그는 팔자에도 없는 정치 스캔들에 휘말려 17대 총선을 시작으로 약육강식의 끝판왕인 여의도에 터전을 잡아야 했다. 이후 정치선거 기획사, 독립 프리랜서로 30여 차례의 각종 선거 현장을 누비며 서식했다. 정치인들끼리 다투다 불쑥, “소설 쓰고 있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 때, 글 대신 정치판에서 밥을 먹고 살고 있는 그로서는 “지들이 소설을 알긴 해?” 하고 속을 삭여야만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런 그에게 여의도는 삶과 죽음, 권력과 정치, 우정과 갈등, 애정과 이별 등이 펼쳐지는 리얼한 세렝게티였다.

사실 먹고 먹히는 치열한 싸움만 빼놓는다면 아프리카 초원은 풀을 뜯는 초식동물의 모습이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 잡아먹히는 희생이 뒤따라야 살 수 있는 포식자들의 생존 방식은 정치판과 빼다박듯이 흡사하다. 이때 상식 밖의 정치가 작동한다고 정계는 입을 모은다. 다른 목숨을 빼앗아야 살아갈 수 있는 육식동물의 세계는 힘에 의해 작동하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법칙이 가혹하다는 말을 빗대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이 만들어놓은 ‘죽거나 죽이거나’ 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운명의 사슬이라 할지라도 저자는 ‘생명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서로 존중하는 세상이 되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 소설에 녹여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한마디로 ‘잡아먹는 자의 감사와 자비, 먹히는 자의 용서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정치판에서 통할 리 없는 소설가의 꿈은 결국 아프리카 생존경쟁의 장인 세렝게티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보던(일부는 지금도 즐겨볼 것이다) 〈동물의 왕국〉, 〈라이온 킹〉, 〈정글 북〉 등 낯익은 단어들이 떠오를 때면 화면 내레이션이 함께 주마등처럼 스친다. '먹고 먹히는 생존 경쟁의 장'. 그러나 포식동물은 살기 위해 죽이고, 먹이동물은 살기 위해 도망가는 곳이 세렝게티 현장이라면 이곳 세상은 마치 포식동물의 것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자를 '동물의 왕', '백수의 왕'이라 일컫는 것일까. 이 상황을 인간의 눈으로 봐서는 정확한 모습을 파악해 낼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특히 저자의 상상력은 정치판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을 것이다. 그 경험은 이 소설을 쓰는 데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되었을 듯하다.

이 책은 모두 17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이 한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마다 동물의 시선으로 의인화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목만으로 어떤 동물의 시선의 장인지 파악할 수도 있다. 1장 「숙명」, 2장 「생존」, 3장 「천적」, 4장 「들불」, 5장 「사선(死線)을 넘어」, 6장 「전사의 사랑」, 7장 「망각의 풀밭」, 8장 「어머니의 자리」, 9장 「킬리만자로 수행단」 10장 「음차위 할망구」, 11장 「행군」, 12장 「해를 좇아 동쪽으로」, 13장 「세상의 끝, 킬리만자로」, 14장 「대정령(大精靈)」, 15장 「절망」, 16장 「귀환」, 17장 「불멸과 소멸」 등이다.

1장은 초식동물 호다루(용감한 자)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은 그저 환한 빛의 무더기였다. 어머니가 긴 혀로 질긴 양막을 걷어내고, 코와 입에 들러붙은 진액을 헤쳐 숨결을 불어넣자 세상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몸을 떨었다. 오오,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키 작은 관목들 너머 이름 모를 짐승들이 뿔을 허공으로 쳐올리며 질주했다. 바람이 지나가는 초록의 풀밭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춤을 추었다. 창공에는 구름 사이로 내리꽂히는 빛의 다발들이 기둥처럼 버텨 서서 하늘을 떠받쳤다. 발굽에 닿는 대지는 부드러웠고 몸을 훑는 바람이 감각을 일깨웠다. 길 닿는 곳마다 생명이 꿈틀거렸고 이 모든 것이 대지의 열기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처음 본 세상은 너무나 다채롭고 아름다워서 꿈결 같았다."(p.12)

 


 

2장 「생존」에서는 사자 '다씸바'가 태어난다. "세상은 그저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냄새도, 촉감도, 소리도 없었다. 자극이 없었으므로 살아 있다는 것도 실감할 수 없었다. 어둠과 적막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아, 그리고 어머니······. 처음으로 감각의 문을 열어준 건 어머니였다. 훅, 피비린내가 끼치는 혓바닥으로 내 몸을 핥는 이가 어머니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머니의 혀는 내 몸 구석구석에 와 닿았다. 어머니의 혀는 바위의 표면처럼 꺼칠했고 응윰부(nyumbu, 누)의 내장처럼 부드러웠으며 물소의 심장처럼 뜨거웠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러나 눈앞은 늘 어둠뿐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다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 그동안 나는 죽은 듯이 누워 있거나 숨소리를 죽이며 잠들었다."(p.22)

사자 다씸바는 태어날 때부터 체취가 없이 태어났다. 사냥꾼으로서 이처럼 좋은 조건이 없을 터였다. 풀숲에 숨어 있다 먹이동물을 덮치려면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동물을 몰아가야 한다는 것은 포식자들의 불문율이다. 냄새로 적을 발견하는 초식동물 방어막을 선천적으로 하나 가지고 태어난 셈이다. 다씸바는 장성해 키불리(kivuli, 유령)란 별명을 얻는다. 귀신처럼 소리 없이 다가가 사냥을 하는 솜씨를 발휘할 수 있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가 어머니 자힐리(jahili, 잔혹한)의 말을 되새긴다. 사자로서의 삶이라 해서 먹이 사냥을 안 할 수는 없다. 먹이 사냥을 하지 못하면 사자는 죽음 앞에 놓인다. 사자 무리라고 해서 대신 먹이를 잡아다 앞에 놓아주지 않는다. 백수의 왕이라고 노력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사자가 안고 태어난 숙명이다. 사자 종족의 사냥감을 가리키며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었다. “저들은 우리보다 한 걸음만 빨리 달리면 살 수 있다. 우리는 저들보다 한 걸음이 더 빨라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지. 이 한 걸음을 위해서 저들은 저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쓰는 거다.”

 


 

동물의 세상처럼 인간의 세상도 다를 바 없다. 태어난 이상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 이겨야 살아 남는다. 그러나 인간의 경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을 지켜 승리해야 진정한 승리일 것이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에서 규칙은 종종 무시되거나 아예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인간이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지만 승부의 세계에서는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무조건 이겨야 살아 남는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다면 승부를 위해 어떤 비규칙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경쟁과 다를 바 없다. 더 문제인 것은 규칙을 어기고도 살아 남았다는 데만 도취된 나머지 비규칙을 조작하거나 은폐해 버리고 규칙에 맞췄다고 우긴다면 이것은 동물의 세상과 다름이 없다. 이 점을 보여주려 했을까? 저자의 가슴과 저자가 바라는 세상에는 아직 '공정'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어서일까?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독자도 자아 성찰의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저자 : 허철웅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경북대 전자공학과에서, 감히(?) 혁명과 시인을 꿈꾸다 제적됐다. 춘천에서 육군 통신병으로 만기 제대하고 2년만 문학공부를 하겠다며 영남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문학은 고사하고 학생운동에 푹 빠져 5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 상경해서 여러 출판사의 영업부장을 전전했다. 술집과 출판사와 서점을 쳇바퀴 돌며 틈틈이 소설에 매달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글쟁이는 안 된다며 반대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 해 1996년, <대구매일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 ‘탁류’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후로도 먹고사는 일에 쫓기다 2000년 제1회 MBC드라마문학상에 가작으로 입선했다. 입선작인 ‘나는 새들의 눈물을 보았다’가 《천일홍》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첫 책을 가졌다. 2002년 세상을 작파하겠다며 전북 고창 방장산 중턱의 임공사(현 미소사)로 들어가 3년 넘게 불목하니로 살았다. 토굴에서 공양간의 나물 반찬을 훔쳐 술안주 삼느라 세상은 작파하지도 못하고 글만 작파하고 말았다. 2004년, 분명히 팔자에도 없었을 정치판에 풀려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17대 총선에서 최재천 전 의원의 선거를 돕고, 보좌관으로 일했다. 정치선거 기획사, 독립 프리랜서로 30여 차례 각종 선거 현장을 누비며 여의도에서 서식해왔다. 추미애 전 의원의 보좌관을 거쳐 민주당 당대표실 정무조정부실장, 메시지실장을 지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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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은 노래한다
엘리 라킨 지음, 김현수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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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서는 오랜만에 읽는 미국 일반 가족의 문제점과 극복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홈 드라마' 같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요즘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스터리나 SF판타지 소설이 대세던데. 미국의 역사는 250년 정도, 이민의 역사는 500년도 안 될 정도로 짧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많은 역할을 한 것이 '개척 정신' 아닌가 생각된다. 미국은 신대륙 발견부터 이민자들이 들어오던 시대에는 유럽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아메리카 대륙 오른쪽, 미국의 동부였다. 뉴욕항을 중심으로 차츰 이민자들의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1776년 독립 때만 하더라도, 불과 250년 전이다. 이때도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독립전쟁에 참가한 주(州)가 13개밖에 안 됐다. 모두 미 동부지역이다. 독립전쟁에 승리, 정식으로 독립국가로 발족하면서 서부 개척의 시대에 돌입한다. 이때는 원주민(인디언)과의 갈등, 이민자끼리의 갈등(각자의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아직 강력한 정부라고 할 수 없는 국가 운영 실태 등으로 이민자들이 직접 서쪽으로, 서쪽으로 개척의 삶이 이어졌다. 국방이나 치안 능력도 아직은 정부의 강력한 힘이 미치지 못했을 때 이민자들은 스스로 개척하고 목장을 만들고 땅을 일궈 식량도 직접 조달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의 적은 스스로 방어해내야 애써 일군 재산을 지킬 수 있었기에 나라의 틀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 그들의 희생은 컸다. 그러나 결국 서부 개척을 이룩해 내고 광활하고 비옥한 땅의 대륙 전체를 통합하고 20세기 들어서는 본격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면모를 키웠다.

미국의 이민사는 엄청난 눈물과 감동 없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낸 성공한 사람들의 역사다. 그 과정에서 가족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도 뿌리내렸다.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가족의 안위를 돌보는 책임감과 가족에 대한 인식은 각별하다.

 


 

이 책 『에이프릴은 노래한다』는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 작품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누구나 ‘가족’을 가질 자격이 있지만 그것을 갖기 위해 싸우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 책 『에이프릴은 노래한다』는 그 ‘가족’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를 위하는 이야기며 희망, 유대감, 소속감, 그리고 우리를 치유하는 노래의 힘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만들어 가는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의 성격과 출생 배경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16세 가정이 해체된 나이 어린 소녀이다. 이름 또한 '4월'이라는 뜻의 메타포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월이면 봄이고, 만물이 소생해 활기를 띠고 생명활동을 시작하는 때이다.

에이프릴의 여정은 ‘나의 자리’와 ‘나의 사람들’을 찾아 헤매며 꿋꿋하게 고단한 길을 걸어온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한 이야기다. ‘우리 집’에 왔다는 감각, 진정한 가족을 찾았다는 안도, 그 소속감과 안정을 얻기 위한 분투는 우리의 가슴에 깊은 공감과 위로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 엘리 라킨의 이 작품은 전작 『햇살을 향해 헤엄치기』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슴 저린 주인공의 고난 속에도 저자가 가진 포근하면서도 단단한 감성은 어김없이 잘 녹아 있다. 자극적인 이야기가 범람하는 요즘,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을 서정적이면서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저자 엘리 라킨의 장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을 찾으려는 에이프릴의 여정이 독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누구나 '가족'에 대한 깊은 믿음과 애정이 한꺼번에 밀려올 것이다. 독자도 한동안 멍하니 '가족'을 생각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태어나면서부터 얻게 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을 주는 사람들? 이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결혼과 출산을 통해 만들어진 가족 관계에 배려와 사랑이 결여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리고 가족에게서 받아야 할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유대감과 자기 수용, 관계와 성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쉽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 문제 가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이라고 의학계는 인정하고 있다.

1994년 뉴욕의 리틀 리버, 열여섯 살인 에이프릴 사위키는 아빠가 포커 게임으로 따낸 모터 없는 캠핑카에서 혼자 살고 있다. 엄마는 에이프릴이 어릴 때 집을 나가 버렸고, 아빠는 애인의 집에서 머물며 애인의 아이에게 최고의 아빠인 척 구느라 친딸인 에이프릴은 내버려 둔 상태다. 고등학교도 다니지 않게 된 에이프릴은 아빠의 전 여자 친구였던 마고 아줌마의 식당에서 교대 근무를 하며 겨우 생활을 유지한다. 그녀는 마고 아줌마와 남자 친구인 매티를 제외하고는 마을의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지낸다. 흔히 결손 가정에서 보여지는 미성년자들의 행태다. 이 마을을 자기가 속한 고향으로 여기지 않으니 그 소외감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시간을 에이프릴은 혼자 기타를 치고 노래를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아줌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냥 나이만 먹은 거예요.”

“정말 그래, 그렇지 않니?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안 그래?”(pp.51~52)

 

 

그러던 어느 날 에이프릴은 이웃의 차를 ‘빌려’ 누구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오픈 마이크 나이트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마을을 나선다. 거기서 에이프릴은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는다. 작은 마을에 머물러 살기엔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그러던 중 아빠와의 큰 싸움으로 뺨을 맞고 기타까지 망가지게 되자, 에이프릴은 캠핑카를 떠나 자신의 삶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차를 몰던 에이프릴은 휴식을 위해 이타카에 잠시 멈춘다. 그 순간 에이프릴의 유일한 목표는 말 그대로 생존이었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타카를 헤매다 커피숍 ‘데카당스’에서 개성이 강한 친구들을 만나 난생처음 소속감와 위안을 느낀다. 이렇게 인생이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오히려 불안하기까지 하다. 에이프릴은 이타카에서 알게 된 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기가 받은 것과 같은 상처를 그들에게 주고 말 것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단골이라고 했으면서 애덤은 오지 않았다. 혹시 단골이 아닌 거 아닐까? 실은 데카당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위험한 사람인거 아닐까? 아님, 혹시 내가 전화를 안 해서 언짢았나? 내가 차라리 캠핑장을 선택해서 기분이 나빴나? 나한테 명함을 줬다는 사실을 기억은 하는지 몰랐다.

내 근무 시간은 세 시까지였는데 나와 교대할 직원이 심리학 시험이 있어서 못 오겠다고 두 시 사십오 분에 연락을 했다.

"부잣집 년들은 하여간."(p.182)

 


 

자기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처음 얻은 안정과 소속감을 등지고 다시 길 위로 내달려야 하는 에이프릴. 그녀는 여행을 이어가며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 또 무엇인지 점차 확고하게 알게 된다. 그 그리움과 갈망, 가슴 아픈 이별과 재회를 통해 결국 자신의 삶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며, 정체성은 누구에게서 태어나 어디에서 자라는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저자 라킨은 "에이프릴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에이프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책의 뒷 부분 〈감사의 글〉을 통해 털어놓는다. "책 속의 인물들은 내 마음속에서 전화 한 통이면 만날 수 있는 오랜 친구 같은 존재가 됐다. 마치 내 책상에 쌓인 종이 무더기 아래, 그들의 전화번호를 끼적인 냅킨을 찾기만 한다면 우리 즐겁고 긴 수다를 떨 수 있을 것만 같달까. 그래서 좀 바보같이 들리리란 걸 알지만 내가 첫 번째로 감사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에이프릴 사와키다. 그녀는 내가 다른 무언가를 쓰고 있던 어느 날 내 머릿속에 홀연히 나타나 나의 모든 감정들을 새로운 이야기로 그려 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주를 설명해 줬다."고 비유적 표현을 이용해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만족과 감사를 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 대한 감사가 끝나고 비로소 현실의 인물들을 드러내며 마찬가지로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내내 즐거움이었고, 소설을 읽고 조언해주고 감상평을 준 모든 사람들이 이 소설의 완성을 위해 도움을 준 것이란 말이다.

그가 이 소설을 오랜 기간에 걸쳐 쓰고 다듬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당연히 주인공 에이프릴의 삶의 태도일 것이다. 미국을 세계 최강국이자 패권국으로 끌어올린 정신, 그 정신이 에이프릴에게 투영돼 있음을 독자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 수많은 유명 작가와 문학평론가, 또 책 리뷰어들이 찬사를 보낸 것을 들어보면 놀랍기 그지 없다.

“엘리 라킨은 부드럽고 여린 장면들을 증류시켜 본질로 압축하는 재주를 가졌다. 당신은 에이프릴과 끝없이 사랑에 빠질 것이고, 그녀가 떠날 때, 떠나는 이유를 다 알면서도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집’을 가질 자격이 있지만 그것을 갖기 위해 싸우는 건 두려운 일이다. 『에이프릴은 노래한다』는 그 ‘집’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이며 희망, 소속감 그리고 우리를 치유하는 노래의 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만들어 가는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컨트리 리빙」

“이 책의 모든 요소가 좋았다. 엘리 라킨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선사하면서도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하는 최고의 주인공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 「뉴욕 타임스」

"『에이프릴은 노래한다』의 모든 점이 좋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지혜로우면서 동시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진한 주인공 에이프릴 사위키부터, 시대적 배경이 1994년이라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엘리 라킨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가도 곧 희망을 심어 주는 어리고, 가공되지 않은 진짜의 여자 주인공을 선사해 주었다." - 크리스 보잘리언(「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번역자 김현수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의 의미」라는 제목의 〈옮긴의 말〉을 통해 작품 감상평을 한마디 보태고 있다. "(에이프릴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의 선의를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맹랑하다 싶은 짓들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 갈수록 이상하게 에이프릴을 응원하게 됐다. 그러니까 어느새 에이프릴이란 아이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에이프릴이 비난 받거나 공격당하면 마음이 아팠고, 간신히 마음 붙였던 곳에서 짐을 꾸려 다시 떠나는 장면을 읽을 때면 따뜻한 방 안에서도 마음이 스산했다."(p.700~701)

 


 

이들은 전부 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어디 사는지 알았고, 아빠가 나를 두고 떠난 것도 알았다. 그들도 나를 버렸다. 캠핑카에 혼자 사는 어린애가 쿠키와 우유가 먹고 싶어 놀러 오진 않을까 생각하는 대신 자기 자식들에게 나와 놀지 말라고 했다. 마치 내가 나의 존재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 내 부모가 이혼했고, 내 신발이 낡아 빠졌고, 내 머리가 지저분하고, 손톱 밑에 늘 때가 끼어 있었다는 이유로,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나의 수치스러움이 그들에게 옮기라도 할 것 같은 취급을 했다. 그들은 아빠가 그랬듯 기꺼이 나를 잊었다. 그래 놓고 다들 나타난 것이다.(p.633)

 

저자 : 엘리 라킨(Allie Larkin)

 

이타카 컬리지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세인트 존 피셔 컬리지에서 작문을 공부하며 첫 작품인 『기다려(STAY)』의 초고를 완성했다. 이후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글쓰기를 향한 갈망을 잊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첫 장편소설인 『기다려』와 그 다음 작품인 『나는 왜 당신이 될 수 없는가(Why Can’t I Be You)』가 큰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 섰다. 『나는 왜 당신이 될 수 없는가』는 곧 영상화될 예정이다. 『햇살을 향해 헤엄치기 Swmming for Sunlight』을 썼다. 현재 라킨은 남편 제레미와 겁 많고 충직한 저먼셰퍼드 스텔라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역자 : 김현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글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이 좋아 라디오 작가로 일하기도 했고, 글밥 아카데미 출판번역 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실버베이》, 《먹고 기도하고 먹어라》, 《나무처럼살아간다》, 《피터 래빗의 정원》, 《자기만의 방》, 《완벽한 아내를 위한 레시피》, 《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나로 삽니다》, 《미라클모닝》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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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
의자 지음 / 마음의숲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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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어디론가 떠나길 망설이는 이들에게 뉴욕에서 1,100일 동안 600만 원으로 살며 얻은 것은? 불안과 불확신 속에서 만나는 생의 감동과 영혼의 울림, 그리고 내면의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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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
의자 지음 / 마음의숲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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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는 저자가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을 마다하고 무모(?-저자의 표현대로)한 결정을 내리는 데 어이가 없고 황당한 느낌마저 받았다. 낯선 곳, 그것도 해외를 혼자 여행한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저자의 계획이 너무나 무모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느낌이었다.

더욱이 단순 여행도 아니고 장기 체류를 계획하고 특별한 대안도 없이 무작정 떠난다는 생각은 독자로서는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앞섰다. 결혼을 하지 않은 혼자 몸이라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하다는 게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림 에세이를 쓴 것으로 보아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 관련 일을 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결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부를 위해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자 의자가 계획한 뉴욕은 현대미술의 요람으로 부각된 곳이니까.

독자의 염려가 부끄럽게 저자는 말한다. "익숙한 곳에서의 안위와 평온보다 낯선 곳에서의 불안을 바탕으로 성장할 때 비로소 인생에서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서른다섯 살 여성인 저자는 자신이 전공한 미술에 대한 노력 끝에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일자리까지 박차고 훌쩍 머나먼 뉴욕으로 떠나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돈이 풍족한 상태도 아닌데 어떻게 뉴욕행 편도 티켓 한 장과 현금 600만 원을 들고 떠날 수 있었을까. 앞서 저자의 언급대로 불안을 떨치고 성장하기 위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독자의 생각이지만 저자는 정글 같은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우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우려된다.

 


 

돌아와 책을 내고 독자들에게 그곳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보여준 저자는 과연 어떤 것을 기대했고 어떤 것을 얻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읽힌다. 조금 모호한 표현이지만 '삶에 대한 자신감'이 아닐까. 낯선 곳에서의 저자의 일상은 저자의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돈마저 부족한데 저자가 택한 방법은 뭔가를 만들든, 그리든, 쓰든 끊임없이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은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사회 최상층에 있는 도시 아닌가. 뉴요커들의 일상이 평범하고 검소하다고 들은 바는 있지만 소문난 자본주의 도시인데... 물론 저자가 물욕이나 돈 욕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느낌은 책을 읽으며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려 햇수로 5년,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젊은 여성인데 불안감은 그렇다치더라도 한국에서도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돈으로... 결국은 아르바이트 생활도 하며 들어가는 돈을 보태기는 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당차고 야무지다는 표현을 저자에 실례가 안 된다면 독자로서는 쓰고 싶다. 그래도 어이없고 황당하다에서 책을 읽고 나니 약간은 이해심이 들어간 표현이다. 사실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책을 덮을 때쯤엔 젊은 여성 혼자서도 해내는 일을 왜 독자는 한 번도 실천은커녕 계획도 세워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겸연쩍기도 했다. 저자만의 생존 방법이 이 책에 여러 가지가 나와 있다.

불안하거나 소심한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충분히 세상 살아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독자는 판단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투 두 리스트가 뭉클하며 신선하다. 우연과 불확신 속에서 만나는 삶의 떨림과 감동, 정신과 영혼의 울림이 저자가 그린 뉴욕의 그림들과 함께 펼쳐진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쯤 다시 한 번 그림이라도 더 보기 위해 빠르게 제목과 그림만으로 한 번 훑어본 사람은 독자만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처음 부분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삶에 더 이상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난다. 삶의 진정한 의미, 가치와 값어치를 깨달아가는 한 화가의 삶에 대한 치열한 도전기라고 보면 알맞을 것 같다.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가 이 책 곳곳에서 빛을 낸다. 저자의 표현대로 사람은 저마다 빛을 낸다고 말하고 그림도 여러 점 남겼다. 가난과 불안이 행복보다 났다는 보장은 없지만 안락하고 안전한 삶의 길보다 화려한 뉴욕의 한가운데서 생의 정면과 맞부딪치며 만나는 영혼의 떨림은 이 책만이 갖는 또 다른 울림이 된다.

저자는 낯선 곳 뉴욕에서 밖으로 나갈 차비조차 없는 상황에서 무서운 고독감에 혼자 울고 쓰러져있으면서도 무의식의 저편을 탐구한다. 내면의 빛을 찾아가며 일어서는 저자의 오롯한 정신이 그림과 문장에서 살아 번뜩인다. 이 책은 뉴욕만이 아닌, 세상의 어느 낯선 곳으로 떠나거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용기와 위로를 안겨줄 수 있다. 여행의 결말이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되돌아옴일지라도 그래서 더 가치 있고 값어치 있음을, 어느 날 쓸쓸함과 불안함이 삶을 덮쳐도 그것을 어루만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라고. 이번 생을 더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의 주장에 신뢰가 간다.

서른다섯 살 미혼의 여자란 사실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내놓은 이력서의 전부다. 아, 화가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림을 책에 남겼으니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저자의 손에는 뉴욕행 편도 티켓과 현금 600만 원이 전부였다. 익숙한 곳을 벗어날 용기는 시간과 돈을 담보로 한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어도 저자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다음에 충분히 돈이 모이면’ 같은 말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저자이기에 즉시 행동에 옮겼다. 이제 저자는 말한다. "'나중에’와 ‘다음에’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남은 생을 입버릇으로만 중얼거리게 될 것 같았다. 나도 한 번쯤 뉴욕에 살고 싶었다고."

 


 

책의 목차를 보다 에피소드를 적은 제목 왼쪽에 숫자가 적혀 있다. 그 앞에 'Day'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뉴욕에서의 체류 일수인 것 같다. 「어려운 쪽을 붙잡는 일」이란 제목 옆에 '293'이란 숫자에 따라 체류 293일째 되는 날이나 보다. "나 역시도 쉽고 편한 길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안다. 험난한 인생에 쉽고 편한 길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달콤하다. 내 무거운 짐을 다 대신 지어준다는 어느 종교 광고에 마음이 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을 살아내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 재력 좋은 보호자가 갈고닦아준 길이라도 장애물 없는 인생은 없다. 보호막이 사라져 내 심장이 칼바람 맞는 거 같아도, 그 고통 온전히 겪어 내 힘으로 이겨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낯설고 아픈 일을 견디면서 천천히 걸을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 꽃피고 열매 맺지 않을까?"(p.132~133)

익숙한 곳을 떠나 보호막이 사라진 자신을 노출하는 일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스스로를 낯선 곳에 두는 것은 꽃피는 생명력, 어려움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일, 그것에서 생의 울림을 발견하고 온전히 ‘나’로 태어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안을 인정하고 빈 곳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힌다고 말한다. 뉴욕 거주 1년도 채 안 됐는데 '도사'나 '수행자' 같은 생각이다.

248일째, 저자는 주머니에 남은 전 재산 오만 원으로 무엇을 할까 고심하다가 커피에 투자했다. 거의 절반에 이르는 이만 원을 스타벅스 카드 충전하는 데 냉큼 써버렸다. "나는 지금 여기서 내 삶이 좀 위태롭다고 해서 보이지도 않는 탈출구가 보인다고 말하는 소용없는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금액으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더 근사한 일은 없으니. 그러면 또 견딜 만할 테니까. 커피가 내 불안의 시간을 달래주는 달콤한 눈속임일 뿐이라도, 달게 쉬고 또 씩씩하게 걸어가면 좀 더 멀리 갈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멀리 떠나온 여행길이니 대범하게 나만의 사치를 부려본 것이다. 그것이 고깟 커피 한잔이라도."라는 글을 만들어냈다.

 


 

이내 저자의 직업을 생각해낸다. 저자의 빈 곳은 허식과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경제적 안정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안정감이라는 단어는 저자에게 크나큰 빈 곳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뉴욕에서의 생활을 통해 결국 불안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 불안을 어떻게 견디는지가 중요함을 알게 됐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여전히 철없고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성격은 아직 고치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말에 곧 수긍이 간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빈 곳은 불안함이다. 이 불안함은 경제적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내면을 단단히 만들어 불안함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빈 곳을 찾아내고 다시는 빈 곳에 침식되어 삶이 흔들리지 않을 굳센 심지를 다져낸다. 우리가 불안함에 흔들릴 때 이 책을 펼친다면 중심을 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날이었을까? 1127일차, 「내 마음의 빈 곳」에서 저자는 "인생의 깨달음은 책상 앞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나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이렇게 시끄러운 맨해튼 한복판에도 소리 없이 오는 거구나. 이 답 하나 얻으러 내가 먼 길을 애쓰면서 왔구나! 그래 낯섦과 생경함, 그에 따른 두려움과 불안함 열렬히 감수할 만하다. 사하라사막에서 뉴욕까지 이토록 헤맬 만하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뉴욕이라는 낯선 정글을 홀로 헤매다가, 나의 아름다운 빈 곳 하나를 찾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내 마음의 빈 곳이 요동치고 발화하는 순간은 아주 특별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는 스스로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본 작가였기에 자신의 찰나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는 생각을 한다. 특별한 감회일까, 체화된 느낌일까?

 


 

저자는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사는 것은 낯선 이와 대책 없이 사랑하는 일」이란 제목의 〈에필로그〉를 통해 "되돌아보는 나의 흔적들. 때론 처절한 사투였고, 때론 달콤한 연애편지였고, 때론 궁상맞은 하소연이었던 지난 오 년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그림들. 지난 그림들 속에서 홀로 던져져 아프고 몇 번이고 무너지는 나를 만났다. 그렇지만 그 무너진 자리에 서니,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고, 사람들의 따스한 빛이 보였고, 나의 빈 곳이 거기 있었다."(p.234) 저자는 그 순간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아름다움은 장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서사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저자가 경험한 사하라사막이 그렇고 뉴욕이 그렇고 지금의 일상이 그렇다. 서사가 쌓이고 쌓여 빈 곳의 발견을 아름답게 만들어낸다. 자신의 빈 곳을 피하지 않고 함께 살아보자고 다짐해 낸다. 그리고 그림책 공부를 위해 다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으로 떠났을 때처럼 그렇게, 그렇지만 조금은 다른 나의 런던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밝히며 이 책의 마침표를 찍는다.

 

저자 : 의자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6년 뉴욕에 거주하면서 아우어 골든 아워(Our Golden Hour)가 진행하는 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2020년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아동문학과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 석사를 마쳤다. 뉴욕에서의 일상이 담긴 그림은 로스앤젤레스의 프록시플레이스 갤러리 개관전에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이후 뉴욕과 서울에서 전시했다. 출간한 책으로는 『사막의 농부』, 『그림 좀 아는 고양이 루이』, 『캠핑 좀 하는 고양이 루이』 등이 있다. 어른을 위한 글 없는 그림책 『얼굴』이 출간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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