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박헌영은 민족보다 계급, 자유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택하며 조선 공산주의의 중심에 섰지만 결국 조국도 동지도 가족도 모두 잃었다. 이 책은 그의 삶을 통해 ‘이념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이 책 『반도의 불은 별 : 소설 박헌영』을 출간한 출판사의 소개글의 일부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을 중심으로, 그 내부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이념의 허상까지 파헤치는 역사소설이라고 출판사는 덧붙이고 있다. 저자 진광근은 이 소설을 통해 민족보다 이념을 앞세운 선택이 어떻게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는지 묻기 위해 집필했다고 말한다.
저자가 밝힌 대로 6.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 후 휴전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 것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은 전후 '동서 냉전'으로 불리우는 강대국의 진영 싸움에 그대로 노출됐다. 끊임없이 서로를 비방하고 옳고 그름을 진영 논리에 맞춰 따지고 겨뤘다. 우리 민족은 한시도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로막힌 휴전선을 응시하며 서로를 감시해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동서 냉전은 어느 날 갑자기 유럽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분단됐던 독일이 소련 붕괴에 따라 다시 합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련 체제 하에 유지하던 공산 사회주의는 대부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소련이란 공산 사회주의 종주국의 몰락은 결국 경제력 차이였다고 우리들은 배웠다. 이렇게 소련은 무너졌지만 대신 중국이 여전히 건재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책은 일제 하 우리나라에 착지했던 공산주의 세력 중 대표적인 인물인 박헌영의 일대기를 소설로 재구성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 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나라는 영토 뿐아니라 이념과 사상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 갔다. 이로써 6.25 이후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고, 70여년 동안 적대적으로 극명하게 갈라서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전후 세대들은 태어날 때부터 반공, 승공으로 철저하게 교육 받았고 이념적으로도 재무장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독립운동하다 공산주의자가 된 인물들, 특히 한국전쟁 때 월북하거나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교육 어디에도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고, 관련 책들도 '금서'로 지정돼 읽기조차 어려웠다. 박헌영도 독자가 어렸을 때는 이름조차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소련이 무너진 후 비로소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해방 후 얽히고설킨 남북 관계의 원인과 전개, 그리고 인물들의 내면을 심도 있는 탐구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도의 불은 별』은 이러한 역사적 과제에 응답하며, 특히 박헌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쟁의 이면과 이념 갈등이 빚어낸 비극적 인간상을 탁월하게 조명한다. 이 책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넘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인물들의 선택과 운명을 분석함으로써 독자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미 군정 하에서 월북한 후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하고 전후 김일성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에서도 이 사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다. (김일성 정권은) 1953년 남로당계열인 박헌영·이승엽 등 13명을 간첩행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여 숙청했다. 52년 12월 1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와 종파주의 잔재 청산을 강조하는 김일성의 보고가 있은 후, 노동당은 각 정당·단체들에게 당성(黨性) 검토를 하게 하는 한편, 박헌영·이승엽 등을 체포·구속했다. 53년 7월 30일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의 12명이 기소되어 8월 3일부터 6일까지 심리가 진행되었다.
기소장에는 ①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음모와 테러·학살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 등 3가지 내용의 죄상이 제시되었다. 이들 중 이원조 징역 12년에 재산몰수, 윤순달 징역 15년에 재산몰수,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박헌영은 55년 12월에 기소되고, 그의 재판을 위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특별재판소를 설치, 최용건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박헌영의 기소내용은 ①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행위 등이었다. 12월 15일 열린 공판에서 박헌영은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으며, 그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박헌영의 유년 시절부터 숙청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 담임 선생이 가정 방문 차 헌영의 집을 찾은 일이 소개된다. 헌영의 재주를 높게 봤던 선생님이 중학 진급을 권유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안골 박첨지라는 사람의 첩으로 헌영을 낳아 기르고, 그가 등을 돌린 후 주막에서 헌영이 잡아온 물고기로 어죽을 끓여 하루하루 생계를 잇는 처지이다. 중학 진학은 어린 헌영도 꿈꾸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등록금의 일부를 내서라도 꼭 헌영을 진학시켜야 한다는 선생님의 권유에 어머니는 완고하게 무력한 자신만을 탓한다. "근디 우짠대유? 당장 입학금은 고사하고 연필값 종잇값 댈 형편이 안 되는데. 그라고 헌영이가 고기를 잡지 않으면 내는 주막도 꾸리지 못할 기고···"(p.15)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중학은 들어갔고 어찌어찌해 공부를 계속한다.(뒤에 들은 바로는 아버지 박첨지가 본처 몰래 학비를 대주었다고 서술한다.)
헌영이 조선의 역사와 조선이 처한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헌영은 선생님이라는 창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배웠고 가끔 읽는 신문을 통해 조선이 처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에 쓰인 조선의 역사와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 즉, 일본의 조선 지배는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이라는 헌영의 믿음은 한치 의심이 없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일제 강점기 때 양반과 상놈으로 반상을 철저히 구분하여 지배와 피지배 구조가 영속되는 조선 사회는 혁파되어야 마땅했다고 헌영은 생각했다. 하지만 양반들은 자신들만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억압할 뿐 모순된 세상을 혁파할 힘을 가진 세력은 조선 어디에도 없었다. 그 모순을 혁파한 것이 바로 일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일본은 조선을 개화시킬 것이고 제 뱃속만 챙기는 양반들로부터 억압받는 백성들을 해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일제 강점기 때 식민사관에 의한 교육의 내용을 받았을 것으로 독자는 이해된다.

하지만 헌영은 자신의 생각이 방향을 잘못 설정한 나침판이요, 굴절되고 왜곡된 창을 통해 정립된 것임은 후일에야 깨달았다.(p.19) 헌영의 생각에 변화를 준 것은 〈동아일보〉였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창간 때부터 일본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논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박헌영의 공산주의는 우리나라 독립에 먼저 방점을 찍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헌영은 동아일보를 꾸준히 구독하며 의식의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독립을 위해 더욱 더 공산주의에 매달리는 이념적 일직선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첫 체포된 것도 신의주경찰서에서였다. 이때 박헌영을 취조하고 고문한 사람은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그곳은 독립운동가들만 조사하는 특별 조사실이라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묵비권을 지키는 박헌영이 무너진 것은 고문에 의해서였다. 묵비권을 행사하던 박헌영은 "조선 내 공산당 조직과 거점을 대라."며 형언하기 힘든 고문을 가하던 노덕술에게 결국 자신의 똥을 집어 먹는 등 이상한 행동을 연출한다. 경찰도 정신이상 증세로 판단, 더 이상의 고문 없이 재판에 넘겼다고 소설은 밝힌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기에 박헌영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는지를 알면 당시 상황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재판에 넘겨진 헌영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대정(大正)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형을 살았다. 신의주 교도소에서 징역 사는 동안 어머니는 부근에 방을 얻어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친분을 갖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 김단야와 임원근는 헌영이 신의주교도소에 수감됐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면회는 위험해서 몰래 편지와 영치금만 보내왔다. 그러나 박헌영은 1년 6개월 동안 이념과 사상을 더욱 견고히 다진 시기였다고 저자는 짧은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도움을 준 스승이자 후견인인 현순 목사와의 만남으로 공산주의 이념에 빠져 들었다. 이때 현순 목사의 딸 현앨리스에게 사랑을 느꼈으나, 그녀도 좋은 감정으로 헌영을 대했지만 막상 정혼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이별이 불가피했던 듯하다. 혼자서 열병을 앓던 헌영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고 레닌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열성적인 공산주의 신봉자가 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점조직 형태로 지하에서 활동했다. 조선공산당은 항일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공개활동을 할 수 없어 고려공산당의 재정 지원을 받았고 조직의 일부를 받아 조선공산당에 열정적으로 힘을 쏟는다.

헌영은 전조선민중지도자 대회를 준비하던 중 관북의 명문 함흥 영생고보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 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여인 주세영을 만난다. 그들은 두 달만에 동거를 시작했고, 둘 사이에 딸 비비안을 두었다. 주세영은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 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시작으로 이들 부부는 망명과 도피, 그리고 번갈아 가며 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박헌영은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조직의 수괴로 7년형을 선고받았고, 서대문교도소에서 형을 살았다. 주세영은 수감 중인 헌영의 옥바라지를 5년 간 하다 어느 날부터 발길이 끊어졌다. 출감 후 찾았던 집에서 헌영은 김단야와 주세영의 동거를 목격하고 집을 나온다. 이후 심훈과 만나 조선 독립의 길에 대해 의논도 하고 그에게서 시(詩)도 한 편 받는다. 이때 심훈이 건넨 시가 「그날이 오면」이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심훈과의 만남은 헌영이 독립운동 의지를 더 다지는 데 좋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옥고를 치르고 또 다시 검거돼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는 생활을 여러 번 겪고서야 해방은 찾아온다. 해방 직후 헌영은 조선공산당 창당에 혼신을 다한다. 해방 정국에서 남한은 미 군정, 북한은 소 군정이 실시된다. 미 군정은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 우려가 큰 인물로 박헌영을 지목한다. '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헌영은 김일성의 요청대로 조선공산당 중앙을 평양으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관(棺)에 숨어 경성을 탈출하고 월북의 길에 오른다. 이때 박헌영은 10여명의 공산당 수뇌부 등과 함께 38선을 넘는다. 1945년 12월 말경이었다. 김일성과도 회동하고, 또 스탈린과도 만난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인공이고 '리론가(이론가) 선생'으로 불릴 정도로 공산 사회주의 이념에 통달했던 박헌영은 해방 후 대위 계급장을 달고 북한에 나타난 젊은 김일성과의 권력 다툼을 하다 김일성에 이어 2인자로 6·25에 참전한다. 모든 독자들이 다 알다시피 남한을 전격 침략한 인민해방군은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 서울에 머무른다. 이때 박헌영이 서울에 더 머무르면서 병참 보급선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병참선이 끊기면 전쟁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후방 병참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저자는 파악한 것 같다. 이 일은 후에 권력 다툼 중 체포되는 빌미가 되고 결국 박헌영은 이적 행위로 숙청돼 형장의 이술로 사라진다.

저자 진광근은 소설의 〈에필로그〉를 통해 박헌영을 "조국의 독립투쟁으로 15년의 옥고를 치렀고,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민주주의의 공화국을 꿈꾸었던 '반도의 붉은 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서도 북한에서도 잊힌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죽어서도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저자는 전쟁과 갈등을 뛰어넘어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한 부분 대사를 인용해 헌사를 남긴다.
"V는···
희망찬 전위!(Vanguard!)
단호한 폭력!(Vioence!)
과거의 흔적!(Vestige!)
철저한 복수!(Vendetta!)
전망의 제시!(Vision!)
결정적 승리!(Victory!)
고귀한 희생!(Victim!)
저자 : 진광근
경남 거창 출생으로 다올합동법무사 대표 법무사로 근무하고 있다. 대검검찰청에서 20여 년간 검찰 수사관으로 근무하였고, 틈틈히 인터넷에서 시와 수필 등을 기고했다. 현재 다올합동법무사 대표 법무사로 서민들의 법률 문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과 사건에 관심을 두고 이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 재평가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예컨대, 조선 후기 정권 실세인 민영익의 호위 무사로 들어가 짧은 시간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지주로 부상해 한일은행을 세운 인물로 알려진 조병택의 치열한 삶을 그린 장편소설 《상혼》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반도의 붉은 별_ 소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해방 후 남로당을 이끌며 ‘조선의 레닌’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지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박헌영의 초기 이념적 지향과 ‘인민민주주의공화국’ 건설이라는 원대한 꿈을 상세히 다룬다.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 호치민 등과의 만남, 김일성의 무력 통일 노선과 충돌하며 점차 좌절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소설은 6.25 전쟁의 주요 국면을 박헌영의 시선으로 재구성하는데,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면서도 동시에 강인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