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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묻어둔 이야기 - 나의 스승 일엽스님
월송 구술, 조민기 정리 / 민족사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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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우리는 많은 지식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나라 잃은 한민족의 암흑기에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본 총독부는 1919년 기미독립 만세혁명을 기점으로 이른바 '문화 정치'를 실시한다. 이로부터 많은 일본 유학생들이 배출된다. 선진 유럽의 문물을 일본을 통해 배우는 셈이다. 그러나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어쩌랴. 1910년 이후 많은 사람들은 만주나 간도로 이주를 가고, 독립 무장 투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에 합류하지 못한 지주 집안이나 조금 넉넉한 집은 자녀를 유학을 보내는 데 뜻을 둔다. 자녀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교육관이 반영된 것이다. 이들 유학생은 대부분 어릴 때여서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뜻에 따른 경우가 많다. 물론 가난하지만 일본 유학을 간 지식인도 있다. 대체적인 시대 흐름이 그렇다는 뜻이다.
일본 유학생들 중에는 간혹 여성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윤심덕과 미술가 나혜석도 이 무렵의 인물들이다. 윤심덕은 일본 도쿄예술대학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의 주인공인 일엽 스님(이하 일엽)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다.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이기도 하다.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빠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를 발표했다. 1918년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고 1921년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식민지 여성들의 삶은 남성들의 삶보다 훨씬 힘들고, 사회 활동도 어려웠을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여성들은 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은 남성 못지 않게 일본 유학을 감행한다. 많지 않은 숫자였기에 일제 강점기 때 그들의 활약은 더 두드러져 보였을 수도 있다. 특히 문화 예술계에 투신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당시로서는 '신여성'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일엽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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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은 여성 단체들이 결성되어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시기다 1930년대의 한국 여성들은 또한 문학과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많은 백과사전은 평가하고 있다.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풀어내며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 이 시기에 활동한 여성 작가로는 최서해, 김명순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은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여전히 많은 제약과 억압 속에서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은 여전히 전통적인 성 역할에 기반하고 있었고, 사회 전반에서는 여성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한국 여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교육과 경제 활동, 민족 운동, 문화 창작 등 여러 방면에서 그들의 역할은 점차 확대되었으며, 이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는 게 대다수 사학자들의 평가다.
이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의 주인공 김일엽은 누구인가? 독자는 일제 강점기의 여성 인물로서 사실 일엽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불교 신자도 아니어서 많은 관심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일엽은 1896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김원주(金元周). 최초 신여성이자 문인, 최초 동아일보 여성 기자, 최초 여성잡지 〈신여자〉 창간, 그리고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당대 '스캔들 메이커' 김일엽은 1920년대 이슈 메이커이자 셀럽으로 주목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짧은 기간 사회 생활 후 1928년 불교계로 전향했다. 이 책에 그의 어머니 이마대에 대해 잠깐 언급된다. 당시 남편 김용경은 5대 독자로서 일찍 결혼했지만 사별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이마대와 재혼했다. 열입곱 살에 집안의 강요로 상처한 홀아비와 혼인한 이마대로서는 사랑 없은 결혼이었지만 오히려 금실이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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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의 친모 이마대는 결혼 6년만에 얻은 외동딸 김원주를 ‘열 아들 안 부러운 대장부’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마대 여사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딸을 학교에 보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김원주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차별에 의구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김원주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빼어난 감수성과 문학 재능을 갖춘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귀국 후 〈신여성〉 창간, ‘신여성 1세대’라는 ‘걸출한 여걸’로 사회적 이슈를 주도하며 문인으로, 여성해방운동가로 활약했다. 선구자로서 찬사도 있었으나 김원주가 ‘열 남자 안 부러운 대장부’다운 모습을 과시한 분야는 연애였다. 젊은 날, 김원주는 가십과 루머,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치며 감탄과 비난을 몰고 다녔다고 두루 알려졌다. 특히 이혼과 〈신여자〉의 폐간 이후 자유연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일과 연애 모두를 놓치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1918년 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에 입학하고, 동시에 도쿄 대학 영어준비학원에도 수강하였다. 1918년 여름에 닛신여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18년 여름 미국 유학파인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사로 있는 40세의 이노익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이노익은 1915년부터 연희전문에서 화학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이노익은 다리가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이노익은 당시 이혼남이었는데,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이노익과 결혼하여 빨리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훗날 회고록에서도 임노월, 백성욱 등에 대한 언급과 애정은 곳곳에서 표현하는 한편, 이노익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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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제 강점기의 신여성으로서의 개인 일엽을 기록하는 책은 아니다. 그가 불교에 귀의해 어떤 수행 생활을 했는지, 불교계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제자 월송이 구술하고 작가 조민기가 정리햇다. 일엽이 일제 강점기에 걸출한 신여성으로서의 활약이 뛰어났기에, 더욱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애관인 자유연애론을 주장하고 실천했기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일이 불교 귀의 이후에도 있었다. 당시 제자 월송은 그의 옆에서 그가 대처하는 방식에 다소 불만스러워 했지만 단 한마디의 일엽이 변명도, 해명도 없이 열반에 들었기에 마침내 스승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지막 수행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고 한다. 뒤늦게 그의 저작물 등을 참고하고, 사실 확인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자신이 경험한 일엽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구술할 수 있다고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일엽의 사생활 부분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목사의 딸이었던 김원주는 만공스님이라는 큰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며 익숙한 것 같으나 사실을 알지 못했던, 불교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런 김원주를 불교로 이끌어준 스승이자 연인이 바로 백성욱 박사다. 백성욱 박사와의 이별 후, 김원주는 재혼과 이혼을 거쳐 마침내 출가하였고, 만공스님이 계신 수덕사로 입산한다. 만공스님은 일엽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인가와 전법게를 내리며 당부했다. “일엽이 백련처럼 성품이 바뀐 후에 세상에 나서라.” 오랜 세월, 글로 세상과 소통했던 일엽스님은 스승의 뜻에 따라 주저 없이 절필하였고 승가 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직책도 맡지 않았다. 일엽스님이 30년 동안 놓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 견성암의 ‘입승入繩(절에서 기강을 맡은 소임)’이었다.
이 책에서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엽의 입산 시점이다. 1923년 수덕사에서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한 것이 시작이었고, 1928년 만공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금강산 마하연으로 입산하여 삭발했다.(p.82)고 입산 시기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1933년 입산안 일엽은 1946년 만공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14년 동안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글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즉시 멈췄다.(p.110)고 5년의 차이가 난다. 일엽을 기록하는 일이라면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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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만공스님이 열반하신 지 15주년이 되던 1961년, 스님은 하늘 같고 바람 같은 스승을 마음껏 기리는 글을 썼다. 그로부터 다시 14년 후, 일엽은 손상좌 월송스님과 함께 보따리 속에 넣어두었던 원고들을 꺼내어 백성욱 박사가 환희대로 보내준 새 원고지에 정리하였다. 그것이 세간에서 삶을 뒤돌아본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이었다. 이어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를 발표하였다. 오랜 시간, 세속에서 모습을 감췄던 일엽의 글이 발표되자 세상은 다시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동시에 잊힌 줄 알았던 온갖 스캔들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사칭해 조잡한 책을 파는 이들이 등장했고, 쓰지도 않은 가짜 자서전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월송스님은 일엽을 보필하며 스승의 글이 세상에 반듯하게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했다. 스승을 곁에서 보아온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은 일엽의 이름을 팔며 스님을 모욕하는 이를 직접 목격하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엽에게 고한다.
“노스님 큰일 났어요! 웬 남자가 노스님을 빙자하고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가 스님의 사생아라고 하며 책을 팔고 다닙니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요.”
억울함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손상좌들을 본 일엽스님은 말했다.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스님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정진스님과 월송스님은 눈물 젖은 얼굴로 스님을 보았다. 이렇게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호들갑 떨 것 없다니 무슨 말씀이실까.
“김일엽이라는 이름 석 자가 뭐라고? 그 이름이 대체 뭐길래? 그 이름 가치가 얼마나 된다더냐? 나를 빙자하여 한 사람이 이 힘든 생을 버티고 한 남자가 장사하고 돈을 벌어 그걸로 생활을 할 수 있으면 내가 한 사람을 구제한 것이 아니냐?”(p.15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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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으로부터 사건을 전해 들은 일엽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할 뿐이었다고 월송은 회고한다. 일엽은 자신의 이름이 한 중생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깟 소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시비비를 다투지도 않았고, 진실과 거짓에 대해 해명하지도 않으셨다는 것. 일엽이 열반하고 나자 온갖 소문들이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돌아다녔다. 소문의 대부분은 생전에 버젓이 서점을 차지한 채 불티나게 팔리던 가짜 자서전 류의 이야기들이었다. 스승이 입적한 후 묵묵히 진실을 지키고 있었던 월송스님과 환희대 문중은 소문이 아니라 꼭꼭 묻어두었던 스승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대한 해명이 아닌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 수행자 일엽을 최초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월송스님은 일엽의 문중 제자 중 최초의 대학생이자 동국대학교에 승복을 입고 다닌 최초의 스님이다. 월송스님은 동국대학교 장학생 입학을 권유하는 백성욱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이 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승복을 입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승복을 입고 대학에 다닐 수 있다면 스승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월송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일엽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승복을 입고 대학에 다니는 것이라면) 의의가 있다. 가라, 대학에.”
일엽의 허락으로 최초의 승복 입은 대학생이 되었던 월송스님은 스승이 떠난 지 27년 후, 수행자 ‘일엽선사’의 면모를 담은 〈일엽선문〉을 펴냈다. 비구니 선사 일엽을 위해 월송스님은 스승에 대한 추억을 마음 깊이 꼭꼭 묻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7년 후, 스승과의 보석 같은 시간을 떠올리며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드디어 세상에 꺼내놓았다. 이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 - 나의 스승 일엽스님』은 소문과 가십의 주인공이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당시 세간의 시선, 편견, 모멸을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어떻게 극복해서 주변을 감화시킬 수 있는지 그 생생한 목격담이다. 김일엽의 변화를 이끈 것은 스승과 불교 그리고 제자들이었다. 일엽의 이름에는 승화된 백련도엽의 향기가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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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욱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 김원주는 생애 처음으로 완전한 사랑을 느낀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 조건도, 삶과 죽음조차 초연해지는 숭고한 사랑이었다.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운명의 반쪽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백성욱 박사와 함께 부부가 되어 함께 깨달음을 성취하는 불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의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백성욱 박사로 인하여 모든 꿈은 부서지고 말았다. (중략)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사랑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또 감화시킬 수 있는 최상의 포교 방법이라는 것을 이 시절의 일엽 김원주는 알았을까. 하지만 훗날 입산하고 30년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사랑으로 장엄한 글을 방편으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가장 솔직하고 간절하게 전했다.(p.52~54) -「여자 김원주에서 인간 김일엽으로」 중에서
저자 : 월송
김일엽 기념 도량으로 환희대를 중창, 원통보전, 보광당, 난야 등을 건립하였으며 김일엽 문화재단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속명은 이송량. 순천시장을 지냈던 이옥로와 아내 진순임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957년, 순천여고 졸업 후 일엽 노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입산하였고, 경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60년, 백성욱 박사의 추천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최초의 승복 입은 대학생이 되었다. 견성암 불사 당시 6년 동안 화주를 맡아 포교 법극 〈이차돈의 사(死)〉를 성공시켰다. 같은 시기 일엽 스님의 저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가 연달아 출간되었다. 견성암 불사 후 교토 불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엽스님 입적 3주기를 맞아 유고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을 입적 30주기를 기념하여 〈일엽선문〉을 출간하였다.
정리 : 조민기
한양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였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던 중 회사 홍보기사로 작성한 ‘광고쟁이의 상상력으로 고전 읽기’ 시리즈가 호응을 얻으며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했고, 〈세계일보〉에 칼럼 ‘꽃미남 중독’을 인기리에 연재하였다.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절대자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이던 중 권력이 잉태되어 탄생하는 과정의 놀라운 기록들을 발견하였다. 절대자와 권력자의 자취를 따라가 실록의 행간에서 찾아낸 흥미진진한 성공과 실패의 기록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 임금 잔혹사』와 『조선의 2인자들(2016)』을 발간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외조 : 성공한 여성을 만든 남자의 비결』과 영화소설 『봄』이 있으며,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역사가 가진 무궁무진한 가치와 의미를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인문역사 강연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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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