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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평점 :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외국의 책(소설)에서 만났던 여주인공의 발자취를 찾아 다니는 한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저자 곽아람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 속의 여주인공이 살던 곳으로 찾아가 소설 속 장면을 그리고 직접 봄으로써 당시 상상했던 기억 속의 장소와 주인공들을 현재 시점으로 불러내 업데이트하는 셈이다. "유년 시절 머리맡을 지켜주던 책 속 친구들이 있었다. 나와 다른 머리색을 한 그들은 부푼 소매의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끊임없이 재잘대거나, 요정과 함께 네버랜드로 모험을 떠나 해적과 한판 승부를 펼쳤다. 때로는 전쟁과 굶주림을 이겨내고 삶을 쟁취했으며, 살인 사건 현장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했다. ‘책 속 친구들이 사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들이 있는 그곳에 가볼 수 있다면!"
이 책은 소설과 현실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독서 여행자 곽아람이 안식년으로 주어진 1년간 심상으로만 존재하던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을 썼던 작가의 내면 세계도 들여다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다. 열세 편의 소설이 태어난 곳을 직접 여행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뉴욕을 근거지로 하면서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시작으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속 도시들을 찾아가는 미국 남부 여행, 『작은 아씨들』이 쓰인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톰 소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미시시피강을 탐험했다. 또 ‘디즈니 그림 명작’의 추억을 떠올리며 올랜도 디즈니월드를 누비고, 애거사 크리스티의 『카리브해의 미스터리』를 환기하며 서인도제도의 세인트마틴을 찾기까지.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땅을 직접 밟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2D로 그려왔던 그 세계가 3D로 실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내게 소중했다.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건 문학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 문학이 말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선의, 그리고 낭만이 실재한다는 것과 동의어여서 그간 내가 책에서 받은 위안이 한 꺼풀짜리 당의정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p.9)

이 책은 「여행을 시작하며」란 제목의 〈프롤로그〉와 「끝나지 않은 문학 여행, 『빙점』」이란 제목의 〈에필로그〉를 제외한 3부 13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부 〈문자로 지은 집〉, 2부 〈바람과 함께, 스칼렛〉, 3부 〈태양 가득히〉와 13장 「그곳,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_『빨강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태고의 자연, 아카디아 국립공원_『에반젤린』.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마녀 도시, 세일럼_『영 굿맨 브라운』 『주홍 글씨』, 너새니얼 호손」「네 자매 이야기, 콩코드_『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컷」「개츠비의 고장, 뉴헤이븐, 샌즈포인트, 그레이트넥, 킹스포인트_『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고단한 예술가들의 도시, 뉴욕_『마지막 잎새』, 오 헨리」「강인한 여성을 키운 남쪽 땅, 애틀랜타, 찰스턴, 존즈버러_『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우아한 어머니의 고향, 서배너_『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꿈과 희망의 세계, 디즈니월드_‘디즈니 그림 명작’, 월트 디즈니」「에밀리에게 장미를, 뉴올리언스에 승리를_『에밀리를 위한 장미』, 윌리엄 포크너」「대문호의 노스탤지어, 해니벌_『톰 소여의 모험』, 마크 트웨인」「헤밍웨이의 영감, 쿠바 아바나, 키웨스트_『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먼 북소리, 세인트마틴_『카리브해의 미스터리』, 애거사 크리스티」 등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명작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빙점』까지 열네 편인 셈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저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들까지 합친다면 수십 편의 책이 이 한 권에 들어 있는 셈이다. 저자의 독서량을 보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파리 센 강변의 영문 서적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Shakespeare & Company)〉 앞에 붙은 칠판의 글귀를 읽다가 울었다고 고백한다. 사라질 뻔한 이 서점을 인수해 키워내 딸에게 물려준 조지 휘트먼의 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라탱 지구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저자는 이웃보다 책 속 인물들을 훨씬 친숙하게 여겼던 휘트먼과 책벌레로 살아온 자신이 무척 닮아 있음을 느낀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들을 더 친구처럼 느끼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고 주인공 나스타시야를 현실에서 찾아 헤맸다는 휘트먼에게서 나는 책벌레로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p.10)

성인이 되어서도 한쪽 발은 여전히 이야기의 세상에 걸치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수없이 여행했다고 밝힌다. 이번이 문학 속에서 보여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을 여러 번 찾았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책 속 주인공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마음, 그 믿음을 품고, 이번에도 독서 여행자가 되어 미국과 캐나다, 쿠바 등 문학의 무대, 작가의 생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가 걸은 길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문학이 만든 ‘실재하는 풍경’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책과 함께 떠난 "그 시절 그녀들"의 도시 말이다. 저자는 뉴욕, 콩코드, 보스턴 등 어린 시절 마음속에 그려온 장면들이 살아 움직이는 도시를 찾아가 문학의 향취를 느끼며 작품과 깊이 공명한다.
첫 장(章)는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이 된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서사시 「에반젤린」의 태곳적 자연이 떠오르는 아카디아 국립공원(2장), 너새니얼 호손의 어두운 상상력이 깃든 세일럼(3장), 루이자 메이 올컷이 네 자매의 우정을 길어 올린 콩코드(4장),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화려함과 허망함이 교차하는 뉴욕 근교의 부촌들까지(5장), 한 시대와 한 작가를 규정한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며 작품 속 문장이 어떻게 현실의 풍경과 겹치는지를 탐험한다. 또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탄생한 애틀랜타와 서배너(7~8장), 헤밍웨이가 생애와 작품을 쌓아 올린 쿠바와 키웨스트(12장), 그리고 마크 트웨인(11장)과 오 헨리(6장)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문학의 요람까지. 저자는 아메리카 문학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길 위에서 되살려낸다.

이 책은 2018년에 출간한 『바람과 함께, 스칼렛』의 원고를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쓰다시피 개정증보했다. 이렇게 이 책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이전의 여정에 새로운 이야기와 한층 깊어진 시선을 더해 다듬어 펴낸 것이다. 책에는 월트 디즈니의 세계와 미스 마플의 미스터리한 현장,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빙점』 속 눈 내리는 설원을 여행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책에는 여행의 시점에 어울리는 문장을 작품의 원문과 함께 저자가 직접 번역해 실었다. 원문을 음미하는 것 또한 문학작품을 읽어가는 또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 저자의 의도가 담겼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단지 ‘책 속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기가 아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해온 문학작품들이 현실의 장소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또 그곳이 작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과 삶을 잇는 하나의 ‘지도’다. 또한 이 책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책 속 인물들과 이별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 숨 쉬는 문학과 마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끄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빨강 머리 앤』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회고한다. "1953년 봄 휴전 직전 서울. 틈만 나면 인사동 헌책방에 들러 지적 허기를 채우던 스물네 살 이화여고 국어 교사 신지식(申智植, 1930~2020)을 손바닥만한 문고판 일본어 책이 사로잡았다. 『빨강 머리 앤』, 『초록 지붕 집의 앤』을 일본어로 옮긴 책이었다. 홀린 듯 읽던 신지식은 호주머니를 털어 그 책을 샀다. 그는 1960년대 초 이화여고 주보 〈거울〉에 이 책을 번역해 연재했고, 1963년 정식 출간했다. 『빨강 머리 앤』은 그렇게 처음 한국에 소개되어 '소녀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p.20)
저자가 신 교사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이화여고 주보에 소개한 이유에 대해 "저는 책을 번역하면서 완전히 앤이 되었다 나왔어요. 앤을 통해, 그 상상력을 통해 저는 전쟁의 우울함을 극복하고 소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저자의 머릿속에는 직접 책 속에 나오는 배경지를 찾아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번 여행에서 들렀던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저자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저자가 독서 여행을 가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책을 읽은 후부터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나는 전자(前者)였고, 이야기 속 트로이가 실재한다 믿었던 슐리만처럼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
저자에 따르면 작가 몽고메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빨강 머리 앤』은 서른네 살 때인 1908년에 쓴 책이다. 그는 캐번디시의 외가에서 이 작품을 썼는데, 현재 집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사과나무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저자는 사진과 함께 책에 실었다. 사과나무 주위에서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몽고메리가 걸었던 오솔길을 산책하고 다시 차를 달려 몽고메리의 생가를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하는 일본인이 열었다는 식당 〈블루 윈즈 티룸(Blue Winds Tea Room)〉이 근처에 있다기에 찾았다. 저자는 앤이 다이애나를 초대해 취하게 만드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바로 그 라즈베리 코디얼(과일청을 물에 타 만든 음료)을 곁들여 비프 커리를 먹었다.
읽을 때는 차례대로 읽었지만 '서평'은 그대로 따를 수 없기에 독자가 청소년기에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쿠바의 아바나로 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겨 묵었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이다. 옥상 야외 바에서 다이키리를 마시며 이 글을 썼다. 이날 석 잔째의 술, 점심 먹은 식당에서 반주로 모히토 한 잔,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바 '엘 플로리디타'에서 오후에 딸기 다이키리 한 잔,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 잔, 럼과 보드카를 좋아하는 내게 쿠바는 술 궁합이 최고인 나라다. 낮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50여 분 걸려서 산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헤밍웨이 박물관, '핀카 비히아에' 다녀왔다. '전망 좋은 농장'이라는 뜻의 이곳은 헤밍웨이가 20여 년간 살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곳, 그러니까 헤밍웨이의 집이었다. 택시를 타면 편도 20쿡(약 2만 5,000원) 정도 내야 한다는데 가이드북의 충고대로 0.5모네다(약 25원)짜리 버스를 탔다. 관광용 버스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버스여서인지 동양인은 나밖에 없어서 당연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행기보다 더 세밀하게 적어놓아서 처음 가보는 독자들은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또 현지에 가보니 달라진 풍경, 변함 없는 곳, 그리고 현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냄새까지 모두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저자의 문학여행은 매우 귀중한 소설 읽기의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최소한 여기에 등장하는 수십 권의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뒤늦은 독서열도 자극된다. 작품 해설은 물론, 저자가 느낀 독후감 형식의 깨알 지식, 현재 주민들의 삶의 모습 등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는 문학 배경지의 모습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호기심까지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에필로그〉에 나오는 홋가이도 아사히카와를 찾아 여행한 저자의 기록이 유독 눈길을 붙잡았다. 물론 독자가 읽어본 소설이기도 하고, 저자가 아는 지식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지적 호기심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빙점』은 광복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소설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드라마·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는데, 줄거리는 다소 자극적이다. 저자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이라지만 독자로서는 성인이 되어서 읽어서인지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설원의 홋가이도는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이 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노벨 문학상 수상작)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숲이 보였다. 화창했던 전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흐리고 눈 내리는 날,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의 어둠, 그리고 눈밭에 휩싸인 숲은 신사의 입구처럼 신령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문학관은 이미 문을 닫았다. 다시 스트로부스소나무숲을 지나 제방까지 걸어갔다. 전날 아이가 타고 놀던 분홍색 눈썰매가 나무 아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곧 캄캄해질 것 같아 이번에는 제방에 오르지 않고 그냥 돌아나오기로 했다.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나오는데 저멀리 숲 어귀에서 문학관의 불빛이 환하게 반짝였다."(p.353)
저자 : 곽아람
문학을 사랑하는 독서 여행자. 주중에는 기사를, 주말에는 책을 쓴다. 책 속 세계에 매료되고, 그림 속 풍경에 고요히 나를 맡길 때 평온하다. 2003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현재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미술경영협동과정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뉴욕대학교 IFA(The Institute of Fine Arts) 방문 연구원으로 있었다. 뉴욕에 있는 동안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뉴욕의 아트 비즈니스 서티피컷 과정을 마쳤다. 지은 책으로 『나의 뉴욕 수업』 『구내식당: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 『쓰는 직업』 『공부의 위로』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미술 출장』 『어릴 적 그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림이 그녀에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