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맥공주
이지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8월
평점 :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독자는 학교 다닐 때까지는 꽤 책을 읽었지만 사회 생활하면서 책과 멀어졌다. 흔히 핑계로 내세우는 "시간이 없어서"였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한참 책을 좋아할 때 읽었던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이 대부분이고 가끔은 에세이도 읽었다. 어쩌다 한 번씩 시집도 사서 읽기도 했다. 소설도 분야별(장르별)로도 편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나이 때는 사실 러브 스토리라는 연애 소설 혹은 로맨스 소설을 주로 읽었다. 그러나 SF판타지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소설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 유명한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내용이 공상(空想)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된 뉴 밀레니엄 들어서는 그야말로 작가 지망생도 인쇄된 책을 쓰는 대신 인터넷에 소설을 발표하는 일이 많았을 무렵, SF 소설이 대세인 듯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젊은 작가들이 주로 많이 쓴다는 말도 매스콤을 통해 들은 적도 있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 소설의 대부분은 이른바 '장르 소설'이 대세를 이뤘다고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택 근무가 실시되면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독자로서는 이때도 대부분 예전의 취향대로 선택했다. 그러나 온라인 서점을 자주 들러 책을 구매하곤 했는데 놀랍게도 장르소설은 이미 베스트셀러 순위에 늘 끼어 있었다. 몇 권을 사서 읽은 적도 있다. 그러나 독자가 읽은 소설에는 여전히 쉽게 공감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팬데믹 상황이라 일본이 강세를 보인다는 추리소설이 우리 국내 작가들도 적잖게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온라인 서점에서는 추리, 미스터리, 심리스릴러, 판타지, 과학, 공상 등을 거의 '장르소설'로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무렵 김초엽 작가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으로 많은 상을 수상했다고 알려졌다. 누군가가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평해 놓은 기사도 읽었다. “김초엽은 심도 깊은 질문을 제시하는데 능숙하여, 그 질문에 대한 답에 다다르는 정교한 퍼즐을 과학과 인문학적 기초 위에 구축한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여성들은 역사에서 잊혀진 여성을 대표한다. 우리는 그 여성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그들이 윤리적 도착 지점에 다다르는 아름다운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예전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별이 없을 때는 이런 평이 나오지 않았을 터다.

독자가 뒤늦게 파악한 김초엽 작가는 과학도였다. 포항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인간은 사실 자연 세계와 동떨어진 채 인간만의 세계에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해 정의할 때 우리는 그동안 인간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죠. 그게 철학이 되고 사회과학이 되었는데, 그것만으로 우리 삶과 인간 자체에 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자연과 공간, 인공물, 기술, 과학 같은, 인간이 아닌 비인간적인 것들도 사회의 핵심적인 구성원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배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김초엽 작가는 어느 책을 읽으면서 SF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관점을 내재하고 있는 장르라고 말했다고 〈밀리의 서재〉는 밝혔다. 김초엽 작가는 SF는 인간도 중요하게 보지만, 인간을 둘러싼 세계, 구조,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 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인간과 사물을 동등하게 다루는 장르라는 말했다는 것.
또 "SF는 항상 우리가 지구환경, 우주, 우리 몸이 기술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유전적 공학을 통해 어떤 괴물들이 만들어졌는지를 다뤄왔다. 그래서 SF는 '얽힘'을 다루기 좋은 장르다. SF를 통해서 현재의 얽힘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을 한다.
그리고 독자가 가장 공감 가는 인터뷰 내용이 마지막에 나온다. "SF에 나오는 과학이 진짜 과학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오해다. SF 작가들이 흔히 쓰는 기법의 하나가 진짜 과학처럼 지어내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들을 써놓고 진짜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예 없는 엉터리도 많다. 과학과 SF가 연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제 과학보다 엉터리 과학이 범위가 좀 더 넓다. 과학을 잘 아는 것도 물론 좋지만, SF 작품을 많이 읽는 게 SF를 쓰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일상적인 것만 알아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독자와 작가 지망생들에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밀리의 서재〉는 SF를 순수 문학으로부터 단절시켜온 벽이 허물어졌고, 순수문학 / 장르문학이라는 상투적인 구분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변화를 이끄는 주인공은 김초엽 작가라고 단언한다.

독자가 이 책 『산맥공주』를 서평하면서 갑자기 김초엽 작가의 장르소설, SF 소설에 관한 최근 강연 내용을 여기에 적은 이유는 '장르 소설'이라면 빠질 수 없는 저자 이지연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이지연은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깊이 있는 상상력, 긴 시간 쌓아온 장르 문학에 관한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가였다고 이 책 뒷 부분에서 출판사 측은 말하고 있다. 김준혁 황금가지 편집주간은 「장르라는 텃밭을 일구려 한 지구별 여행자」로 저자와의 인연을 회고한다. 김 주간은 자신이 출판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지연 저자가 직장 선배였고, 퍽이나 힘든 사수였다고 말한다. 김 주간에 따르면 이지연 작가는 그야말로 황무지와 같은 한국 장르 텃밭에 수많은 씨를 뿌려온 장인이었다. 1997년 PC 통신 하이텔에서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를 세상에 선보인 게 그 첫 시작이었다. 지금이야 서점에서 SF나 추리,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출판소설을 만날 수 있지만, 1997년 당시에는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한 작가 외에는 신인 작가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서점 매대에 비치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판타지라는 장르로 구분된 소설이라면 당연하듯 도서대여점으로 직행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영도 작가의 역량을 일찌감치 알아본 그녀는, 12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자신의 직을 걸고 출판하고 홍보에 물두했다. 한 편집자의 열정적 의지는 회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영도 작가 인터뷰와 소개가 이례적으로 주요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동시에 담겼고, 당시 신문지면에선 낯선 광경인 판타지 소설 광고가 연거푸 실렸다. 책은 100만 부가 훌쩍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그야말로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전설이 되었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당시 막 꽃피우던 여러 판다지 소설가들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선뵈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황금가지가 선두에 서서 물꼬를 터뜨리자 다른 출판사도 경쟁적으로 작가 물색에 참여하였다. 신춘문예에선 장르문학 부문이 도입되기까지 했다. 서점에는 장르 분야의 매대가 비치되었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이런 대중적 흥행은 현재의 웹소설 플랫폼이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p.308~309)

1997~2007년 국내 창작물 외에도 해외의 고전 장르 소설을 적극적으로 찾아 정식 출판을 밀어부쳐 『듄』, 『반지의 제왕』, 『어스시의 마법사』, 『스타십 트루퍼스』, 〈러브 크래프트 전집〉, 〈링 시리즈〉, 〈해인 시리즈〉 등 SF와 판타지, 호러 소설 기획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김 주간은 말한다. 이후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고 편집 책임자 자리를 물려주고 소설도 쓰고, 번역과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황금가지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인연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리고 이지연 작가는 2024년 8월, 지구별 여행을 마쳤다. 향년 52세. 출판사 황금가지는 그녀의 공로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 책 『산맥공주』를 출판했다.
이 단편집은 저자가 생전에 애정을 가지고 다듬었던 미발표작과 기발표작을 한데 엮은 것으로, 「생일을 축하」, 「눈 속의 요정」 등 타자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초기작들에서부터 「산맥공주」, 「역표절자」 등 작가의 사변적 깊이에 더해 사건의 플롯을 능숙하게 다루는 변화된 스타일을 선보인 최근작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저자와 오랜 지기였던 소설가 송경아 씨가 직접 여덟 작품을 엮었으며, 저자의 가족 및 지인, 그리고 작가들의 1주기 추모글이 전자책으로만 별도 수록되어 발매될 예정이다.
표제어로 선정된 「산맥공주」는 고아로 자란 보르후가 한 여인과 결혼하지만, 곧 아내가 죽자 깊은 슬픔에 잠긴다. 무당은 '죽은 아내의 옷에서 나온 씨앗을 심고 잘 보살피면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일러주자, 보르후는 그 말대로 씨앗을 심고 정성껏 돌보아 출룬체첵이라는 아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는 비범한 괴력을 가진 채 빠르게 성장하며 세상을 뒤흔들게 된다.
「눈 속의 요정」은 폭설로 마비된 도시에서 발견한 작은 요정이다. 인형처럼 생겼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근처 편의점으로 급히 요정을 데려가지만, 요정을 본 사람들로 곧 소동이 일어난다. 과연 요정을 살려낼 수 있을까? 궁금하다. 「공녀님은 기사가 되고 싶어서」에서는 황위 후계자의 친우를 선발하는 과정에 미드라코 가문의 17공녀 엘이 지원한다. 하지만 경쟁자인 데레의 예상치 못한 실력 발휘와 자신의 성적 하락으로 혼란을 겪게 된다. 더군다나 데레의 가문에 관련된 숨겨진 비밀까지 알게 되자, 엘은 복잡한 심경에 빠지고 마는데··· 「역표절자들」에서는 자신이 남긴 미스터리한 메모가 다이어리에 남아 있다. 메모에는 특정 기억이 삭제될 것이며, 친구나 지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누군가를 경계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사라진 기억을 되짚는 와중에, 정말로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난다.

독자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작품은 「만찬: 콴 행성 라마 지역 상층부, 우위디야마구」이다. 주인공은 세즈.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콴 행성이고, 콴 행성에 거주한 이들은 조금 특이한 식성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을 먹는다. 세즈는 이런 식성에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반면 세즈의 친구인 맥다이는 별로 거리낌이 없다. 인간이 죽은 후 음식의 형태로 재생되어 다른 인간들에게 제공된다. 이 작품은 인간이 항상 이야기하는 '존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은 존엄한가?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태어나고, 죽기 전까지는 생명 운동을 지속한다. 인간만 존엄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맥다이가 세즈에게 던진 말이 이 문제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사람에게 존엄성 같은 건 없어. 살아가는 거지. 그뿐이야."(p.251)
지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타인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음 이후 타인의 음식으로 재활용된다면 존엄성을 해치는 것인가? 지구에서는 예부터 식량 부족으로 전쟁을 했다. 전쟁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먹을 것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먹지는 않는다. 그래서 얻은 존엄성이라면 동물을 죽여 먹이로 사는 인간은? 끔찍한 상상을 해야 하지만 흥미로웠다.
「진화 혁명: 디벤둑 상급지식체화소의 강의 소묘」에는 '신인류'가 등장한다. 최근 출판된 베르베르의 작품 『키메라의 땅』에도 신인류가 등장한다. 구인류와 신체 구성요소가 다르며 정신적으로 더 완전하다. "의식과 유전자가 의식 우위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100%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없다. 가정적이지만, 이들은 '진화했다'라고 표현한다. 이성이 감정을 완전히 조절하는 것, 이걸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구인류에 대해 배우던 카인은 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감정을 이성 아래 복속시키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p.215)
저자 : 이지연
책과 동물을 좋아하는 어린이였다가 책과 동물과 한문과 과학을 좋아하는 청소년기를 거쳐 더 더 많은 것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세상에 좋은 것을 한 톨만큼씩 더해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상당 기간 단행본 편집자 및 번역자로 일해 왔으며, 옮긴 책으로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 6부작」을 비롯하여 『무한의 경계』, 『2010 스페이스 오디세이』, 『1인분 프렌치 요리』, 『빈티』 외 다수가 있다. 2024년 8월,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