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피싱
조진연 지음 / 북오션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돈의 유혹에 빠져 오직 돈을 버는 목적만으로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참회의 방법으로 그들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똑같은 대응책으로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 피싱
조진연 지음 / 북오션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블랙 피싱』은 이른바 '전화 사기'라는 오래된 범죄 수법을 토대로 최근 사회·국가적 문제로 부상된 사기 범죄 조직과 수법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개인 SNS 덕택으로 전화보다는 인터넷 환경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통 수단을 다 동원하는 듯하다. 지난 몇달 동안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했던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법죄 조직은 대한민국 본국에 있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통해 돈을 갈취하는 조직이었다. 규모도 엄청나서 보도되는 매체마다 다르지만 수백~수천의 한국인이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걱정하며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에는 여러 가지 난제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선 국가간 문제다. 군이나 경찰을 투입해서 직접 수사하거나 범인 색출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외교적 역량을 발휘에 일부 대한민국 수사관이 캄보디아 자체 수사진을 따라다니며 공동 수사 형식을 취할 수 있다.

대규모 수사력을 집중해 범죄 단지 내로 침입한다 해도 자발적으로 들어간 경우 강제 체포나 압송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단 이곳에서 철수한 뒤 동남아시아 단속이 느슨한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수익은 무려 수조 원에 달한다 하니 웬만한 군대가 투입되도 뿌리째 없애기는 어려운 상태라는 말도 들린다. 특히 범죄 조직 상부는 거의 모두 외국인이나 외국인 출신 캄보디아 귀화인이어서 함부로 다루기에도 어렵다. 이번 범죄 조직의 수장은 중국계 캄보디아 귀화인으로 재산이 21조 원에 달하는 거대 갑부로서 캄보디아 정치권과 결탁돼 있다는 말도 들린다. 특히 이번 수사에서 모델 겸 배우로 활동하던 A씨가 캄보디아에서 한국 여성들을 범죄 조직에 넘기는 끔찍한 '모집책' 역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독자로서 사실 확인이 안 돼 팩트만 무명으로 적는다.)



A씨는 국내 포털사이트에도 이름이 검색되는 인물이라 더 충격이 크다. 연예계 활동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범죄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일본어 통역 구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지옥으로 가는 문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모델 겸 배우 A씨는 지난해 4월, 30대 여성 B씨에게 '캄보디아에서 일본어 통역을 구한다'며 아주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고 한다. B씨는 그 말을 믿고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공항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A씨가 사실은 현지 범죄 조직의 잔인한 모집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프놈펜에 도착한 B씨는 곧바로 씨아누크빌 바닷가 근처의 한 아파트로 유인당했. 그곳에서 남성 3명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고, 가장 중요한 핸드폰과 여권을 빼앗기면서 감금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A씨는 현지 범죄 조직으로부터 500만 원을 받고 B씨를 팔아넘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돈 몇 푼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돈을 위해서는 인면수심이다. 거기다 뒤에 가려진 범죄 조직은 상상을 초월한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현대판 노예'를 자처한 것이다. 이 책 『블랙 피싱』은 이번 캄보디아 보이스 피싱 조직 단속이 모티브가 되었겠지만 사실 아직 수사도 채 끝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미루어 짐작컨대 최소 몇해 전부터 저자 조진연이 구상해온 게 아닐까 싶다. 어느 것이 됐던 누구나 범죄 대상이 될 수 있고, 한 번 빼앗긴 돈은 다시 되찾기 쉽지 않다는 점은 초기 보이스 피싱과 같다. 

이번 캄보디아 범죄 사태는 보이스 피싱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범죄조직인 마피아나 중국 삼합회, 일본 야쿠자를 능가하는 잔인성과 규모면에서도 엄청나다는 것이 지금까지 수사해온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한민국은 보이스피싱 공화국이다. 한 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2,000억에 달하고, 각종 기관을 사칭한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링크 한번 잘못 클릭했다 내 개인정보가 다 유출되는 게 아닐까 불안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 보이스피싱 전성시대에 살고 있는 스트레스를 통쾌하게 날려줄 소설 『블랙 피싱』이 출간되면서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갖게 한다.



이 소설 작품의 주인공은 보이스피싱 업체에서 '호구' 낚는 매뉴얼을 전문적으로 만들던 이선경이다. 그녀는 보이스피싱 업체가 쌓아두고 있는 거대한 돈을 가로채기 위해서 새로운 업체를 만들어 독립한다. 새로운 멤버와 새로운 프로젝트, 그리고 새로운 매뉴얼. 이제 사기꾼을 호구로 만들기 위한 그녀의 새로운 작업이 시작된다. 보이스피싱은 자영업자부터 공시생, 선량한 시민까지 ‘불안’과 ‘절박함’을 파고들어 돈을 갈취한다. 이 작품은 ‘보이스피싱 조직을 역으로 보이스피싱한다’는 과감한 개념 전환으로 독자들에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만약 보이스피싱에 하느님이 있다면 모세나 예수쯤으로 불릴 법한, 타고난 보이스피싱 천재 이선경. 보이스피싱 회사 정수식품에 입사한 그녀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서 단박에 실적 1위를 차지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 아예 최고의 보이스피싱 매뉴얼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고, 그 매뉴얼로 정수식품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그녀는 정수식품을 그만두고 정수식품을 털어먹기 위한 새로운 업체 하나 리서치를 설립한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민 사장을 정점으로, 중국에까지 손이 뻗어 있는 국제적 보이스피싱 조직인 정수식품. 그 막대한 돈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이선경은 사기조직에 사기를 칠,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매뉴얼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짜증 나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시원한 한 방을 날리는 소설 『블랙 피싱』은 마치 훌륭한 케이퍼 무비를 보는 듯한 짜릿함과 통쾌함을 독자들에게 안겨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이번 캄보디아 사태에서 독자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감금된 B씨에게 범죄 조직이 시킨 일은 다름 아닌 '성인 방송' 출연이었다. 매일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고, 시청자들에게 후원금을 구걸해야 하는 끔찍한 생활이 한 달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조직이 정한 '실적', 즉 후원금 목표액을 채우지 못할 때마다 욕설과 함께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졌다고 하니,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옥 같았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또 로맨스스캠이란 단어도 독자로서는 처음 들었다. SNS·데이팅앱 등에서 이성에게 환심을 산 뒤 금전을 편취하는 사기 수법이라고 한다. 해외에서 해킹 계정이나 허위 계정으로 접근해 친분·연인 관계를 형성한 뒤 금전을 요구하고, 군인·의사 등 특수직업 사칭, 긴급상황 빙자 송금, 가짜 투자 제안, 통관·운송비 명목 요구, 치료비·선물 통관료 등 다양한 수법이 쓰인다고 하니 혀를 내두를 정도다. 로맨스사기라고도 하며 가짜 연애 감정을 이용해 재산·계정정보·신용카드·여권·이메일 접근정보 등을 노린다고 당국에서는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관계 당국에 따르면 이 범죄 조직은 SNS·메신저·소개팅 앱이 주요 경로이며 인스타그램·위피·틴더 등에서 접근한다. 2023년 1~10월 국정원 111콜센터 접수 111건, 확인 피해액 48억6,000만원으로 급증했습다. 피해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고, 한국에선 20대 여성이 가장 많이 당한다고 한다. 


“퇴직금은 없어. 알지?”

“앞으로 매뉴얼 만들게요. 인센티브 5프로.”

박 이사는 눈앞에 있는 이선경에게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5프로? 그냥 콜이나 해. 욕심 부리지 말고.”

이선경은 손에 쥐고 있던 USB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박 이사는 이게 뭔지 물어보듯 이선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감정을 누르고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만든 매뉴얼이에요. 호구는 대기업 신입사원 부모.”(p.16)



사실 이번 캄보디아 보이스피싱 사태는 검찰 조사 결과, 국내 특정 지역의 지인 다수가 이 조직에 가담하는 과정에서 1명당 미화 600달러를 유인책에게 지급하는 '다단계 모집' 정황이 드러났다. 검찰은 장기간 조직에서 상담원 역할을 하던 조직원이 국내 조직원 모집책으로 활동하며 모집 수수료를 취득한 점을 밝혀냈다. 검찰에 따르면 자금세탁 과정에 이용될 것으로 의심되는 조직원들 명의의 가상자산 거래소 계정 89개에 대한 지급 정지 등 동결조치를 실시했다. 또 피해금 입금 계좌의 계좌 추적을 통해 피해금이 다수의 대포통장을 통해 자금세탁이 이뤄진 혐의를 확인해 인지 후 병합 기소했다. 피고인들이 이 건으로 약 9억 5,000만 원 상당의 범죄 수익을 취득한 점도 확인하고, 가담 피고인들의 범죄 수익 박탈과 피해재산 회복을 위해 조직원 명의 금융자산, 가상자산 계정 등 추진보전을 청구했다.

검찰은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가상 자산 투자시 거래소 공시내용 등 유의사항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또 관공서 등과 거래시 담당 부서 방문 확인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질문에 이수진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잖아.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그 반응에 당황한 김나영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자조하듯이 웃었다.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다, 피해자보다 돈을 보고 하는 일이다, 그 생각을 하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김나영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만두고 아나운서 시험에 올인할까?”

“그만둘 거면 미리 말해줘. 네 일 내가 할게.”

그 말을 하는 이수진의 눈빛이 빛났다.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싶은 사람 같았다.(p.123)


저자 : 조진연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 영화, 만화, 소설, 드라마, 음악만 있으면 행복한 INFP. 대원웹툰대상 [위대한 가족], 대한민국 스토리대전 [환관 최판계], 대한민국 디지털 작가상 [자살방지위원회] [굿모닝 펭귄], 롯데시나리오대전 [연비] 등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 연재작으로 스포츠동아 만화 [공부의 달인], 스포츠경향 만화 [이야기 채집꾼 진대수] [고양이가 개를 만났을 때], 네이버 웹소설 [설공찬환혼전], 카카오페이지 웹툰 [척살] [지금 죽이러 갑니다] 등. [지금 죽이러 갑니다]는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초 화학 사전 - 개념, 용어, 이론을 쉽게 정리한, 개정 증보판 그린북 과학 사전 시리즈
    다케다 준이치로 지음, 조민정 옮김, 김경숙 감수 / 그린북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독자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과학(물리·화학·생물·지학) 과목을 학교에서 배웠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독자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2학년이 되면 문과와 이과로 반이 갈라졌다. 문과와 이과는 수학1과 수학2의 차이였다. 이과반은 수학2를 따로 배웠고, 문과반은 이른바 문·사·철이라고 하는 인문학 쪽 과목이 더 심층적으로 바뀌었다. 국어도 문과반은 국어2로 더 심화되었으나 수학처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산업화 사회의 한복판이었기에 대학도, 취업도 이과반이 훨씬 유리했다. 대학 본고사가 있을 시기였으니 70~80년 학생 세대들은 잘 알 것 같다. 독자는 부모의 권유로 이과반으로 갔다. 그러나 이과반이 독자의 적성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은 불과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수학2는 일주일에 6시간으로 가장 많은 시간이 배당되었고, 이런 커리큘럼을 작성한 것은 대학입시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과를 뽑는 대학의 수나 입학생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산업화 시대 바로 쓸 수 있는 인재 육성 차원에서 국가 정책적으로 그랬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문과의 법대나 상대, 이과의 의대 등은 최상위 계층의 차지였던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당시는 대학 자체를 일류, 이류, 삼류로 규정지었다. 일류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서울대와 연고대 정도만 인정될 정도로 '과'보다는 '학교 등급'이 먼저였다. 독자는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대학 입학 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의 고집대로 인문대에 입학했다. 이후 과학과는 멀어졌다. 대학은 물론 어느 곳에서도 따로 과학을 배운 적이 없다. 대학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왜 물리 화학을 그때 열심히 하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한 적이 많다.



    당시 독자는 학교 다닐 때까지 과학이든 수학이든 실제 사회에 나가서 별로 써먹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기 싫으니 변명 삼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실제 물리나 수학, 화학 등이 사회 생활하면서 훨씬 쓰임새가 많다는 것을 경험할 때는 이미 다시 배울 수 없었고, 꼭 필요하면 이과 친구나 물어보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땐 책을 한 권 사보는 정도로 대처했다. 

    그러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의학이나 생물학보다 화학이 더 필요했다. 생물 시간에서나 배울 듯한 바이러스에 대해 십수 년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이 알게 됐고, 필요에 의해서 관련 책도 사본 적이 있다. 물리학 역시 마찬가지다. 인문학 열기가 높을 땐 문과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기 위안을 한 적도 있지만 실생활에 당장 필요한 지식은 과학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때 아니게 늦은 나이에 하려다 보니 사실 기초 과학 수준의 책을 사보기가 좀 그렇고, 조금 어려운 책은 읽다 말고... '배움도 때가 있다'는 말이 실감이 간다. 이때 이 책 『기초 화학 사전』이 눈에 띄었다. 부제로 「개념, 용어, 이론을 쉽게 정리한」이라는 제목을 수식하는 문구로 사용했다. 주저할 것 없이 선택했다. 그때 열심히 안 한 것을 벌충하려는 심산이었다. 지금 우리 삶의 주도적인 주체는 모두 과학 분야인 듯 싶다. 얼마 전 코로나 팬데믹 때도, 지구온난화도, 생명 및 수명, 환경 생태 문제 등이 모두 과학 분야다. 

    바야흐로 4차 산업 혁명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사회적 대변혁이 가속화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려면, 문제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찾는 힘, 즉 ‘종합적 사고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핵심 역량인 종합적 사고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전문 지식과 첨단 기술 문제는 그것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맡긴다 할지라도 '기초 과학' 지식은 갖추어야 이해도, 적응도 가능할 것이란 게 독자의 생각이다.



    이 책 『기초 화학 사전』은 ① 기초 화학 ② 이론 화학 ③ 무기 화학 ④ 유기 화학 ⑤ 고분자 화학까지, 크게 다섯 개 분야로 나누어 광범위한 화학을 다룬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초 화학’은 말 그대로 화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정리한다. 물질의 기본 입자인 원자와 원소의 개념, 이온화 에너지와 전자 친화도, 결합의 방법과 명명법, 다양한 결합의 형태, 화학 반응식의 기본 원리, 몰의 정의와 개념을 다룬다.

    다섯 개의 큰 분류에 따라 이 책은 모두 16장(章)으로 이뤄져 있다. 1장 〈물질의 기본 입자〉, 2장 〈화학 결합〉, 3장 〈몰과 화학 반응식〉, 4장 〈물질의 상태 변화〉, 5장 〈기체의 성질〉, 6장 〈액체의 성질〉, 7장 〈화학 반응과 열〉, 8장 〈반응의 속도와 평형〉, 9장 〈산과 염기〉, 10장 〈산화 환원 반응〉, 11장 〈전형 원소의 성질〉, 12장 〈전이 원소의 성질〉, 13장 〈지방족 화합물〉, 14장 〈방향족 화합물〉, 15장 〈천연 고분자 화합물〉, 16장 〈합성 고분자 화합물〉 등이다.

    ‘이론 화학’은 기초 화학을 바탕으로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이론들을 정리했다. 대부분 초등학교 과학 시간부터 반복해서 익혀 온 기본 지식이지만, 제대로 짚자면 만만치 않은 내용들이다. 고체, 액체, 기체 등 물질의 상태 변화와 압력, 각각의 상태에서 자주 쓰이는 공식과 계산, 열과 에너지 관련 법칙과 계산, 반응 속도와 평형, 촉매 관련 이론, 산과 염기 관련 개념과 이론, 산화 환원 반응 관련 개념과 이론들을 친절하고 꼼꼼하게 해설하고 있다.

    ‘무기 화학’은 주기율표를 중심으로 원소를 분류하고 나열하는 원리부터 시작한다. 크게 전형 원소와 전이 원소로 나누어, 성질이 비슷한 원소끼리 묶어 소개한다. 원소와 그 화합물의 흥미로운 성질, 관련 실험, 우리 생활과 산업에서의 쓰임새 등을 함께 다루었다.

    ‘유기 화학’에서는 유기 화합물의 광범위한 세계를 소개한다. 탄소 골격에 따른 분류와 작용기에 따른 분류 등 화합물을 구별하고 구분하는 법을 알아보고, 복잡하지만 꼭 이해해야 하는 유기 화학의 중요 키워드 구조 이성질체를 찬찬히 파헤쳐 본다. 도시가스, 가솔린 등에 쓰이는 알케인, 마취약에 쓰이는 에테르, 합성 향료에 쓰이는 에스터, 각종 지방산과 유지 등 지방족 화합물을 차례로 소개하고 벤젠 고리를 중심으로 한 방향족 화합물의 성질과 쓰임새도 알아본다.



    ‘고분자 화학’에서는 1만 이상의 분자량을 갖는 고분자 화합물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크게 천연 고분자 화합물과 합성 고분자 화합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천연 고무, 다당류, 단백질, DNA 등 천연 고분자 화합물의 구조와 성질을 분석해 보고, 이어서 합성 고분자 화합물에서는 합성 섬유, 열경화성 수지, 기능성 고분자 등 현대 산업에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물질들을 화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저자 다케다 준이치로는 20년 이상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화학을 가르쳤던 경험을 살려 개념과 지식을 전달한다. 특히 실생활과 연관된 풍부한 예시는 독자들의 흥미를 집중시킨다. 드라이아이스, 스쿠버 다이빙, 인공 투석 등 보편적인 화학적 원리도 놓치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쳤을 우리 주변의 금속과 비금속 원소들, 식품이나 생활용품에 쓰이는 수많은 유기 화합물도 실례를 중심으로 연관 지어 설명한다.

    화학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금속, 섬유, 전기, 식품, 약품, 의료 등 수많은 생활·산업 분야에서 화학이 활용되고 응용된다. 화학과 거리가 먼 직업 또는 생활 환경을 가진 사람이 드물 정도다. 화학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의 업무와 산업에 대한 이해의 폭도 달라질 것이다. 『기초 화학 사전』은 복잡한 기호와 공식 때문에 화학을 포기하고 싶었던 청소년뿐 아니라 고등학생 교과 수준의 난이도로 화학의 개념을 총정리하고 싶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화학 용어를 검증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에서 다루는 범위와 개념을 반영하기 위해 현직 화학 교사 김경숙의 감수를 받았으며, 개정 증보판을 준비하며 최신 화학 개념을 보강하는 의미에서 재감수를 거쳤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아울러 주기율표 12족 원소는 과거 전형 원소로 분류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전이 원소로 본다. 이에 따라 초판의 관련 기술을 바로잡았다. 가장 큰 변화인 ‘엔탈피’ 용어 사용 원칙도 안내하되, 국내 교과에서 대체로 ‘에너지’로 포괄해 다루는 점을 고려해 개념 소개 중심으로 적용했다.



    이 밖에 압력을 다루는 장을 제외하고는 화학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위인 ‘hPa’는 ‘기압’이라는 표현으로 통일하고, 필요한 부분의 설명과 표·그림을 보완했으며, 초판의 일부 오류를 교정해 책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핵심 개념과 용어를 정돈하고 내용을 보강한 개정 증보판으로, 화학의 기초를 더욱 탄탄히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현직 과학 교사인 저자는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 성적은 늘 중하위권이었다는 점을 털어놓으며 자신의 흑역사(?)를 털어놓는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네가 선생님이라니··· 잘 가르치고 있어?"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그게 어떻게든 되더라고, 하하하." 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20년 넘게 교사 생활을 하면서 지금은 학생들이 어떤 부분에 좌절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가르쳐야 좀 더 쉽게 이해하고 잘 떠올릴 수 있는지 아이디어도 많아졌기에 "나 정도 되니까 더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고 있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화학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으로 독자들 스스로 목차를 훑어보고 흥미가 느껴지는 페이지를 먼저 펼쳐 볼 것을 주문한다. "화학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신선한 발견을 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대로 독자는 목차를 먼저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많은 화학 용어들이 하나 하나 당시 독자의 화학 선생님의 얼굴까지 떠오르며 기억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용어를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수십 개의 용어들이 낯설지 않은 점은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목차의 제목만을 쭉 훑어보다가 16장 「비닐론은 일본에서 발명한 합성 섬유」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고분자 화학' 분야다. 제목 설명으로는 "첨가 중합으로 만드는 합성 섬유에는 아크릴 섬유와 비닐론이 있다. 비닐론은 일본에서 처음 개발한 합성 섬유인데, 만드는 방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왜 복잡한지, 화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함께 살펴보자.(p.372)



    아크릴로나이트릴이라는 에틸렌의 H원자 1개가 -CN으로 바뀐 물질이 있다. 구조가 살짝 바뀌었을 뿐인데 이름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CN을 사이아노기 또는 나이트릴기라고 부른다. 또 에틸렌의 H원자 1개가 -COOH로 바뀐 물질을 아크릴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아크릴로나이트릴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중략) 1939년 사쿠라다 이치로가 발명한 일본 최초의 합성 섬유다. -OH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셀룰로오스로 만든 무명과 비슷한 성질이 있다. 비닐론의 합성법을 그림 1131-2에 소개했다. 왠지 무척 복잡해 보인다. '폴리비닐알코올을 만들 거면 비닐알코올을 첨가 중합하는 게 낫지 않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닐알코올을 만들기 위해 아세틸렌에 H2O(물분자)를 첨가해도 비닐알코올의 구조 이성질체인 아세트알데하이드밖에 만들 수가 없었다.(p.372~373, 이하 생략) 


    저자 : 다케다 준이치로


    1979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대학교 이공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와세다대학교 교육학부와 부속 고등학원에서 강의했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대학생, 예비 교사, 일반 시민 등 다양한 대상에게 화학을 가르치며 화학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아 왔다. 기상예보사, 환경계량사로도 활동했다.


    역자 : 조민정


    신라대학교 일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일본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물리·화학 사전』 『단위·기호 사전』 『천문학 사전』 『괴짜 물리학자에게 듣는 유쾌한 우주 강의』 『물리와 친해지는 1분 실험』 『재밌어서 밤새 읽는 소립자 이야기』 『반성의 역설』 등이 있다.


    감수 : 김경숙


    30여 년간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고등학교 화학 교사로 재직 중이다. 2001~2003년에는 일본 문부과학성 초청 교원연수생으로 요코하마국립대학에서 공부했고 서울, 경기 지역 과학 교사들의 연구 모임 신과람(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과학 교육의 대안을 모색하고 과학 실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흥미로운 과학 교육의 길을 찾기 위해 열정을 다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 책읽기에서 글쓰기까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10주년 개정증보판
    장석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의 저자 장석주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비평가, 인문학 저술가로 잘 알려져 있다. 40년 넘게 글을 쓰고, 또 글 쓰는 방법을 강의하며 문학에의 열정을 쏟았다. 고희의 나이로 접어들었지만 그의 문학에의 천착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문학에의 천착으로 얻은 깨달음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정리한 창작 노트다. 이번 개정증보판은 출간 10주년 기념으로 독자들의 지속된 개정판 출간 요청에 호응해 에세이 작가를 지망하는 독자들의 수요 해소를 위해 ‘에세이 작법’에 대한 원고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은 작가 한강의 문체를 분석한 특별한 원고가 추가됐다.

    “글을 잘 쓰려면 우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지금은 중년에 들어선 독자도 한때 글을 써볼 것을 희망했지만 문재(文才)가 부족한 탓인지 중도에 접고 말았다. 덕분에 글쓰기 교본이나 텍스트를 여러 권 읽은 기억이 난다. 출간되는 책마다 주제가 다르고 관점이 다르지만 모든 글쓰기 텍스트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한 가지가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란 격언이다. 독자가 학교 다닐 때나, 지금 학생들이 배우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왕도가 없다고 해놓고도 웬 글쓰기 교본은 그렇게 많이 출간됐는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글 잘 쓰는 방법은 그때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당시 글쓰기 교본이 근거없는 개인적 주장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판단한다면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 독자 기억으로는 "3다(多)"를 모두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3다는 아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많이 읽고(多讀)' '많이 생각하고(多思)' '많이 쓰기(多作)'를 이르는 글쓰기 교본의 원칙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해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는데, 3다의 부족 때문으로 독자는 생각한다.



    사실 어떤 책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는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한다. 많이 읽고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읽고 쓰는’ 것이라는 게 저자 장석주의 지론이다. 즉, 작문 테크닉과 작가들의 비법을 무턱대고 따르기보다는 글쓰기의 기본을 다지고 본질적인 안목을 기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고(故) 기형도 시인이 가장 사랑한 시인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 평론가 등 전방위 문인으로 활동하는 장석주는 독학으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해 6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고 한다. 저자는 고희를 앞둔 지금도 날마다 하루 8시간씩 책을 읽고 4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어마어마한 생산 능력과 성실한 글쓰기의 비결에 대해 그는 “어떤 글이 나오는가는 삶의 경험과 자세, 태도의 문제로 그것이 곧 자기 문장이나 글의 스타일이 된다.”고 강조하며, 작가의 삶을 날것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려준다. 

    날마다 도서관에서 책이나 꾸역꾸역 읽으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시를 끼적이던 ‘문청’ 시절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등단 후에도 계속된 창작의 고통과 재능에 대한 회의, 생계에 대한 불안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까지 작가로서의 신산한 삶에 관한 진솔한 고백들도 저자는 이 책에서 털어놓는다.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겪어냈지만 마음의 끼니로 책을 먹고, 읽고, 써 온 저자는 자신이 존경하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말에 빗대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도했었다. 실패했었다. 상관없다. 다시 시도하라. 더 잘 실패하라.”

    일상이 글감이 되고, 글쓰기가 일상이 되는 삶을 통해 그가 체득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자기답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 글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쓰기 시작하면 삶의 의미에 눈뜨게 되고, 살아갈 힘도 얻게 된다. 그것이 글쓰기의 본령이고, 인문학 공부임을 이 책은 강조한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현실의 지옥을 벗어나 빛 속을 뚫고 나가는 일과도 같다. 삶에의 의욕과 글쓰기에의 욕망은 하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다.” 즉, 글쓰기는 재능이나 소질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만큼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방법론을 제시하는 이 책은 초보 작가뿐 아니라 글쓰기 입문자들, 자신만의 글쓰기를 마음먹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작가 지망생들, 혹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확실한 안내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밀실: 글쓰기를 위한 책읽기〉, 2장 〈입구: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3장 〈미로: 글쓰기에서 마주치는 문제들〉, 4장 〈출구: 작가의 길〉, 5장 〈광장: 글쓰기 스타일〉 등이다. 〈개정판 서문〉과 「세상의 저자와 작가들은 고마운 스승이다」이란 제목의 〈에필로그〉가 책의 앞뒤로 붙어 있다. 특히 「글쓰기에 도움이 되었던 책들」의 목록이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첨가돼 시선을 끈다.

    저자는 〈개정판 서문〉에서 사춘기 시절에 쓴 첫 단편 「기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단편은 열여섯 살 겨울에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내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에서 끼적인 것이다. 책상 위에 널린 교과서들을 옆으로 밀치고 알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문장을 썼다. 이 단편은 당시 중고생들이 많이 보던 〈학원〉이라는 잡지에 활자화되면서 박제되었다. 누구에게도 '소설작법'을 배운 적도 없는 상태에서 단편을 써낸 것은 한국현대문학전집을 통독하며 여러 작가들의 소설을 두로 읽은 덕분이었으리라. 분명 한국 작가들의 소설들이 내 소설의 교본이 되었을 테다. 그 뒤로도 단편 몇 편을 썼는데, 어느 순간 더 이상을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을 쓰고 싶은 열망은 끓어오르는데, 벽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p.7) 다독의 중요성과 문학에의 열정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어 다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쓰다'는 돋, '살다'」라는 작은 제목을 붙였다. "나는 거친 세상을 떠돌다가 굳은 결의를 다지며 혼자 시립도서관의 구석에 처박혀 습작을 했다. 무수한 실패를 겪은 뒤 등단을 하고 시집과 비평집을 펴낸다. 내가 습작 경험으로 얻은 결론은 천부의 재능이라는 것은 거짓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과 '쓰다'와 '살다'는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무수한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는 작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정직하게 실패를 겪고 그것을 제대로 반추한 사람만이 작가로 빚어지는 것이다. 실패 경험은 작가들의 자산이자 글쓰기의 동력이다. 작가들은 삶의 장면들, 이야기, 꿈과 환경의 파편들을 언어라는 도구를 써서 글을 빚는다. 작가의 연장통에 담긴 가장 중요한 도구는 바로 언어다. 작가들이란 언어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걸 올바로 쓰는 법을 훈련 받은 사람들이다.



    이 책은 저자의 체험에서 건져 올린 창작론이자 고전문학에서부터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스타일을 광범위하게 탐구한 작가론이기도 하다. 국내외 다양한 작가들의 예문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각각의 문체와 형식, 내용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책이라고 한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한강의 시적인 문체, 소설쓰기로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김연수, 강건한 탐미주의의 문체로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김훈, 문장을 재즈 리듬으로 연주하는 하루키, 『노인과 바다』를 15년이나 구상하고 200번 이상 고쳐 쓴 헤밍웨이, 오감을 행복하게 만드는 문장으로 인간의 부조리함을 명석하게 꿰뚫는 카뮈,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그린 허먼 멜빌, 세상을 등진 따뜻한 냉소주의자 J. D. 샐린저 등 ‘작가들의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스타일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책인 만큼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이 책에 쓰인, 삶의 파고를 헤쳐 가며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해간 작가들의 내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마음의 무늬’이자 ‘사상의 실체’라고 말하며, 글쓰기 스타일을 둘러싼 지적 여정을 밀실-입구-미로-출구-광장이라는 다섯 경로를 따라 산책하듯 나아간다. 저자가 안내하는 생각의 경로를 따라 책의 행간을 걷다 보면 어느새 한 줄 한 줄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펜 끝에서 진짜 ‘나는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3다의 실천 과정을 저자는 '밀실-입구-미로-출구-광장'이라는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3다의 실천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개의 작가들은 작가가 되려는 의식이 생기기 전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누가 시켜서 읽는 게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책을 읽는다. 그들 내면에 잠재된 '책을 읽고 싶다'라는 욕망은 본능에 가깝다. 그들은 책읽기를 통해 본능으로서의 지식욕을 채운다. 작가가 되려고 많은 책들을 섭렵한 게 아니라 많은 책을 섭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이다. 책읽기는 이해와 공감의 능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이해와 공감 없이는 어떤 글도 쓸 수 없다. 글쓰기의 동기는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자극하고 촉발하는 것은 다양한 책읽기다.



    앞서 언급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문체를 저자는 「존엄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적인 문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상 작품은 이 책에서 해석하고 있다.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인용했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p.299)

    『채식주의자』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세 편의 연작으로 구성돼 있다. 세 편의 연작 단편을 관통하는 초점 인물은 영혜인데, 화자는 작품마다 바뀐다. 첫 번째 화자는 영혜의 남편, 두 번째 화자는 영혜의 형부, 세 번째 화자는 영혜의 언니다. 영혜는 어린 시절 개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육식을 멀리하며 타인과의 불화를 겪는다. 독자들은 『채식주의자』에서 동물성과 육식이 보편적인 생활 습관인 타자들에 둘러싸여 대립하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겪는 폭력의 실상과 마주친다. 작중 여성화자의 내면에 고여 있는 분출하지 못한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이것은 내면에 "겹겹이 뭉쳐져" 있는 채식주의자의 고함이자 울부짖음이다. 육식주의자들에 둘러싸인 채식주의자의 발화되지 못한 목소리에 담긴 전언은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라는 육식을 추종하는 세태에 치우친 제 식성에 대한 통렬한 자기 성찰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육식이란 인간이 아닌 동물 개체를 도살하고 그 피와 살을 취하는 일이다. 씹고 삼켜서 제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져버린 동물의 피와 살! 채식주의자의 처지에서 육식은 '차가운 악(cold evil)일 수도 있다. 육식 옹호자들은 기계적 환원주의나 시장 효율성 등을 앞세워 육식의 야비함과 악취를 감춘다고 저자는 장석주는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육식에 대한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인용해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양산되는 쇠고기가 호르몬과 살충제로 오염되고, 그 운송과 도축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생명적인가를, 쇠고기를 둘러싼 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악과 협잡이 이루어지는가를 일러바친다.



    『채식주의자』는 돌연 육식을 향한 혐오와 생리적 거부를 말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하는 화자의 욕구는 외부화되지 못한다. 『채식주의자』는 소수자인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자의 고통으로 얼룩진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육식이 숨긴 포식자의 동물성과 잔혹함을 까발린다. 이 소설이 힘을 얻는 이유는 응축된 언어로 시적인 문체를 사용해 명료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시키는 데 있다고 저자 장석주는 생각하는 듯하다.


    한강 소설의 가장 큰 매혹은 시적 문체를 통해 드러난다. 시적 문체란 진부한 서술을 뛰어넘는 감수성의 발현이자 함축된 목소리이고, 시를 품은 문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서사를 품은 채 흐른다. 그 흐름은 모음과 자음이 만나 이루는 교향(交響)이자 자유로운 숨결이며, 응축과 뜻밖의 도약을 품은 시적 스타일을 이룬다.(p.304)


    저자 : 장석주(張錫周)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 시인, 에세이스트, 인문학 저술가. 그밖에 출판 편집자, 대학 강사, 방송 진행자, 강연 활동으로 밥벌이를 했다. 현재 아내와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 파주에서 살고 있다. 1955년 1월 8일(음력),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던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하고, 스물 넷이 되던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문학평론이 입상하면서 등단 절차를 마친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직접 경영하는 동안 15년간을 출판 편집발행인으로 일한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명지전문대에서 강의를 하고, 국악방송에서 3년여 동안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한다. 2000년 여름에 서른여섯 해 동안의 서울생활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전업작가의 삶을 꾸리고 있다. 한 잡지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소장한 책만 2만 3,000여 권에 달하는 독서광 장석주는 대한민국 독서광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고 해서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15년을 출판기획자로 살았지만 더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자 업을 접고 문학비평가와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급변하는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보다 잘 소통하고 교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성에 있는 호숫가 옆 ‘수졸재’에 2만 권의 책을 모셔두고 닷새는 서울에 기거하며 방송 진행과 원고 집필에 몰두하고, 주말이면 안식을 취하는 그는 다양성의 시대에 만개하기 시작한 ‘마이너리티’들의 롤모델이다.”

    저서로는 『몽해항로』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일요일과 나쁜 날씨』, 『행복은 누추하고 불행은 찬란하다』,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고독의 권유』, 『철학자의 사물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시간의 호젓한 만에서』,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공저) 등이 있다. 애지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칼훈의 랫시티 - 완벽한 세계 유니버스25가 보여준 디스토피아
    에드먼드 램스던 외 지음, 최지현 외 옮김 / 씨브레인북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한민국의 문화가 21세기 들어 드디어 날개를 펼친 듯하다. 5,000년 간 이어온 우리는 늘 '문화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는 야만족과 대립되는 개념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를 자랑으로 내세우는 동안 우리는 군사·외교적으로는 지형상 굉장히 불리한 위치라고 군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아마 아시아 대륙 동쪽 끝 반도 국가여서 그렇게 말한 듯하다. 더욱이 문화가 앞선 대륙 쪽보다는 해양 쪽으로 진출하는 것이 유리했을 터이지만 사실 일본 열도에 가려 태평양을 직접 마주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일본은 섬 나라이지만 우리 한반도보다 인구가 많은 이유를 독자로서 알지 못하지만 문화도 뒤떨어지고 식량 생산도 충분치 못한 일본에 막혀 해양으로 뻗어나가지 못했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백제의 전성시대와 통일신라, 고려 때는 그래도 중국 해안 쪽으로 돌아 동남아시아와 회교국가와도 바다를 통해 교역을 했던 것으로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볼 때 매우 불리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고대 이후 늘 중국의 위협과 일본의 침입 사이에서 침략에 대비해야 했다.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왔다.

    최근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으면서 많은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이 눈부시게 높아졌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 상위권 국가에 들어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목받을 만한 경제력을 갖추었기 때문이겠지만 문화 민족의 자긍심은 갑자기 억지로 세워질 일이 아니다. 아무리 핍박을 받고 나라를 빼앗겨도 이를 되찾으려는 민족적 양심은 살아남아 독립을 향해 목숨까지 스스럼없이 바칠 수 있는 숭고한 이타적 정신이 있었고, 그 가운데 우리 문화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 하고, 한국어를 배우려 애쓴다. 한국의 위상이 눈부시게 높아진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사람, 즉 인재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사가들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교육열, 낮은 문맹률, 탄탄한 첨단 인프라까지, 한국은 많지도 않은 인구와 넓지 않은 국토로도 이만큼이나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비관적인 평가가 대두되고 있다. 바로 인구 때문이다.



    한국은 이렇게나 빨리 늙어버렸을까? 왜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을까? 단지 정책을 잘 만들면 젊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 할까? 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고 정책적으로 보조해서 아이를 키우기 쉽게 하면, 과연 인구문제는 해결될까? 인구 관련 연구자들은 이런 식의 피상적인 접근법과 해결책으로는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 말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넘어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랫 시티』가 제시한다.

    이 책은 존 칼훈의 삶과 연구를 다룬다. 존 칼훈은 전설적인 연구자로, 쥐를 가지고 한 ‘유니버스’ 실험은 행동학적인 관점에서 인구와 인간 사회의 문제를 살펴보게 한다. 물론 쥐와 인간은 일대일로 등가 치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실험 결과를 무작정 인간 사회에 일대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칼훈의 연구가 시사하는 점은 크다고 한다. 특히 〈유니버스25〉는 단순히 쥐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이는 과학의 언어로 쓰인 현대 도시에 대한 실험적 우화이며, 삶의 ‘공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인구가 인류 번영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은 근대에 들어서서야 제기됐다. 중세까지만 해도 인간은 각종 질병에 취약한 데다 식량 사정이 원활치 않아 평균 수명이 불과 40세 안팎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때 인구 문제를 들고 나온 학자가 맬서스다. 영국의 경제학자 토마스 맬서스가 인구의 자연증가는 기하급수적인 데 비해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하므로 과잉인구로 인한 빈곤의 증대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맬서스는 1798년 「인구의 원리에 관한 이론, 그것이 장래의 사회개량에 미치는 영향을 G.W.고드윈과 M.콩도르세 그리고 그 밖의 저작가들의 사색에 언급하며 논함」이라는 제목의 『인구론』을 발표했다. 이후 이 책은 여섯차례 개정을 거쳐 1826년에 최종판이 나왔다고 한다.



    맬서스는 인구란 언제나 생산가능한 식량공급량으로 부양할 수 있는 최대한도까지 계속 증가하는 속성을 지니며, 결과적으로 임금까지 압박하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노동력의 증가에 대응할 만큼 식량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경작지보다 저급한 토지까지 경작을 확대해야 하기 때문에 단위당 생산량은 감소한다는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세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이 생산하는 생계 수단인 식량은 산술급수적 성장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식량은 동일한 시간안에 동일한 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이에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 성장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자 계산 방법인 복리처럼 늘어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전제는 노동자 계층이나 하위 계층 사람들 대다수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출산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 이론은 당대 뿐 아니라 후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찰스 다윈, 알프레드 월리스 등의 진화론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찰스 다윈은 1836년에 ‘인구론’을 읽은후에야 진화의 기제가 적자생존, 즉 자연도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맬서스는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에 대해 과잉이란 표현으로 개념화하였다. 그의 이론은 당대에는 종종 놀림거리로 취급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후세의 대공황과 케인즈의 등장을 예견한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 책 『랫 시티』는 '인구 소멸에 대한 실험 보고서'란 문구를 표지를 두르는 띠지에 쓰고 있고, 표지에는 「완벽한 세계 유니버스25가 보여준 디스토피아」란 부제가 붙어 있다. 지금 우리의 출산율은 유사 이래 최저인 0.7이라고 한다. 이는 『랫 시티』에서 세운 가설과 이론에 따르면 이처럼 생활 수준이나 수명은 놀랄 만큼 향상되는데 출산율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걸까. 이 현상에 대해 '생식 본능 붕괴'에 대한 우려를 존 칼훈이 실험 결과로 내놓은 결과에 다가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장대익 가천대학교 카천코코네스쿨 석좌교수 장대인은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은 전대미문의 쥐 집단 실험('랫 시티')의 역사를 생태학적 언어로 탐구한 기록"이라며, "쥐 집단의 '과밀화'만으로도 어떻게 행동의 붕괴(번식 중단, 폭력성 증가, 사회 붕괴)가 발생했는지를 추적한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존 칼훈의 이론이나 저서를 직접 번역 출판한 것은 아니다. 존 칼훈의 연구 결과에 공감하고 더 확장하고자 하는 두 학자가 그의 연구를 널리 알리고자 새로 쓴 책이다. 존 애덤스와 에드먼드 램스던이다. 에드먼드 램스던은 퀸메리런던대학교 과학사 및 의학사 수석 강사로, 20세기 미국 사회학, 행동학, 생물학 과학사를 연구하고 있다. 또 존 애덤스는 BBC 선정 '신세대 사상가'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존 칼훈 실험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에 대해 램스던과 공동 작업하고 있다. 역자도 두 분이다. 최지현은 뇌과학자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 설립 초기 멤버로 합류했으며, 현재 KIST 책임연구원이자 UST 교수, 고려대 산학연 교수로 재직 중이다. 칼훈의 〈유니버스25〉를 현대화한 실험 공간을 구축하며 인구소멸 과정의 뇌 변화를 추적 중이다. 허성우는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재학 중이며, 물리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이번 번역에 참여했다.

    칼훈은 쥐들이 포식자도 없고 배고픔도 없는 유토피아인 〈유니버스〉에서 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했다. 사람의 개입은 먹이통과 물병을 채우고, 깔짚을 더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아마도 평화롭고 이상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 않을까?

    책에 따르면 처음 A단계는 개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로, 각자의 영역을 형성하고 둥지를 만들어 서식지를 구축했다. ‘사회적 적응 단계’였다. 곧 개체 수가 급격히 늘었고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B단계, 즉 ‘확장기’가 다가왔다. 개체수는 두 달마다 2배로 늘어났다. 어린 쥐가 성체 쥐보다 3배나 많았지만 양육은 잘 이뤄졌고 교육을 잘 받았다.

    그러나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이때가 C단계, 즉 ‘정체기’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것은 사회질서의 붕괴였다. 암컷과 새끼를 보호하던 수컷들은 점차 그 역할을 포기했고, 암컷은 점차 공격적으로 변했다. 동성 간 교미 행위가 늘어났고, 출산 후 새끼를 방치하는 암컷이 늘었다. 새끼는 정상적으로 교육받지 못했다. 물리적 공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데도 이미 사회적 붕괴의 초기 단계에 접어들었다. 젊은 수컷은 좌절하고 거부당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물러났다. 이 단계가 끝날 때쯤에는 이미 사회 조직은 사실상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 D단계는 ‘멸망의 단계’로, 대개 방치된 채 자라난 쥐들은 개인 공간에 대한 감각이 없었고 욕구나 충동을 잃었다. 공격성도 없고 구애나 교미도 하지 않았다. 무성적이고 비사회적인 이들은 싸우지 않았기에 상처가 없었다. 이들은 끝없이 털을 정리하고 몸을 매만졌으며, 먹고 마시고 자는 것 외엔 하는 일이 없었다. 서로 몸을 밀착한 채 앉아 있었지만, 반대 방향을 바라볼 뿐 교류하지 않았다. 개체 수 밀도는 절정에 달했다가 점차 줄어들었다. 아무 저항 없이 상황을 받아들인 쥐들은 차분하고 만족스러운 상태로 지냈고, 건강히 살다가 자연사했다. 개인으로서는 최적의 삶의 방식이었으나, 전체 종에는 치명적인 재앙이었다. ‘아름다운 자들’만 남은 사회는 결국 서서히 죽어갔다. 칼훈은 마지막 단계의 개체들이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여겼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You can’t identify with nothing)”기 때문이다.

    〈유니버스25〉의 흥망성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의 한국 사회와 겹치는 지점이 분명히 보인다. 문제는 C단계에 접어들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칼훈의 실험에 따르면, C단계에 접어든 다음에는 무엇을 해도 이미 행동학적으로 무너진 쥐를 되돌릴 수 없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므로 쥐와는 다르고, 인간의 사회는 쥐의 조직과는 다르게 작동한다. 그러나 과연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벌써 D단계에 접어들어 ‘아름다운 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적으로 최적의 삶에 길들어 인간 종은 점차 멸종되어가는 건 아닐까?

    위 그래프는 칼훈의 유니버스25 실험의 쥐 개체군의 인구 수 곡선이고, 오른쪽은 대한민국의 인구통계 곡선이다. 급격한 성장, 완만한 정체기, 추락하는 비가역적 하강까지, 두 그래프는 놀라울 만큼 닮았다. 이런 유사성은 단순히 우연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초저출산이라는 작금의 현상이 경제적인 선택을 넘어 신경생태학적 위기라고 한다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칼훈은 정체된 사회적 관계망이 인간 집단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서, 이를 ‘행동의 붕괴(behavioral sink)’라고 불렀다. 칼훈의 통찰은 군집 행동 연구에서 나아가 뇌과학, 사회학, 역사학이 융합한 연구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분야를 넘나들며 행동의 싱크를 메울 방안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칼훈의 실험은 1980년대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단지 쥐로 가득한 시각적 충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 실험이 인간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엄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연구는 미국 의회 회의록에 인용되었고, NASA와 워싱턴D.C. 행정당국, 감옥 과밀화 정책 자문에 반영되었다. 단일 생물종에 대한 실험이 도시 설계와 국가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정책을 바꾼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공로로 한때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유니버스’ 실험은 예리한 통찰을 제공하는 놀라운 연구 과정이었다.


    칼훈은 사회적 접촉의 빈도를 측정해서 ‘사회적 속도’ 또는 ‘사회적 온도’라고 불렀다. 이는 개인의 사회적 상호작용 빈도와 그 깊이를 측정하는 개념이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쥐와 인간 모두에게 이상적인 그룹 크기를 성인 8~16명으로 설정했으며, 최적은 12명이라고 제안했다. 칼훈은 이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했는데, 영장류 조상들이 반고립된 소규모 집단으로 생존했던 유산이라고 주장했다. “현대 문화적 진화는 이러한 원초적 유전적 기반 위에 덧씌워진 것뿐입니다.”

    이상적인 크기의 그룹은 개인에게 사회적·심리적 안정을 준다. 그룹이 너무 작으면 자극이 부족해지고, 너무 크면 과도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좌절감이 생겨 폭력적 행동이나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칼훈은 과도한 상호작용이 발생하면 상호작용의 강도가 약화되며, 결국 의미 없는 수준까지 약해진다고 경고했다.

    또한 쥐 실험에서 개체 수가 증가할수록 사회적 속도에 따라 하위 계층이 형성되는 것을 관찰했다. 사회적 속도가 높은 개체는 더 활발하게 움직이며 보람 있는 상호작용을 더 많이 나눴다. 반면, 사회적 속도가 낮은 개체는 고립되고 움직임이 제한적이었으며, 결국 하위 계층을 형성했다.(p.287~288)


    저자 : 에드먼드 램스던

    퀸메리런던대학교 과학사 및 의학사 수석 강사로, 20세기 미국 사회학, 행동학, 생물학 과학사를 연구한다. 웰컴트러스트(Wellcome Trust), 레버흄트러스트(Leverhulme Trust) 등 과학사 관련 주요 연구 펀딩을 수주하며 환경설계, 정신건강, 도시계획과 교감하는 과학의 역할을 깊이 조명해왔다. 존 애덤스와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존 칼훈 실험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에 대해 공동 작업했다.


    저자 : 존 애덤스

    BBC 신세대 사상가(BBC New Generation Thinker)로 선정된 적이 있으며, 『Interference Patterns: Literary Study, Scientific Knowledge, and Disciplinary Autonomy』의 저자이기도 하다. 에드먼드 램스던과 함께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존 칼훈 실험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에 대해 공동 작업했다.


    역자 : 최지현

    어쩌다 보니 출판사를 만들게 되었지만, 본업은 뇌과학자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 설립 초기 멤버로 합류했으며, 현재 KIST 책임연구원이자 UST 교수, 고려대 산학연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버드의대와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마우스 모델에서 인지와 행동을 매핑 중이다. ‘군집뇌과학(Collective Brain Science, CBRAIN)’을 제안하고, 이를 바탕으로 칼훈의 〈유니버스25〉를 현대화한 실험 공간을 구축하며 인구소멸 과정의 뇌 변화를 추적 중이다.


    역자 : 허성우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재학 중이며, 물리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