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삶이 된다 - 지치지 않고 꿈을 실현한 청년의사 폴 파머 이야기
트레이시 키더 지음, 서유라 옮김 / 디케이제이에스(DKJS)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슈바이처’라고 불리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점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헌신 의료활동을 펼친 슈바이처 박사에 대해 우리는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든 슈바이처가 벌인 봉사 활동은 롤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의 주인공 폴 파머 박사는 젊은 미국인 의사다. 그는 앞의 별칭 이외에도 ‘국제보건의 아버지’, ‘현대판 로빈 후드’, ‘세상을 고치는 의사’, ‘전염병학 전문가이자 인류학자’ 등 수많은 별칭으로 수식되는 위인이기도 하다. 도대체 그가 어떤 활동을 펼쳤기에 위인의 반열에 올릴 정도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이자 국제의료 구호단체 ‘파트너스 인 헬스(PIH)’를 설립한 폴 파머(Paul Farmer) 박사는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의료봉사 활동 쓴 사람은 트레이시 키더(Tracy Kidder)로, 퓰리처상 수상 작가이자 논픽션 서사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파머가 세상을 떠난 후 논픽션의 대가 트레이시 키더는 왜 펜을 잡았을까?

키더는 파머의 젊은 날을 밀착해 그려내며 이 질문에 대한 생생한 대답을 내놓는다. 이 책 『꿈은 삶이 된다』는 아이티의 작은 마을 캉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파머가 펼친 의료활동을 현장감 있게 기록한 현장일지이며, 특히 그가 어떤 가치관과 태도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꿈을 실현해나갔는지 알아보는 여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은 키더와 파머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치 한 편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의 글이 눈을 사로잡는다.

 

그 사건으로부터 6년이 지난 어느 날, 폴 에드워드 파머 박사는 우리의 첫 만남을 이렇게 추억했다. "하고 많은 일 중에서 우린 하필이면 목이 잘린 시체 때문에 만났죠."

때는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둔 1994년 겨울이었다. 사건의 무대는 아이티의 중부 고원지대에 자리한 소규모 상업도시 미르발레스로, 상업도시라고 해도 도로가 드문드문 포장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p.11)

 


 

당시 저자 키더는 아이티에 주둔 중이던 미군을 취재하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하고 국민을 잔혹하게 통치하던 아이티 군사정권의 권력을 박탈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복권시키는 임무를 위해 파견된 미군 2만 명을 파견했다. 캐럴 대위의 부대에 소속된 군인은 고작 여덟 명뿐이었지만 그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약 2,5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시골 지역에서 인구 15만여 명의 평화를 유지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그 중부 고원지대에서는 정치적 폭력이 사실상 끝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캐럴 대위가 들어온 후 일어난 살인사건은 딱 한 건뿐이었다. 유난히도 끔찍한 사건이긴 했지만.

사건 몇 주 전, 캐럴 대위의 부하들은 아르티보니트 강에서 미르발레스 전 부시장의 머리 없는 시신을 건졌다. 투표로 선출된 그는 조만간 복권될 예정인 민주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는 군사정권 치하의 지방 관리자였던 시골 보안관 네르바 쥐스테가 지목됐다. 그는 주민 대부분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존재였다. 캐럴 대위와 부하들은 쥐스테를 체포해 심문했지만 증거나 목격자를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그를 풀어줘야 했다.

만 29세인 대위는 앨라배마 출신의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다. 저자는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아이티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타국의 '국가 재건'은 미군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적극적인 협조를 거부했다. 한번은 대위가 임신한 아이티 여성을 이송하기 위해 미 육군의 응급 헬리콥터를 가동시켰다가 윗선의 질책을 받은 일도 있었다. 발코니에서 그가 최근에 느낀 분노와 무력감에 대해 한창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웬 미국인이 그를 찾는다고 누가 전했다.

 


 

방문객은 미국인 한 명과 아이티인 네 명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티인들은 점점 길어지는 막사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고, 미국인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캐럴 대위에게 자신의 이름이 폴 파머이며 미르발레스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밝혔다. 저자 키더는 그 당시 상황을 캐럴 대위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파머는 창백하지만 태도는 오만하다 싶을 만큼 위엄이 있었다고 술회한다.

둘의 대화는 이어졌고, 파머는 미국 정부가 아이티 경제를 바로잡는답시고 내놓는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기업의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아이티 국민의 고통을 더는 면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군사정권의 고위관리가 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미국이 쿠데타의 뒷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고 한다. 그의 의견은 아이티에는 딱 두 가지 부류만 존재한다고 것이다.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파머는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의 편이었다고 저자는 첫 만남의 인상을 밝히고 있다.

이후 우연히 저자 키더는 파머가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는 일등석에 앉아 있었고, 마이애미와 아이티를 오가는 항공편을 자주 이용하며, 몇 번인가 응급의료 상황에 도움을 준 보답으로 승무원이 좌석을 업그레이드줬다고 말했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서로의 인적 사항을 알게 됐고, 그가 스스로 밝힌 그는 만 35세의 의사로,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 중 4개월은 보스톤의 가난한 동네 교회에 머물며 환자를 보고, 나머지 8개월은 아이티에서 무보수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이티의 환자는 대부분 수력발전소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은 가난한 소작농이라는 사실도 그의 말을 들어 알았다.

 

 

몇 주 후 저자가 보스톤에 가서 저녁 대접을 하기 위해 다시 만났다. 당시 키더는 자신이 쓰고 있던 글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 덕분에 저자는 아이티의 역사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이티보다는 '빈민을 위한 의사'를 자처하는 폴 파머라는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그날 저녁, 자신이 누리는 여유 있는 삶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듯한 그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저자 키더는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지저분한 교회의 쪽방과 아이티 중부의 황무지 대신 보스톤의 큰 병원과 교외의 쾌적한 주택단지를 오가며 젊고 성공한 의사로서의 인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됐다. 하지만 아이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곳에서 소작농들과 함께 지내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듯한,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다고 한다.

파머는 저자 트레이시 키더에게 “저는 절망이 뭔지 몰라요. 앞으로도 알게 될 것 같지 않고요”라고 편지에서 말한 적 있다고 한다. 하지만 파머가 아무리 낙천적이라 한들 그 역시 좌절한 적이 없을 리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은 완전무결한 위인의 모습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사적 인상이나 감성을 모두 배제하는 노련한 작가의 글솜씨를 보여준다. 저자는 생명과 긴밀하게 얽힐 수밖에 없는 직업인 의료인을 소재로 다룰 때는 그들을 신격화하고 위인화하기 쉽다. 읽는 이가 안전하고 적절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그를 롤모델로 삼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키더는 정반대 글쓰기 전략을 취한다. 때로 갈등하고 흔들리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가는 파머의 젊은 날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이 정한 가치를 지키고 자기 안의 모순을 몰아내기 위해 애쓰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의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를 롤모델로 삼기보다는 그의 가치에 공감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나은 시스템과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려보게 한다. 역시 논픽션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다운 솜씨다.

 


 

책은 파머의 유년시절과 대학시절, 그리고 하버드 의과대학에 재학하는 동시에 캉주를 오가며 의료활동을 펼치던 시기를 되짚는다. 그리고 PIH를 설립하고 에이즈, 다제내성 결핵 등 세계를 휩쓴 질병 퇴치에 앞장서는 모습을 그려낸다. 파머는 유복하기는커녕 괴짜 같은 아버지 덕분에 버스와 보트를 집 삼아 자랐지만,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여러 관심 분야를 탐색하며 인류학자이자 의료인이라는 꿈을 키웠고,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의 환자로 여기며 의술과 인술을 펼쳤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PIH를 설립하면서는 전 세계은행 총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용(Jim Yong Kim)과 유명 소설가인 로알드 달의 딸이기도 한 오필리아 달(Ophelia Dahl)과 의기투합해 혼자만의 꿈을 함께하는 꿈으로 확장해나간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젓는 일을 하나씩 이루는 놀라운 결과 앞에서도 그는 한두 명의 가난한 환자를 직접 살피고 치료하기 위해 일곱 시간을 들여 산을 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책의 주인공인 폴 파머 박사는 2022년 2월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든지 편안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는 하루에 70~80통에 이르는 이메일에 성심껏 답장을 쓰고, 보스턴과 캉주를 쉴 새 없이 오가며 환자를 돌보고, 여러 국가를 넘나들며 회의와 연설을 하고, PIH 기부자들에게 일일이 감사장을 보내는 ‘무모한 열정’으로 가득한 일생을 보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올바름을 믿었고, 그 일을 끝내 제대로 해낸다면 설령 지금 실패할지언정 헛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파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저자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환자에 대한 구체적인 애정, 좌절에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태도,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섬세함, 함께하자고 말할 용기와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마음은 여전히 큰 울림을 전한다.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헌신적인 삶을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는 그의 젊은 날을 보는 동안 가슴 절절히 새겨지도록 저자는 글에 담았다. 어떤 일을 하든 책을 읽으며 ‘내 일의 본질’,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깊고 폭넓게 고민하고 자기 삶의 지도를 그려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독자에게 심어준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파머는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구매할 수 없는 사람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의술을 파는 현실에 모순을 느끼기에 그 불편함을 줄여나가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숭고한 영혼에서 비롯된 말이리라. 이처럼 자신의 가치관을 단단하게 세운 사람은 수많은 역경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저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파머가 스스로를 ‘절망을 모르는 사람’으로 칭한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라고 추단하기도 한다. 아무리 많은 실패를 해도 자신의 길에 확신이 있고, 그 실패가 자기 내부의 불편함을 줄여나가는 과정임을 안다면 잠시 좌절할지언정 종국에는 꿈을 이룰 것이기에.

저자는 말한다. 원대한 꿈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고. 폴 파머의 꿈은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나 더 크고 건실해졌다고. 특히 오필리아 달 그리고 김용은 그의 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료이었다고. 그들은 쉴 새 없이 토론하며 각자의 나아갈 바, 함께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정립했으며 서로를 신뢰하고 응원했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배우 맷 데이먼과 벤 애플릭이 총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벤딩 디 아크: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특히 맷 데이먼은 “폴 파머, 김용, 오필리아 달은 나의 영웅이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용기와 실천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또한 PIH의 열렬한 후원자인 톰 화이트(Tom White)와 파머의 인연도 감동적이다. “이승을 떠날 때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사회봉사에 뜻이 깊은 톰 화이트였지만, 그조차도 파머와 김용이 자신이 죽기도 전에 돈을 다 써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그는 많은 돈을 PIH에 기부했다. 그리고 걱정과 별개로 그는 단 한 번도 파머와 김용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만큼이나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인생을 바꾸었으며,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마침내 세상의 변화에도 기여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진정 쓰고 싶은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다들 비용 대비 효과니 뭐니 떠들어대는데, 살면서 단 한 사람의 목숨만 구해낸대도 꽤 괜찮은 인생이라는 거예요. 비용 찾고 효과 찾는 인간이 대체 누구를 구했습니까? 저는 죽어가던 미켈라를 살려냈고, 억울한 젊은이를 감옥에서 구해낼 거예요. 이거면 제 인생은 이미 성공한 셈이죠.”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정말 끝내주겠죠?”(p. 309)

 

저자 : 트레이시 키더(Tracy Kidder)

‘살아 있는 휴머니즘의 펜촉’으로 불리는 미국 최고의 논픽션 작가. 1945년에 태어났으며, 하버드대학교와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컴퓨터 엔지니어들의 장인 정신을 다룬 《새로운 기계의 영혼》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전미 도서상, 로버트 F. 케네디상 등을 수상했다. 《고통은 너를 삼키지 못한다》 《홈타운(Home Town)》 《오랜 친구(Old Friends)》 《아이들 사이에서(Among Schoolchildren)》 《하우스(House)》 《노숙인(Rough Sleepers)》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현재는 매사추세츠주와 메인주를 오가며 지내고 있다.

 

역자 : 서유라

서강대학교 영미어문학과 및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백화점 의류패션팀과 법률사무소 기획팀을 거쳐 현재 전문번역가 및 작가로 활동 중이다.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좋은 권위』 , 『태도의 품격』 , 『인듀어』 , 『인재로 승리하라』 ,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일러스트 에세이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 『나와 작은 아씨들』 을 펴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09-02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리뷰글이었어요. 고맙게 읽었습니다.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 야만과 지상낙원이라는 편견에 갇힌 열대의 진짜 모습을 만나다, 2024 세종도서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열대 지역에서 만나는 우리들은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야만의 행위를 덮으려고 내세운 편견과 오해를 거둬들여야 한다. 열대 지역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수많은 지구 환경이 파괴된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파괴자들의 민낯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 야만과 지상낙원이라는 편견에 갇힌 열대의 진짜 모습을 만나다, 2024 세종도서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우리의 해외 여행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지만 불과 30년여 전만 하더라도 그리 쉽지 않았다.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에 그랬다. 뿐만 아니라 해외 여행은 경비가 만만찮은 데다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들이 많아 무척 제한적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유로운 해외 여행이란 '아직 먼' 이야기이고 꿈 같은 현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해외 여행 자유화가 실시됐다. 정말 자고 일어나 보니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고, 갖고 나가는 현금도 1인 5,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두 배 늘었다. 획기적이었다. 당시 YS 정부의 '세계화' 계획에 따른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국교가 정상화되는 동유럽, 러시아,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와도 국교 정상화 맞춰 비자도 필요없이 여권만 가지고 가면 됐다. 여권만 있으면 여행국의 입국은 OK였다. 너도나도 해외 여행 붐이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국내 신혼여행지 1위로 꼽히던 국내 관광업계는 불황의 시기가 됐다. 
독자도 그때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었다. 영어도 안 되고, 홀로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패키지 여행으로 첫 해외 여행의 테이프를 끊었다. 관광업체의 알선으로 다녔기 때문에 여행이라기보다 시찰이나 연수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관광업체는 수익을 목적으로 모집을 하기 때문에 겉보기에 화려한, 국내에서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만으로 구성됐다. 주마간산식 관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태어났으면 유럽 여행 한 번쯤은..."이라는 생각으로 앞다퉈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정말 말 그대로 붐이 일었다. 불과 몇 년 뒤 IMF라는 엄청난 시련이 닥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규제에 묶였던 해외 여행 자유화로 '돈 모아 해외 여행'이라는 평생 소원이 될 지경이었다. 주부들은 친목계 등을 통해 해외 여행 계를 만들어 너도나도 해외 여행을 갈 정도였다. 그야말로 정부의 해외 여행 억제 조치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무분별한 해외 여행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사실 그것은 '여행'이 아니고 '관광'이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배움'보다는 '사치'였다. 국민 소득이 오르고 얼마간의 경제적 여유가 일시에 해외 여행으로 몰려서 그때부터는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한국말을 조금씩 할 줄 아는 관광지 상인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관광지에서 쇼핑은 '면세품'이라는 이유로 있는 대로 다 사가지고 돌아올 심산으로 사들여 왔다. 말 그대로 돈을 물 쓰듯 했다. 물론 모두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IMF에 해외 여행 붐이 한몫 거든 셈이다라고 말한다. 지금이야 다 지나간 이야기라 쉽게들 말하지만 학교에서 이름만 배웠던 IMF가 살벌한 곳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열대 지역 여행'이라는 새로운 여행 개념을 제시하는 이 책 소개를 하기에 앞서 사설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독자가 여행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이 앞서 몇 마디 덧붙인 것이니 양해 바란다.

이 책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이 새로운 여행 개념뿐만 아니라 여행의 원래 뜻에 가장 가깝게 쓰여졌기에 사적인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관광'과 '여행'의 참뜻을 알고 여행을 즐기자는 의미에서다. 지구의 기후별로 나눈 열대 지역은 일년 내내 덥고 햇볕에 탄 새까만 피부의 사람들로 연상된다. 아직도 문명의 혜택을 못 받는 '미개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 곳이다. 저자 이영민도 책에서 지적하지만 "열대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게으르고 위험하다는 인식은 역사적으로 덧씌워진 편견"일 뿐이다. 무력 침입해 식민지로 만들고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사람들이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덧씌운 '의도적 편견'이다. 실제로 이 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비문명화된 곳이 아직 많다는 점을 악용한 사례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식민지로 만들어 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주기 위해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었다. 우리도 식민지를 겪었지만 똑 같은 논리로 일제 강점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들의 말이 얼마나 사리에 맞지 않는 비논리적 말인지 알 수 있다.

 

 

열대 지방 여행이 꺼려졌던 이유는 감염병이나 너무 더운 날씨에 의한 풍토병 등의 위험이 크고, 교통도 불편한 데다 치안마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점은 있을 것이다. 사실 독자도 몇 번이나 열대 지역 여행을 가려고 마음먹었다가도 매번 건강상의 우려로 계획을 철회하곤 했다. 전쟁 중인 나라에는 미리 외교부나 문화부 등에서 여행을 자제하는 단계별 경보를 주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면 전쟁에 휩쓸려 목숨을 잃거나 할 우려는 크지 않다. 다만 예방 접종이나 풍토병에 대해 지식이 없이는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힘들긴 하다. 치안도 다소 불안한 곳이 많지만 아무리 뒤떨어진 문명 시대에 살고 있어도 이쪽이 공격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공격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또 열대 지방은 대부분 교통이 불편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낯선 기후에 오래 노출될 경우 풍토병은 물론 각종 감염병으로 고생할 수 있다는 경고는 무조건 수용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은 표제어에도 나오듯이 '지리학자'로서의 여행이라서 탐사의 성격이 강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수 여행의 목적임이 맞다. 지리학에 관한 지식을 지역에 관한 여행 상식에 슬쩍 덧붙이는 형식으로 쓰였다. 앞서 말한 대로 기후에 의해 열대, 아열대, 온대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경계가 북위 몇 도? 하는식으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대체로 산이나 강, 바다 등의 경계에 따라 구분되어짐을 확연하게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열대림이라고 하는 지역도 열대 지방부터 아열대 지역까지 걸쳐 발달된 곳이고, 외부와의 접촉이 어렵고, 강을 따라 나라의 경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로 대면할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 아무래도 소통이 불편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경계할 수밖에 없을 터, 소통이 안 된 곳은 탐험 정신을 앞세우지 말고, 그들의 방식을 존중하는 여행객으로서의 자세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지리학자의 여행답게 중요한 지리적 정보 중 하나인 기후를 중심으로 카리브해의 휴양지부터 생명의 보고 아마존 열대우림까지 전 세계 곳곳의 열대 지역을 여행한다. 기후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기후의 특성을 이해하고 여행지를 바라본다면 더 깊이, 더 많이, 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첫 번째 여행지로 ‘열대’를 선택했을까? 우리에게 가장 낯설면서도 친숙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위험하고 불편한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쉽게 여행지로 선택하기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저자는 이 책에 열대에 덧씌워진 오해와 편견을 거둬내고 총천연색의 다양함이 살아 숨쉬는 있는 그대로의 열대를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1부에서는 열대 지역의 자연환경과 독특한 지리적 현상을 정리하고, 2부에서는 가장 전형적인 열대 기후 특성이 나타나는 보르네오섬, 아마존, 빅토리아호,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열대 고산지대, 열대 바다휴양지의 6개 지역을 중심으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열대의 자연이 여행자들에게 어떤 매력을 선사하는지 담아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열대 지역에서 활발하게 벌어져왔던 교류의 흔적들과 그곳 사람들의 삶과 그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머릿속에 남기게 될 것이다. 첫째, 열대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게으르고 위험하다는 인식은 역사적으로 덧씌워진 편견이라는 점, 둘째 열대 지역의 자연환경은 무덥고 습한 게 전부가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다는 점, 셋째 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열대우림 파괴와 같은 일들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열대에 덧씌워진 유토피아의 이미지와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열대를 소비하는 방식이 잘못된 이미지에 근거했던 것이 아닌지를 성찰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열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오해와 편견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했다. 이 책은 ‘다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며, 독자들은 지리학적 여행이 어떤 앎과 경험의 즐거움을 선사해주는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은 한 가지 더 있다. 열대는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지만 실은 그곳의 삶이 우리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열대 동물들의 서식처인 열대우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기름야자에서 짜낸 팜유는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으며, 보르네오섬의 아름드리 열대 나무는 원목으로 수출되어 가구 제품의 원료가 되고 있다. 아마존 개발에 따른 열대우림의 파괴는 지구 온난화를 가속하고 있다. 이를 열대 지역 사람들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열대가 주는 풍요로움의 혜택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은 결국 선진국 사람들이다. 이런 깨달음은 오늘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누구나 깨우쳐 다시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제공한다. 열대 지방 여행은 인간이 편의를 위해 수많은 지구 환경을 파괴된 현장에서 파괴자들의 민낯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장소·사람·문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지리학자의 여행은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도 시선이 닿는다. 낯선 것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낯익은 것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한다. 이 책은 지리학적 여행이 어떤 앎과 경험의 즐거움을 선사해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장 낯선 열대라는 지역을 통해 생동감 있게 전해준다.

 

저자 : 이영민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다문화·상호문화 협동과정/아시아 여성학 협동과정 교수.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 지리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소와 사람, 그리고 문화의 관계를 밝히는 인문지리학을 연구한다. 특히 여행과 국제 이주에 초점을 맞추어 글로벌 이동성과 장소 재구성의 관계를 밝히면서 그 속에 펼쳐지는 인간의 삶과 행복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지리학자의 인문여행』, 『나를 읽는 인문학 수업』(공저) 외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문화·장소·흔적: 문화지리로 세상 읽기』,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 『국가·경계·질서: 21세기 경계의 비판적 이해』, 『쿠바의 경관: 전통유산과 기억, 그리고 장소』 등 다수의 번역서를 공동으로 출간했다. 또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온·오프라인 미디어에 여행의 지리학, 국제 이주와 한국의 다문화 현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아울러 지자체 평생교육원, 공공도서관, 백화점 문화센터, 초중고 교사연수와 인문학 특강 등에서 관련 내용을 전파하는 일에도 주력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의 사과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쟁과 속도와 집단적 이기에 내몰린 인간은 이성은 물론이고 본성까지 잃어버렸다. 현대인인 우리는 인간이 만든 도시 속에서 천천히 짐승이 되어 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늑대의 사과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 작품 『늑대의 사과』는 매우 강렬하다. 담고 있는 뜻이나 저자 최인의 표현도 내용 못지않게 적나라하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의 자신의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고 생각한 주인공 표기가 탈북해 대한민국에 와서 겪고 직접 체험한 일을 즐기는 것 같지만 결코 바람직한 체험이 아니다. 매우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더욱이 출판사들의 행태는 표기의 소설에 대해 작품성 여부를 떠나 돈과 연결해 생각하기 때문에 탈북자 입장으로 작품 출판마저 녹록지 않아 좌절한다. 북한 김일성대 문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로서 이 때문에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탈출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는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면 할수록 자신이 이상해져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남한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차츰 소외되고 낯설어지고, 기형화되어 간다는 사실에 몸부림친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끼게 된다.

표기는 자신이 목적하는 대로 소설을 쓰고는 있지만, 남쪽 출판사들은 하나같이 그의 글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루하다며 출판을 거절한다. 결국 파격적인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표기는 신작 집필에 들어간다. 그가 집필을 시작한 소설은 '블러드 서킹'을 하는 내용이다. 즉 평범한 샐러리맨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피를 먹는다는 줄거리다. 블러드 서킹을 중간쯤 썼을 때 표기는 난관에 부딪친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상황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표기는 사람의 피를 직접 맛보기로 하고 대상을 찾아 나선다.

 


 

출판사의 거절은 사실 이 작품 때만 아니다. 저자의 첫 번째 장편인 『문명, 그 화려한 역설』은 인문학적이고 종교적이고 문명적인 요소를 갖춘 소설이다. 두 번째 장편 『도피와 회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 문체로 쓰여지고,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세 번째 장편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는 선과 악, 신과 천사, 악마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갖추어야 할 이성과 오성과 명성이 무엇인지 묻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품는 동시에 줄거리를 끌어가는 스피디한 문체, 신선하고 유쾌한 발상으로 이어지는 대화체, 세분화된 챕터 형식의 구성은 쉴 틈 없이 책장을 넘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주제 의식이 뛰어나면서 재밌는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은 단언컨대 흔치 않다.

이에 반해 『늑대의 사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재미만을 위해서 전개되고 진행되어 간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날카로운 묘사와 섬뜩한 장면, 자극적인 요소가 이것을 말해 준다. 소설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소설을 읽고 나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소설 속에 소설이 있다는 점이다. 즉 『늑대의 사과』라는 작품 속에 다른 소설이 동시에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소설은 결국 끝부분에서 하나가 된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두 가지 부분에서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 하나는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가와, 또 하나는 인간의 내면에, 우리의 내면에 주인공과 같은 악마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자문이다. 결국 소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 데 성공한 셈이 된다. 위와 같은 궁금증을 풀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면 된다.

 

 

저자의 전작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는 신의 종말, 천사의 저주, 악마의 죽음, 인간의 타락, 짐승의 멸종을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논하고, 노래하고, 추억한다. ‘악(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에 깊이 매료된 저자가 철저히 악마화 된 인간, 인간을 대신해 죽은 신, 천사를 타락시키는 악마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신의 종말, 천사의 저주, 악마의 죽음, 인간의 타락, 짐승의 멸종을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논하고, 노래하고, 돌이켜 생각한다. 역설적이면서도 부조리한 회억은 과거를 되새기고, 반성하고,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저주와 조소와 비난의 읊조림이다. 이미 죽어서 궤란(潰爛)의 무덤 속에 자리 잡은 미래는 신조차도 살릴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 되살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차라리 창조주를 어둠의 동공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하여 인간으로부터 버림 받은 신과 천사와 악마는 궤란의 무덤 속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재확인한다. 얼핏 들으면 단테의 신곡 같고, 읽다보면 철학서 같기도 한 이 소설은 저자 최인의 이력과 전작을 살펴보면 좀더 이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는 등단 전 인천지방경찰청에서 13년 근무했으며 파출소장과 형사반장을 역임했다. 범죄와 악에 대한 충분한 사유가 있었으리란 독자의 판단이다. 사실 에로티시즘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이고 강렬한 묘사는 이미 단편집 『돌고래의 신화』(2022. 4, 글여울刊)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작품들이 출판사에서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되기도 했다. 그래서 집필한 『늑대의 사과』는 저자 최인이 직접 출판사를 찾아가지 않았으리라. 이미 저자는 자신의 출판물을 위한 출판사를 별도로 설립했다.

 


 

『돌고래의 신화』에서 저자는 단편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 포우와 오 헨리가 즐겨 쓴 '충격요법'과 '반전기법'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집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소설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빠르게 전개되는 한편, 극적 반전을 이뤄 독자를 글 속으로 몰입시키는 데 성공한다고 평가된다. 또한 치밀하고 세밀한 점묘법으로 구성된 작품 속에 녹아 흐르는 에로티시즘은, 책을 읽는 흥미를 더 한층 배가시킨다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이것들은 단편소설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충격요법, 반전기법, 점묘법 등은 단편소설의 중요한 기법에 해당되는 일들이다. 단편소설이 대부분 200자 원고지 70~80장 분량임을 감안한다면 장편소설처럼 사건이나 인물에 구구한 설명도, 장황한 묘사도 필요없다. 오히려 소설 전개나 반전에 방해가 될 뿐이다.

또 전작 『도피와 회귀』(2021. 10, 글여울刊)를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문체와 소설 내용에 대해 쉽게 수긍하리란 독자의 생각이다. 『도피와 회귀』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의 끝까지 치닫는다. 그것이 이성을 상실하고 감정을 잃고 지성과 오성을 벗어 던지는 일이라도 상관이 없다. 주인공의 이같은 행위는 소설의 시작과 함께 이행되며,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극단적이 된다. 인간은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위해 일하고 움직이고 경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모든 것을 바친다. 그것이 짐승이 되고 악마가 되고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본래 최인 작가의 소설은 인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을 보면 그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번 작품 『늑대의 사과』는 저자의 지식 탐구와 사유가 매우 깊어짐을 느낄 수 있어 더 흥미가 있다. 저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등장한 디지털 문명, 비접촉 소통, 거기에 따른 인간의 원초적 고통과 좌절감 등을 잘 버무려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자본주의와 기독교 문명을 처음 접하는 사회주의 출신인 탈북자 주인공 표기가 서른 다섯의 나이에 겪을 만한 일은 모두 다 동원된다. 특히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되어 가고 있는 인간 중심, 인본적 사고 방식에서 멀어진 젊은이들의 놀이 행태도 쾌락이나 단초적 감정만 발달한 비이성적 생물체로 생각될 만큼 삭막한 인간성을 드러낸다. 사회주의 체제의 산물이라고 생각한 체제와 집단 의식에의 몰입이 일상에 배어들어 있다. 오직 생물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말기적 현상과 사회주의 비이성적 발전의 끝이 거의 같다는 저자의 사유 덕분일까? 저자 최인의 글에서는 늘 슬픔과 분노가 교차하면서 극단적인 행위를 거리낌없이 행하는 '악(惡)'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지금 세상을 나누는 잣대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흑백 가리듯 나뉘어 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의'나 '이념', 그리고 '종교'보다 '인간'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짙게 깔리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건, 오직 인간이 만든 소사이어티로 인해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만든 제도와 규칙이 이제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경쟁과 속도와 집단적이기에 내몰린 인간은 이성은 물론이고 본성까지 잃어버렸다. 현대인인 우리는 인간이 만든 도시 속에서 천천히 짐승이 되어 가고 있다.'(p.76)

 


 

'늑대의 사과'란 표제어는 서양 문명에서 '신이 내린 채소'라고 부르며 즐겨 찾는 토마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붉은색의 토마토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 시작 전 '서문'에 두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붉은색 토마토를 땡감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외국에서 온 빨간 가지, 이탈리아에서는 황금열매, 즉 사과라고 칭했다. 학술적으로 부르는 라틴어 학명은 〈늑대의 복숭아〉이다. 반면 중남부 유럽에서 만들어진 학술명은 〈늑대의 사과〉이다. 동물을 잡아먹는 늑대가 복숭아나 사과 같은 것을 먹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늑대의 사과〉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는 배경이 있다.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이 열매를 저주와 파멸의 독초라고 생각했다. 북부 유럽에서는 이보다 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토마토를 먹으면 사람이 흡혈 늑대인간으로 변한다고 믿었다. 그 시대에는 마녀가 고약을 사용해서 사람을 늑대로 만든다는 풍문이 돌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 중미에서 들어온 눈이 부시도록 새빨간 열매는 유럽인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주었다.

 

저자 : 최인(崔仁鎬)

 

본명은 최인호다.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탄강구리에서 태어났다.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비어 있는 방」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문명, 그 화려한 역설』로 1억 원 고료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2019년 12년간 ‘최인소설교실’을 운영했다. 인천지방경찰청에서 13년 근무했으며 파출소장과 형사반장을 역임하였다. 저서 『안개 속에서 춤을 추다』, 『킬리만자로 카페』, 『뒤로 가는 버스』, 『장미와 칼날』, 『크리스마스 전야』, 『그 바다엔 낙타가 산다』, 『인베이더』, 『그들 그리고』,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