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붉은 별 - 소설 박헌영
진광근 지음 / 힘찬북스(HCbooks)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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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박헌영은 민족보다 계급, 자유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택하며 조선 공산주의의 중심에 섰지만 결국 조국도 동지도 가족도 모두 잃었다. 이 책은 그의 삶을 통해 ‘이념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이 책 『반도의 불은 별 : 소설 박헌영』을 출간한 출판사의 소개글의 일부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을 중심으로, 그 내부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이념의 허상까지 파헤치는 역사소설이라고 출판사는 덧붙이고 있다. 저자 진광근은 이 소설을 통해 민족보다 이념을 앞세운 선택이 어떻게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는지 묻기 위해 집필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밝힌 대로 6.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 후 휴전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 것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은 전후 '동서 냉전'으로 불리우는 강대국의 진영 싸움에 그대로 노출됐다. 끊임없이 서로를 비방하고 옳고 그름을 진영 논리에 맞춰 따지고 겨뤘다. 우리 민족은 한시도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로막힌 휴전선을 응시하며 서로를 감시해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동서 냉전은 어느 날 갑자기 유럽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분단됐던 독일이 소련 붕괴에 따라 다시 합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련 체제 하에 유지하던 공산 사회주의는 대부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소련이란 공산 사회주의 종주국의 몰락은 결국 경제력 차이였다고 우리들은 배웠다. 이렇게 소련은 무너졌지만 대신 중국이 여전히 건재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책은 일제 하 우리나라에 착지했던 공산주의 세력 중 대표적인 인물인 박헌영의 일대기를 소설로 재구성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 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나라는 영토 뿐아니라 이념과 사상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 갔다. 이로써 6.25 이후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고, 70여년 동안 적대적으로 극명하게 갈라서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전후 세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반공, 승공으로 철저하게 교육 받았고 이념적으로도 재무장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독립운동하다 공산주의자가 된 인물들, 특히 한국전쟁 때 월북하거나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교육 어디에도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고, 관련 책들도 '금서'로 지정돼 읽기조차 어려웠다. 박헌영도 독자가 어렸을 때는 이름조차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소련이 무너진 후 비로소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해방 후 얽히고설킨 남북 관계의 원인과 전개, 그리고 인물들의 내면을 심도 있는 탐구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도의 불은 별』은 이러한 역사적 과제에 응답하며, 특히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쟁의 이면과 이념 갈등이 빚어낸 비극적 인간상을 탁월하게 조명한다. 이 책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넘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인물들의 선택과 운명을 분석함으로써 독자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미 군정 하에서 월북한 후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하고 전후 김일성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에서도 이 사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다. (김일성 정권은) 1953년 남로당계열인 박헌영·이승엽 등 13명을 간첩행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여 숙청했다. 52년 12월 1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와 종파주의 잔재 청산을 강조하는 김일성의 보고가 있은 후, 노동당은 각 정당·단체들에게 당성(黨性) 검토를 하게 하는 한편, 박헌영·이승엽 등을 체포·구속했다. 53년 7월 30일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의 12명이 기소되어 8월 3일부터 6일까지 심리가 진행되었다.

기소장에는 ①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음모와 테러·학살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 등 3가지 내용의 죄상이 제시되었다. 이들 중 이원조 징역 12년에 재산몰수, 윤순달 징역 15년에 재산몰수,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박헌영은 55년 12월에 기소되고, 그의 재판을 위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특별재판소를 설치, 최용건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박헌영의 기소내용은 ①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행위 등이었다. 12월 15일 열린 공판에서 박헌영은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으며, 그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박헌영의 유년 시절부터 숙청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 담임 선생이 가정 방문 차 헌영의 집을 찾은 일이 소개된다. 헌영의 재주를 높게 봤던 선생님이 중학 진급을 권유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안골 박첨지라는 사람의 첩으로 헌영을 낳아 기르고, 그가 등을 돌린 후 주막에서 헌영이 잡아온 물고기로 어죽을 끓여 하루하루 생계를 잇는 처지이다. 중학 진학은 어린 헌영도 꿈꾸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등록금의 일부를 내서라도 꼭 헌영을 진학시켜야 한다는 선생님의 권유에 어머니는 완고하게 무력한 자신만을 탓한다. "근디 우짠대유? 당장 입학금은 고사하고 연필값 종잇값 댈 형편이 안 되는데. 그라고 헌영이가 고기를 잡지 않으면 내는 주막도 꾸리지 못할 기고···"(p.15)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중학은 들어갔고 어찌어찌해 공부를 계속한다.(뒤에 들은 바로는 아버지 박첨지가 본처 몰래 학비를 대주었다고 서술한다.)

헌영이 조선의 역사와 조선이 처한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헌영은 선생님이라는 창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배웠고 가끔 읽는 신문을 통해 조선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에 쓰인 조선의 역사와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 즉, 일본의 조선 지배는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이라는 헌영의 믿음은 한치 의심이 없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일제 강점기 때 양반과 상놈으로 반상을 철저히 구분하여 지배와 피지배 구조가 영속되는 조선 사회는 혁파되어야 마땅했다고 헌영은 생각했다. 하지만 양반들은 자신들만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억압할 뿐 모순된 세상을 혁파할 힘을 가진 세력은 조선 어디에도 없었다. 그 모순을 혁파한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일본은 조선을 개화시킬 것이고 제 뱃속만 챙기는 양반들로부터 억압받는 백성들을 해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일제 강점기 때 식민사관에 의한 교육의 내용을 받았을 것으로 독자는 이해된다.


하지만 헌영은 자신의 생각이 방향을 잘못 설정한 나침판이요, 굴절되고 왜곡된 창을 통해 정립된 것임은 후일에야 깨달았다.(p.19) 헌영의 생각에 변화를 준 것은 〈동아일보〉였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창간 때부터 일본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논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박헌영의 공산주의는 우리나라 독립에 먼저 방점을 찍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헌영은 동아일보를 꾸준히 구독하며 의식의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독립을 위해 더욱 더 공산주의에 매달리는 이념적 일직선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첫 체포된 것도 신의주경찰서에서였다. 이때 박헌영을 취조하고 고문한 사람은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그곳은 독립운동가들만 조사하는 특별 조사실이라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묵비권을 지키는 박헌영이 무너진 것은 고문에 의해서였다. 묵비권을 행사하던 박헌영은 "조선 내 공산당 조직과 거점을 대라."며 형언하기 힘든 고문을 가하던 노덕술에게 결국 자신의 똥을 집어 먹는 등 이상한 행동을 연출한다. 경찰도 정신이상 증세로 판단, 더 이상의 고문 없이 재판에 넘겼다고 소설은 밝힌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기에 박헌영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는지를 알면 당시 상황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재판에 넘겨진 헌영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대정(大正)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형을 살았다. 신의주 교도소에서 징역 사는 동안 어머니는 부근에 방을 얻어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친분을 갖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 김단야와 임원근는 헌영이 신의주교도소에 수감됐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면회는 위험해서 몰래 편지와 영치금만 보내왔다. 그러나 박헌영은 1년 6개월 동안 이념과 사상을 더욱 견고히 다진 시기였다고 저자는 짧은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도움을 준 스승이자 후견인인 현순 목사와의 만남으로 공산주의 이념에 빠져 들었다. 이때 현순 목사의 딸 현앨리스에게 사랑을 느꼈으나, 그녀도 좋은 감정으로 헌영을 대했지만 막상 정혼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이별이 불가피했던 듯하다. 혼자서 열병을 앓던 헌영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고 레닌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열성적인 공산주의 신봉자가 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점조직 형태로 지하에서 활동했다. 조선공산당은 항일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공개활동을 할 수 없어 고려공산당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조직의 일부를 받아 조선공산당에 열정적으로 힘을 쏟는다.


헌영은 전조선민중지도자 대회를 준비하던 중 관북의 명문 함흥 영생고보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 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여인 주세영을 만난다. 그들은 두 달만에 동거를 시작했고, 둘 사이에 딸 비비안을 두었다. 주세영은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 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시작으로 이들 부부는 망명과 도피, 그리고 번갈아 가며 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박헌영은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조직의 수괴로 7년형을 선고받았고, 서대문교도소에서 형을 살았다. 주세영은 수감 중인 헌영의 옥바라지를 5년 간 하다 어느 날부터 발길이 끊어졌다. 출감 후 찾았던 집에서 헌영은 김단야와 주세영의 동거를 목격하고 집을 나온다. 이후 심훈과 만나 조선 독립의 길에 대해 의논도 하고 그에게서 시(詩)도 한 편 받는다. 이때 심훈이 건넨 시가 「그날이 오면」이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심훈과의 만남은 헌영이 독립운동 의지를 더 다지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옥고를 치르고 또 다시 검거돼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는 생활을 여러 번 겪고서야 해방은 찾아온다. 해방 직후 헌영은 조선공산당 창당에 혼신을 다한다. 해방 정국에서 남한은 미 군정, 북한은 소 군정이 실시된다. 미 군정은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 우려가 큰 인물로 박헌영을 지목한다. '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헌영은 김일성의 요청대로 조선공산당 중앙을 평양으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관(棺)에 숨어 경성을 탈출하고 월북의 길에 오른다. 이때 박헌영은 10여명의 공산당 수뇌부 등과 함께 38선을 넘는다. 1945년 12월 말경이었다. 김일성과도 회동하고, 또 스탈린과도 만난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인공이고 '리론가(이론가) 선생'으로 불릴 정도로 공산 사회주의 이념에 통달했던 박헌영은 해방 후 대위 계급장을 달고 북한에 나타난 젊은 김일성과의 권력 다툼을 하다 김일성에 이어 2인자로 6·25에 참전한다. 모든 독자들이 다 알다시피 남한을 전격 침략한 인민해방군은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 서울에 머무른다. 이때 박헌영이 서울에 더 머무르면서 병참 보급선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병참선이 끊기면 전쟁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후방 병참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저자는 파악한 것 같다. 이 일은 후에 권력 다툼 중 체포되는 빌미가 되고 결국 박헌영은 이적 행위로 숙청돼 형장의 이술로 사라진다.


저자 진광근은 소설의 〈에필로그〉를 통해 박헌영을 "조국의 독립투쟁으로 15년의 옥고를 치렀고,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민주주의의 공화국을 꿈꾸었던 '반도의 붉은 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서도 북한에서도 잊힌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죽어서도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저자는 전쟁과 갈등을 뛰어넘어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한 부분 대사를 인용해 헌사를 남긴다.

"V는···

희망찬 전위!(Vanguard!)

단호한 폭력!(Vioence!)

과거의 흔적!(Vestige!)

철저한 복수!(Vendetta!)

전망의 제시!(Vision!)

결정적 승리!(Victory!)

고귀한 희생!(Victim!)


저자 : 진광근


경남 거창 출생으로 다올합동법무사 대표 법무사로 근무하고 있다. 대검검찰청에서 20여 년간 검찰 수사관으로 근무하였고, 틈틈히 인터넷에서 시와 수필 등을 기고했다. 현재 다올합동법무사 대표 법무사로 서민들의 법률 문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과 사건에 관심을 두고 이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 재평가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예컨대, 조선 후기 정권 실세인 민영익의 호위 무사로 들어가 짧은 시간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지주로 부상해 한일은행을 세운 인물로 알려진 조병택의 치열한 삶을 그린 장편소설 《상혼》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반도의 붉은 별_ 소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해방 후 남로당을 이끌며 ‘조선의 레닌’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지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박헌영의 초기 이념적 지향과 ‘인민민주주의공화국’ 건설이라는 원대한 꿈을 상세히 다룬다.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호치민 등과의 만남, 김일성의 무력 통일 노선과 충돌하며 점차 좌절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소설은 6.25 전쟁의 주요 국면을 박헌영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는데,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면서도 동시에 강인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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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폭발
이유소 지음 / 한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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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마음속에도." 하나의 구멍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중간 세계로 설정,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결합된 매혹적인 환상소설의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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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과 폭발
이유소 지음 / 한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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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소설 작품 『호흡과 폭발』은 주인공인 '유소'가 중학교 동창 친구의 집에서 '구멍'을 발견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니 방에 하나 터놓은 창문에서 햇빛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사그라졌다. 내가 그걸 발견한 건 그때였다.

구멍.

아주, 아주, 아주 시커먼 구멍이었다. 무슨 발판 같기도 했다. 그게 한구석 방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름은 50센티가량, 높이는 0에 가까웠다. 아니, 바닥보다 더 낮아 보였다."(p.26) 

이 소설 『호흡과 폭발』은 한 '구멍'의 이야기다. 이 구멍은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경계로 설정된다. 표제어 '호흡'이나 '폭발'이 내포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른 듯한 소재가 등장해 환상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한 독자로서는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을 차분하게 읽어본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저자 이유소의 작품 집필 의도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어느 날, 학창 시절 이후로 소식이 끊겼던 중학교 동창 고유상이 주인공 유소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그는 유소에게 다짜고짜 보여줄 게 있다면서 집으로 와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유상은 집 안에 물건이 하나도 없는 이유가 이 정체 모를 구멍 때문이라며, “이제 더 이상 넣을 것도 없어, 난 그저 저 구멍 안이 궁금할 따름이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구멍으로 뛰어든다. 눈앞에서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놀란 유소는 멍하니 구멍만 바라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유소는 일단 집으로 구멍을 가져온다. 그리고 자신 역시, 구멍으로 들어가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호흡과 폭발』은 ‘구멍’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호흡처럼 반복되는 일상, 그 끝에 환상이 폭발한다.

이 소설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출판사 〈한끼〉의 '경장편 시리즈'에서 「미스 마플 클럽」의 서미애, 홍선주, 이유소, 한새마 등 네 명의 작가가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미스터리 시리즈를 준비해 차례로 선보이는 기획 시리즈의 한 작품이다. 첫 작품 홍선주의 『꽃거지를 찾습니다』를 시작으로, 이유소의 『호흡과 폭발』이 두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저자의 이름과 같은 주인공 유소는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학창 시절 거의 교류가 없었던 고유상의 연락을 받는다. 유상은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유소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유소는 그를 만나러 간다. 그 집엔 이상하게도 가구나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어 의아해하던 찰나, 방바닥에 붙어 있는 이상한 구멍을 보게 된다. 깊이가 없어 저게 구멍인지 단순한 깔개인지, 아니면 블랙홀인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아주, 아주, 아주 시커먼 구멍이었다. “넌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저 속이 궁금해서 미쳐버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지금까지 참고 참다가 도저히 안 돼서 널 불렀어.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았거든.” “저 세계에서 진짜 내 존재가 뭔지 확인해 보고 싶어. 너도 꼭 자신을 되찾길 바라.”라고 말하며 구멍 속으로 뛰어든다. 친구가 사라진 이후, 두려워진 유소는 구멍을 챙겨 자기 집으로 가져온다.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 결국 유소 역시 그 구멍으로 들어간다. “구멍을 본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든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p.46) 그렇게 일상이라는 평면에, ‘구멍’을 만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입체화된다.

이 소설 『호흡과 폭발』은 모두 3부로 나뉜다. 1부는 현실, 2부는 구멍 속 세상, 3부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유소의 이야기다. 유소는 구멍의 반복된 통과를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산책, 친구와의 만남 등에서 이전과 다른 불연속성과 이질감을 겪으며, 결국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만, 이 세계가 과연 본래의 현실인지 불확실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자던 중 천장에서 손을 내민 ‘릴’이라는 인물을 만나 사막의 세계로 이동한다. 릴은 오랜 시간 자신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있는 존재다. 유소는 릴과 함께 ‘자각몽의 천장’ 개념에 대해 듣게 되고, 천장이 곧 현실 세계로의 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릴은 수백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자신의 무덤을 찾아내고, 유소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사라진다. 유소 역시 구멍 속 세계에서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방을 찾는 여정을 계속한다. 유소는 결국 자신이 떠나왔던 원래의 방을 찾아 돌아오지만, 그것 역시 구멍 속의 한 세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유소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만난 사람들-가장 친한 친구 수혜, 선으로 된 소녀, 사막의 여자, 뒤로 걷는 소년-은 모두 주인공이 마주해야 하는 ‘또 다른 나’이자,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사는 트라우마와 결핍의 은유다. “이 소설이 그리는 구멍 속의 세계는 평행세계라기보다는 인간 정신과 무의식이 반영된 내면세계에 더 가깝다.”(p.223)고 문학평론 박인성은 풀이했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마음에도. 이 작품 “『호흡과 폭발』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뿌리를 둔 현대적 변형이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유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통해서 지금껏 가 본 적 없는 세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앨리스와 유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스스로 구멍 속에 떨어지길 원하는 자발성이다.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 가는 유소는 근대의 막다른 길에 처한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유소가 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발성은 미래를 직면하기도 죽음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현대인이 택할 수 있는 퇴행적인 도피다. 

오늘날 장르 문학의 관점에서 평행세계와 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유행하는 것은 사회·문학적인 흐름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잃은 이 시대 청년세대의 현실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고 해석한다. 중간 세계는 탈출구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숙고의 시공간이다. 주인공 유소가 그러하듯 이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의 무대이며,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을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표현처럼, 세계가 알이라면 우리는 이 알을 부수고 나옴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을 태어나게 할 것이다.”며 박인성 평론가는 〈작품 해설〉을 통해 평가하고 있다.


구멍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며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나는 왜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뛰어든 걸까. 고유상은 왜 내가 구멍을 가져가길 바랐던 걸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무서울까. 현실의 죽음이란 이런 걸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직시할 수도 없다.(p.64)


저자는 책 뒷 부분의 〈작가의 말〉을 통해 자신이 병원에서 비슷한 진단*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 소설은 자신의 삶과 무의식을 통과하며 쓴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이 말은 '구멍'을 통해 저자가 뭘 형상화했는지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이 구멍은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현실 세계로 나오는 출구이기도 하다. “어떤 장소나 사물을 보면 뜬금없는 상상이 밀려왔고, 그걸 글로 써야만 견딜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이 소설의 소재도 수년 전 메모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호흡과 폭발』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충동과 동시에 그곳으로 되돌아오려는 내면의 분열을 정직하게 마주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심리적인 시공간을 환상적으로 연출하는 이야기 마술사답게 구멍 밖의 세계와 구멍 안의 세계를 넘나들며 독자를 환상 문학의 절정으로 끌고 간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호흡했고, 그사이 내 속에서 창조되는 희망과 염원이 크고 작은 별처럼 수축하고 폭발했다.”(p.216). 이로써 '호흡'과 '폭발'의 의미도 제 모습을 찾는다. ‘구멍’이라는 상징은 존재와 실존, 그리고 인간적 구원의 불가능성과 희망을 동시에 암시한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환상이 끝나는 곳이다. 유소는 반복된 구멍 속 세계를 경험한 후, 결국 구멍을 떠나 현실로 돌아온다. 구멍은 숨고 싶은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삶을 다시 껴안을 수 있는 입구였던 셈이다. 저자는 구멍은 누구나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이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숨구멍이기도 하다. 


* 경동맥 협착증(carotid artery stenosis): 경동맥은 외경동맥과 내경동맥으로 나눠지며, 외경동맥은 주로 두개골 밖에 있는 피부나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고 내경동맥은 두개골 내의 뇌나 신경조직에 혈액을 공급한다. 외경동맥은 좁아지거나 막히더라도 다른 혈관을 통해서 비교적 풍부하게 혈액이 공급되므로 특별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경동맥은 좁아지거나 막히면 뇌에 혈액공급이 감소할 수 있으며, 내경동맥 벽에 침착되어 있는(쌓여서 들러붙어 있는) 지방 조직들이 떨어져 나와 뇌혈관의 말단 부위로 흘러가 혈관을 막을 수도 있다. 이처럼 내경동맥을 포함한 경동맥이 좁아지는 경우를 경동맥 협착증이라고 지칭하며, 이는 혈류를 감소시키거나 혈관을 막게 되어 허혈성 뇌졸중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경동맥 협착증이 있는 경우 뇌졸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치료 대상이 된다.(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소설 속 주인공 유소의 마음은 이미 죽음과 무관심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러나 구멍 속 세상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통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되찾는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키워드다. 현실 도피가 나쁜 것이 아니라, 도피 이후에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품은 것이다. 

저자는 지금껏 써내온 소설 작품에서 환상 세계와 심리를 결합한 독창적인 문체로 평가돼 왔다. 미묘한 심리 묘사와 상징적 소재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인간 내면의 불안과 삶에의 갈망을 그려냈다. 이 작품 『호흡과 폭발』도 중편 소설의 응축된 형식으로 독자의 몰입을 끌어올린다. 주인공 유소가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의 의미를 잃은 상태에서 ‘구멍’을 발견하고 뛰어드는 설정은, 일차적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현실의 압박과 무력감 속에서 선택하는 ‘내적 도피’를 은유한다. 그러나 저자는 구멍은 숨고 싶은 곳이자, 동시에 다시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입구로 만들어낸다. 즉, 도망친 자리에서 끝나지 않고, 돌아오려는 의지까지 포함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 


"구멍이었다.

아주, 아주, 아주 까만 구멍.

5년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것이 내가 한때 소중히 여겼던 통기타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 초반에 연습하다 싫증이 나서 그 후로 몇 년을 방치한 기타였다. 조금 전에 기타를 옮긴 건 아저씨여서 나는 그 공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그저···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p.212)


저자 : 이유소


환상문학 작가. 2021년 계간 미스터리 〈졸린 여자의 쇼크〉로 등단. 소설집 《우울의 중점》, 앤솔로지 중편 《사일런트 디스코》 《히즈 마이 블러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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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뇌의 비밀 - 마음 챙김 명상법
김말환 지음 / 민족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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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명상'에 대해 생각하면 독자는 90세 국민 정신과 의사로 불리우는 이시형 박사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지난 2018년 9월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서 건강의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이시형 박사는 "대체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며 "기계적으로 시간을 맞추는 규칙은 아니고 대충 규칙적"이라고 답했다. 중요한 것은 스트레칭과 명상을 꼽았다고 기사 첫머리에 쓰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30분 정도 스트레칭과 명상을 하는 게 건강 비결이라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식사, 적당한 운동이 건강의 3대 요소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명상'이 들어가 눈길을 끌었고 독자는 그때부터 명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때는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명상이 중요한 것으로 독자의 인식에 자리잡았다. 다만 게으름 탓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아침 명상을 습관처럼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은 5분에서 10분 정도.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생각만 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게 이제는 몇 달 됐다.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나 삶에 크게 도움이 됐다고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느 종교든 '위대한 종교'는 명상을 권한다. 발상지 인도는 물론 천주교의 묵상, 불교의 참선, 기독교의 명상 등 모두 같은 '명상'을 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기독교만은 명상을 채택하지 않는다고 한다. 명상과 참선을 종교로 보고 타종교를 배척하는(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 교리에 따른 것이라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예전의 말이지만 지금은 종교를 갖지 않은 독자로서는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왜 명상을 할까? 국내 한 명상 전문가는 명상 즉, 내면의 ‘참된 나’를 찾음으로 에고로 둘려 쌓인 ‘거짓 나’를 버리고 지금 바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명상을 통해 찾고 있다고 밝혔다. 『명상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책을 통해 그는 우리를 불안과 우울의 상태로 빠뜨리며 괴롭히는 ‘생각’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살고 있는 인간 누구나 중독돼 있지만 중독된 것조차 모르는 ‘생각이라는 병’에서 벗어나는 길’, ‘모든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저 ’예‘라고 대답하는 내려놓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담고 있다.



'명상'은 고대 동양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마음챙김'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불교 수행 전통에서 시작한 명상은 오늘날 심리학적 구성 개념으로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적인 태도로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마음챙김'으로 발전했다. 용어 역시 순우리말을 사용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는 명상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또 치료나 단련의 일환으로 실천해 온 것이다. 영어로는 두 단어가 조금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 명상은 'meditation'으로, 마음챙김은 'mindfulness'로 표기한다. 전자는 치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후자는 훈련이나 수행의 의미가 배어 있다.

불교 명상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마음챙김은 빨리(Pali)어 ‘sati’의 번역어라고 한다. 이는 자각(awareness), 주의(attention), 기억하기(remembering)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알려져 있다. Sati는 영어권에서 mindfulness로 번역되며, 우리말로는 마음챙김이 가장 적당한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마음챙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마음챙김의 네 가지 기반으로 해석되는 'satipatthana'의 어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심리학용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Satipatthana의 sati는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러나 sati는 과거를 기억하는 기능이라기보다는 현재에 대한 주의 집중과 알아차림, 깨어 있음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 반면 patthana는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확립을 의미한다. 즉 satipatthana는 ‘관찰 대상에 대한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알아차림의 확립’을 의미한다.

위파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는 미얀마의 승려 유 판디타(U Pandita)는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을 챙기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마음 챙김의 특성을 흔들리지 않는 것(들뜨지 않음)으로 보았고, 그 기능은 대상을 항상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야구 선수가 항상 공을 시야에 넣어 두고 있는 것처럼 마음챙김의 대상을 놓쳐 버리지 않고 관찰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마음챙김은 대상과 일대일로 직면하거나 번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때의 마음챙김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된다. 마음챙김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관찰 대상에 대한 강하고 분명한 알아차림 및 몸, 마음, 느낌, 법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마음 챙김 명상법」이란 부제를 가진 이 책 『늙지 않는 뇌의 비밀』에 담긴 내용과 백과사전의 풀이를 포함해 독자가 가진 명상의 의미다.



현대인의 일상은 과도한 정보와 자극으로 인해 늘 과부하 상태다. 머릿속 생각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뇌는 쉴 틈 없이 작동한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기억력 저하, 감정 기복, 집중력 저하, 그리고 치매. 이러한 퇴행성 뇌 피로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20년 넘게 명상 지도자이자 심리상담가, 군법사로 활동해 온 이 책의 저자 김말환 박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법을 ‘마음챙김’에서 찾는다.

"마음 챙김 명상은 단순한 휴식이나 이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의 위험을 줄이는 효과적인 뇌 건강법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뇌의 과부하는 알게 모르게 뇌세포를 파괴하고, 제대로 깨어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깨어있지 못한 뇌는 일에서도, 개인 생활에서도 제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지켜보고 알아차려 마음을 챙기는 일, 그 어느 때보다 뇌 관리가 필요한 시대이다. 마음 챙김 명상은 우리의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거나 느끼면서 자동 반응하던 행동을 멈추고, 깨어있는 뇌의 흐름을 더 자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키워준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 안정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 챙김 명상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뇌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실천 수행이다.

이 책은 마음 챙김 명상이 단지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 안정에 머무르지 않고, 뇌의 노화 자체를 늦추고, 뇌세포와 시냅스, 인지 기능을 회복하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임을 과학적·수행적 언어로 해설한다.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일컬어지는 '뇌'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일을 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몸의 '사령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들어왔다. 모든 인간의 행동을 실행하고 제어하는 명령을 하는 곳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을 2배 이상 늘린 현대의학에서도 아직까지는 뇌의 병에 대해서는 정확한 치료법이나 약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 뇌는 아직까지 '신의 영역'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책 『늙지 않는 뇌의 비밀』은 우리 신체 일부인 '뇌'에 대한 설명서이자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다. 뇌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뇌가 우리 몸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의학적·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물론 이 책이 뇌의학과 뇌과학에 대한 전체를 말하지는 못한다. 풀리지 않은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문제가 남아 있고, 지금도 많은 과학자들이 뇌의 신비에 대해 연구하면서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몸의 신호는 이미 뇌에서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전달하고자 한 결과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뇌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뇌 따로 몸 따로 다르게 인식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뇌에 어떤 이상 징후가 생기게 되면, 그로 인해 몸에 이상이 오면 독자들은 어떤 일을 먼저 하는가. 의학적 해결책은 많지 않다.

특히 심각한 증상이 생기면 의사를 찾는 것을 제외하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조금만 뇌와 몸의 흐름을 알게 된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은 뇌에서 시작하고 몸에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신한대학교 이태정 명예교수 이런 점에 착안해 명상과 치매환자를 연결해 생각한다. "어르신들에게 명상 지도를 한 것은 나에게도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현장에서 마음 챙김 명상의 놀라운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르신들 대부부 명상을 처음 접한 탓에 조금 망설이기도 하고 어색해했다. 그런 분들이 이제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몇 년 동안 힘이 들었지만, 어르신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이 컸다."(p.6)

〈추천사〉에 따르면 명상은 지나온 날들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삶의 근본적인 지혜를 길러준다. 명상을 통해 우울증과 불면증, 기억력 저하와 불안감을 크게 완화하여 가는 것을 체험한 분들이 정말 많았다. 고요하게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녹여내 숙면에도 도움을 준다. 명상을 통해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어르신들의 인지 기능이 깨어나고, 지혜가 생기고, 알아차림으로 인해마음이 차분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장 〈마음 챙김 명상이 몸과 마음의 치유에 왜 필요한가?〉, 2장 〈뇌의 자생 능력과 마음 챙김 명상〉, 3장 〈누구나 할 수 있는 마음 챙김 명상〉, 4장 〈건강한 뇌 관리와 치매 예방〉 등이다. 부록으로 「치매 예방, 몸과 마음을 깨우는 수행」「치매 자가 진단법」「자애경 사경하기」를 따로 두었다. 저자 김말환은 마음 챙김 명상은 단지 수행 기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자 실천의 길이며, 역사와 전통 속에서도 검증된 지속 가능한 수행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오늘날 정보화 사회를 넘어 인공지능 AI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최첨단 컴퓨터 기기들에 의한 작동의 융합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능과 그 편리성에 대해서도, 우리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나약함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책에 따르면 뇌에는 약 800억 개의 뉴런이 존재하고, 이들은 수천 개의 시냅스로 서로 연결된다. 하지만 감정, 스트레스,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되면 전두엽과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이 과부하되며 손상된다. 저자는 그동안의 체험을 통해 마음 챙김 명상으로 호흡의 리듬, 감각의 흐름, 뇌의 안정성을 회복하여 손상된 뇌를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특히 명상 수행자의 뇌를 측정한 결과 전전두엽 피질에 혈류 공급이 풍부해지고, 감정 조절과 인지 기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이 책에서 밝혀줌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세포 노화의 핵심 지표인 텔로미어와 이를 복구하는 텔로머레이스의 활성 역시 명상과 정서적 안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과학적 논거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치매 예방과 명상의 연결고리다. 명상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감정 반응―불안, 분노, 스트레스―에 휘둘리지 않고, 그 감정을 ‘잠시 지켜보는 힘’을 길러 줌으로써 뇌의 회복력과 감정의 회복탄력성을 강화하여 일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뇌과학 서적이 아니다. 저자는 『대념처경』, 『자애경』 등 불교 초기 경전을 바탕으로, 마음 챙김 명상이 뇌세포 연결망의 회로를 바꾸는 수행 원리임을 입증한다.

『대념처경』에서는 “수행자는 걸어가면서 ‘나는 걷고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한다. 걷는 순간조차 ‘알아차림’의 수행이 되며, 이러한 주의 집중은 뇌의 감각기관, 시상, 후두엽의 회복에 실제로 작용한다. 저자는 경전의 문장과 뇌 생리학적 기전을 결합하여, 마음의 통찰과 뇌의 기능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이 책의 강점은 명상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명상법을 통해, 뇌의 흐름을 스스로 조절하고 회복시키는 방법을 안내한다. 책에 있는 5가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① 먹기 명상 :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음식처럼 대하라.” 오감에 집중하여 음식에 몰입하며 ‘지각의 훈련’을 실천한다.

② 수영 명상 : 물속의 저항과 온도, 움직임을 통해 몸과 뇌의 균형 감각을 회복한다.

③ 몸 스캔 명상 : 손의 열기로 눈, 귀, 얼굴, 장기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자신을 돌본다.

④ 호흡 명상 : 들숨과 날숨의 흐름을 지켜보며 현재의 감정과 긴장을 알아차린다.

⑤ 자애 명상 : 나 자신을 향한 연민과 타인을 향한 자비를 키워 정서적 면역력을 높인다.

명상은 단순한 정서적 위로가 아니다. 뇌과학은 이미 여러 실험을 통해 명상이 뇌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해마 등 고차원의 인지 능력과 관련된 영역의 활성도가 명상 후 뚜렷하게 증가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는 곧 명상이 기억력 향상, 감정 조절력의 상승, 스트레스 저항력을 증가시킨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신경전달물질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로토닌(serotonin)이다.(p.127) - 「명상은 뇌의 구조 자체를 바꾼다」 중에서

저자 : 혜명 김말환(慧命)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큰스님을 은사로 불교입문, 무심보광 전 동국대 총장 스님을 지도교수로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선수행에 의한 심리상담법 연구」이다. 군 법사로 활동하면서 “군 생활 부적응 장병들을 위한 선도 및 치유 활동으로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역 후 동국대 경주 캠퍼스 불교상담전공 객원교수, 서울 동국대 불교대학 강사, 동국대 미래융합 교육원 자격과정 ‘명상전문 지도강사 과정’ 주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수행과 심리치료』, 명상지도전문강사 교재 『명상 수행자를 위한 내면의 통찰과 자기성장 』 논문으로는 「선문답을 통한 심리 고찰」〈한국불교학〉 제29집 한국불교학회, 2001. 「十牛圖의 수행과 自己實現」〈대각사상연구〉, 2002. 등이 있다. 서울 관악산 화승사 선심리상담 및 명상센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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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김요한 지음 / RISE(떠오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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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삶에 대하여」, 「이제, 살아야 한다.」가 이 책 『각성』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적힌 글귀다. 이 문구들은 표제어 '각성'과 잘 조화를 이룬다. 의도적으로 써넣은 문구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그 끝에서 '살아야 한다'고 깨닫는다는 말과도 뜻이 통한다. 살아보고, 사유하고, 그리고 깨달음의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운영자이자 저자인 김요한은 이 에세이집의 소개글에서 비슷한 말을 내놓는다. "사람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돌아야 하는가.

이 책 『각성』은 단순한 위로를 거부한다. 따라서 이 책에는 긍정도, 희망도, 달콤한 말도 없다. 대신 단 한 줄의 진심만 남는다. "지금 이대로는 무너진다." 무뎌진 감정, 흐릿한 중심, 피로한 관계, 반복된 실패는 각성의 주 대상이다. 이 책은 그 모든 균열을 해부하고, 어디서부터 다시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짚어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을 줄이고, 기준을 세우고, 감정을 정리하라."고 제언한다. 이 책은 저자의 각성 훈련의 기록이자, 생존의 기술이다. 끝까지 살아남고 싶은 사람을 위한 단 한 권의 에세이집에 담긴 적지 않은 문장들. 저자가 사유하고 실천하고 다시 각성하고 난 남은 한 줄의 진실한 문장들이다. 저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당신에게 "지금, 각성하라."고 강조한다.

이 책 『각성』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다. 흔들리는 인간의 구조를 해부한, 단단한 생존의 문장들이 줄을 잇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감정을 위로하거나 관계를 포장하는 방식 대신, 감정의 정리, 관계의 정돈, 자기 기준의 회복을 통해 삶을 근본부터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을 위한 ‘훈련서’이다. 저자는 100개의 짧고 단호한 2음절의 단어들을 실천과 사유로부터 추출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 단어들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독립된 통찰이며, 동시에 하나의 흐름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자기 해체와 재구성으로 나아간다.

책의 초반부는 감정과 관계로부터 흐트러진 개인의 상태를 직시하게 만든다. 말이 많고 소음에 반응하며 중심 없이 살아가는 일상의 파편을 정확히 짚어내고, 말보다 감정의 리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첫 단어 「진동」(1절)에 대해 깊은 사유의 변을 보인다. "사람은 우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관계엔 파동이 있다. 진동수가 다르면 아무리 애서도 끝까지 어긋난다." 저자의 해설(실천)이 잇따른다. "억지로 웃는 자리, 괜히 말 많은 순간, 목소리가 자꾸 작아지는 관계. 이미 답은 거기 있었다. 맞지 않는 곳에 계속 남아 있는 건, 어리석음이고, 욕심이고, 비겁함이다. 지나고 나서야 보였다. 혼자인 게 아니었다. 혼자인 척, 살아 있는 척, 연결된 척. 오래도록 그런 척만 하고 살았다."라고 쓰고 있다. 자신이 주도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성찰한다. 그러나 깊은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에 대해 성찰의 깊이를 한층 깊게 들어간다. "깨달음은 크지 않았다. 사람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핑계를 줄였다. 줄이는 건 버리는 게 아니었다. 밀도를 높이는 거였다." 어설프게 깨닫고 대충 꿰맞춤으로는 올바른 대인 관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결국 크게 깨닫게 된다. 관계는 상태다. 흐트러진 사람들 틈에 있다면, 흐트러진 건 내 안이란 깨달음에 이른다. 거기서 비로소 소음이 사라지자 고요가 들렸다고 토로한다. "그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본래의 나를 봤다."고 한다. 누구의 리듬에도 맞추지 않고, 흉내를 내지 않고, 억지로 웃지 않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곳에서만 존재했다고 고백한다. 

중반으로 갈수록 이 책은 더 냉정해진다. 무너짐의 반복에는 반드시 습관이 있으며,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건 대부분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방식이라는 것. 그 통찰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실제 삶을 바꾸기 위해 감정을 조율하고 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생존 전략으로 이어진다.

「사랑」(41절)에 대한 저자의 말에 귀기울여 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 앞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 모든 걸 포함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p.93) 여기서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말은,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를 내려놓고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위해 새로 태어나겠다는 뜻임을 저자는 단언한다. 즉 내가 당신의 남편으로 살아간다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말보다 먼저, 당신에게 해롭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당신 앞에서 더 이상 내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선택하겠다는 다짐이 '사랑'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역시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크고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저자는 「사랑」에 이어 「소각」(42절)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끝은 항상 날카롭다. 처음엔 가볍게 스며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의 모양을 지워가기 시작한다. 성격이 변하고, 말투가 달라지고, 자기 기준이 무뎌진다. 사랑이 깊어졌다는 증거는 감정이 아니라 손상이다."(p.95) 사랑은 사람을 무너뜨리며 다가온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가 사유한 사랑이 단계적으로 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처음엔 껍질을 벗긴다. 겉으로 붙이고 있던 단단한 말투, 체면, 이성 같은 것들을 하나씩 걷어낸다. 그다음엔 분류한다. 필요 없는 생각은 밀어내고, 필요한 가정만 남긴다. 거기까지 오면 이미 어느 쪽으로든 선택이 불가능해진다. 이후엔 갈아버린다. 사랑을 갈아 일관성과 자존감을 부순다. 자기 확신이 있던 영역이 모조리 백지화된다. 말은 줄어들고, 호흡은 거칠어지고,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표정을 분석한다. 그때쯤이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사랑은 재구성'이란 결론에 이른다. "완성된 인간을 부숴서 다른 구조로 다시 짓는 작업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파괴와 소각의 단계가 포함된다. 사람을 빵처럼 구워내는 게 아니라, 가루로 만들어 태우는 과정이다. 태워진 사람만이 이후의 삶에서 쓸 수 있는 감각을 얻는다. 실천-파괴-소각-재구성의 구조를 사유해 낸다.

43절에서 저자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사유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래서 점점 더 안전한 사랑만 찾는다. 확신 없는 시작은 피하고, 상처받을 가능성이 보이면 거리를 둔다. 말은 주고받지만 감정은 비껴가고, 함께 있어도 고요할 뿐, 깊어지지 않는다."

요즘 '사랑의 얕음(淺)'을 지적하는 말이다. 즉 이해 관계에 치중하는 듯한 사랑의 가벼움을 꾸짖는 것이다. 저자는 요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요즘은 사랑도 컨트롤하려 든다. 강도 조절, 속도 조절, 감정 조절, 불확실한 건 감정 낭비라고 치부하고, 의심이 들면 먼저 물러나고, 기대하기 전에 출구를 찾는다는 것. 그래서 다들 관계는 잊는데, 기억은 없다는 말이다.


후반부로 가면 『각성』은 본격적인 절단과 복원의 구조를 보여준다. 무엇을 지워야 하는가, 누구를 정리해야 하는가, 어떤 기준으로 남은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저자는 ‘미뤄둔 삶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독자의 판단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마지막 10여 개의 절들은 인간관계, 감정, 중심, 집중, 구조, 단가, 태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을 재정렬하는 ‘감정 없는 정리의 미학’을 제시한다.

70절 「징후」에 이르면 "누군가 이유 없이 싫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단언한다. 설명은 안 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한다면, 이미 감지된 것이다. 머리는 속아도 감정은 속지 않는다. 이성은 타협을 하고, 예의는 무시를 덮지만, 기분은 본질을 먼저 알아차린다고 주장한다. 이유 없는 거부감은 대개 오래 참은 감정의 요약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무 일 없었지만 불편하고, 말 한마디 없었는데 피로하다면, 그건 반드시 언젠가 증명된다고 강조한다. 

"사람을 싫어한다는 감정은 절대 가볍지 않다. 대부분은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처음의 그 불쾌감이 맞았다는 걸. 사람은 말보다 공기를 통해 상대를 인식한다.(p.162)

저자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거나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작은 이유를 놓치기 때문으로 규정하는 것 같다. 억지로 웃으며 대화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은 긴장을 놓지 않는다. 그 긴강감은 이유 없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감각이고, 감각은 생존에 가깝다. 그걸 무시하는 이유는 대체로 관계를 맺는 법만 배우고, 관계를 끊는 감각은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가장 날카로운 자기 보호는 싫다는 감정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보다, 위험한 사람을 먼저 피하는 능력이 더 절박하다. 설명 없이 불편한 관계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소모시킨다. 감정이 먼저 꺼지려는 사람과는, 나중에 이성도 어긋나게 되어 있다."(p.163) 그래서 이유 없는 기피는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 『각성』은 읽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한, 단 하나의 기준을 찾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장이다. 그 문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더는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감각이 남는다. 저자는 이 책은 기억에 남는 책이 아니라, 결국 삶의 방식에 남는 책이길 원한다. 이런 저자의 바람은 우선 실천 없는 각성은 무의미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실천, 반복함으로써 「내성」(91절)이 생기고, 깨달음으로써 「절연」(92절)할 수 있다. 감정을 「단속」(94절)함으로써 실패의 반복 이유를 「복기」(95절)를 통해 구조적 오류를 바로잡음으로써 「복원」(98절)해야 한다. 「복원」의 일부를 여기에 기술한다. "사람은 망가졌을 때 누군가를 찾는다. 이해해줄 사람, 들어줄 사람, 위로해줄 사람. 하지만 진짜 복원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삶이 흐트러졌을 때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니라 조용한 수리다.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 어떤 말에서 무너졌는지, 어떤 감정을 방치했는지 스스로 되짚어야 한다.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 위로를 먼저 찾으면, 회복은 미뤄지고 무너짐만 늦춰진다. 타인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도 구조까지는 만져주지 못한다. 조각난 자존감, 휘어진 표정, 뒤틀린 말버릇은 결국 내가 고쳐야 한다. 무너진 걸 고치는 건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외로움 안에서만 습득된다. 

마지막 장(100장)은 「시작」이다. 아이러니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이 책의 내용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필연성'이 가득 채우고 있다. 필연성을 추출해낸 것은 책의 표제어로 쓰인 '각성'이다. 우리말로 '깨달음'이라고 해도 크게 다른 뜻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절에 가서 시작한다는 말은 "이제, 살아야겠다."는 책의 마지막 문장과 잘 어울린다. 

누구나 잘나갈 때는 그럴듯하다. 말이 많고 관계가 빽빽할수록 중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주변의 반응이 빠르고, 하루가 시끌벅적하게 돌아가면, 마치 삶의 궤도가 정확한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는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간 후에 드러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연락이 끊기고, 계획이 흩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정적 속에서 드러나는 말투, 표정, 생각이 당신의 실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외부 자극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태도, 그게 중심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면, 그곳이 바로 시작점이다. 남겨진 그 순간이 당신의 전부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침묵은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게 한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건 글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p.220~221)


저자 : 김요한


떠오름출판사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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