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수업 - 슬픔을 이기는 여섯 번째 단계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박여진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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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경중을 따진다는 것은 조금은 비정한 듯 보이지만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수년 전 신문에 난 기사가 생각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조사한 앙케이트 결과였다. 가장 많은 응답자가 '배우자의 죽음'을 꼽았다.

부모의 죽음과 자식의 죽음, 그리고 형제의 죽음 등이 뒤를 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조사 결과다.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의 순서 그대로다. 이 조사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조사하는 과정의 일부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현대인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자신의 직장 상실이나 자신의 질병 등이 아니라 역시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 조사는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 내용을 밝혔다. 현대인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슬픔'이며 가장 슬픈 일은 '배우자의 죽음'이다. 그러나 이혼이나 별거는 그리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은 듯하다. 순위가 훨씬 뒤로 밀려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은 것이 배우자의 죽음이나보다.

이 조사 결과를 보고 독자는 배우자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고, 배우자에 대한 새로운 결심도 갖게 됐다.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 그리고 건강 문제는 스스로 챙기기 전에 배우자인 독자가 직접 챙겨주겠다고.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은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는다. 물론 자신의 죽음을 뺀 삶을 얘기하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운명이자 숙명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게 될 것이며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죽음 이후 겪게 되는 모든 슬픔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늘었다. 산업사회로 옮겨진 후 인간이 할 일이 기계가 대신하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감정이나 정서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이다. 더욱이 현대는 정보화 사회이고 디지털 사화이다. 컴퓨터로 대변되는 인터넷 사회는 대면의 관계에서 비대면의 관계로 급속도로 이전시켰다. 삶에 중요한 경제문제를 얼글도 보지 않은 채 해결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쌓이는 우울감의 극대화를 초래하는 환경으로 이전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은 비대면, 비접촉으로까지 확대돼 인간 관계를 단절시킬 우려까지 생긴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극단적으로 표출될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비대면 사회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코로나로 인해 급격하게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는 물론 의료계에서도 우려하고 있다.



『의미 수업』의 저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는 분명 곁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도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곧 삶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제 죽은 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남겨진 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그 마지막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의미 수업』은 그런 의미에서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을 잇는 완결판이자 진정한 치유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이자 죽음 연구의 권위자이며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함께 베스트셀러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을 집필한 슬픔과 애도 분야 최고 전문가인 데이비드 케슬러가 새롭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기존에 널리 알려져 왔던 죽음과 슬픔 고유의 다섯 단계 너머에 있는 여섯 번째 단계를 찾아내 집대성한 책이다. 그가 발견한 여섯 번째 단계이자 기존의 과정을 완성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는 바로 ‘의미 찾기’다. 저자는 수십 년간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지혜와 지식뿐 아니라 자신이 힘들게 얻은 귀중한 경험을 토대로, 슬픔을 이기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강력한 ‘의미’를 발견하고 힘겨운 현실을 희망으로 바꾸는 치유의 방법을 제시한다.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재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은 사람들과 가까이 와 있다. 심지어는 전쟁보다 더 가깝다는 학자들도 많다. 보이지도 않고,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적과 함께 사는 삶'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이란 누구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다. 죽음은 언제든 맞이해야 하는데 왜 슬픔에 관한 책에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이유는 앞서 설문조사 결과를 말한 대로 죽음은 슬픔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총기 난사 사건을 목격하고,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슬픔이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체험한 저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이후 스승이자 멘토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함께 ‘슬픔 치유자’로서 여러 강연과 교육, 상담 활동을 해왔다. 그러던 그가 몇 년 전 스물한 살이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고, 또 한 번 인생의 고통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슬픔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전문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상실을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이 책의 근간은 대략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69년 자신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에서 죽음에 관한 다섯 단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을 최초로 정의한다. 정신의학자였던 그녀는 죽어가는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비슷한 단계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연구는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생각과 담론을 뒤바꿔놓았다는 평을 받었다. 그 뒤 그녀와 함께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을 집필하면서 데이비드 케슬러는 이 다섯 단계가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왔다. 그런데 자신 역시 직접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을 겪은 후, 이것만으로는 상실의 고통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의미’의 길을 찾는 것만이 아들의 존엄을 지켜주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같은 슬픔을 겪는 이들을 위한 강력한 위로와 방법들을 담아내기로 한다. 그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사랑과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면 언젠가는 슬프다. 상실의 슬픔은 결코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슬픔을 직시하는 용기, 슬픔 이후를 견뎌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의미 찾기’의 출발점이다.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슬픔은 상실에 수반되는 경험이자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저자는 슬픔을 숨기거나 외면하거나 조급하게 마무리 지으려는 행위는 죽음의 슬픔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또는 결혼 생활이 끝났을 때,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었을 때, 자연재해로 살던 집이 폐허가 되었을 때 등 살면서 절망과 좌절의 경험을 하는 순간, 우리는 가혹한 상실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의미를 찾는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는 과정 같지만 실제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상실과 상처, 거기에 수반되는 슬픔과 고통을 세분화해 들여다보고 각각의 상태에 필요한 처방들을 상세하게 풀어낸다. 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갑작스러운 사고사부터 암이나 병으로 인한 질병사 뿐 아니라 정신적 문제와 약물 중독으로 인한 죽음, 큰 죄라는 오명 때문에 드러낼 수 없는 자살, 침묵으로 덮어버리려 하는 유산까지 우리가 언급하기 꺼려했던 여러 죽음에 대한 사회적 편견들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방식을 신중하고 사려 깊게 조언한다. 슬픔을 목격하고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자살이나 마음의 병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우, 그들에 대한 비난의 눈초리와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슬퍼할 권리조차 빼앗기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짚어내며 이러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린 시각을 환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 지독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치유될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절망하기 쉽다. 하지만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슬픔의 농도가 엷어지기는 해도 결코 완전히 끝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또 슬픔보다 충만하고 풍요로운 무언가로 바뀔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슬픔이라고 하는 감정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보다는 사랑으로 기억될 때, 그들이 살지 못한 날들을 빛내기 위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삶에서 의미를 만들기 시작할 때 치유는 시작된다고. 의미는 찾으려고만 한다면 어느 곳에나 있다.

현대 죽음 연구가이자 슬픔 전문가로서 슬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일을 해온 저자는 병원이나 호스피스 시설에서 죽음이 임박한 이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왔다. 책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수많은 사례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인물의 우표를 모아 편지를 붙일 때마다 떠올리는 아들, 갑작스런 사고로 아이를 잃은 뒤 글쓰기를 통해 딸과의 유대감을 찾은 아빠, 자식이 죽고 난 뒤 장기 기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은 부모,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손을 잡아드린 것만으로 충만해진 딸, 아내의 유산 이후 일찍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위로하는 장례 지도사가 된 남자 등 사연은 각기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모두 절망 속에서 크고 작은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걸까?





저자는 ‘의미’는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결국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나’ 자신에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약물 중독으로 아들을 잃고 한때 삶의 의욕을 상실했지만 그가 아들과의 소중하고도 짧은 만남에서, 아들이 남기고간 추억의 흔적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이 책을 쓰는 것을 삶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삼았듯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의 삶이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죽음이 생명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그리고 그 상실의 슬픔을 직시하고 의미를 찾고자 선택할 때, 우리는 마침내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희망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엷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슬픔은 그대로다. 대신 우리가 커져야 한다. 상실 이후의 삶을 우리가 다시 지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우리는 남아 있는지, 그 이유를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의 삶이 값지고 소중했듯, 살아야 할 날들이 있는 우리의 삶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이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는 책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롯이 목도한 수많은 삶과 죽음에 대한 목격담이자 절망을 온몸으로 견뎌낸 처절한 경험담이며 전문가로서의 내공과 통찰이 담긴 감동적인 치유서다. 언젠가는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꼭 필요한 위로와 따뜻한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 확신한다.



살다 보면 ‘왜’라는 질문을 셀 수 없이 많이 맞닥뜨린다. 왜 우리에게 이런 비극이 찾아왔지? 왜 그 사람이지? 왜 하필 그들이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생이 이토록 잔인하고 무작위일 수는 없으니까. 수많은 사람이 몇 년 동안 이렇게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만 답을 구하지는 못한다. 왜 이혼을 했는지, 왜 죽었는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던 이유에서 의미는 찾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사랑하는 그 사람을 알게 되어 무엇을 얻었는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좋은 것이 남았는가? 그럼 그 사람의 죽음에서는 좋은 그 무엇이 남았는가?(p. 172~173)


자살한 이들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있다 해도 여전히 ‘자살’이라는 말에는 오명이 남아 있다. 평범한 대화에서 또는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로 자살이 직접 언급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그 사람이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드문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쉬쉬하며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하면 같은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을 만나게 된다. 자살은 가장 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p. 199)



대부분 고통의 무리를 두려워한다. 스스로를 온전한 감정을 다 경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감정에 감정을 품는다. 슬픔을 느끼기 시작한 다음에는 슬프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슬픔을 오롯이 다 느끼기도 전에 감정을 재빨리 바꿔버리는 것이다.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다.

화가 나면 자신의 화를 판단해 자기 비난으로 감정을 바꾼다. 이런 예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처음 느끼는 감정에 충분히 오래 머물라고 말한다. 충분히 느끼지 않은 고통은 처음 상태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기억하는 비결은 고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려 애쓰지 말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p. 312)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내게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묻는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그 사람이 죽은 이후의 삶이 있을까요?” 모두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하루라도 더 살기를 온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짧은 시간 동안 이 땅을 거쳐 가는 우리는 같은 삶을 두 번 다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도 그 단 하루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p. 366~367)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치유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고통 속에 머물 것인지. 슬픔의 다른 단계들과 마찬가지로 여섯 번째 단계에서도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를 떠나지 않고서는 미래를 향해 갈 수 없다. 살아왔던 날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다가올 날들에 긍정의 대답을 해야 한다. 이렇게 자문해보라. “이러한 상실과 더불어 변하고 성장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이러한 상실과 더불어 성장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p. 397)


저자 : 데이비드 케슬러(DAVID A. KESSLER)


세계 최고의 슬픔과 애도 분야 전문가다. 그는 삶과 죽음의 맨 가장자리로 몰린 수천 명의 사람과 함께해오면서 행복의 비밀을 배웠으며 비통한 상실을 겪은 뒤에도 그 지혜를 잃지 않았다. 저서로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공동으로 집필한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이 있으며, 단독으로 쓴 책으로는 《환영, 여행, 붐비는 방VISIONS, TRIPS, CROWDED ROOMS》, 《생이 끝나갈 때 준비해야 할 것들》 등이 있다.

특히 《생이 끝나갈 때 준비해야 할 것들》은 테레사 수녀의 극찬을 받았다. 루이스 L. 헤이와 함께 《스스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YOU CAN HEAL YOUR HEART》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슬픔과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과 직접 소통하며 의사, 간호사, 상담사, 경찰, 응급 구조대원 등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교육을 하며 보내고 있다. 9ㆍ11 테러 이후 미국 적십자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특별 예비 장교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웹 사이트 GRIEF.COM은 슬픔에 빠진 수많은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을 제공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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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읽는 로마사 - 1,000년을 하루 만에 독파하는 최소한의 로마 지식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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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건국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견해는 로마의 건국 세력이 다른 국가의 추방세력으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독신 남성으로 이루어졌던 로마의 건국 세력은 여인들을 충원하기 위해 인근의 사비니족 여인들을 납치하게 된다. 이의 굴욕을 갚기 위해 사비니족과 로마인이 전쟁을 벌였지만, 이미 사비니족의 딸이자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들이 전쟁을 중재하여 두 민족이 합쳐지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기서 '로마는 어떻게 지중해의 패권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답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은 사실 그렇게 특출난 민족은 아니다. 게르만이나 노르만족에 비해서 신체적/전투적 우월함이 돋보이지도 않고, 에트루리아인이나 그리스인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발달한 국가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인은 '겸손한 민족'이었다. 자신들의 부족한 점은 크개 개의치 않는다. 민족적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복속시킨 민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복속시켰으면 단지 '로마인'으로 편입시킨다. 이를 통해 자기 국가의 부족한 점을 기꺼이 메꾸게 된다. 이것의 시초가 사비니족과 라틴족의 융합이다. 사비니족 여인의 중재로 인해 융합하게된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그 어느쪽에게도 사회적 지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실상 로마인에게 사비니족이 편입된 것이지만, 사비니족 장로들도 배정받는 시민권이나 원로원 의석에 만족할 수 있었고, 로물루스와 사비니족 왕의 공동 왕 체제를 통해 동등한 위치임을 보장받았다. 이를 통해 다민족 국가의 기틀을 두게 된 로마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민족을 '로마인'으로 편입시키며 성장하게 된다.

무려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는 정치인,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로마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로마' 하면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던 검투사들의 경기, 도시를 불태웠던 네로 황제의 기행,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일화를 어렴풋이 떠올릴 정도로 로마 역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다. 조금 더 들어가보면 예수도 그때의 사람이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서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로마 제국 건국 무렵 예수는 별 영향력 없는 유대인의 한 사람이었다. 로마 제국의 복속국이던 예루살렘의 한 시민일 뿐이다. 당시 로마는 이민족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신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미국에 의해 전격적으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로서는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조그만 도시국가가 세계를 지배한 제국을 건설했나부터 로마인들이 남긴 법 체계, 건축물, 군대 운용 방식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더욱이 그때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 당한 주변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은 물론 영국 등 주변 나라와 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정복자의 위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로마인의 포용과 균형은 정신적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의 중심이라 하는 그들 서구 사회도 로마 제국의 자부심을 견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각종 제도와 법을 그대로 지속거나 변형해 쓴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 관한 일련의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로마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데 오히려 장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정복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나, 황제와 원로원의 대립 구도 등 정치사적 관점을 통해 로마사를 이해하자니 방대한 역사 앞에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는 이처럼 로마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으로 더 깊이 파헤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이나, 이미 로마사를 나름의 경로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로마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로마인이 먹었던 ‘음식’을 통해 로마 시대를 조명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란 결국 사람이 살아간 흔적에 대한 기록인데, 로마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의식주, 그중에서도 ‘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지금껏 로마사를 조명했던 여타의 관점들과 차별화를 이룬다. 이 책의 저자 윤덕노는 여기에 착안해 글을 썼다.

책에 따르면 로마인의 식탁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특히 우리네 밥상과 로마의 식탁을 비교해봤을 때 둘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인의 식탁은 주로 우리 땅에서 재배한 곡식과 채소, 나물이 올랐다. 가축과 생선 역시 우리 산과 강, 바다에서 키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2,000년 전 로마인의 식탁은 달랐다.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인접한 지역에서 수입해온 밀, 보리, 와인, 올리브 등의 이국의 식재료들로 채워졌다. 마치 현대를 사는 우리가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먹고 칠레산 와인, 중국산 김치로 식사를 하듯, 로마는 2,000년도 훨씬 이전에 식탁에서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를 실현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식탁도 하루아침에 다 채워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로마 제국의 영광과 발전의 궤도를 같이 밟았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들은 처음에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당시 이들이 먹었던 음식은 기껏해야 양젖과 치즈에 보리죽이었다.

로마인의 음식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바로 로마인들의 식문화다. 이 책에는 제국의 로마인들이 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는지, 먹고 난 뒤에 음식물 쓰레기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저녁 식사인 케나(cena) 자리에서 어떻게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는지 등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로마인의 식생활을 해부한다. 또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던 황제의 연회를 묘사하면서 청나라의 ‘만한전석’을 압도하는 ‘미네르바의 방패’나 ‘조디악’ 등 전설의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로마인의 소울푸드는 뭐니 뭐니 해도 빵, 와인, 올리브다. 로마인들은 하루 평균 한 병가량의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하지만 로마인에게 와인은 술이 아니라 식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와인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 채로 마셨다. 이에 대해서는 식습관이나 인구의 증가를 이유로 꼽기도 하지만 상하수 시설이 미비한 관계로 물을 그냥 마실 수가 없어서 와인을 섞어서 마셨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역시 로마인의 생활과 더없이 밀접한 식재료였다. 빈민층은 올리브 열매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했고, 샐러드나 소스의 재료로서 우리의 김치와 버금가는 용도로 활용했다. 식사뿐만 아니라 목욕을 할 때도 올리브 오일을 뒤집어쓰고 스트리길(strigil)이라는 도구로 땀과 때로 범벅이 된 몸을 벗겨냈다. 또한 등잔불을 밝히거나 찌꺼기를 건축 마감재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올리브를 제외한 채 로마인의 생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이처럼 음식은 로마인의 일상과 로마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아닐까. 무엇을 먹었는가 하는 주제는 로마 사회의 단면을 살피는 데는 적합하지만 굵직한 역사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단지 로마인이 즐겨 먹던 음식들을 살펴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에는 의식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음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로마의 흥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식재료가 하나 소개된다. 그것은 바로 ‘빵’이다. 도대체 빵이라는 게 로마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저자는 로마를 들어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한 제국’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우리가 밥심으로 사는 것처럼 로마인들은 빵심으로 살았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주식으로 먹었는데, 그 무렵 동양은 밀가루가 귀해서 중국의 황제도 간신히 만두를 먹었던 시기에 로마의 평민들은 매일 같이 빵을 먹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로마 시민들은 시장의 제빵소, 오늘날로 따지면 제과점에서 빵을 사다가 먹었다. 노예 또는 해방 노예 출신의 제빵업자들은 시민들로부터 곡식을 받고 빵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로마의 무상 식량배급 제도인 ‘큐라 아노나(cura annona)’ 때문이었다.

큐라 아노나는 로마 공화정 초기에도 존재했는데, 흉년으로 인해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고 물가가 치솟을 때 시민들에게 곡식을 싼값에 나누어주던 제도였다. 처음에는 원로원에서 담당했던 아노나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수준에서 점차 수혜 대상자를 확대해, 기원전 75년부터 기원전 58년 사이에 이루어진 법 개정을 통해 로마 시민의 절반가량인 32만 명이 공짜로 식량을 배급받게 되었다. 빈민 구제 수단이었던 아노나가 포퓰리즘에 의한 선심성 정치제도로 변질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노나 제도를 손보기 위해 무료 식량 배급의 대상자를 15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으나, 초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다시 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티베르강의 홍수로 상당수의 식량 저장 창고가 강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아노나는 별다른 부작용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아노나는 또다시 선심성 포퓰리즘의 수단이 된다. 193년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곡식뿐만 아니라 와인과 돼지고기, 올리브 오일과 소금까지 더해서 나누어주었으니, 로마 시민의 식생활 일체를 정부에서 책임진 셈이었다. 더불어 로마 후기로 갈수록 아노나 집행의 권리를 황제가 장악하게 되면서 아노나는 점점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간다. 결국 국고를 털어 환심을 사려 했던 황제와 귀족, 그리고 공짜를 좋아하고 폐해에 둔감했던 로마 시민의 도덕 불감증이 얽히고설켜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랬던 로마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재배하던 작물을 보리에서 밀로 바꾼 뒤 빵을 구워 먹고, 이탈리아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다 와인을 만들고, 마을 입구의 나무에서 올리브 열매를 따서 피클을 담고 기름을 짜서 요리를 했던 것이 아니다. 로마인의 식탁은 자급자족을 통해 채워진 것이 아니라, 4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이루어진 전쟁과 탐험, 개척을 통해 얻은 결과물로 채워졌다. 즉 외국에서 가져온 전리품과 열매들이 하나둘 식탁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빵과 와인, 올리브와 젓갈 등…. 지금의 기준으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음식들이지만 로마인들은 이 음식을 얻기 위해 개인의 목숨과 국가의 운명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물론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 및 자원과 음식들이 승리와 함께 부수적으로 따라온 전리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로마가 치렀던 각종 전쟁은 자원 확보를 위해 싸운 경제 전쟁이기도 했다.

결정적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제국이 세력을 넓혀갈 때마다 로마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났고, 식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로마 경제도 그만큼 윤택해졌다."

p. 18, 제1장 「모든 음식은 로마로 통한다_식탁에서 찾은 로마 제국 번영의 열쇠」 중에서



"로마인들은 빵에 대해 무척 민감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빵의 재료인 밀을 비롯한 갖가지 곡식을 실은 배가 로마의 관문인 오스티아 항구에 들어오곤 했는데, 그 시기가 좀 늦어지기라도 하면 로마 시내에는 곧 뒤숭숭한 소문이 나돌았다. ‘폭풍우를 만나 수송 선단이 몽땅 바다에 가라앉았다더라’, ‘아니다, 그냥 운항에 차질이 생겨서 예정보다 늦어지는 것일 뿐이다’ 등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다.

이집트 곡식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또 다른 빵 창고인 시칠리아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돌면 시민들은 공황에 빠졌다. 그로 인해 빵 공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으면 우선 빈민들이 거리에 나앉아 굶주렸고 평민들은 동요했으며 폭동이 일어날 조짐마저 보였다. 그러니 시칠리아의 흉년 소식에, 이집트의 수송 선단 사고 뉴스에, 시민들은 곡물 사재기를 시작했고 빵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로마 시민들이 이처럼 이집트를 비롯해 시칠리아, 북아프리카의 곡물 작황과 곡물 운송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는 시민들이 먹을 식량을 전적으로 해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는데, 외부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는 일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흉작이 원인이 되거나, 수송 선단이 폭풍우로 침몰하거나 해적들한테 곡물을 털리게 되는 일이 생기면 로마 시민들이 빵 부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러면 빵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빈민들, 평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가 불안해졌다.

이를 막기 위해 빵값이 오르면 당장 굶주린 채 거리에 나앉아야 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처음에는 싼값에, 나중에는 무료로 곡식을 나누어주는 제도가 생겼다. 훗날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받는 무료 배급제도다."

p. 209~210, 제4장 「로마,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하다_로마 시민 절반이 공짜 식량을 먹다」 중에서



"로마인들은 평균 하루에 0.5리터, 그러니까 하루에 와인 한 병쯤을 마신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런 추정치에는 성인 남성들이 마신 분량만 해당되는지 여성과 아이도 포함되는지 등 여러 측면에서 논란이 있다. 어쨌든 하루 한 병의 와인이라면 주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은근히 취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다. 게다가 매일 한 병씩 거르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면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이 강대해짐에 따라 로마 시민들이 매일 흥청망청 와인을 마시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다는 소리인가 싶지만 그런 것은 또 아니다.

이 무렵 로마인에게 와인은 쾌락을 위해 마시는 기호품인 술이 아니라 물과 함께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수였다. 그렇기에 현대인처럼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물을 타서 희석해서 마셨다. 와인을 왜 물에 타서 음료수처럼 마셨는지,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이후에 와인 소비량이 왜 그렇게 급속도로 늘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우선 물을 대신해 와인을 마신 배경으로는 오염된 식수를 꼽는다. 지금도 유럽 상당수의 나라는 물에 석회질이 섞여 있어 자연 상태의 물을 그대로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유럽에서 생수나 탄산수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도 그런데 로마 시대에는하수 시설의 미비 등으로 마시는 물이 상당 부분 오염된 상태였다."

p.238~239, 제5장 「와인이 만든 로마의 전성시대_물 탄 와인을 물 대신 마셨던 로마인」 중에서




"1세기 때 활동한 로마의 미식가 아피키우스의 요리법에는 약 500 종류의 요리 레시피가 실려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음식에 올리브 오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브 오일은 모든 로마인이 평등하게 먹는 필수 식품이었다. 품질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구분 없이 식사 때마다 올리브 오일을 쓰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식품학자들은 올리브 오일이 특히 저소득층의 영양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로마에서 가난한 계층은 부자나 평민과는 달리 고기를 별로 먹지 못했는데 옛날에도 고기값이 저렴하지는 않았을 뿐만 아니라 냉장 시설이 없었던 만큼 보존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상으로 곡식과 빵을 배급받지 못했던 진짜 빈민의 경우는 빵도 먹지 못하고 대부분 죽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대신에 올리브 오일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는 로마에서 저소득층은 하루 섭취 칼로리의 3분의 1을 올리브 오일로 먹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p. 276, 제6장 「올리브 기름 독에 빠진 로마 시민들_로마인의 의식주를 책임지던 올리브」 중에서




저자 : 윤덕노


신문기자를 거쳐 현재는 음식문화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매일경제신문 중국 베이징 특파원과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매일경제신문 사회부장, 국제부장, 과학기술부장, 중소기업부장과 부국장을 역임했다.

25년의 신문기자 생활과 장기간의 방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음식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관련 스토리를 발굴해 음식 유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음식잡학사전》 발간을 계기로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과 중국 고전에서 원문을 확인하고 그리스 로마 고전에서 근거를 찾아 음식의 유래와 속설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음식이 상식이다》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음식으로 읽는 한국생활사》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신의 선물밥》 《음식잡학사전》 《중국권력대해부》 《중국벗기기》 《차이나쇼크》 《베이징 특파원 중국경제를 말하다》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월가의 황제, 불룸버그 스토리》 《유럽의 세계 지배》 《장자의 내려놓음》 《나쁜 세계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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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이야기 - 마음에 들려주는 어른 동화
손길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 출판 서점계에 '어른 동화'가 심심찮게 올라온다. 시대 탓인지,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지 독자는 모른다. 어렸을 때로의 회귀본능? 아니면 세상살이에 너무 물든 얼룩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어떤 이유로든 동화 읽기는 좋다. 어린날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고, 순수한 세상으로의 상상력 여행 때문이다. 세상에 물들어가며 적당히 더렵혀진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 더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하는 세상살이는 인간의 숙명일까. 여러 생각에 진정의 마음으로 삶과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어서 동화가 좋다. 다만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보다 왜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은지, 그때의 감동은 왜 지금은 크기가 작아졌을까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등이 교차한다.



이 책 『모든 것의 이야기』에는 '머리말'이나 '나가는 말'이 없다. 동화 8편만 오롯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그나마 머리말을 대신하는 편지글이 맨 앞에 실려 책 출판 과정이나 저자와 교유가 있던 사람이 돌아가신 뒤에 고인이 되신 분을 뜻을 감안해 출판을 결심한 듯하다.

미처 출판되지 않은 저자의 원고를 모아 출판한 것은 고인의 죽음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출판사 측은 출판을 결정한 배경과 책 소개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스즈키 도시치카의 〈편지〉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두 편지입니다. 당신이 읽으려고만 한다면.”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와 달은 왜 빛을 내고 있을까? 색깔은 왜 생겼을까? 물방울은 왜 밑으로 흘러갈까? 그들의 소소함에 귀를 기울인다면 아름다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 늪에 빠지게 된 어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대답을 회피하거나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어린아이였던 우리는 언제 “왜?”라는 질문을 멈춘 것일까요. 이 책을 읽는 동안엔 잠시 접어두었던 상상의 날개를 다시금 펼쳐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8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목과 비교하면서 살펴보면 8개의 명사인 단어가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빛'이 첫번째 소재이고 '인간'이 마지막 소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얘기해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표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의 의도가 거기에 있었다면 설득력을 얻는다.

'손길 우화집'이라는 작은 부제목이 있다. 손길은 당연히 저자의 이름이고 우화집은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이솝 우화'가 떠오르고 전래 동화도 떠오른다. 저자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어슴푸레 머릿속을 스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것은 '살아 있다'의 다른 표현이리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 동화를 읽을 준비가 돼 있을 것이다. 독자는 깊숙한 곳에 있는 영혼을 끌어내 저자의 글을 쓴 이유에 가 닿으려 읽고 싶다.


빛 이야기

색깔 이야기

장미 이야기

고라니 이야기

물방울 이야기

벚나무 이야기

지렁이 이야기

인간 이야기



해와 달과 별은 신의 섭리대로 움직이지만 정작 인간은 신의 뜻과 무관심하고 살아간다. 그냥... 어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처럼 치열하게 살고, 어떤 이는 '살아 남기' 위해 사는 것처럼도 보인다. 각자 삶의 이유가 다르겠지만 삶의 모습은 비슷하다.

이어 보여지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색깔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색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신의 뜻을 담은 것,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도 있고 과거 같은 느낌의 흑백의 삶에서 다양한 색깔이 생기고 다른 색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사는 것 어쩌면 가장 쉽지만 어려운 과정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도 인용된다. 고라니의 이야기도 감명 깊다. 나이 들어 갈수록 우리는 감정이 메말라 가고 순수함도 사라진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지렁이 이야기는 여운이 많이 남는다. 우주나 장미, 인간에 비해 하찮은 존재이고 때에 따라서는 기피하는 존재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한번 더 깊게 생각해보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생각 없는 장난이나 기억도 못할 사소함이겠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 자연, 존재에게 끼칠 영향력에 대해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개구리 이야기'도 생각난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어른을 위한 동화로서의 알맞은 소재나 이야기를 창작하는 저자의 순수한 마음, 극적이지 않고 차분하고 수수한 느낌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다.


저자 : 손길


1994년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발자국을 남기는 삶이 가치 있다고 답을 내려서 글을 쓰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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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역사 공부 - 사마천, 우리에게 우리를 묻는다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를 일컬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말한 대로 신흥 강국과 패권국의 충돌은 역사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어 왔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영국의 대립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알아두는 것은 중요하다. 언제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의 연구』의 저자 영국의 역사가인 아널드 J.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독자적인 문명사관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유기체적인 문명의 주기적인 생멸이 역사이며 또, 문명의 추진력이 고차문명의 저차문명에 대한 '도전' 과 '대응'의 상호 작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이후 쇠퇴하였던 역사의 반복성에 빛을 부여함으로써 고대와 현대 사이에 철학적 동시대성(同時代性)을 발견하고 역사의 기초를 ‘문명’에 두었다. 이로써 토인비는 19세기 이후의 전통 사학에 맞서 새로운 역사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대체적으로 서양에서는 투키디데스로부터 시작해 토인비에 이르러 역사학의 전형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동양의 역사관도 결은 조금 다르지만 명쾌하게 역사를 보는 입장을 정리하고 그에 따른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이미 기원전 시대부터 역사 서술의 정확한 사관을 세웠다. 사마천과 그의 저서 『사기』이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술왕사(述往事), 지래자(知來者)’라고 했다.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가올 일을 안다’는 역사의 미래 예견력에 대한 통찰이다. 사마천은 중국 고대사를 이 같은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 『사기』를 저술했고,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었다. 특히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전서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를 하든 기업을 경영하든 각계각층의 리더는 반드시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더욱이 지식이 해방된 집단지성의 시대에서 역사 공부는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리더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공부는 한층 더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책을 읽는 자가 성공한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과거 속에 미래가 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저자의 주장이 큰 설득력을 갖고 다가온다.



이 책 『리더의 역사 공부』는 김영수 저자가 지난 10년 동안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했던 글과 이번 책을 위해 새로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의 원고를 다듬고 현 상황에 맞게 일부 바꾸었다. 총 97꼭지의 글들이 모두 칼럼 형식이다. 주로 사마천과 『사기』의 정신과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다.

사마천의 생각을 빌려 우리 사회 각계각층을 향해 자성을 촉구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1년 전의 글인데도 시사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정말이지 역사의 진전은 참 더디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거나 후진할 수는 없다. 몇 사람이 바뀌었을 뿐 적폐세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준엄한 역사 평가와 심판은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수행하고 넘어가야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각계각층의 리더들, 세상을 바른 쪽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사마천과 『사기』의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들,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바로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역사는 그 자체로 뒤끝이다' 편에서 명장 악비를 모함해 죽게 만든 간신 진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독자에게 큰 보람이다.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정확히 잘 알지 못했던 악비에 대한 이야기다. 그 당시 진회는 악비를 죽이고 떵떵거리며 살았을 테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그 부부의 철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다 무릎을 꿇려놓았는데, 그걸 보는 자손들이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악비의 충(忠)이 어리석은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그 당시도 있었을 텐데 그가 무조건 강경 대응만을 고집하느라 송나라 백성들이 크게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성들은 끊임없이 악비를 칭송했다. 이유는 그의 '충'이 조정이나 권력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조국과 백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진회는 왕이나 자신의 안락만을 위한 것이었기에 외면당하고 악비를 영원히 응원하는 걸 백성들이 선택했다는 이야기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전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이 부분은 생각할 게 많아진다.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던 백성들은 이미 높은 이들의 선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 시대가 지나면 인간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잊을 수 있지만 긴 역사에는 망각이란 게 없다. 망각이 없는 역사의 기록과 기억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우리 현대사에 이름을 남기는 정치인으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특히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에는 모두 97꼭지의 칼럼 형식의 글들이 들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등 사회 각 방면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통일성과 일관성이 없었다. 이번에 원고를 정리하면서 독자들을 위해 편의상 다음 일곱 개 큰 범주(주제)를 설정하여 그에 맞는 꼭지들을 배치했다. 이 일곱 개의 주제가 갖는 의미를 간략하게 소개해둔다.

1. 역사는 기록(記錄)이 아니라 기억(記憶)이다

이 범주에는 주로 역사의 기능과 역사가의 자세 등을 다룬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는 이제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가 역사를 쓰는 시대다. 특히 정치인, 지식인, 언론의 말과 글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시대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말과 글을 수시로 소환하여 바로바로 판단하고 심판을 내린다.

집단지성 시대에 역사는 이제 더 이상 기록물이 아니라 다수의 기억이 되고 있다. 이 기억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필요할 때 언제든 소환되어 증언하고 증명하고 판결한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적폐의 주범으로 지목된 언론 문제도 함께 짚어 보았다.

2. 옳은 길은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이 범주에는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리더와 공직자들의 자세를 주로 다룬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긴 인물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백성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공직자들의 확고한 공사 분별의 자세와 멸사봉공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의 문제를 다룬 글도 몇 꼭지 실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가 다름 아닌 개혁이기 때문이다.



3. 백성이 부유해야 나라도 부유해진다

이 주제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이자 경제 전문가였던 관중(管仲)의 기본 철학인 ‘부민부국(富民富國)’이란 네 글자를 풀이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부국강병(富國强兵)’ 논리에 억눌려 왔다. 이 국가적 폭력논리에 기생하여 대기업과 재벌들이 정치와 결탁했고, 성장을 거듭했다. 그 결과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심화되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로 떠오른 최저임금, 기초 생활 등과 같은 어젠다를 역사 속 사례들과 비교해 보았다. 성장과 분배의 문제 등 예민한 주제들이 적지 않다.

4. 권력(權力)은 힘을 나누는 것이다

권력이란 단어에서 ‘권(權)’은 저울추다. 물건의 무게를 달 때는 그 무게에 맞는 저울추를 사용한다. 따라서 권력의 정확한 뜻은 ‘힘을 고르게 나눈다’는 것이다. 권력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다양한 사례로 살펴보았고, 아울러 리더십 문제도 다루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의 비중이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5. 언격(言格)이 인격(人格)이다

2020년 4.15 총선거의 승부를 가른 여러 요인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맨 먼저 ‘말’을 꼽겠다. 말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 정신세계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이런 점에서 말은 글보다 그 사람을 더 잘 나타낸다. 따라서 모든 말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평소 소신의 표출이다. 실수로 포장하고 변명할 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이 ‘말의 격’, 즉 ‘언격(言格)’이 곧 ‘인격(人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목격하고 체험했다. ‘언격’은 인문학 소양에서 나온다. 인문학의 기본은 문사철((文史哲)이며, 역사는 인문학의 핵심이다.

역사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하나, 자신보다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에 대한 막말과 비난의 본질도 새삼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시기와 질투였고, 그 뒤에는 탐욕이 웅크리고 있었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의 본성에 가깝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남을 해치게 된다.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는 길은 끊임없는 자기수양과 자아성찰, 그리고 공부다. 삐뚤어진 지식인들과 갈 데까지 간 언론들을 염두에 둔 글들이 있다.



6. 좀 알자, 중국

여기에는 주로 중국 지도자들의 언행과 인문학적 소양 및 리더십을 다룬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바람직한 한중관계를 정립하고, 한 단계 더 진전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 지도자들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몇 꼭지 다루어 보았다. 이와 함께 중국의 우주 프로젝트에 대한 글도 있다. 우주굴기, 우주강국으로 떠오른 중국 우주 프로젝트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을 짚어 보았다. 진시황을 다른 측면에서 조명한 글도 한 편 있다.

7. 지식이 해방된 시대

마지막 범주와 주제는 지식이 해방된 집단지성의 시대를 과거 역사 속의 번득이는 지혜들과 견주어 보기 위해 마련했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옛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통찰했는지, 또 그런 통찰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밖에 흥미로운 사회적 주제들이 함께 마련되었다.

이 책의 독창적인 특징은 사마천과 중국의 역사가 거듭되면서 기록된 현상들이 되풀이됨을 보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위기와 기회가 따른다. 그것을 판단해 극복하고 해결하는 것 자체가 삶인지도 모른다. 어렵고 힘들다고 극복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우회하는 방법만 사용하다보면 늘 같은 상황이 다시 펼쳐진다. 그러기에 되풀이되는 역사를 또 기록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의 모든 꼭지마다에 명언명구가 하나씩 딸려 있다. 저자는 여기에다 ‘일침견혈(一針見血)’이란 네 글자를 달았다. ‘침 한 번 찔러 피를 보다’는 뜻으로 흔히 ‘정곡을 찌르다’는 말과 통한다. 단번에 핵심을 움켜쥔다고 풀어도 될 것 같다. 『후한서(後漢書)』[곽옥전(郭玉傳)]이 그 출전이다. 해당 글의 핵심을 짤막한 명언명구로 정리한 것으로 보면 된다.



저자 : 김영수


이 책의 지은이 김영수는 지난 31년 동안 사마천(司馬遷)과 《사기 (史記)》, 그리고 중국을 연구하고 22년 동안 중국 현장을 150차례 이상 탐방해온 사마천과 《사기》에 관한 당대 최고의 전문가이다. 저자는 지금도 사마천과 중국의 역사와 그 현장을 지속적으로 답사 하고 미진한 부분을 계속 보완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번에 펴낸 《리더의 역사 공부-사마천, 우리에게 우리를 묻는다》 는 저자가 오랜 동안 〈사마천 컬럼〉에 연재한 100여 꼭지 글을 7개 의 주제로 관련 도판 자료와 함께 엮었다. 각 꼭지 주제마다 쉽게 풀 어쓴 《사기》 속의 적절한 예화들은 《사기》 마니아는 물론 《사기》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적 감흥을 불러일으킴은 물론, 이 시대를 이끌고 있는 리더와 앞으로 리더가 될 분들을 위한 훌륭한 역사 공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는 《완역 사기》 시리즈를 비롯하여 《역사의 등 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 : 사마 천, 삶이 역사가 되다》 《절대역사서 사기-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2》가 있다. 또한 《사마천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 인 간의 길을 묻다》 《사기의 경영학》 《사기의 리더십》 《사기를 읽다》 《사마천과의 대화》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나를 세우는 옛 문장 들》 《1일 1구》 《36계》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 《백양柏楊 중국사 1, 2, 3》 등 50여 권이 있다.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 사마천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과 강연을 병행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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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m 인물 교양 수업
앤드류의 5분 대백과사전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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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배운다. 어렸을 때의 역사는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한 발 나아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선조들의 정신과 육체를 이어받아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가 필수적이다. 독자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를 배웠고, 한 학년이 올라가서는 세계 역사도 배웠다. 그러나 대학 입학을 위한 역사 공부이다 보니 이해와 역사 의식보다는 연대 외우기에 치중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금속활자는 고려 때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발명한 사실을 '1234년 고려' 때다는 식이다. 대입에서도 역사 문제는 연대를 정확하게 외워야 풀 수 있도록 몇 개의 사건이나 인물을 나열해놓고 연대순으로 맞는 것은? 하는 식이었으니, 전체 우리 역사에서 그 사건, 그 인물의 역사적 위치 등을 배웠다기보다는 언제 일어난 일인지 어느 시대 누가 발명했는지 등을 암기했을 뿐이다. 당시 선생님이 "어려운 과목이 뭐냐'고 물으면 '역사'라고 대답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암기를 못해서'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학생들은 역사를 공부하다 포기해버린 사람들은 사건이 발생한 연도나 딱딱한 재미없는 사실들을 외우다가 지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며 재미를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인물의 삶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1cm 인물 교양 수업』도 전형적인 위인전 스타일의 글보다는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각 인물들에게 접근한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을 모두 ‘위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은 사람들이므로 자유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뽑아 구성해 독자들에게 스스로 정말 필요한 역사 중 인물 한 사람임을 깨우쳐 '교양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일상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고, 어제보다 지적인 나를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의 구성과 설명에 수긍하리라 본다. 교양은 쌓고 싶지만 긴 글을 읽는 것은 부담이 될 때 이 책은 그야말로 독자의 약한 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해내기에 충분하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한나 아렌트, 알프레드 히치콕, 파블로 에스코바르까지,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지나간 역사 의식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가오는 정보의 홍수를 막기에 바쁜데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문제는 정보의 홍수만 있는 게 아니다. 수시로 판단하고 선택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판단과 선택에는 역사에서 배우는 게 가장 좋다. 또 TV나 신문 등에서도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앞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재미가 반감될 때 '역사를 조금 더 공부해둘걸' 하는 후회도 해보는 사람이 많다. 여가의 재미를 즐기기 위해서도,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서 역사의 중요성은 크게 부각된다.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독자들에게 정보와 재미를 동시에 주는 이 책은 발간 취지를 프롤로그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전형적인 위인전 스타일의 글보다는 조금 더 독특한 방식으로 각 인물들에게 접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짧고 재미있는 위인전’이라 칭하고 싶다.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짧고 재미있는 위인전’이라고 칭하고 싶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을 모두 ‘위인’이라 칭할 수 없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에 남은 사람들이므로 자유로운 방식으로, 필자만의 시각에서, 재미있는 사실들을 뽑아만들었다. 이 인물들을 통해 역사가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 이상의 영광은 없겠다."(p. 5)




『1cm 인물 교양 수업』은 세상을 바꾼 100명의 인물이야기를 통해 방대한 역사 지식을 매일 '1cm'씩 쌓을 수 있는 책이다.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철학, 종교 다양한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의 일대기와 명언을 압축해 각 분야의 흐름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위인전처럼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담은 것은 아니다. 역사 속 핵심 사건은 물론, 희대의 악인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까지 알차게 담았다.

책에 따르면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는 왠지 점잖고 푸근했을 것만 같지만 그는 사실 다혈질에 사고뭉치였다. 제자와 한바탕 싸움이 벌어져 교회를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만든 적이 있었고, 고용주와의 트러블로 감옥에도 다녀왔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으로 손꼽히는 로스차일드 가문. 그 가문에서 역사상 최초의 주가 조작이 벌어졌다면? 이 가문의 아들이었던 나탄은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꺾고 승리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낸 뒤, 프랑스가 승리했다는 거짓 소문을 흘려 영국의 국채 가격이 떨어지자 그것을 사들였다가 파는 방법으로 20배가 넘는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라운데 나탄은 영국에만 베팅해 돈을 번 것이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에서도 이득을 챙겼다고 한다. 펼치면 금세 숙면에 빠져들게 했던 지루한 교양서가 아닌 독특한 유머와 해박한 지식이 넘치는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역사가 더 새롭고 넓게 보일 것이다. 평소 역사와 담을 쌓고 지냈던 사람들은 역사의 참맛을 알게 되고,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지적 허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독자가 좋아하는 레오나로도 다빈치와 베토벤이 빠졌다는 점이다. 저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인으로서는 아쉽다. 그러나 두 명이 빠졌다고 이 책의 인물 선정에는 독자의 아쉬움을 주장할 수는 없다. 더욱이 더 재미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나 현재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던져준 사건이나 인물 두 사람이 더 실렸으니까.

우선 눈에 가장 먼저 띈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가 말하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신선했다.

첫째, 사유재산이 공유재산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물건에는 온갖 정성을 다 들이면서 남들과 같이 쓰는 물건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노력한 대가를 직접적으로 보상받아 내 것이 될 때에 무언가를 할 의욕을 가진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분배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동등하게 일한 사람들에게는 동등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르게 분배하는 것이 정의다. 개개인의 능력 차이가 있는데 그에 상관없이 똑같은 보상을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셋째, 베푸는 것이나 호의를 제공하는 것은 사유재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같이 소유하는 공동의 재산이 있을 때는 진정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내 것'을 남에게 준다는 것이 바로 베푼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덕이며 사유재산은 사람들의 미덕을 드높일 수 있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경계했고, 사유재산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과 화폐는 거래를 하고 개인의 덕성을 끌어올리는 수단일 뿐 절대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경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철학자인줄만 알았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많이 등장하는 히포크라테스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그는 의학도들이 의사가 되고자 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는 그 인물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왜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릴까? 그가 나타난 이후에 사람들이 질병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신전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전이 병원이었던 셈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이 신의 노여움이 아니라, 인체의 내부와 외부 환경이 변화해 발생하는 것으로 이를 올바르게 관리하면 병도 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질병에 대한 생각 자체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신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pp. 215~216)]

2,000여년 전부터 그리도 말했지만, 아직도 일부 종교인들은 그가 세운 의학과 그가 베푼 의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종교와 과학은 대립되는 개념이어선지 모르지만 어차피 인간과 인간의 삶을 위해 생겨난 것들 아닌가? 일부 의료인들이 '돈만 밝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돈만 밝히는 일부 의사가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의사들은 '명의'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 대한민국 의사들처럼 자신을 희생해가며 치료한다는 의사의 예를 전 세계적으로 별로 들은 바가 없다. 일부를, 자신의 판단을 바탕으로 보편화시켜 매도해서는 안뒬 일이다.



또 조셉 퓰리처는 '현대 저널리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운다.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아수라백작'이란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었다. 언론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는 이때, 이보다 더 생각나는 사람은 없다.

플리처도 처음에는 돈을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썼다. 이 책에 왜 황색언론이라는 말이 나왔는지 설명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그들의 행보를 보고 플리처의 신문에 실린 ‘황색 옷을 입은 소년’에서 착안해 황색언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중략) 플리처는 언론이 과연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보게 된다. 이후 플리처의 「뉴욕 월드」는 방향을 180도 선회한다. 끈질긴 고집으로 정경유착과 부패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 사람들에게 알렸다. 독자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저널리즘을 살려낸 것이다."(p.156)

돈을 벌기 위해 황색언론의 비판도 감수했던 그가 깊은 고민 끝에 언론의 정도를 밝혀내고 새로운 언론인의 의무를 다하는 삶을 살아 사망 이후 존경받는 인물이다. 자신의 잘못을 고민하고 사유해 반성하고 진정한 저널리즘의 선구자가 된 사람이다. 그의 삶에 뒤늦게라도 경의를 표하고 싶다. '쓰레기 기자'라는 말이 유행처럼 많이 퍼진 요즘은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수많은 유튜버들까지 언론인 행세를 하고 있다.

거짓은 점점 교묘해지고 진실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퓰리처가, 그의 삶이 존경받는 이유이다. 진정 후회했다면 거듭나야 한다.





책 속엔 각 장마다 마지막에 <쉬어가는 페이지>로 앞서 소개되었던 인물들의 비하인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자칫 지루함을 느낄 무렵에 재미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던 히틀러였지만 반려동물은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동안 여러 마리의 개를 길렀고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이를 선전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1933년 11월 세계 최초로 독일에서 동물보호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을 제정한 것은 히틀러와 나치당이었다. 이 법은 오늘날 전 세계의 동물보호법의 기초가 되었다.(p. 120)

팝아트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앤디 워홀'.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분이 천재야, 예언자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앤디 워홀은 "미래에는 모두가 15분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기술의 발달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이 등장할 것을 미리 예측했던 걸까?(p. 197)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작품으로 또 한 번의 충격을 선물할지 궁금할 정도다.

'악의 평범성'을 논했던 한나 아렌트도 위인이다. 평범한 인간들이 악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일러준 그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긴 여운과 함께 남는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전혀 고민해보지 않고 그저 행동하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타인의 비윤리적인 행동에 치를 떨면서도 반인간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생각해야 한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는지,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과연 이것이 올바른 길인지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꾸준히 생각하지 않으면 말하는 것도 무능해지고 행동도 무능해진다고 보았다. 결국 그 행동은 악을 불러오고 사회와 국가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의 깊은 사유'인 것이다.(p. 29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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