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 - 썸머 짧은 소설집
썸머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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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의 표제어는 소설 제목이라기보다는 싯구처럼 보인다. 저자는 여름을 좋아해서인지 필명도 '썸머'다. 저자는 작가뿐만 아니라 이미 에세시를 출간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또 배우와 영화, 영상의 연출가이다. "하나의 직업도 깆기 힘든 시대라는데 여러 개의 직업을 갖고 있다"면 부러워서 하는 말일까? 아무튼 그는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열정을 가지고 여름의 태양처럼 자신을 이글이글 불태운다. 이 책은 저자의 첫 소설집이다. 지난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 동안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공개된 작품집이다. 소설책 치고는 작고 얇은 이 책에 소설 7편을 담았다. 얼핏 제목만 보아도 '여름'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소설은 길이에 따라 중·장편, 단편 등으로 나뉜다. 학교 국어 시간에 배우듯 장·중·단편 소설은 그 특성도 다르다. 쓰는 일은 작가의 일이고, 작가의 자유이어서 어느 길이로 쓸지에 대해서는 오롯이 작가의 자유 재량이다. 그러나 이 원고가 출판할 때에는 출판사와 협의를 해야 한다. 검열의 의미가 아니라 출판 책의 모양과 판형, 글자 크기, 페이지 수 등을 협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가 파악되면 출판사는 편집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원고 길이를 알아야 한다. 책의 페이지 수는 편집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컴퓨터 자판을 이용해 글을 쓰지만 이전 세대는 대부분 200자 원고지에 펜으로 직접 한 자 한 자 메꿨다. 그래서 아날로그 세대 작가들은 컴퓨터로 치면 글이 더 안 써진다며 펜으로 200자 원고지에 쓴 경우가 최근에도 있다는 사실을 독자도 들은 바 있다. 

아무튼 이 책 이야기에 소설의 길이에 대해 한마다 하지 않을 수 없어 꺼낸 이야기다. 소설의 길이는 작가와 편집 출판사와의 문제이지 독자들은 전혀 관여할 바는 없는 문제이다. 다만 학교에서 배운 대로 장편의 경우 일생이나 시대를 가로지르는 시공간, 인물들이 일생 혹은 몇 세대를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를 쓸 때 적절하다. 단편은 하나의 사건을 집중 조명하며 성격이 분명한 인물이 등장하며, 오랜 시간에 걸친 이야기라면 압축적으로 써야 한다. 또 구성 역시 소설 형식이 있기 때문에 따라 맞춰야 한다.



길이에 따라 소설이 구분되긴 하지만 분야별 구분은 여기에 적용하지 않는다. 어떤 소설이든 중·단편의 구별은 소설 길이에 따라 나뉜다. 따라서 장편 소설이 소설의 원형이라든지,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장편 소설을 쓴다든지 하는 점도 적용되지 않는다. 소설의 길이는 작가의 문장력이나 소설 기법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단편이 소설의 길이가 짧아서 붙여진 이름이듯이 장편은 소설의 길이가 길어서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이 소설집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 역시 작가의 소설 쓰는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뜻에서 써본 말이다. 

출판사 측은 이 소설집을 '여름을 닮은 경쾌한 짧은 소설집', '단편 영화를 보는 듯이 선명한 이야기'들이라고 말한다. 출판사 리뷰에 따르면 이 소설집은 어디서든 만나고 헤어졌을 이름들과 ‘얼음물, 담요, 물감, 볼링공, ASMR, 수박, 그리고 수영장…’을 생각하게 한다. 엉뚱하게만 보이는 여름의 준비물이 빚어내는 뜻밖의 다정과 진득한 응원을 발견하게 되고, 독자들은 이 소설들을 읽는 또 하나의 기쁨을 맛볼 것이라고 밝힌다. 저자 썸머가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뜻밖의 충돌과 기울어진 마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싱그러운 여름의 물기를 머금은 일곱 편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통해 두근거리는 사랑과 정성스러운 일상을 기대하게 한다"는 추천평을 쓴 작가 가랑비메이커는 독자들이 삶과 사랑의 의지를 다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다정한 방법을 알고 싶다면 썸머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어느 인물에든 자신의 삶을 대입해 볼 것을 조언한다.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우리는 곧장 주인공이 되어 데굴데굴, 어디론가 굴러가게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저자 썸머는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사랑, 마음이 한 쪽으로 쏠리거든요."」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소설 제목은 실제로 어느 영화에서 했던 대사"였다고 말한다. 대사가 아주 많은 영화였는데 감사하게도 감독이 직접 대사를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때 떠올린 문장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사랑이 뭘까"라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었다고 회고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집에는 짧은 소설 7편이 담겨 있다. 길이로만 판단하자면 단편 소설 1~2편의 분량에 불과하다. 글재주가 뛰어나 간결한 문장으로 7편의 스토리를 이 작은 책에 담았다고? 선뜻 믿기지 않지만 분명 7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먼저 소설의 제목만 열거해 본다. 「얼음이 녹으면」, 「정아」, 「수족냉증」, 「데굴데굴」, 「양호실」, 「점점」, 「그녀의 여름방학」 등이다. 모두 신비스럽거나 판타지적인 요소도 없고 평범한 단어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여름과 소설을 사랑하던' 자신이 여름 소설을 내게 된 것만 해도 아마도 세게 넘어진 듯하다고 말한다. 여기 '짧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하지만 어딘가 기운 마음의 방향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기어코 그들을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 여름이 오면 얼음이 녹듯 어딘가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단단히 붙잡았던 마음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의 벽을 먼저 무너뜨리고 가슴을 열어 사랑하는 마음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다. 저자의 이 같은 마음이 첫 번째 소설 제목으로 등장한다.

「얼음이 녹으면」 첫 문장은 "되게 초록이네."다. 국어 어법에 안 맞는 듯한 표현이지만 요즘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고 들었다. 특히 젊은 층에서 이 정도의 어법은 흔히 쓰인다고 하니, 첫 문장으로 채택한 국적 불명(?)의 문장으로부터 저자는 시대의 흐름에 적극 참여하는 젊은 세대일 것도 같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적이며 독자들 누구나 머릿속에 쉽게 각인되도록 하는 말일 터다. 소설 속 여주인공인 연우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내심 한가득 초록빛을 내뿜는 창밖 풍경이 꽤나 마음에 들어한다. 그런 연우의 마음이 들켰는지 은수는 아무 말 없이 연우가 앉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한가득 초록빛을 내뿜던 풍경들이 차 안으로 쏟아지듯 밀려들어온다. 가득 풍기는 눅진한 숲 냄새, 따듯한 햇빛 냄새에 한결 더 기분이 좋아진 연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소설 속 풍경이 '여름'을 짙게 암시하고 있다. 연인 사이인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연우는 다음 문장으로 은수와의 여행이 '호캉스'이기를 바랐지만 은수의 희망대로 여행지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어느 작은 마을로 가는 중이다. 호텔은커녕 숙소 하나 찾기도 어려운 산골 동네다.



두 사람은 영화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연우는 배우 겸 연출자로서 이 모임에 가서 시나리오를 쓰는 은수를 처음 대면한다. 첫 만남 때 은수는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는(겨울이어서) 은수가 했던 말은 연우에게 아주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우연히 정류장까지 함께 걷게 되고, 두 사람은 꽤 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관계도 아닌 터에 중요하지 않은 대화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독자들도 다 느꼈겠지만 친밀감 이상의 감정이 발동된다면 으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구 던지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은근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 전에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잖아."

은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연우를 휙 하고 올려다보고는 말없이 끄덕였다.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야?"

"응, 난 여름이 좋아."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짧은 순간 은수의 얼굴에 여름이 스쳐 지나가는 걸 연우는 느꼈다.

"여름이 왜 좋아?"

가늘게 다문 입속으로 신중히 답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음··· 차가운 물을 마실 수 있어서."

(중략)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연우는 그 순간 은수와 함께 여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p.16~17)



두 사람은 그리고 첫 번째 여행을 여름의 절정 7월에 함께 오게 된다. 중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굳이 저자는 표현하지 않는다. '시골이라 그런지 6시 반만 돼도 불그스럼한 노을이 지더니 얼마 안 가 하늘엔 푸른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연우는 밀 장을 봐온 재료들로 서둘러 저녁을 만들기 시작한다. 얼마 전 영화 현장에서 스탭들끼리 만들어 먹었던 해물파전고 비빔면을 꼭 은수에게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지글지글, 프라이팬에서는 식용유가 반죽을 기다리며 소리를 냈고 마당에서는 하나둘 풀벌레가 울기 시작한다. 마루에서 잠에 든 은수가 깨지 않도록, 달궈진 프라이팬 위로 조심스레 반죽을 얇게 퍼올렸다. 

마루에 놓인 유리잔을 치우다 말고 잔에 남은 작은 얼음과 물을 삼켰다. 차가운 기운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제야 조금 은수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나지만 많은 생략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계절도 겨울 이른봄, 그리고 본격 여름인 7월로 바뀌는 동안 사건은 별 것도 없다. 다만 두 주인공의 마음속 변화를 대화나 여행 등을 통해 느낄 뿐이다. 소설을 짧게 쓰기 위해 생략한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를 통해 사람의 변화를 독자들이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표현되지 않은 것을 독자들에게 살짝 귀띔만 해주며 소설이 끝을 맺는다. 

잠에 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연우는 이제 자신도 여름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속으로 고백한다. 


저자 : 썸머


여름과 소설 그리고 영화를 좋아합니다. 수영과 풋살에 푹 빠져 지냅니다.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여전히 설렙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가 가장 짜릿!하고 행복합니다.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랑과 용기를 얻어 추진력을 얻기 위함입니다.

“영화보다 먼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로 했다.” 낮에는 카메라 안팎을, 밤에는 키보드 위를 달리는 배우이자 글 쓰는 사람 고아라. 때로는 주인공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의 자리를 오가는 그녀의 진짜 이야기는 카메라 밖에서 시작된다.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인생이라는 러닝타임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감정과 서사를 작은 노트와 유튜브 [여름비누]에서 짧은 필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shy_ara

▶ 유튜브 : //www.youtube.com/channel/UCbzAryy7fkHXfCVqtUsdwiA/featured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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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 - 지혜에 관한 작은 책,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 지음, 노윤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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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고통으로 보는 철학자와 성인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는 칸트와 같이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를 구별하지만, 경험적 현상의 세계는 주관의 여러 형식(시간, 공간 및 인과의 법칙)에 의존하는 단순한 표상에 불과하고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은 의지, '맹목적인 생존의지'라고 본다. 무기적 자연에서 동식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전체는 이러한 의지의 객체화·개별화의 여러 단계이기 때문에 세계는 보편적으로 무근거, 무원리이고, 부단한 욕망에 쫓기어 만족할 수 없는데 이러한 삶은 고통이라고 했다. 

또 석가모니의 불교는 고통과 번뇌에서 해탈하며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교리에 따라 대승인 북방불교와 소승인 남방불교로 나뉜다. 대승불교는 중생을 계도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 이상이며 중생의 능력을 큰 그릇으로 본다. 반면, 소승불교는 수행을 통한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며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열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철학자와 성인은 2,300년 이상의 생존연대의 차이가 있지만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점은 공통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인생에는 수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우리가 세상일을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세상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은, 로마제국 시대의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이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대신, 통제할 수 있는 일들에만 집중한다면 누구나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 이 책은 단순히 이론적인 철학서를 넘어 실제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불변의 진리를 담은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통은 행복과 함께 인류의 삶에서 가장 큰 화두이며 영원한 숙제이다.



이 책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제자 아리아노스가 스승의 강의와 대화를 받아 적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의 원제인 『엥케이리디온』은 ‘손에 들고 다닐 만한 작은 것’, 즉 핸드북이라는 뜻으로 에픽테토스 철학의 정수만을 담은 요약집임을 뜻한다. 에픽테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으며, 한쪽 다리가 불편한 불구의 몸이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당시 로마 제국주의 시대로 그리스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그는 자신만의 철학을 갈고닦아 니코폴리스에 철학 학교를 세우고 가르침을 전하며 수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았다. 황제조차 그에게 가르침을 청할 정도였다. 그는 가장 부자유한 노예로 살며 자유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고민한 끝에 답을 얻었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자신의 삶을 원하고 결정하며,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원하거나 결정하지 않기에 좌절이나 실패에 영향받지 않는 정신적 태도’이다.

그는 외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내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욕망과 같은 마음속 주인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노예로 보았고, 반대로 외적으로는 노예지만 내적으로는 좌절과 갈등에서 자유롭다면 자유인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복은 내게 달려 있고 스스로 나에게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은 필요 없다.” 에픽테토스가 정립한 철학은 스토아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명상록』을 남긴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그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자기 철학의 기반으로 삼았다. 한때 노예였던 인물의 철학이 로마 황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그 사상의 강력함을 드러내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자 아리아노스는 『엥케이리디온』에 대해 “에픽테토스의 말들 중에서 가장 시의적절하고 가장 철학적이며 영혼에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말을 엄선한 선집.”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제목에 맞게 짧고 간결하지만, 에픽테토스 철학의 중요 핵심은 빠짐없이 담고 있다. 또한 『엥케이리디온』은 손에 쥐는 칼, 또는 단도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 책이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을 제목으로 암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 뒷 부분에 〈작품 해제〉를 쓴 앨버트 살로몬(독일계 유대인 사회학자)은 "근대가 시작되던 시기에 스토아주의가 다시 부상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며 "그 시대에 필요한 철학적, 도덕적, 사회적 조건들이 한데 집결한 역사적 사건"으로 『엥케이리디온』 재부상의 필연적 시대상을 설명한다. 로마 스토아주의가 전제 왕권 시대의 도덕적, 사회적 지향점들이 이성의 철학이라는 돌파구로 집약된 외롭고도 용감했던 영혼의 철학임을 강조하고 있다. 

살로몬은 삶의 양식으로서의 철학은 언제나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전제한다. 스토아주의가 예속의 시대에 자유를 주창하며 당대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는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즉 근대 시작 당시 삶의 많은 요소가 로마 스토아주의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로써 근대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사상가가 탄생했으며 세속 문명에 기반한 자유로운 지식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살로몬은 근대는 중세 교회의 권위에 기반한 절대 국가라는 전제정치 질서가 무너진 시기였다고 풀이한다. 이에 따라 근대 철학 또한 주관적 의식을 철학의 기초를 삼으며 스토아주의의 기본 개념을 계승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도덕 문제를 강조한 스토아주의는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새롭게 재건하고자 한 급속한 전환의 시대에 적합한 철학이었다는 논리다. 이 작은 책에 스토아학파의 도덕철학 개념이 다양한 예시로 기술된 양상을 살피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고 말하는 살로몬은, 이 책이 학생들에게 스토아학파의 이론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로 집필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흥미는 배가 된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저자는 스토아학파를 배우는 상급 단계의 학생들에게 최적화된 방식으로 철학자가 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목욕을 급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목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고 목욕을 빠르게 한다고만 말하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말하지 말고 술을 많이 마신다고만 이야기하라.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그 행동이 나쁜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p.119)



에픽테토스와 그의 책 『엥케이리디온』은 스토아주의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살로몬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살로몬은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립과 고독, 그리고 역사라는 실존적인 문제를 표현하는 최적의 사상으로 스토아 철학을 택했다고 말한다. 세네카는 인간이 가진 퇴폐적인 의식 부산물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회 심리학을 정립했으나(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은 니체와 닮았다) 스토아학파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인 원리를 고독한 통치자의 사상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에픽테토스는 스토아 철학을 '삶의 원리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요컨대 『엥케이리디온』은 스토아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함께 제시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느 시대나 인간 삶의 근원적 화두 '고통'과 '행복'에 대한 문제를 철학적 입장에서 다루고 천착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에픽테토스는 그의 철학적 사유를 책으로 쓰지 않고 삶과 제자를 가르치는 현장에서 몸소 실천해 나가는 모습을 평생 보여주었다. 이것이 스토아 철학이 근대에 들어서 다시 급부상한 이유라고 살로몬은 역설한다. 

책에 따르면 스승의 강의를 책으로 집필한 아리아노스는 138년 공식 활동을 접고 문필 활동에 전념해 『담화록(Discoourses)』이라는 제목으로 8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가 엮어낸 『엥케이리디온』은 스토아 철학의 기본 원리를 쉬운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스토아 철학을 삶의 양식으로 실천하는 데 필요한 여러 조언들도 담고 있다. 하지만 원본 저작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근대의 사회심리학자 미드(G. H. Mead)처럼 그도 학생들의 인간적이고 지적인 문제에 진심으로 헌신하며 스승이 간직해야 할 내적인 성품을 보여주고자 했다. 에픽테토스는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과 달리 자신의 철학에 대한 주관적인 이론 체계를 구상하지 않았다. 도덕철학이 가르침의 중심이었고 체계적인 인식론은 이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가 물리학이나 우주론을 경시했다고 주장한다면 그 비판은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엥케이리디온』에 투영된 스토아 사상의 가르침에 온전히 동화될 수 있다. 에픽테토스의 인격은 자연에 순응하는 그의 사유에 그대로 통합되어 있다.



이 책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은 장(章)의 구별 없이 모두 52개의 격언이나 잠언처럼 짧은 문장이 대부분이다. 문장에 대한 해석은 어쩌면 에펙테토스가 강의 중에 한 설명쯤으로 생각해도 될 듯하다. 이 책의 표제어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 역시 그것 중의 하나다. "에픽테토스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강의의 내용을 엮은 것"이라고 『엥케이리디온』을 출간한 제자 아리아노스가 말한 대로다. 독자가 말한 '아포리즘'은 흔히 우리가 배운 바로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 금언·격언·경구·잠언 따위를 가리킨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명한 아포리즘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 첫머리에 나오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다. 또한 파스칼의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도 널리 알려진 아포리즘의 한 예이다.

이 책에는 이 같은 문구나 문장이 52개의 제목으로 제시된다. 중요하고도 유명한 말 일부만 열거해 본다. 「통제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라」, 「배움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으로 타인을 비난한다」,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내면을 관찰하라」,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칭찬을 받으면스스로를 의심해 보라」, 「집착이 노예를 만든다」, 「아픈 것은 그 일 때문이 아니라 아프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라」, 「그렇게 보이고 싶다면 스스로 그렇게 살면 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없다」, 「홀로 있을 때나 사람들과 있을 때 똑같이 품위를 유지하는 법」, 「이때는 맞고 그때는 틀리다」, 「내 능력을 벗어나는 역할을 맡지 말라」, 「적당히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추락하게 된다」, 「지혜를 말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라」,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적처럼 경계한다」, 「글을 읽었다면 그 의미를 삶에 적용해야 한다」, 「결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지금이다」, 「증명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것」 등이다.

우리가 살면서 자주 듣던 문장이 많다. 또 누군가가 이용한 것 같은 문장도 많다. 르네상스와 함께 서양의 근대를 보는 사람도 많다. 좀 더 엄격하게는 산업혁명의 시작을 근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유럽은 교육 받은 신 지식인인들로 엘리트 계층으로 떠오른다. 시민 계급의 등장이다. 이들은 사회 부조리, 부의 편재, 인권의 존중 등 현실적인 문제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며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직 사회에는 '전근대적(사회 흐름과 발전에 뒤떨어진 사고 방식이나 기술 등)'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 계급의 급성장으로 전근대적 요소는 모두 개혁의 대상이다. 기득권 세력과의 갈등과 다툼이 불가피하다. 사회가 발전하는 과도기엔 언제나 혼란하다. 이때는 도덕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 의식이 폭력과 부조리, 혼란을 제압하는 디딤돌이 된다. 스토아 학파와 스토아주의가 대두된 이유이다. 이 책에 게재된 에픽테토스의 말 중에는 거의 모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천히 읽어보면 시선이 개인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표제어는 물론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란 말에도 삶의 원리가 들어 있다.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를 뜻한다. 요즘 말로 "공짜 없다"는 이야기다. 세상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한 말이 "No pain No gain"(고통 없이 영광 없다)는 스포츠 용어로 바꾸어 말한 것일 뿐 에픽테토스가 2,000년 한 말이다. 

또 무엇을 하든 지금 당장 하라는 말도 유행처럼 퍼진 말이다. 「결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지금이다」의 변주곡이다. 이 책에는 이 말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가장 고귀한 성취와 이성의 높은 판단력을 추구하는 일을 언제까지 미룰 생각인가? 이제 당신은 알아야 할 철학적 원칙들을 숙지했다. 그런데 그 원칙들을 발전시키는 행위를 미루고 언제까지 스승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인가?


저자 : 에픽테토스(Epictetus)


서기 55년(추정), 로마 동쪽의 변경지방인 피뤼기아의 히에라폴리스에서 태어나 노예 신분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때부터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다는 설도 있고, 첫 번째 주인에게 구타를 당해 다리가 부러져 평생 불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행히도 두 번째 주인인 에파트로디토스가 에픽테토스의 재능을 인정해 해방노예로 풀어주었고, 당대 최고의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알려진 무소니우스 루푸스에게 철학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에서 해방된 후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서기 93년경 당시 로마의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철학자 추방령을 발표하자 헬라스 북서부 지역인 악티움 만에 있는 니코폴리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서기 135년(추정) 사망할 때까지 철학을 가르쳤다. 에픽테토스의 가르침들은 그의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강의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다. 『어록Discourses』이라 불리는 이 기록은 원래 총 8권이었으나, 그 중 4권만이 현존하고 있다. 이 책은 『어록』의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통상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이라는 책으로 통한다.


역자 : 노윤기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공기업에서 국제관계와 기업 홍보 업무를 보았으나 좋은 책을 읽고 소개하는 번역가의 업에 매료되어 바른번역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번역가가 되었다. 옮긴 책으로는 『군중의 망상』 『이 진리가 당신에게 닿기를』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옥스퍼드 튜토리얼』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남자의 미래』 『단순한 삶의 철학』 『커피의 모든 것』 등이 있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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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아내가 차려 준 밥상 매드앤미러 2
구한나리.신진오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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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수상한 묏맡골의 관습은 어떤 이유로 생겨났을까? 이승도 저승도 아닌, 진한 회색 안개로 뒤덮인 〈파락〉에 왜 인간들이 머물고 있는지 판타지�스릴러의 충분 조건이 되어 궁금증을 높였다 줄였다를 통해 베일 속의 이야기가 정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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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아내가 차려 준 밥상 매드앤미러 2
구한나리.신진오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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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라진 아내가 차려 준 밥상』는 출판사 텍스티(TXTY)의 프로젝트로 추진된 실험적 소설 시리즈의 두 번째 소설 작품이다. 시리즈로서는 두 번째지만 첫 번째 작품 『배우자의 죽음에 관하여』와 동시 출간했다. 쌍둥이인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20년 가까이 국내 장르 소설계를 지켜온 호러 전문 창작 집단 〈매드클럽〉과 환상문학웹진 〈거울〉이 협동으로 "매력적인 한 문장이 각기 다른 작가를 만날 때 어떻게 달라질까?"라는 흥미로운 상상에서 시작했다. 이번 첫 번째 실험작품집은 작가 구한나리의 「삼인상」과 신진오의 「매미가 울 때」가 콜라보를 이루었다. 

출판사 텍스티에 따르면 매드클럽, 거울과 함께 수십 개의 한 줄 아이디어를 구상한 뒤, 각 작가가 선택한 한 줄을 토대로 16쌍의 작가 매칭을 진행했다. 소속은 다르지만 공통 한 줄로 만난 두 작가는 크루의 성향과 자신의 개성을 살린 한 쌍의 중편 소설을 기획했다. 여기에 장르적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호러·스릴러적 색깔도 가미했다. 두 번째 작품집이 구한나리의 「삼인상」과 신진오의 「매미가 울 때」를 담은 『사라진 아내가 차려 준 밥상』이다. 두 작가에게는 공통 한 줄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사라진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이다. 공통 한 줄이 작가들에게 어떤 상상을 불러 일으켰을까?란 관점으로 소설을 읽으면 즐거움이 한층 더 클 것으로 기대된다. 

『사라진 아내가 차려 준 밥상』의 첫 작품 「삼인상」은 신국과 월국의 경계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인 〈묏맡골〉에서 벌어지는 일이 소설의 배경이자 소설의 발단이다. 이 마을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마을 밖 사람들은 이곳 존재 자체를 모른다. 이 묏맡골에는 ‘삼인상’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상을 차리면 안 되고, 두 사람 이상이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상을 차리되 삼인상의 그릇을 함께 올려야 한다. 그래야 이 그릇의 주인인 ‘삼인’이 집을 살피고 지켜 주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산다.

주인공이자 소설 속 화자(話者)인 ‘나’는 언젠지 기억나지 않을 때부터 묏맡골의 제를 주관하는 '당골'의 셋째 딸, ‘현’을 사랑해 왔다. 현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을 볼 줄 알아서, 마을 사람들은 현을 후대 당골로 여겼다. 당골의 배우자는 대대로 후대 당골의 운명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1년 안에 사망했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런 건 현을 향한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혼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큰일이 생긴다. 신국과 월국 사이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서, 묏맡골이 세상에 알려진다. 남성 청년들이 끌려가고, 다쳐서 돌아오고, 또 다른 남성들이 끌려간다. 마을 사람들은 ‘삼인’의 가호를 믿었지만, 연이은 불행에 점차 배신감을 느낀다. 당골과 후대 당골인 현. 그리고 현의 남편인 ‘나’에게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닿기 시작한다.

같은 책 '공통 한 줄'의 또 한 작품 「매미가 울 때」에서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진한 회색 안개로 뒤덮인 ‘파락’에는 얼굴에 버섯이 피어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아내와 함께 여행 가던 길, 순식간에 벌어진 교통사고로 차가 뒤집혀 버린다. 겨우 정신 차린 ‘나(시광)’는 차에서 빠져나와 아내, 승희를 구한다. 크게 찢어지지는 않았으나 승희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흐른다. 사고 충격에 고장이라도 났는지 두 사람의 핸드폰이 모두 먹통이다. 짙은 회색빛의 안개는 걷힐 줄 모르고, ‘나’의 불안함이 커진다.

‘나’와 승희는 뿌연 시야를 견디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이상한 사람과 마주친다. 아니, 사람이 맞긴 할까? 속옷조차도 걸치지 않은 알몸인 데다 얼굴에는 버섯이 다닥다닥 피어 있다. 기괴한 모습에 기겁한 ‘나’와 승희가 얼른 피하려는데, 그 존재가 ‘나’를 물려고 한다.

두 사람은 한참 도망치다가 낡은 절 하나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스님 한 분과 여러 명의 일반인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몸에 버섯이 피어난 ‘괴물’을 피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 말없이 앉아 있던 스님이 드디어 입을 연다. 지금 이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파락’이라는 곳이며,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괴물’처럼 변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하나 있는데, 단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긴장이 서린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두 작품을 태어나게 한 주인공은 이 실험작품집을 구상한 텍스티다. 실험 소설이니만큼 작가의 독창성이나 문장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스토리와 유기적 구성으로 얼마나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느냐가 소설의 성공 여부를 가름할 의미 있는 시도다. 즉 소설 작품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적 시도라는 데 중점을 두고 읽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흥미로울 것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출판사 측 작품 소개글에 따르면 「삼인상」에서의 묏맡골은 신국과 월국 경계에 있으면서,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 공간에서의 이야기를 ‘나’의 시점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삼인칭 시점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정보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 의해, 경계가 주는 신비로움과 긴장감이 극대화되었다. 보호받고 있다는 확실한 인식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더라도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공간을 다른 곳과 구분하는 울타리가 흐트러지거나 경계를 넘어 침범하는 존재가 있다면, 사람들은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삼인상」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나’의 터전이, ‘우리’의 공간이 점차 외부에 의해 흔들린다. 경계의 모호함은 묏맡골의 모든 이들에게 칼을 겨눈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나’의 시선으로 함께 ‘묏맡골’을 지켜보는 독자 역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럴수록 이야기의 몰입도는 더 높아진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궁금해지고, ‘나’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기다려진다. 그렇게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가 어느 순간, ‘나’의 선택과 결과에 작은 탄성을 내뱉게 된다. 그 탄성이 ‘몹시 탄식하는 소리’일지, ‘몹시 감탄하는 소리’일지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책을 읽은 독자들이 함께 서로 어떠한 ‘탄성’을 냈는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매미가 울 때」의 이야기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미지의 공간, 〈파락〉에서 벌어진다. 파락은 짙은 회색로 뒤덮여 있으며, 시공간의 구분이 없다. 낯선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나’는 자신과 아내가 대체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불가해한 상황 속에서 ‘나’가 느끼는 불안한 감정은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상대적으로 정보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어, ‘나’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마치 파락에 갇힌 듯 막막함을 느끼기 쉽다. 왜 이곳에 왔는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저 ‘나’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삼인상」과 마찬가지로 ‘나’가 보고 들은 대로 따르던 독자는 어느 순간,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파락을, 이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에 대한 이해도도 역시 높아지며, 그의 선택을 응원하게 된다. 그의 행복과 우리 모두의 안녕은 소설 속에서 하나의 운명으로 한데 묶여 있다는 점을 독자들은 인지하게 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두 작품을 태어나게 한 주인공은 이 실험작품집을 구상한 텍스티다. 실험 소설이니만큼 작가의 독창성이나 문장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스토리와 유기적 구성으로 얼마나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느냐가 소설의 성공 여부를 가름할 의미 있는 시도다. 특히 3인칭 전지적 시점과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직접 인식하고 읽어간다면 새로운 독서 체험을 하는 즐거움이 있으리라고 독자는 믿는다. 이 시리즈의 작품들은 소설 작품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적 시도라는 데 중점을 두고 읽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흥미로울 것이라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삼인상」과 「매미가 울 때」는 모두 부부의 사랑을 주 소재로 삼고 있으나,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라면 인간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잃었을 때, 어떠한 일까지 벌일 수 있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또 동시에 인간성을 잃기 쉬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이타심을 놓지 않는 인물도 보여 준다. 낯선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선택과 행동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기도 하고, 희망을 갖게도 한다. 모두가 인간다움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러지 말라고. 힘들겠지만, 이타심을 그래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일깨우는 저자의 소설 기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자는 생각한다. 

출판사 편집진은 실험적 소설집이니만큼 전례없이 파격적 편집을 선보인다. 책의 뒷 부분에 두 작가에게 공통 질문을 하는 인터뷰를 실었다. 〈7문 7답〉이다. 7가지 공통 질문에 각 작가들이 답하는 형식이다. 독자들은 이 질문에 답해보든지 기억나지 않거나 의식하지 않고 읽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안 해도 상관없다. 이 질의 응답은 소설 작품집 안에 함께 싣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다만 실험 소설이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출판사가 의도한 질문일 수도 있다는 게 독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소설의 재미를 더하고, 다시 생각해볼 이유를 찾는다면 이 질문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답을 찾는다면 다른 어떤 소설을 읽더라도 작가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두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질문 7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지금의 공통 한 줄에서 어떤 매력을 느끼셨나요? ② 한 줄을 지금의 이야기로 기획하면서 스스로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③ 원고를 쓰면서 가장 고민하셨던 지점은 어떤 부분인가? ④ 원고 중 가장 만족하시는 장면은 어떤 대목인가요? ⑤ 상대 장면 가져오기 미션에서 그 부분을 가져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⑥ 상대 작가님의 작품을 읽어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셨나요? ⑦ 끝으로 작품을 읽으신 독자님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두 작가의 답변 중 한두 개의 의미 있는 답변, 흥미로운 답변을 여기에 발췌해 적어본다. 먼저 「삼인상」을 쓴 구한나리 작가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많은 미스터리에서 출발점이 되죠. 사라진 존재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이 문장을 본 순간 상실감을 가진 사람이, 잃은 줄 알았던 존재가 나타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지 상상할 수 있었어요. 이건 꿈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잃은 것이 꿈이고 아내가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인가, 어떤 쪽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상하는 재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구상할 때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부부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상황을 상정했었는데, 계속해서 다소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폐기하고 새로 구상하며, 그 반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불가피한 문제로 헤어지게 되는 편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불가피한 문제가 무엇일까 구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이야기로 흘러갔네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이 공통 한 줄을 골랐나 보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구한나리 작가의 두 번째 답변도 작가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화에 관심이 많은데, 언젠가는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어요. 어렸을 대부터 집에서 제사와 차례를 지냈는데, 얼마 전까지 만날 수 있던 사람을 못 보게 되었다는 슬픔이아직 남아 있는데, 그분을 위해 상을 차리는 게 신비롭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떠나신 분들을 위해 상을차리는 날이 있는데, 남은 사람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도 헤아려 보곤 했어요. 제삿날도 명절도 아닐 때, 망자들은 어떻게 상을 받을까도요. 먹는 것에 진심인 아이였던 듯싶습니다. 이번 글을 구상하면서 내내, 공동체 단위로 먼저 떠난 분들을 섬기는 분의기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 중에 "세상의 어떠한 서러운죽음도 그냥 잊히진 않네."(〈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패닉, 이적 작사·작곡, 1996년)라는 구절이 있는데, 글을 쓰면서 자주 그 가사를 떠올렸어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말이죠. 힘이 없고 약해서 숨어들고 도망치며 살아온 이들이 분노하는 이야기로, 이야기 자체가 저를 이끈 느낌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다기보다는 조금, 신기한 경험이었어요."(p.298~299)



신진오 작가는 두 번째 질문에 고충과 함께 산뜻한 답변을 냈다. "이 작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야기의 확장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줄의 문장에서 파생할 수 있는 이야기의 가짓수가 무궁무진했으니까요. 이것이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부분이 매력으로 와닿았습니다." 또 가장 만족하시는 장면은?이란 질문에 "몇몇 장면들이 떠오르는데요. 두 가지만 꼽자면, 하나는 사람들이 문을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파락의 공포를 보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공포 소설가이다 보니 이런 장면에서 독자들이 긴장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악인들이 벌을 받는 장면이었는데요. 이 부분이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해서, 작가인 저도 쓰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부디 독자분들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를 희망합니다.(p.304~305)


저자 : 구한나리


수학교육, 국문학과 법학을 전공하였다. 2009년 일본 문부과학성 연수생 시절 단편 「신사의 밤(神社の夜)」으로 유학생문학상에 입선했고, 2012년 장편 『아홉 개의 붓』으로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토피아 단편선 1(유토피아 편) 『전쟁은 끝났어요』에 「무한의 시작」을, 『교실 맨 앞줄』에 「100명의 공범과 함께」를, [거울] 2020 대표중단편선 2 『누나 노릇』에 「늦봄 어느 날」을 수록했다. 2010년 가을부터 후기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는 소녀의 이야기 『종이로 만든 성』을 집필 중이다. SF어워드 2020 중·단편소설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웹진 거울 73호(2009년)부터 3년간, 2018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독자우수단편 심사단을 맡으며 소설 필진으로 단편을 게재하고 있다. 거울×아작 환상문학총서 『거울아니었던들』에 참여했다. 문구점에서 새로 나온 펜을 발견하는 순간을 좋아하고, 소설 초고는 늘 라미 알스타 만년필로 쓰는 문구 마니아이다.


저자 : 신진오


『한국공포문학단편선』 1, 2, 3권에 「상자」, 「압박」, 「공포인자」를 수록했으며, 장편 공포소설 『무녀굴』을 출간했다. 『무녀굴』은 영화 <퇴마: 무녀굴>의 원작 소설이다. 최근엔 리디북스 ‘우주라이크소설’에 「무엇이 소년을 이렇게 만들었나」, 「악의」를 발표했다. 현재도 꾸준히 공포소설을 쓰고 있으며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공포소설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더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기 위해 항상 노력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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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의 죽음에 관하여 매드앤미러 1
아밀.김종일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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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방식으로 ‘의심’을 대하는 두 여주인공의 서사가 펼쳐지는 판타지 호러의 장르적 재미가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초현실적인 설정에서 비롯된 무한 상상의 세계, 사랑의 관계에 대한 은유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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