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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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시련의 시대를 맞았다. 시리아 등 난민들이 몰려오고, 이들과의 적대적 관계가 된 일부 극우 세력은 코로나 재확산으로 방역을 위해 국경 폐쇄까지 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국가의 음모'라고 반발하고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 각국의 정부는 방역 활동과 방역 조치 완화를 주장하는 일부 시민과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계속함으로써 이중고를 겪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EU로 통합을 이룬 유럽은 영국의 EU 탈퇴로 자중지란의 상태에 놓였는데도 이렇다 할 뾰족한 수를 못 찾고 눈앞에 닥친 코로나 방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1968년 '68혁명' 이후 사회 변혁 주도세력이 퇴보하는 현상이라는 진단도 나와 전 세계 질서의 변혁을 예측하기도 한다. 68혁명이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학생과 근로자들이 일으킨 사회변혁운동을 일컬으며 '5월혁명'이라고도 한다. 1968년 3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면서 발생하였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학교와 직장에서의 평등, 미국의 반전,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됐다. 시위대는 정부가 대학교육문제와 유럽공동체 체제하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68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갔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 『유럽을 성찰하다』를 펴냈다. 원제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해야 한다(Faut Dire Que Les Temps Ont Change’인 이 책은 68혁명 이후 이 세계의 변화에 대해 총체적으로 성찰한 진중한 인문에세이다.

특히 오랜 시간 세계 질서를 주도했던 유럽적 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질되고 쇠락했는지, 바뀐 세계 속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 찾기 질문을 여러 방면으로 담았다. 유럽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자,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등 극단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만하다.

“1964년에 밥 딜런은 ‘시대가 변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대는 변했다.’ 하지만 시대는 예상했던 방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서문에 나오는 코엔의 시대 진단은 좌파와 우파라는 두 이념세력의 공통된 실패를 주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한 세상에서 앞선 시대와도 완전히 낯선 다른 세상으로 건너왔다. 눈부신 미래를 향한 희망이 있던 자리에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자리를 잡았다. 과거의 좌파가 행하던 비판의 메가폰 역할을 포퓰리즘이 이어받았다. 영원한 현재의 공간에 갇혀서 앞날을 생각하기가 너무나 어렵게 된 오늘날 청년 세대의 상황이야말로 지난 반세기 동안 쌓여온 정신적 외상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짧은 기간 민주주의와 산업 발전을 이룬 우리에게도 곧 닥칠 문제여서 주목할 만하다.





코엔이 보기에 50년 전 1968년 5월 혁명은,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당시 대학가인 라탱 구를 행진하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르주아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문제였다. 하지만 68년 5월 혁명에서는 어떤 이도 처형되지 않았으며 마치 즐거운 파티와 같았다. 프랑스 대혁명에서는 빵을 요구했지만, 이제는 부를 차별없이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것’이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 파리, 베를린의 신세대들은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노동과 물질의 문제에서 벗어나 사랑과 로큰롤로 이뤄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7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이 중단되고 기나긴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1960년대의 열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하며 공장에 잠입했던 좌파 청년들에게는 경악스럽게도, 당시 산업은 섬유, 야금, 조선소의 위기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 세대의 열정은 이렇게 무너졌는데,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에 있었던 첫 번째 트라우마로 저자는 진단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경제 위기는 68혁명의 반대자들에게 역습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일랜드의 토머스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이 ‘무절제와 악덕’의 사슬을 풀어놓아 젊은 세대들이 ‘지혜와 미덕’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보수주의자들도 같은 실수를 범했다.

68혁명 세대들이 ‘금지를 금하기를’ 원했지만,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모든 사회는 규칙과 금지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불가능을 요구하기’를 원했지만, 인간 조건이 비극적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68혁명에 대한 비판은 ‘무력감과 쾌락주의와 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을 한시바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쾌락 원칙에대한 현실 원칙의 설욕으로 보였다. 레이건은 경제가 아닌 도덕적 혁명의 기수였다.

하지만 레이건은 68혁명 세대만큼이나 순진한 환상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도덕성 회복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자동 조절되리라는 게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선 이후 실제로 실현된 것은, 아무런 절제도 없는 가운데 터져나온 부의 불평등과 탐욕의 승리였을 뿐이다. 보수주의 혁명의 이 배반은 우리 시대가 겪은 두 번째로 큰 헛된 기대와 착각이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처럼 급격하게 변화한 것은 인간 욕망의 양극단 사이에서 이뤄진 진부한 왕복운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욕망의 양극단은 보들레르가 ‘이 세상 밖 어디든지’라고 불렀던, ‘스스로에게서 해방되어 멀리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이 역시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되어 있다.2 지난 반세기 동안의 변화는 이처럼 깊이 왜곡된 대립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전통에 대한 찬사는 타인 기피와 외국인 혐오증으로 변했고, 기존 질서에 대한 즐거운 이의 제기는 경쟁적인 개인주의 속에 쓰러져 있다. 해방과 전통이 대립하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의 커다란 분열을 목격했다. 관습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인 존재가 된 승자와, 전통이 제공해주지 않는 보호책을 전통에서 찾고 있는 패자가 그것이다.

지금의 포퓰리즘은 바로 이런 위기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산업사회가 제공해주던 지표를 잃어버리고 끝없는 모험을 펼친 끝에 민중은, 지나친 도덕적 관용주의라며 좌파를 비난하는 한편, 부자가 될 생각만 한다고 우파를 비난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좌파는 서민을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위기에서 서민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덕 회복 정책으로 선출된 우파는 서민들을 탐욕의 제단에 갖다 바쳤다.”(104p)

마침내 민중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의 종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동계급이 포퓰리즘 정당으로 넘어간 것은 68세대의 희망에 조종을 울리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저자에 분석에 따르면 이탈리아 포퓰리즘 운동에는 엘리트 혐오라는 위를 향한 증오, 즉 첫 번째 요구를 만족시키는 급진 좌파 성향은 있었지만, 외국인 혐오라는 두 번째 아이템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선거 결과는 우파에 뒤졌다. 스웨덴의 ‘민주당’, 덴마크의 ‘인민당’, 핀란드의 ‘진짜 핀란드당’, 오스트리아 ‘자유당FPO’, 그리스의 ‘금빛 새벽당’, 이탈리아의 ‘북부 리그당’은 모두 외국인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의 ‘민족전선’도 마찬가지다. 좌파보다 더 급진적인 경제 정책과 우파보다 더 급진적인 도덕 정책으로 세계화에서 낙오되고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서민들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러한 지지가 파국 이외에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코엔은 “포퓰리즘 부상이 빚은 두 번째로 끔찍한 사건은 2016년 10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110p)라고 한탄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 번째 환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연속으로 나타나는 이런 위기와 단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시대가 소리 없이 보여주는 현상들은 과연 어떤 병일까? 그 대답은 산업세계라는 문명의 붕괴와 더 이상 후계자를 찾기 힘든 진보 사회의 커다란 어려움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의 시대를 부르는 ‘후기산업사회’라는 명칭이 많은 오해를 낳는 것 같다. 후기산업사회를 두고 좌파는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것으로, 우파는 노동 가치라는 기본 가치로 복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두 시각 모두 틀렸다. 후기산업사회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최근 들어 걷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코엔은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생겨났던 환상,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9년에 발간된 장 푸라스티에의 중요한 저서 『20세기의 큰 희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경제학자에 따르면, 농경사회에서는 땅을, 산업사회에서는 물질을 가공했다.

그런데 이제 많은 시간을 물건보다는 건강이나 교육, 여가와 같이 사람에게 쏟는 이 새로운 사회의 희망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었다. 인간화의 길을 걷던 경제학의 이런 염원은 그러나 배반당하고 만다.




푸라스티에는 오늘날 사회의 불굴의 성장 욕구를 과소평가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서비스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 있을 수 없다. 전자의 소득이 후자의 소득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유치원 교사나 간병인 같은 인적 서비스는 새로운 세상의 깃발이라기보다는 아주 낮은 임금의 영역에 맡겨져 있던 것들일 뿐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선동했듯이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1950~1960년대 산업사회에서처럼 더 이상 15년마다 소득이 2배로 오를 수는 없게 되었다. 구매력 상승이 가능하려면 연극 무대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감으로써 관객의 숫자를 대폭 증가시키는 연극배우처럼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규모의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탈산업사회는 숱한 시행착오 끝에 적절한 명칭인 ‘디지털 사회’라는 제대로 된 길을 이제는 찾은 것 같다. 규모의 효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정보가 취급할 수 있는 정보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이 강제로 거대한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사전에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있으면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은 무한대의 고객을 돌보고 배려하고 충고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미래를 예고하는 영화 「그녀Her」에는 ‘감정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한꺼번에 수백만 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런 것이 바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세상, 즉 호모 디지털리스가 예고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 우리의 의문은 치료약이 병보다 나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냐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면서 근심거리가 늘어나지 않을까? 페이스북과 넷플릭스를 거치면서 새로운 플랫폼 위에서 이뤄지는 컨베이어벨트 식의 연쇄노동이 사람에 대한 테일러주의 시스템 관리로 변하지는 않을까? 산업사회의 해묵은 문제가 이를 대체한 사회 한가운데에서 시간의 엄청난 굴절로 인해 다시 제기되는 중이다. 도덕 붕괴나 금융 위기와 같은 그 모든 단계를 다시 밟아야 할까? 우리는 그때보다 잘 할 수 있을까? 그 의미를 잘못 알지 않았다면 역사는 지금 쓰이는 중이다.

저자 코엔의 진단과 평가, 대안은 마치 대한민국에 곧 닥칠 문제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의 분석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이 우리가 21세기 들어 겪었거나, 겪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해 부응해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이 책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저자 : 다니엘 코엔(DANIEL COHEN)


오늘날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파리1대학, 파리경제대학, 파리고등사범학교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양한 저서를 통해 경제 현상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이고 바람직한 경제 정책에 대한 사회적 발언도 활발히 하고 있다. 경제학자로서 개발도상국 경제에 중심 관심을 두고 특히 개발도상국의 부채 및 성장 문제에 관해 많은 연구를 수행해왔다. 시장방임주의적 담론에 비판적이며 스스로를 실용적 경제학자로 규정하는 코엔은 프랑스 정부와 국제기구의 정책 수립에도 적극 관여해왔다. 『악의 번영』은 2009년 초 출간되어 프랑스 아마존 종합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프랑스 총리 지원 기관인 경제분석위원회 위원과 OECD 개발센터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르몽드』 편집위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화폐, 부, 부채』 『세계화와 그 적들』 『악의 번영』 『호모 이코노미쿠스』 『출구 없는 세계』 등이 있다.


역자 : 김진식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울산대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르네 지라르에 의지한 경제논리비판』(2005), 『알베르 카뮈와 통일성의 미학』(2005), 『세계 프랑스어권 지역의 이해』(2009), 『르네 지라르』(2018), 『모방이론으로 본 시장경제』(2020) 등이 있다. 역서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공역, 1993), 『희생양』(1998),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2004), 『문화의 기원』(2006),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2007), 장-미셸 우구를리앙의 『욕망의 탄생』(2018)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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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돈 - 금융 투시경으로 본 전쟁과 글로벌 경제
천헌철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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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강국 대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의 경제 전망은 밝지 못한 지금이다. 서구나 미국에 비해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내 세계의 모범국가처럼 회자되지만 우리의 삶은 그다지 녹록치 않다. 더욱이 휴전으로 총탄이 오가지는 않지만 대치하고 있는 북한은 핵무기로 옥쇄작전을 펼치고 있어 늘 전쟁 위협이 잔존하고 있다. 이념과 경제 등에서 북한을 압도하지만 핵무기는 비대칭 전략무기여서 경제력만으로는 북한과 일대일 전쟁에서 우위에 있다는 평가도 무의미하다. 정부의 평화, 경제 협력의 노력도 미국과 중국이 끼어들면 남북 문제가 아니라 세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쉽게 진척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은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막대한 재화의 소실을 가져온다. 이것은 전쟁의 겉면이다.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해 모든 전비를 충당한 전쟁은 없다. 화폐의 발행이나 국내외 차입으로 전쟁을 치른다. 여기서 중앙은행이나 금융기관이 개입한다. 전쟁은 금융의 진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작용된 구조가 금융시장의 형성과 제도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적 개념의 이자를 주고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방식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후 큰 규모의 전쟁에서 다양하게 변화ㆍ발전해 왔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전개되는 내밀한 움직임, 특히 돈의 흐름은 쉽게 알아채기는 어렵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전쟁 충돌을 피하고 평화 통일을 이루려는 우리 정부의 정책 지향성은 겉돌고 있는 형국이다.





이 책의 1부는 전쟁의 전개와 함께 금융 비사, 금융의 역사를 바꾼 사건과 사기, 돈의 부메랑 등 전쟁과 관련된 금융 안팎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 패배한 금융적 측면의 원인은, 프랑스는 정복지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전비로 삼았고 영국은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자금을 전비로 삼았다는 데 있다. 결국 이 전쟁은 금융 시스템 간의 전쟁이었으며 이후 영국의 금융 시스템은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 수행 국가는 자국에 있던 적국의 자산을 서로 몰수했다.

이런 행위는 국내 금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위험이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국가 위험이 결정된다.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법과 규범이 갖추어져 있고 집행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국제금융센터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전쟁과 금융은 서로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2부는 국가 수출금융 지원 체제의 탄생,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근대 글로벌 경제와 금융의 역할, 글로벌 금융 지원의 환경과 변화 등을 살펴보고, 각국 민간 부문의 금융 발달 정도와 금융 환경 수준을 반영한 국가 주도의 금융 지원 형태가 진화하는 모습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요소와 대안을 모색하면서 몇 가지 경쟁력 화두를 제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 강대국은 세계화와 자유무역으로 세계 경제를 장악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유럽은 국가가 중심으로 경제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산업을 보호하고 수출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들을 시행했다. 그리하여 관세 전쟁이 시작되었고, 수입 쿼터와 수출 승인제가 도입되었으며, 산업을 국유화했고, 전략 산업 보호를 위해 보조금을 지원했다. 보호무역이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영국은 자유무역의 흐름을 회복하려 했다. 영국은 1919년 실업자를 구조하고 파괴된 수출을 재건하기 위해 수출신용보증부(ECGD)를 설립했다. 국가 수출금융 지원 체제로서 공적 수출신용기관(ECA)이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대공황의 영향을 받은 선진국들은 무역과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공적 수출신용기관을 발족시켰다.

1,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세계 은행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고 미국이 그 지위를 이어받아 팍스아메리카 시대가 도래했다. 전후 도입된 브레턴우즈 체제로 자본의 이동이 통제되었지만 공적 수출신용을 통해서 자본의 이동이 가능했다.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공적 수출신용 분야에서 국제적 규범과 질서를 구축하면서 전 세계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려는 내용은 주로 1, 2부에 들어 있다.



용병으로 군대가 조직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나를 지키는 병사가 되는 시대는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이해가 안 가는 점 투성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 역시 전쟁이라는 거대한 물자가 필요한 이벤트에서 어떻게 금융을 움직일까에 대한 고민과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등장한 사례다.

금융이 전쟁을 통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나폴레옹의 반격 워털루 전쟁에서 등장한다. 지금까지도 금융계를 지배한다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제대로 돈줄을 쥐는 시대의 탄생이다. 영국 정부의 승인 아래 이들이 부지런히 돈을 움직였고 웰링턴 연합국은 승리하게 된다.

프랑스가 운영하던 세금에 의한 전쟁비용 조달은 더 이상 금융이라는 신무기에 먹히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가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후 숨은 권력자로 탄탄대로를 구축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독일에게 가혹할 만한 배상금을 요청했던 부분은 결국 인과응보라는 결과로 돌아온다. 역사의 아이러니기도 하다. 물론 승자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도 들어간 비용이 있으니 한몫 단단히 잡고 싶었겠지만 쥐구멍을 만들어 놓고 쥐를 몰아야 한다는 기본을 망각했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나치의 리더들의 모습을 찍은 유명한 사진을 보면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프랑스가 어떤 모멸감에 빠졌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지금도 사실 회복되지 못했다. 1조 마르크로 오렌지 2~3개를 살 수 있는 수준의 인플레이션이라니 독일 국민들이 겪었을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은 그야말로 엄청났으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히틀러라는 화가출신의 어설픈 정치가가 카리스마로 온 독일을 집어삼킨 힘의 원천이다. 돈은 이렇듯 때로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게 만든다.

최강의 발트함대가 시행착오로 먼 길을 돌아와 맞붙은 덕에 일본에게 대패하게 된 러일전쟁, 참 웃기지도 않는 전쟁이었지만 어쨌든 전쟁 주머니가 얄팍했던 일본은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하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게임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의 규모가 뒤졌던 일본은 이 상황에서 약속 받은 전쟁보상금을 받지 못했던 대목은 흥미롭다. 경제적 독립성과 규모가 전쟁의 결과조차도 뒤바뀌는 상황을 만든다는 데 집중해야 한다. 1차 대전 독일과는 정반대의 대목이어서 그렇다.



강대국들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하면 국제공조방식으로 위기에 대처한다. 이 이야기는 결국 강대국이라는 울타리에 속하지 않는 국가들은 언제든지 금융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가 1997년,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금융 위기를 맞은 바 있다. 한국은 우리의 금융 건전성이나 미래가능성은 마음만 먹으면 한방에 괴멸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약하기만 존재였다. 그 이후 다시 새로 시작한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두 차례의 금융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지금은 경제, 문화, 방역 등의 성공적인 정착으로 아직까지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시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샴페인은 와인이 될 때까지 숙성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우리는 이른바 경제 강대국들의 힘에 휘둘리고 있고 대외무역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몇 조를 투자한 중국에서 '사드 배치'를 이유로 트집이 잡혀 쫓겨난 국내 그룹사도 우리는 착잡한 심경으로 봐야만 했다.



저자에 따르면 금융이 전쟁의 승패를 갈라놓듯, 현대 금융전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국가적 체력은 금융을 이해하고 많은 국민들도 이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어린이들부터 금융을 가르치는 방법도 좋지만, 국가는 물론이고 언론에서도 거짓뉴스 생산을 그만하고 생산성 높은 금융과 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실력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IMF 발발 시점처럼 일본이 언제든지 등에 칼을 꽂는 상황이 되어도 스스로 독립적인 자생이 가능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똘똘 뭉쳐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중소기업과 우수한 기술 위주의 탄탄한 성장, 자율경쟁과 연구개발 두가지 방향성에서는 해외사례로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취약한 산업구조상에서 백 번 맞는 주장으로 보인다. 문제점은 이런 주장이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 왔지만 개선이 안되고 위기가 되풀이되는 점이다. 특히 대기업 편향 경제구조는 개선과 개혁을 하겠다고 한 지 20년도 넘었지만 아직 제자리걸음이다. 2차, 3차... 끝없이 이어지는 하청 구조와 갑질문화, 기술 빼앗기 등 국가가 손댈 부분조차 목소리만 높이지 여전한 실정이다. 이젠 개선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자체가 독자 생존할 수 있는 투명하고 공정한 보이는 돈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면 언제 강대국의 음모 속에 많은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그 한 번의 치명타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각 경제 주체들이 자각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위기 상황은 경제 구조의 변화를 가져온다.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을 규명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위기 이후의 상황에서 언제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졌다고 한다. 언론 보도를 유심히 보면 각종 지표들이 빈부 격차의 심화를 해년마다 알린다. 보수 정권이나 진보 정권이나 빈부 격차 해소에는 힘이 부치는 모양새다. 보수는 안 해서 어렵고, 진보는 해도 안 되는 문제다. 그렇다면 금융 위기에 버금가는 세계적 충격인 이번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 이후의 상황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전쟁을 치르기 위해 찍어 낸 돈이 전쟁이 끝난 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역사적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코로나-19가 퍼지면서 경제의 불확실성이 짙어지고 일자리가 더욱 고갈되어 가는 현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시대의 경제ㆍ금융은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국제경제 및 금융을 규정하는 질서와 규범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글로벌 경쟁력이 꺾이고 있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는 데 더해 미국 등 선진국의 견제를 받게 되면 한국의 미래는 그리 낙관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 지식도 별로 없고, 큰돈도 벌어본 일이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이 책에 의존한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일본·미국의 ‘문화로부터 배운다’, 부족한 민간 부문을 보완하여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자’, ‘스스로 노력하는 기업을 도와주자’ 등을 경쟁력 화두로 제시한다. 그리고 글로벌 비즈니스를 디지털로 연결하여 글로벌 강자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이 주장에 동의한다.

K-POP, 한류, K방역 등 우리가 세계에서 인정 받는 분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저자의 현실적인 조언에 귀 기울여 본다.



누구나 돈을 벌 때는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액수를 정해놓고 돈을 벌지는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만큼의 돈을 갖다줄지 아무도 모르고 실제 자신이 정하는 목표액이 있다할지라도 목표대로 성공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모든 가치의 척도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뭘할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우선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에 인간의 본초적인 '욕망'이 합쳐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될 뿐이다. 일본이 한참 잘나가던 80년대 미국인들은 그들을 경멸하며 '경제 동물'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인간적인 양심이나 여타 환경은 돌보지 않고 앞서 표현한 대로 돈 버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국인들은 동물이라는 비아냥을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괴물에게 먹힐까봐 전전긍긍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런 비아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부자의 "나 돈 없다" 식의 엄살 같은 조소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지금 이 책 『보이지 않는 돈』은 결국 역사의 굴곡을 이끌어간 돈의 힘과 점점 치밀해지는 돈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돈을 주무르고 이용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가 포스트 코로나를 앞두고 거시경제에 어떤 변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삶의 목표를 지향하고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청할 만한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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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갓 오 마이 로드 - 바이러스 · 종교 · 진화
방영미 지음 / 파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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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또 종교 탄압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후 한 번도 박해하거나 주어진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 갈등은 종교와 종교, 같은 종교 안에서의 분파 등으로 야기된 적이 있지만 정부는 일체 중재하거나 어느 쪽 편을 들어 다른 쪽을 박해한 적도 없다고 한다. 최고 권력자 대통령이 된 후 비록 대통령이 어느 종교의 신자이어도 다른 종교에 압력을 가하거나 종교 활동을 저지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권과 갈등이 왜 생겼나. 어느 한 종교인의 종교 활동이 아닌 정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종교와 정부가 갈등이 있다면 정부의 탄압 때문이 아니라 한 종교인의 정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예전 군부독재 시대에도 없던 정치와 종교 갈등이 왜 21세기 코로나19로 혼란한 틈에 일어났나. 여기서 독자가 '정부와 종교 갈등'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정치의 종교 탄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종교 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인도 아니다. 그냥 대한민국의 떳떳한 국민이고, 서민으로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들지도 않고, 들 이유도 없다. 다만 지난 4.15 총선거 때는 종교인 자신의 소신이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8.15 광화문 집회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번 정치와 종교 갈등은 어느 한 종교인의 정치 활동을 정부가 막은 것이다. 그 종교인은 현 정부를 비난하고 신자들을 모아 집회를 갖고 정치 세력화했다. 그 종교를 믿는 신자들을 정치 선동으로 시위 대열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에 정부는 법에 의한 법 집행을 했을 뿐이다. 코로나19 세계적 감염병으로 전 세계가 삶의 활동도 중단한 채 감염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방역 지침을 지키지 않고 정치 집회를 갖고, 신자는 물론 수많은 국민들에게 감염의 공포감을 주었다. 이른바 8.15 집회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 책 『오 마이 갓 오 마이 로드』의 방영미 저자는 우리 시대 종교의 존재 양상과 신앙의 문제를 경쾌하고 예리한 필치로 펼쳐내고 있다. 몇몇 학자의 주장처럼 종교는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다. 저자는 종교가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깊게 들여다본다.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했을 때, 개신교 일각에서는 종교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라는 탄식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의 민족해방 투쟁과 교육, 복지 등에 관해 개신교가 기여한 바를 잘 알고 있다. 한때 기독교인은 존경받는 대상이었다. 그렇게 존경받던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언젠가부터 사회의 발목을 잡는 세력이 된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극단적 반공주의와 소수자 혐오의 정서를 퍼트리는 전초 기지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그런 문제 제기가 전혀 근거 없지 않았다는 점을 어느 정도 드러냈다.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저버려 교회는 바이러스 전파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거친 입으로 비난받았던 전광훈 목사는 드디어 국가의 방역 체계를 위해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

이에 저자는 “한국교회는 가뜩이나 추락 중이었는데, 전광훈이라는 망가진 날개로 수직 낙하의 가속도가 붙어버렸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소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탐욕과 거짓 위에 세워진 위선의 교회를 지금 제대로 붕괴시키는 중이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8·15 극우집회를 계기로 개신교에 대한 반감은 크게 확산되었다. 음식점 등에 ‘기독교인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붙기 시작한 것은 많고 적음을 떠나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이 책은 코로나19의 시대 기독교 또는 종교가 가야 할 길을 성찰하고, 세상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짚어가고 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 확산에 복무했다. 이북에 기반을 두었다가 월남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정권과 결탁해 사회의 진보세력과 상식세력에 빨간 덧칠하기 여념이 없었다. 점차 레드 콤플렉스가 퇴색하면서, 혐오의 표적은 동성애와 이슬람교인 등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소수자를 향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퀴어 축제가 열릴 때면, 한쪽 편에서 난리굿을 펼친다. 한국 사회의 일반 시민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감에도 개신교는 한참 더딜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변화의 흐름을 가로막으려 든다. 시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짜뉴스까지 퍼트려가며 막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차별금지법’ 반대는 특히 동성애자를 향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독자는 의견이 약간 다르더라도 독자 자신의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하고 저자의 생각과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축자영감설’과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성경무오설’에 근거해 동성애 반대의 근거를 제시하지만, 해석학적 맥락에서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근거는 다소 빈약하다. 저자는 일단 동성애 문제를 성서에 기반을 두고 신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매우 어렵다고 한다. 성문화가 구약시대 다르고 신약시대 달라서 같이 놓고 정리도 잘 안 될뿐더러, 그 구절들이 모호해 해석상 합의를 보기가 거의 불가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한때 문명과 문화를 이끄는 최첨단이었으나,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서 처지고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형국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그런 점을 여지없이 노출시켜, 혐오와 차별의 발신지였던 기독교는 ‘기독교인 출입금지’라는 문구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이 그토록 제정을 반대했던 ‘차별금지법’의 수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약간 조롱 섞인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비판의 소리를 듣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종교에 대해 뼈아픈 성찰을 전개하지만, 아이를 목욕시킨 후 물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버리는 태도를 경계한다. 종교의 여러 폐단 못지않게 종교가 인간사회에서 이어온 긍정적 측면과 문화의 총체라는 사실마저 부정하지는 말자고 한다. 그러면서 21세기의 종교와 신앙의 양상을 제시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제도종교에 구속받지 않는 신앙의 양상은 사실 기독교가 융성했던 서구사회에서 등장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다. 일요일에만 경건한 마음으로 종교예식에 참여하는 신자를 조롱하는 말이지만, 한편 어찌 되었든 주일을 거르지 않아야 한다는 제도종교의 불문율을 반영한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특히 코로나19가 함께 종교 예식을 치르는 데 치중한 제도종교의 관행에 타격을 가했음을 지적한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종교 예식이 중단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됨으로써 ‘대면’의 신앙생활에서 ‘비대면’의 신앙생활이 함께하게 되었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는 처음엔 종교계에 극심한 타격을 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신앙생활의 폭을 넓혀주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제기했던 제도종교에 매이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자는 논지와 맥을 같이한다.



책에 따르면 중세 말기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사람들은 성당 안에 들어가면 그 혹독한 감염병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임으로써 병은 더욱 확산되었고, 그들이 믿었던 피난처는 병의 전파지가 되고 말았다. 최근 코로나19를 둘러싼 종교계의 모습은 중세기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지 모른다. 코로나19를 통해 스스로 온전히 돌아볼 수 있다면, 본연의 역할이라는 차원에서 두고 본다면 이 사태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역설적으로 종교일 수 있다.

저자는 무지몽매한 종교를 극복해야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 수 있다고 재차 주장한다. 시대는 변하고 종교가 관할했던 많은 영역은 일반 사회로 옮겨졌다. 이를 다른 말로 ‘세속화’라고 하는데, 건강한 종교는 사회와 조화해야 한다. 세상의 상식과 어울리며, 시민적 감성과 수준을 외면하지 말아야 종교는 건강해지고 그 본연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현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된 종교의 속살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심도 있게 분석했다. 저자의 심도 깊은 비평은 더는 외면받지 않는, 더는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에서 활기차고 건강한 종교와 신앙생활의 첫걸음을 떼게 해준다.



신학은 종교 간 울타리를 제거하는 일에 복무해야 한다. 그래서 경계 없는 세상이 되도록 말이다. 교단을 넘어선 종교 간의 화합이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교단 간의 배타적 울타리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종교인들끼리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말씀이 곧 생명이요, 진리요 빛이다. 그런데 우린 바벨탑 이후 여전히 소통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라마다 언어가 달라서 기호 자체가 소통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형식적으로만 같은 언어를 사용할 뿐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지금의 현실이다.(p. 213)


현대인은 실증적인 근거 위에서 실존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나와 무관한 신이 내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잘 차려진 밥상이라도 내가 먹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신을 연구 대상으로 축소하고 객체화해 박제하는 순간 우리의 여정은 막다른 곳에서 끝난다. 결론이 정해진 이상 가닿을 데가 없어져버리는 것이다.(p. 234)


신의 전지전능은 관점에 따라 종교에 따라 신앙심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개념이다. 그러니 그걸 굳이 공동체가 토론하고 논의해서 하나로 합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인간이 내 안의 신성을 발휘한다면, 구태여 신이 선한지 악한지 유능한지 무능한지 따질 필요도 없다.

다수에게 결정권이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자신의 탐욕을 내려놓고 선량한 마음을 드러낸다면, 저절로 악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며 그만큼 고통의 총량도 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p. 244)



저자 : 방영미


자가격리의 달인, 자달 방 박사는 사춘기를 격하게 겪고 사회를 알고자 사회학과에 진학한 결과 사회성을 잃었다. 국문학 석사를 거쳐 글쓰기 강사로 일하면서 동화작가로 등단했으나 동화적 세계관을 잃었다. 이후 인간의 본성과 종교에 회의를 느껴 종교학 박사가 되었다. 학사 둘, 석사 둘, 박사 하나. 공부할수록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게 두려운 학위 수집가 1인. 현재 우리신학연구소,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연구위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자는 팟빵 ‘종교모두까기’의 운영자로 코로나19 이전이나 이후나 한결같이 제도화된 종교를 모두 까고 있다. 팟빵 사씨맨투맨의 출연자로 시사·예능 방송에서 교양 지식을 담당(아마도 시작은?), 극우 유튜버 들의 동태를 살피며 극우 논리를 습득하다 급기야 멘탈 붕괴, 이로 인한 자아 이탈을 해탈로 오인하는 정신승리 과정에 대한 분석가로 거듭나고 있다. 종교학 전공자, 종말론 묵시록 연구자로서 방 박사는 말한다. 바이러스 테러를 운운하며 정작 교회가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 돼버린 현실에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나와 우리 이웃이 덜 상처 입도록, 이미 내상이 깊다면 치유할 수 있도록 종교를 아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여겨 이 책을 썼다.

죽을 때까지 난관을 공부로 극복하는 학생이기를 원하며, 집단지성을 믿는 대중추수적 성향으로 인터넷 댓글 읽기를 즐긴다. 방 박사가 꿈꾸는 세상은 온 세상 사람들이 미친 듯한 탐욕을 버리고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답게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만 순화하면 이 지구가 곧 천국이다. 그것이 종말론의 요지이고 종교의 역할이라 믿는 구도자 소시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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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여왕
가와조에 아이 지음, 김정환 옮김 / 청미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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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학교 다닐 때부터 유난히 수(數)에 약했다. 산수를 배울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수학'을 배우는 중학교 때부터 시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수학과 멀어진 때는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대입 준비도 수학이 적게 반영되는 '문과'를 선택하려 했으나 집안에서 '이과'를 강권하는 바람에 이과반으로 편성됐다. 다른 과목은 별로 다른 것이 없었지만 이과는 수학1에 이어 수학2도 있었다. 당연히 시험 성적은 늘 수학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게 나왔다. 이후 대학은 고집을 꺾지 않고 문과로 택했다.

수학은 그렇게 멀어졌다. 대학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수학이 필요없었다. 산수 정도만 잘해도 되는 게 사회였다. 직종도 숫자가 필요한 경리, 재정 관련 부서는 피했다. 이 책 『수의 여왕』도 SF소설이니만큼 숫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천운, 재물운에 쓰이는 '운수'인 줄 알았다. 오해였다는 것은 책을 받아보고서야 확인됐고, 운수(運數)의 수도 숫자를 뜻하는 '셀 수'임을 사전을 찾아보고야 알게 됐다. 주의력 부족이었음을 뒤늦게 후회한들 어쩌랴. 그래도 억지로 이해하다시피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SF소설을 수학을 모티브로 쓰거나 유명 작품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촘촘히 읽은 게 그나마 위안이 되고 새로운 분야의 독서에의 욕구도 증가했다. 빨리 읽는 것보다 이해하면서 느릿느릿 읽으면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한층 더 크다는 점을 확인한 것도 이 책을 읽은 보람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이렇게 골치 아픈 수학을 갖고 썼지만 이해가 어려운 독자 같은 사람을 위해 저자의 풀어쓰기의 묘미도 애착을 갖게 한 이유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수학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적어도 독자에게는 그렇다.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운명수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리고 그 운명수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고민거리와 생각거리도 안겨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운명수로 상대방에게 저주를 거는, 아름답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메르세인 왕국의 왕비에 대항하여 왕비의 양녀 나쟈가 자신의 잔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환상적인 모험의 이야기이다.

수가 운명을 지배한다는 다소 설득력 떨어지는 명제를 소설, 그것도 SF소설로 엮어낸 저자의 글쓰기 능력과 수학 지식 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운명수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나쟈와 요정들의 판타지 대모험 이야기는 그렇게 독자와 가까워졌다.





저주와 마법의 세계에서 요정들의 도움으로 성장해나가는 나쟈의 이야기를 다룬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읽다 보니 학교에서 배웠던 수학 이론(사실 이름이나 대충의 공식과 기호들만 생각나지만)들이 생생하고 재미있게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소설은 수학에 대해서 품고 있던 거부감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학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지적인 놀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매우 잘 표현됐지만 저자는 독자 같은 상상력 부족인 분들을 위해 등장인물을 책 앞에 컬러그림으로 배치시켰다. 그림을 그리고 책 앞에 배치한 것은 당연하게 편집진의 의도겠지만. 독자는 이 등장인물들 때문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는 멋진 시간이 됐다.





스토리는 수학과 다르게 무척 단조롭다. '단조롭다'는 표현은 수학에 비해서 그렇다는 독자의 판단이다. 8년 전에 일어난 참극으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언니 비앙카가 행방불명된 이후, 나쟈는 왕국에서 왕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죽이며 살고 있다. 왕국의 왕비이자, 나쟈의 양어머니는 적수에게 저주를 걸어 없애버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우연히 이상한 편지를 받게 된 나쟈는 편지에 적힌 곳에서 신비로운 거울을 발견하게 된다. 거울을 자신의 방으로 가져온 나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거울 속에서는 5명의 요정들이 왕비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운명수”를 분해하는 계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는 이 세계에서는 금지된 행동으로, 계산을 하는 것 자체가 엄금된 것이었다.

이 요정들은 왕비에게 납치되어 이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다. 요정들은 나쟈에게 자신들이 이 거울의 방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줄 열쇠인 운명수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태초에 수(數)가 있었다. 모든 존재의 근원, 어머니 수, 즉 수의 여왕인 최고신은 대기(大氣)를 낳고, 신들을 낳고, 대지를 창조하고, 요정을 만들고, 그리고 인간을 만들었다. 어머니 수는 모든 ‘자식’에게 수를 하나씩 부여했다. 생명 그 자체, 우리를 형성하는 운명수를.”


“제가 약한 인간이고 저주에 맞설 수 있는 운명수를 갖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제가 좀더 강하고 더 좋은 운명수를 가졌더라면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 거예요.”


요정들과 함께 성에서 도망친 나쟈는 최초의 1인의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낙원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낙원장과 그녀의 딸 타니아를 만난다.

그들의 도움으로 요정들은 다시 힘을 회복하고, 왕비와 왕국의 비밀에 대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나쟈는 다시 한번 왕비에 맞서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자 한다. 보잘것없는 운명수를 가진, 나쟈는 거대한 운명수의 소유자인 왕비에 맞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수학과 판타지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설정은 독자들이 부담 없이 수학의 세계로 모험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나쟈와 요정들이 일종의 퀘스트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모습은 흥미를 주고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가는 나쟈의 모습은 자그마한 감동마저 선사한다.

이야기 곳곳에 숨어 있는 수학이라는 매개는 자연스럽게 수학의 원리를 떠오르게 하고, 수학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수, 피보나치 수열, 페르마의 정리, 삼각수, 소인수분해, 메르젠 수 등(일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수학 용어) 어려운 수학적 개념과 이론을 꺼내놓지만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건 전개와 해결 과정에 따라 재미있게 풀이해준다. 독자로 하여금 "수학은 아름다운 학문이구나"라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수학과 SF소설이 완전 다른 분야가 아니라 재밌게 공유되는 부분도 많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줌으로써 교묘하게 수학이 어려운 사람에게도, SF소설이 너무 허황된 만화 같은 수준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서도록 바꿔놓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수학이 어려운 독자들도 수학과 판타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역력하다. 매력적인 작품이다.


저자 : 가와조에 아이


작가. 규슈 대학교 문학부 문학과(언어학 전공)를 졸업하고, 2005년 동 대학 대학원에서 박 사학위(문학)를 취득했다. 전공은 언어학, 자연 언어 처리이다. 국립 정보학 연구소 연구원, 쓰다주쿠 대학교 여성 연구자 지원 센터 특임 준교수 등을 거쳐, 2012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 정보학 연구소 사회 공유 지(知) 연구 센터 특임 준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게으른 족제비와 말을 알아듣는 로봇』, 『백과 흑의 문─오토 마톤과 형식언어를 탐험하는 모험』,『정령의 상자─튜링머신을 둘러싼 모험』,『컴퓨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등이 있다.


역자 : 김정환


건국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통번역과를 수료했다. 21세기가 시작되던 해에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 한 권에 흥미를 느끼고 번역의 세계를 발을 들여,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력이 쌓일수록 번역의 오묘함과 어려움을 느끼면서 항상 다음 책에서는 더 나은 번역,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번역을 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공대 출신의 번역가로서 공대의 특징인 논리성을 살리면서 번역에 필요한 문과의 감성을 접목하는 것이 목표이다. 야구를 좋아해 한때 IMBCSPORTS.COM에서 일본 야구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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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 언젠가 너로 인해 울게 될 것을 알지만
정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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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사랑'을 생각해본다.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사랑은 삶의 화두였고, 지속되면서도 계속된 명제다. 즉, 사랑은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자손 유지에도 필요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고 유지하는 데도 절대적인 힘이 된다. 이웃 사랑은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서로의 안전에 협력 가능하고 삶의 과정을 함께하면서 더욱 돈독해진다. 이밖에도 사랑의 힘은 종교, 이념, 국경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인류가 지속하는 만큼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자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도 이 사랑의 힘이 밑바탕이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래서 진부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담론은 우리 생활을 전반적으로 관여한다. 언제나 가슴 떨리고 또 어떤 순간 놀라운 행복감과 충만함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담론은 이제 다른 각도, 다른 표현으로 나타난다. 글로써 나타내도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표현은 다르지만 사랑 예찬은 계속된다.

20여 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으며, 자신과 라디오를 꼭 닮은 서점 리스본과 2호점 서점 리스본 포르투를 가꾸고 있는 정현주 작가도 동참한다.



그는 어쩌면 한국에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자주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쓰는 사람이다. 그가 지금껏 써낸 사랑 3부작 시리즈 《그래도, 사랑》 《다시,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 는 지금껏 사랑이 어려웠던, 그리고 지금보다 행복한 사랑을 꿈꾸는 대한민국 100만 남녀들의 일상과 가슴을 파고들며, 수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이 책은 그의 사랑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이번에 개정판으로 출간되며 새롭게 옷을 입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푸르른 하늘과 달과 나무가 공존하는 사막의 어떤 한가운데서 만나는 남녀의 모습을 표지로 구현하며, 텍스트를 읽었을 때 전해지는 저자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필치를 표현했다. 두 사람이 마주본 모습은 새로운 만남과 시작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랑, 영화와 음악, 책을 두루 아끼는 저자의 다양한 취향과 매력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작품으로 가벼운 듯, 가볍지 않는 매력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마음의 울림과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정현주 작가는 두 번째로 쓰는 프롤로그를 통해 “이별하고 울던 날 여기 적힌 몇 줄이 등을 쓸어주는 것 같았다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많은 분이 다정한 말을 돌려주셨습니다.”라며 그간 독자들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청년 세대의 삶이 고달파지면서 '5포 세대'라는 말이 나왔다. 출산이나 결혼은 물론 연애까지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어려운 시점에서도 이 책은 제목처럼 그래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만이 답이고 힘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다만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저자가 책을 통해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 대개 '연애 실패'로 단정한다. 왜 실패했나는 이미 관심 사항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 물음에 대한 답하지 않을 경우 어느 누가 나서서 해답을 찾으라고 강요하거나 권유하지 않는다. 때문에 실패한 사랑은 잊혀지기 쉽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사랑에 대한 감정이 새로워진다.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면서도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준다. 또 사랑 그 자체를 통해서 행복에 가까워진다. 인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특별한 사람,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람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오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도 나름대로의 특별함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는다.



사랑을 포함한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솔직함이 중요하다. 결별 과정에서도 지나치지 않은 솔직함은 상처를 줄일 수 있다.

연애 과정에서 입는 상처는 헤어질 때 특히 심한데 이걸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연애할 때의 기억이 헤어지고 나서도 나를 괴롭힌다면, 좋은 기억을 우선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연애도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의 공부다. 항상 모든 일에는 상실이라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힘들어하기보다 추억을 남겨두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저자는 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보다 깊고 우직한 사람이 되어보라고 권유한다.

따뜻한 사랑을 하면서 인생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가고 싶다면 느긋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빈자리를 채우려는 노력도 좋지만 자신이 여유가 있어야 상대에게도 여유를 베풀면서 보다 지속가능한 사랑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독자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강해지면서도 사랑을 품는 것이다. '사랑'. 그래야 상처를 극복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삶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도전하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과 격려를 준다. 그래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우리 모두 누리고 살자는 저자의 간곡한 '사랑론'이 의미가 있다.



문제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들은 대개 아주 심플합니다. 좋은 사랑 또한 그렇다고 믿어요. 너무 많은 생각은 사랑을 망칠 뿐이에요.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 속에서 커가는 것 아닐까요. 사랑에 답이 어디 있겠어요. 선택이 있을 뿐.

「사랑은 어려운 말로 시작되지 않는다」 중에서


흐름에 맡기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지만 나중이 되면 너무 늦을지도 모르죠. 가장 솔직한 자신을 만나고, 만약 이것이 사랑이다 싶으면 용기를 내면 좋겠어요. 마음을 말해보세요. 고백을 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잃게 될 거니까.

「우정을 잃을까봐 사랑을 감췄다면」 중에서


마음을 열고 또 다른 우주를 만나게 되길 빌어요. 마주 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기를. 상대와 나눌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하루가 더 부지런해지기를. 그리하여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멜빈처럼 되기를.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그런 사랑」 중에서



[우리도 사랑일까?]의 주인공처럼 살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어느새 [아무르]의 주인공처럼 늙기를 바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것도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낡은 것이 갖는 아름다움도 알게 되었어요. 마냥 새로운 것만 따라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요’라고 대답할 겁니다. 시간을 두고 지켜온 것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따로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낡아지는 것과 깊어지는 것」 중에서


사랑이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사는 집을 닮았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맞는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요. 살면서 하나씩 나에게 맞게 바꿔가야 하죠. 특별히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고쳐야 하는 게 당연하고요. 그래야 그 집에 오래 살 수 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머리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머리 몰래 병이 듭니다.

「그곳이 전쟁터라고 해도 같이 있고 싶은 것」 중에서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와 자신감, 시간이 갈수록 보면 볼수록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겠죠. 그 안에서 행복하여 새장 문을 열어두어도, 새가 떠나지 않도록 품이 넓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려는 노력 말이에요.

「행복한 새는 날아가지 않는다」 중에서



저자 : 정현주


사람과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다정한 사람. 20여 년 동안 라디오 작가로 활동했으며, 자신과 라디오를 꼭 닮은 서점 리스본과 2호점 서점 리스본 포르투를 가꾸고 있다. 별명은 정서점. 친구와 가족, 영화, 음악, 사진과 그림, 아름다움과 다양한 빛깔을 담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 이야기하기를 즐겨한다. 사랑 또한 늘 빠지지 않는 대화의 주제다. 그렇게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은 그녀의 라디오를 통해 사람들에게 마음과 이야기로 전해지며, 누군가의 새로운 사랑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잘 알고, 또 많이 쓴 사람. 사랑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담은 그녀의 첫 사랑 에세이 《그래도, 사랑》은 사상으로 행복하고, 아파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사랑 연작으로 《다시, 사랑》 《거기, 우리가 있었다》가 있다. MBC 〈별이 빛나는 밤에〉 〈꿈꾸는 라디오〉, KBS 〈최강희의 야간비행〉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 등과 함께했다. 지은 책으로 《스타카토 라디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등이 있으며 공저로 《픽스 유》가 있다.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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