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의 목숨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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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아홉 명의 목숨』은 공포소설이란 표현이 알맞다. 전작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현대 스릴러 작가를 대표하는 피터 스완슨의 최신간이다. 그의 소설의 특장점은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예측을 뒤집는 반전'이다. 추리 소설의 기본적 요소다. 전작 『죽여 마땅한~』으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번 출간한 『아홉 명의 목숨』은 전작의 흥미 요소에 더해 한층 치밀해진 구성과 다채로운 캐릭터들로 무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 서점가에서 “추리소설의 발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또 한번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독자들에게 스릴러가 줄 수 있는 강렬한 몰입과 희열을 선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저자 피터 스완슨은 이 작품 출간 후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추리소설의 여왕'으로 불리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는 ‘서로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사건에 얽히면서 차례로 살해당한다’는 고전적 구성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티의 전 작품 중에서 스릴과 서스펜스가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걸작 『그리고 아무도~』는 영국에서 『열 개의 인디언 인형』(The Ten Little Indians)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추리 소설 애독자라면 거의 읽어봤을 작품이다. 인디언 섬이라는 무인도에 여덟 명의 남녀가 정체 불명의 사람에게 초대받는다. 여덟 명의 손님이 섬에 와 보니 초대한 사람은 없고, 하인 부부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뒤이어 섬에 모인 열 사람이 차례로 죽어간다. 한 사람이 죽자, 식탁 위에 있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중에서 한 개가 없어진다. 인디언 동요의 가사에 맞춰 무인도에 갇힌 열 사람은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한다. 인디언 섬에는 이들 열 명 외엔 아무도 없다. 섬에 갇힌 사람이 모두 살해되었으니 범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에 교묘한 트릭과 반전을 더해 추리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기가 막힌 구성과 반전으로 세계적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피터 스완슨이 크리스티의 구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듯이 이 작품 『아홉 명의 목숨』에서도 비슷한 전개를 보인다. 스완슨은 크리스티의 플롯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여기에 교묘한 트릭과 반전을 더해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소설의 발단은 백지에 '아홉 명의 명단'이 적힌 쪽지가 봉투 안에 밀봉돼 이 명단에 들어 있는 '앨리슨 혼'에 우편으로 전달된다. 밀회 상대자인 조너선 그랜트는 도어맨에게 건네받은 우편물과 자신이 선물할 스카프 등과 함께 문을 열어주는 혼을 다짜고자 끌어당긴 후 침대로 들어간다. 조너선은 70대 초반의 남자다. 밀회 상대인 혼을 만나기 위해 미리 발기부전 약을 먹고 온다. 매주 수요일이 밀회 날이기 때문이다. 조너선은 아내가 매주 수요일 여자들끼리 만남을 가졌기에 주 1회 앨리슨에게 와 밀회를 즐긴다. 70대임을 감안하면 사전 준비는 필수다. 앨리슨은 이제 막 그랜트와의 밀회를 끝내고 샤워를 마친 후 와인 한 잔을 마시면서 우편물을 뜯어본다. 발송지가 적히지 않은 봉투 속 종이 한 장, 거기에서 의문스러운 아홉 명의 명단이 발견된다. 그런데 봉투를 뜯어보던 앨리슨은 미간을 찌푸린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발견하고 앨리슨은 혹시 이 명단이 잠들어 있는 조너선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쓴다.

그러나 아무 설명 없이 이름만 적힌 명단을 받았으니 뭔가 막연하게 위협적인 기분이 들지만 잠든 조너선이 일어날 때까지 외출복으로 갈아 입는다. 잠을 깬 조너선이 침실에서 나오자 앨리슨이 종이를 내밀며 묻는다. 

"이 명단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요?" 

조너선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뭔데?"

"아까 당신이 건네준 우편물에 들어 있었어요?"

"이게 다야?"

"네, 이상하죠?"

"이상하네." 

조너선은 명단을 다시 앨리슨에게 건넸다.(p.15) 조너선이 함께 저녁 먹으러 나갈 것을 제안하지만 조너선은 헤지펀드 매니저들과의 약속이 있다며 미안한 듯 거절한다. 그들의 관계가 막 시작됐을 때는 조너선이 이런 식으로 가버리면 앨리슨은 난리를 쳤지만, 이젠 그런 식의 애정 확인이 필요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 관계에서 조너선이 원하는 건 섹스와 말동무였고, 그녀가 원하는 건 돈이었다.

아홉 명의 명단 중 앨리슨은 여섯 번째 이름이다. 두 번째 인물은 아서 크루즈란 간호사이다. 아서에게 명단이 전달된 것은 앨리슨이 명단을 뜯어본 다음날인 목요일이다.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마치고 집에 막 돌아온 터였다. 아침 아서에게 배달된 우편물 중에서 가장 그의 관심을 끌었다. 아서는 별다른 기대 없이 봉투를 뜯었다가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짧은 명단을 보고 깜짝 놀란다. 명단에 적힌 이름은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서는 1년 전, 교통사고로 남편 리처드와 코커스패니얼 반려견 미스티가 죽고 아서의 왼쪽 다리가 기능을 대부분 상실한 후로 중세 시대의 삶과 그 끝없는 고통, 신에 대한 탐구만이 마음을 달래주는 유일한 약이 되었다. 아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네 목사인 조앤은 그가 어느 정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행복을 느끼려면 적어도 2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서는 의문이었다. 길게만 느껴진 지난 1년이 영원히 반복될 듯했기 때문이다. 그가 택한 것은 중세시대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다. 중세시대 책들은 아서에게 꽤 위안을 주긴 했다.

같은 날 이선 다트는 아파트 문틈으로 우편물이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최근 유례없이 왕성하게 작곡을 한 터라 에이전트에게서 온 답장이기를 바라며 얼른 뜯어보았다. 봉투(뉴욕시라는 소인이 찍혀 있다)를 보니 안에는 달랑 종이 한 장만 들어 있다. 그를 포함에 모두 아홉 명의 명단이다. 아서는 노트북을 켜서 명단 맨 위에 있는 이름인 매슈 보몬트를 입력한 뒤 검색 결과를 좁히려고 '작곡가'를 함께 입력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서는 다음 이름들로 검색하다가 중간에 흥미를 잃었다. 기대했던 작곡가나 뮤지션의 명단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 명단에서 영감을 얻어 아서는 '라스트 온 유어 리스트' 같은 후렴구가 들어가는 노래가 떠올랐다. 연필을 집어들고 명단이 적힌 종이를 뒤집은 뒤 컨트리송 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명단(list)은 운율을 맞추기 좋으면서도 은근히 까다로운 단어였다. 고를 수 있는 단어가 많지만 전부 다 식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립다(missed), 키스하다(kissed), 우기다(insist),처럼. 그래도 가사를 세 줄이나 썼고 심지어 머릿속에서 멜로디까지 들렸다. 이선은 잔에 커피를 더 따르고 기타를 가져왔다. 뮤지션이 되기를 꿈꾸는 가난한 아서는 어떻게 명단에 올랐을까.

이 소설 작품은 이처럼 명단에 있는 아홉 명이 간단하게 등장인물 소개로 전개된다. 명단 인물들은 명단 순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죽음 역시 명단 순과 다르다. 이는 독자들에게 어떤 일관성에서 오는 단조로움으로 몰입을 떨어뜨릴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저자 스완슨의 장치인 것 같다. 아홉 명의 숫자 만큼 장(章)도 아홉 개로 구분되어 있다. 마지막에 '영(0)'이란 장이 덧붙여지는데 이미 앞의 아홉 개 장을 통해 명단은 완전히 지워졌다. 마지막 '영(0)'은 뒤쫒던 형사가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고, 다시 '하나'란 장으로 이어진다.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캐럴라인 게디스의 경우 그녀에게도 9월 15일 목요일에 명단이 우편물을 통해 전달된다. 목요일은 캐럴라인의 근무날이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 12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찾아오는 학생이 별로 없다. 이날 목요일엔 학생이 한 명밖에 없었다. 일레인 청이라는 여학생이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반면 사전에 약속한 두 명은 오지 않았다. 일레인은 쪽지 시험을 망쳤기 때문에 어떻게든 캐럴라인에게 점수를 받아내기 위해 약속도 없이 찾아와 하소연한다. 그러나 하소연으로 점수를 불쑥 내줄 수는 없는 일이라 새로운 시험을 제시한다. 

이렇게 일레인에게 노트에서 찢은 종이 한 장이 내밀며 새로운 문제 세 개를 적었다. 오늘 아침 수업에서 다룬 시는 아니지만 예전에 숙제로 내준 있었던 시다. "새로운 쪽지 시험이야." 일레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는데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살짝 자국까지 남았다. 일레인의 묘한 항의성 투덜거림이 이어진다. "연도까지 외워야 하는지 몰랐어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캐럴라인이 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다. "다음주 수업에서 보자." 캐럴라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레인은 벌써 휴대전화를 꺼내든 채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누군가에게 영문과 교수(캐럴라인)가 너무 못됐다는 문자를 보내나보다라고 캐럴라인은 생각한다. 근무시간이 끝나자 캐럴라인은 캠퍼스를 가로질러 주차해둔 프리우스를 타고 앤아버의 워터힐에 있는 방 두 개까지 작은 집으로 향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반갑게 맞이하고 캐럴라인은 으레 하던 일처럼 우편물을 뒤적거리다가 흰 봉투 하나를 끄집어낸다. 봉투에 붙은 라벨에 쿠리어 글꼴로 그녀의 집 주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오른쪽 모서리에는 성조기가 그려진 영원 우표가 붙어 있었다. 발신인 주소는 없다. 역시 봉투 안의 종이 한 장. 거기에는 명단이 적혔다. 자신의 이름을 빼고는 다 모르는 이름이다. "문득 캐럴라인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살해될 사람 명단이야. 누군가가 우리를 죽음의 표적으로 삼은 거야 저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p.34)

명단 중 마지막에 소개된 이는 프랭크 홉킨스다. 9얼 초 날씨는 아직 여름이고, 평소에는 차가운 대서양이 가장 따뜻하며, 관광객-적어도 시끄러운 애새끼들을 데리고 온 관광객-은 영원히 사라졌다. 해가 뜬 지 삼십 분쯤 지나 프랭크 홉킨스가 아침 산책에 나섰을 때 윈드워드 리조트에서 돌을 쌓아 만든 방파제까지 쭉 이어지는 모래사장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다(조수 웅덩이 옆에 웅크린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다). 하늘은 피시 차우더처럼 허여멀건 색이었고 모래사장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프랭크는 반바지에 캐주얼한 구두를 신었지만 위에는 폴로셔츠에 낡은 면 스웨터를 껴입었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요즘은 아침에 약간 추웠다. 프랭크는 리조트 바텐터로 십년째 일하는 셸리란 여성을 좋아한다. 그러나 셸리는 유부녀인데다 최근 남편이 플로리다로 이사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왔다가 떠나는 것은 일상이다. 누구든 그렇다. 아내도 그렇다. 또 세월도 그렇다. 그래도 프랭크는 셸리가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매일 셸리와 함께 보내는 저녁 시간이-비록 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있기는 해도-하루 중에서 제일 행복했다. 이날 셸리는 산책 겸 바닷가를 걷다가 바위 위에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 붙은 라벨을 읽었다. 그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그를 덮쳤다. 왜 그의 앞으로 온 편지가 방파제에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똑 같은 절차를 통해 프랭크는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지만 나머지 여덟 명의 이름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이름들이었다. 바위에 봉투를 놓아둔 사람이 근처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양 발목을 꽉 움켜잡더니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가 반환점으로 삼는 바위에 머리 한쪽을 부딪힌 바라에 눈물이 핑 돌았고, 관자놀이에서 날카롭고 축축한 통증이 느껴졌다."(p.50)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샘 해밀턴 형사는 시신에서 2.5미터쯤 떨어져서 범죄 현장을 머릿속에 새기고 모든 걸 다 살피려 노력했다. 이처럼 아홉 명의 사람들 앞으로 의문의 명단이 배달됐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이름만 빼고 다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 없는 명단에 다소 안심을 한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이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프랭크 홉킨스.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리조트 주인이기도 하다. 뒤이어 또다른 이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명단이 곧 살해 대상 목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FBI가 서둘러 수사에 나서지만 수많은 동명이인 가운데 명단을 받은 사람을 찾아내는 동시에 범인을 뒤쫓는 일은 쉽지 않다.

FBI 요원이자 아홉 명의 명단에 이름이 오른 제시카는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사는 지역도, 나이도, 성별도 모두 다르지만 분명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 확신한 제시카는 자신들의 부모부터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 아래서도 살인은 계속되고, 범인의 손길은 점점 제시카에게도 뻗쳐온다. 과연 연쇄살인의 범인은 누구일까? 그는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이들 아홉 명일까?

“아홉 명이 무작위로 뽑힌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고 확신해요. 또 범인이 누군지 몰라도 우리가 전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도요.”(p.164)


저자 : 피터 스완슨(Peter Swanson)


국내에 출간되어 10만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메스처럼 예리한 문체로 냉정한 악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퍼블리셔스 위클리>)”, “무시무시한 미치광이에게 푹 빠져들게 하는 법을 아는 작가(<가디언>)”라는 찬사를 받았고, 뉴잉글랜드소사이어티북어워드The New England Society Book Award, 영국범죄작가협회에서 매년 최고의 스릴러 부문에 수상하는 CWA 이안플레밍스틸대거Ian Fleming Steel Dagger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데뷔작 《아낌없이 뺏는 사랑》부터 “대담하고 극적인 반전을 갖춘 채 가차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보스턴 글로브>)”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로 NPR 올해의 책을 수상했으며,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로 “정점에 오른 스타일리시한 스릴러(<가디언>)”라는 평가를 받으며 ‘결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살인 재능》은 저자의 데뷔 10주년을 맞아 출간한 작품으로 피터 스완슨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스릴이 극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자 : 노진선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뉴욕대학교에서 소설 창작 과정을 공부했다. 잡지사 기자 생활을 거쳐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언어의 경계를 허무는 유려한 번역으로 독자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조디 피코의 『작지만 위대한 일들』, 존 그린의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레오파드』, 『네메시스』, 『아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결혼해도 괜찮아』, 캐서린 아이작의 『유 미 에브리싱』 외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 『아빠가 결혼했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만 가지 슬픔』, 『새장 안에서도 새들은 노래한다』, 『금요일 밤의 뜨개질 클럽』, 『자기 보살핌』, 『동거의 기술』, 『창조적 습관』, 『고든 램지의 불놀이』, 『달빛 아래의 만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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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주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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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형의 주인』의 저자 조이스 캐롤 오츠는 현대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고딕 소설의 대가로 손꼽힌다. 오츠는 1964년 데뷔한 이후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여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을 쉼 없이 써내며 〈전미도서상〉, 〈오헨리상〉, 〈페미나상〉, 〈브램스토커상〉 등 주요 문학상을 석권했다고 한다. 얼핏 셈해도 100권이 훌쩍 넘는 책을 썼다는 이야기다. 이 책도 단편소설집이다. 특히 인간 내면에 깃든 어둠과 광기, 근원적 불안과 공포를 깊이 탐구하고, 이를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로 형상화하여 ‘공포소설의 완성자’인 에드거 앨런 포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는 표제작 「인형의 주인」을 포함, 6편이 실려 있다. 원제가 'The Doll-Master and Other Tales of Terror'인 것으로 공포소설인 듯하다. 

이 책에는 사이코패스 소년의 내면을 1인칭으로 서늘하게 묘사한 「인형의 주인」을 비롯하여, 미국 백인-기독교인 사회의 뿌리 깊은 우월주의를 다룬 「군인」, 유년시절 성폭력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의 기억을 다룬 「총기 사고」, 가장 사랑했던 이에게서 자신을 향한 살의를 느끼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성을 그린 「적도」, 국제스릴러작가상 최우수 단편상 수상작인 「빅마마」, 그리고 아름답지만 수상한 고서점을 무대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주식회사」 등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포 소설'이 '환상적인 이야기'라는 소설의 장르 수식어로는 부적절한 조합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읽다보면 금세 왜 '환상적인 공포소설'이라고 소개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이야기들이 자아내는 공포는 호러와는 결이 다르다. 특별히 자극적인 장면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초자연적 존재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극한의) 두려움을 끄집어 낸다. 평소 웬만해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 책의 역자 배지은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정말 두려움을 느꼈다고 털어놓는다. "어찌 보면 영미권 독자들의 지적대로 참신한 반전도 없고 결말도 예측이 가능한 이야기들이지만, 특별한 반전 없이 예상된 결말로 마무리되더라도 찜찜한 느낌은 그대로다. 결국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 안에서 최고 수준의 서스펜스를 끌어내는 것은 작가의 내공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심연에 닿는 공포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들은 탁월한 '공포 소설'로 꼽힐 만하다."(p.417)

이 책의 단편 소설들은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본다면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은유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다. 특히 미국 사회는 거의 모든 것이 '돈'과 연결돼 있다. 혈연이나 지연 등보다는 세상의 가치 척도로 내세운 '돈'을 갖기 위해 사회는 거대한 경기장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민자로 이루어진 특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관련 전문 학자가 아닌 이상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사회를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냉정한 승부 사회로 생각하는 것 같다. 동물의 야생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며, 선거, 스포츠, 전쟁 등의 게임 방식이다. 이런 사회에서 패자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기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진 후에 승자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죽거나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승자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이 단편 소설들은 그만큼 처절한 경쟁 사회를 꼬집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인생에는 포식자가 있고 먹잇감이 있다. 포식자는 미끼를 던지고, 먹잇감은 이 미끼를 자양분으로 착각한다.”(p.367) 

이 책에 실린 각 작품은 ‘포식자’와 ‘희생자’의 대립 구도를 통해 인간 내면에 숨겨진 잔혹성을 드러내 보이고, 강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들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작품집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약자이거나 한때 약자였던 이들이다. 가족과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고 점차 자기 안의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소년,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외로워하고, 어른들의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다가 끝내 비극적 결말로 치닫고 마는 소녀들, 집단적 광기에 휘둘려 의도치 않게 영웅이 된 남자······.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층 갈등, 종교적 맹신, 소통의 단절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부조리한 사회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분노, 광기를 자극한다. 오늘날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런 부조리한 사회는 계속해서 새로운 ‘포식자’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는 ‘포식자’ 앞에 내던져진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중 인물들이 경험하는 공포는 초자연적 존재나 재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으스스하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면이나 충격적인 반전 하나 없이도 우리 안에 내재된 불안을 파고들어 최고의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조이스 캐럴 오츠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한다. 올해도 이름이 올랐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올 노벨문학상은 대한민국의 작가 한강에게 갔다. 노벨문학상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준다는 원칙이 있다. 이 작품 『인형의 주인』의 저자 오츠는 내년에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것이다. 내년에는 꼭 노벨상을 받았으면 독자로서 바란다. 그의 작품이 호러 공포 소설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많이 바꿔주었다. 저자에게 감사하기에 그의 수상을 바라는 것이다. 1938년 출생이니까 올해 84세라는 셈이 나온다. 아직은 건강하고 더 많은 작품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할 만하다. 좋은 작품을 써준 데 대해 독자로서 응원한다. 이제 문단 데뷔 60년이 흐른 지금 이 거장의 내공은 소설집 『인형의 주인』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번역자 배지은도 탁월한 ‘공포 소설’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에서 산 기간이 훨씬 길지만, 이른바 암기와 추산, 연산과 추리, 응용 능력 등 이른바 지능을 갖췄기에 다른 어떤 동물보다 먼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불과 1만~2만 년 전의 일이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한 시기가 15만~25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4만~5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널리 분포되어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인류학자와 인류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문명을 이루며 자연을 떠나 살았다. 인류가 문명을 이룬 것은 단순히 집단 생활을 했거나 간단한 의사 소통을 했다는 사실로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 인해 문자 발명 이후로부터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대략 7,000~8,000년 전쯤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야생에서 생활할 때에 비해 사실 비교할 수 없이 짧은 기간이다.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인간의 본성 안에 깊이 새겨진 잔인함은 은밀히 감춰져 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숨겨진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목격한다면 독자들은 「적도」에서 생태계의 잔인함에 반감을 느끼는 오드리처럼 불편한 마음이 들게 된다. 내 옆에 있던 사람, 내가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나의 적이자 포식자로 돌변할 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기댈 곳 없는 허허벌판에 먹잇감으로 던져진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면서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얘들은 길이 든 게 아니에요. 인간을 포식자로 인식하는 유전적 기억이 없을 뿐이에요.”(p.224) 남편과 함께 떠난 로맨틱한 적도 여행. 크루즈를 타고 갈라파고스섬의 생물들을 관찰하던 오드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생태계의 냉혹함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 태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남편 헨리,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낀다.

"잠깐 사이에 창백한 초승달이 사라졌다. 두꺼운 구름이 달을 완전히 가려버린 모양이었다. 배의 이편에서 보는 바다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하늘도 어둡고, 파도 소리는 요란했지만 보이지 않았고, 파도가 배를 이리저리 떠미는 힘이 느껴졌다. 아내는 반항했다. 갑판을 따라 걷고 싶지 않다고,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위험하기만 하다고, 여기엔 아무도 없지 않느냐고······. 남편은 경멸조로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건데? 파도에 휩쓸려 배 밖으로 빠질 일도 없잖아.” 그녀는 생각했다. 아뇨, 당신이 날 배 밖으로 밀어버릴 수 있죠.

아무도 못 볼 것이다. 아무도 못 들을 것이다. 아래층 갑판에서 사람들이 흥청대는 소리가 너무 컸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이곳 3층 갑판에는 짙은 어둠과 기름 냄새뿐이었다. 헨리는 웃으며 오드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세게 잡아당겨 난간 앞에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겁먹은 아이처럼 움츠러들었다."(p.241~242) 「적도」 중에서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되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 안에서 강자마저도 절대적인 강자가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이다. 「인형의 주인」의 로비도, 「총기 사고」의 트래비스도 강자에게 짓밟힌 약자의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군인」의 브랜던 슈랭크는 삼촌의 총을 손에 들고 자신이 주님의 군인이라고 믿으며 힘없는 흑인 소년 위에 잠시 군림하지만, 사건 후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고 만다. 작가가 일종의 우화라고 말하는 「빅마마」에서, 먹잇감이 된 바이올렛이 빅마마를 마주하며 빅마마 역시 유리 감옥 안에 갇힌 포로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어쩌면 이 모든 관계들을 암시하는 한 장면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가해자의 '서사'에 공감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나약한 존재임을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츠는 서로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펼쳐 보이며 현실에 기반을 둔 공포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이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것이기에, 그녀가 제시하는 공포는 미지의 초자연적 존재나 현상으로부터 느끼는 공포보다 훨씬 더 으스스하게 다가온다. 오츠의 시건으로 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나 잔인하고 무서운 곳이다. 이 소설집에 있는 다섯 편(앞서 언급한 「적도」 제외)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한 제공한 출판사 측의 소개로 여기에 열거해 본다. 순서는 소설 게재 순이다. 

① 「인형의 주인」 “얘들은 여기에 있으면 행복해. 여기에 있으면 평화로워.” 언젠가부터 로비는 길에서 인형을 주워 남몰래 창고에 보관해왔다. 그리고 로비가 인형을 주울 때마다 동네에서는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스스로를 ‘인형의 주인’이라 칭하는 소년. 사이코패스의 뒤틀린 내면을 섬뜩하게 그려낸 작품으로서 표제작이다.

② 「군인」 “인종 전쟁은 이 나라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이야.” 흑인 소년을 살해하고 ‘하느님의 군인’으로 칭송받게 된 남자.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지 지머먼’과 ‘버나드 고츠’의 실화를 모티프로, ‘백인-기독교인 사회의 뿌리 깊은 우월주의와 종교적 맹신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③ 「총기 사고」 “그 일은, 일어났어야만 했던 거야. 어쩔 수 없었어.” 두 아이를 키우는 해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는다. 그리고 한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매클러랜드 선생님의 거대한 저택을 스쳐 지나며, 과거 그곳에서 일어난 비극적 총기 사고의 기억을 떠올린다. 순진하고 내성적이었던 소녀의 운명을 바꿔놓은 25년 전, 가려져 있던 그날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빅마마」 “미워 미워 미워 진짜 미워.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엄마를 따라 낯선 동네로 이사 온 바이올렛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던 중 리타 메이 클로비스라는 소녀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고, 늘 외로움에 시달리던 바이올렛은 친절하고 따뜻한 리타와 그 가족에게 마음을 연다. 어느 날, 리타네 집에 놀러 간 바이올렛은 클로비스 가족의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애완동물 빅마마를 보게 된다.

「미스터리 주식회사」 “왜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여러 개의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뉴햄프셔의 아름다운 고서점 ‘미스터리 주식회사’를 찾아간다. 지금껏 전 주인들을 은밀하게 독살하고 그들의 서점을 차지해 사업을 확장해온 나는 이번에도 가방에 독이 든 초콜릿을 준비해두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미스터리 주식회사’의 주인 에런 노이하우스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친절하게 카푸치노까지 대접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서점에 얽힌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왜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노이하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슬레이터의 할아버지인 바나바스가 인생으로부터 ‘미스터리’의 핵심을 잘 추출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독개구리로부터 독을 추출했던 것처럼 말이죠. 죽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완성된 행위이며, 아무 이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느 예술 작품이나 마찬가지죠. 그럼에도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적들을 두려워하고 낯선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만일 낯선 사람이 내 영역에 들어온다면, 그리고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아니 사악한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를 이해해보려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그를 없애버리는 쪽이 더 나을 겁니다.(p.410~411) 「미스터리 주식회사」 중에서


저자 :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현대 미국 문단의 대표 작가이자 고딕 호러의 대가이다. 1938년 미국 뉴욕주 록포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처음 문학을 접했고, 이후 브론테 자매, 포크너, 헤밍웨이, 소로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열네 살 때 할머니에게 타자기를 선물 받으면서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시러큐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에 「구세계에서」로 대학생 단편소설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4년 첫 장편소설 『아찔한 추락』을 시발점으로 이후 지금껏 50편이 넘는 장편과 1,000편이 넘는 단편을 비롯해 시, 산문, 비평, 희곡 등 거의 모든 문학 분야에 걸친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 찬 20세기 후반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해왔다. 1967년 「얼음의 나라에서」, 1973년 「사자The Dead」로 오헨리상을 받았고, 1969년 『그들』로 전미도서상, 1995년 『좀비』, 2011년 『악몽』, 2012년 『검은 달리아와 하얀 장미』로 브램스토커상, 2005년 『폭포』로 페미나상 외국문학상을 받았으며,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도 무려 다섯 차례나 올랐다. 1978년부터 미국학술원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2003년 문학 부문의 업적으로 커먼웰스상과 케니언리뷰상을 수상했다. 2006년 시카고트리뷴문학상, 2019년 예루살렘상을 받았다. 현재 프린스턴대학교 로저 S. 벌린드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멀베이니 가족』 『블론드』 『사토장이의 딸』 『소녀 수집하는 노인』 『카시지』 등이 있다.


역자 : 배지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휴대전화를 만드는 엔지니어로 일했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을 전공하고 소설과 과학책을 번역하고 있다. 『엿보는 자들의 밤』, 『밤의 새가 말하다』, 『열흘간의 불가사의』, 『최후의 일격』, 『꼬리 많은 고양이』, 『퀸 수사국』, 『무니의 희귀본과 중고책 서점』,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아파트먼트』, 『물질의 탐구』, 『입자 동물원』,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양자역학지식 50』, 『전자부품 백과사전』(전 3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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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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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시대예보: 호명사회』의 표제어 '호명사회'에 눈길이 먼저 간다.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던 용어이기 때문이다. 한자 직역 뜻으로는 '이름을 부르는 사회'쯤으로 이해된다. 책의 제목으로 쓸 단어는 저자의 의도뿐만 아니라 편집진도 여러 가지 의미를 고려했을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시대'라면 무척 좋은 의미로 독자 개인적으로는 들린다. 저자 송길영의 전작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이미 새로운 개념의 단어 '핵개인'을 사용했다. '호명사회'도 역시 저자의 신조어인가 싶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핵개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사회는 조직의 이름 뒤에 숨을 수도, 숨을 필요도 없는 사회다. 자신이 한 일을 책임지고 온전히 자신이 한 일에 보상을 받는 새로운 공정한 시대라는 뜻을 내포한 단어라는 설명이다. 이 책은 호명사회는 어디까지 왔으며, 이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를 제시하는 책이다. 

전작을 읽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했지만 저자 송길영에 대해 독자는 어떤 정보도 없었다. 다만 저자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시대를 읽고, 시대에 맞게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논리정연해 관심을 갖고 프로그램이 끝날 때가지 지켜본 기억이 있다. 그 프로그램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이었다. 그는 시사평론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말을 들은 바는 있다. 시사평론이라면 '정치적'인 평론이나 싶었는데 '경제'라고 했다. 경제의 흐름을 잘 아는 분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기억됐다. 

저자 송길영은 지금의 시대를 왜 '호명 사회'라고 일컬었을까? 저자는 책의 앞 부분에 「예보: 호명사회」란 글에서 언급한다. "첫 번째 예보인 '핵개인의 시대'에 지능화와 고령화가 나선처럼 꼬여지며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 핵개인의 탄생을 예고했다면, 이번 두 번째 예보에서는 개인의 삶과 자각의 관점에서 핵개인의 탄생과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기적인 경제 위기를 겪으며 직업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어느새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졌다.

학벌, 학점, 토익에 불과했던 직장 등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은 어학연수, 공모전, 제2외국어,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확장됐다. 최근에는 유치원에서부터 의대를 준비하는 시대가 왔다고도 한다. 이렇듯 '경쟁의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경쟁을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의 비용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뜻이라고 저자 송길영은 진단한다. 한마디로 성공의 값이 비싸지는 것이다. 경제의 기본원칙이지만 이 경우 우리가 들이는 시간과 열정의 가치는 폭락한다. 우리가 그동안 굳게 믿고 있던 직업이 주는 안정감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생애주기는 길어지는데 직업의 생멸주기는 짧아지는 극단적 불일치 현상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당연히 취업준비생이든 직장인이든 평생 한 직장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불안이 퍼져나가고 있다. 이를 ‘유동화’라 한다.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연결성이 조밀해지면서 여러 사람이 나눠서 하던 일의 규모가 작아지고 있다. 예컨대 기존의 광고대행업은 고객상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카피라이터, 행정, 스태프 인력 등 모든 단계에 인원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생성형 AI와 다양한 자동화 서비스를 통해 1인 창작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를 ‘극소화’라 한다.

이처럼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현실 정년은 바뀌지 않고, 기술의 발전으로 직업의 수명은 오히려 짧아지는 시대가 왔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여기에 유동화와 극소화로 조직은 점점 작아지고 개인은 점점 커지도록 사회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렵게 들어간 회사의 간판과 직책이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나보다 직업이 먼저 사라질 시대에 앞서 살아간 선배들의 조언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급변한 사회 시스템과 시대정신이 가져올 가장 큰 변화는 나의 이름을 찾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호명사회’의 도래다. 산업혁명 이후 팽창한 조직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잃었다. 이제 조직의 확장이 저물고 수축기로 접어든 시대에 우리는 조직에 가려져 있던 ‘나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예보: 호명사회」에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까?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는 서구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불과 200년 정도의 기간에 대량생산을 하기 위한 설비 투자, 재료 수급과 운영 관리, 판매 촉진과 사후의 응대 등 경제 주체로서의 규모를 빠르게 확장했다. 이 기간에 경제의 주체가 되는 기업이나 '조직'의 팽창은 반대급부로 '개인'의 이름을 조금씩 잊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장을 넣은 장인의 표식은 기업의 브랜드로 대체되었고, 이름을 걸고 만들어내던 품질의 보증은 각종 인증마크로 바뀌었다. 전체를 관할하지 못하고 일부를 맡게 된 참여자는 장인이 아닌 노동자로 불리며, 정규화된 프로세스로 인해 항상 대체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p.12~14) 

이젠 시대의 핵개인이 예전의 장인과 동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시작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을 것으로 저자는 전망한다. 이를 호명사회라고 칭하고 있다. 저자는 앞서 규정한 유동화와 극소화는 작은 단위 조직 사이의 협업을 독려하고 전문화로 무장한 핵개인들은 조직이라는 형식이 아니어도 다른 핵개인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더 섬세한 협업을 만들어 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단위가 개인으로까지 작아질 때, 그를 부르는 호칭은 그의 이름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시뮬레이션 과잉」, 2장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 3장 「호오에서 자립을 찾다」, 4장 「선택의 연대」, 5장 「호명사회의 도래」 등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문턱'이라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연 지 6년이 지나가고 있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3년 이후 60년이 지난 시점이다. 당시 100달러 수준이던 경제 수준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성장세를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전무후무한 일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위상이 달라졌다. 인구도 만만치 않기에 '경제대국'이란 호칭도 붙었다. 4만 달러를 쉽게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또다른 동기 부여만 있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달성하고 넘어서리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내보는 시점이다. 4만 달러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과거 국민소득 1,000달러 미만일 때는 산업화 추진이나 개인의 취업에 이르기까지 선뜻 손대지 못할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잃을 게 없어서 선택은 오히려 쉬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에 두려움이 생겼다. 잃을 게 없던 시절과는 다르게 자칫 선택에 실패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부(富)를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새롭게 생긴 것이다. 저자는 이를 '3만 달러'를 놓고 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다는 선택 심리로 표현한다.

저자는 이처럼 신중한 선택의 결론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향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사회에서 단기적으로 금전적 보상이 높은 직업, 사람들이 지금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모든 이들이 매달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쟁투'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유행을 따르며 뜨고 지는 주기가 빨라지자 그 눈을 과거로 돌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임을 강조한다. 잠시 사람들이 좋아해 무수히 경쟁하다가 결국은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례들이 매년 나오자 그 보상의 유효성이 더 오래 검증된 직업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의사'로 귀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단일해지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삶의 안정성을 얻기 위한 노력이 금전이라는 수단으로 쏠렸고, 경쟁에 지친 이들이 모두 안전해 보이는 일을 탐하며 동일한 트랙의 선착순 경기로 내몰리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실제적 증거로 자라나는 아이들이 롤 모델로 삼아 택하고 싶은 직업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고 한다. 스포츠 스타와 예능인을 거쳐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를 지나, 이제 의사로 결집하고 있다. 학원가로 유명한 동네에서 무거운 가방을 멜 수도 없어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니는 초등학생들의 꿈이 하나같이 '의사'가 됐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심지어 무리의 경쟁이 치솟는 사회는 이제 '유치원 의대 준비반'으로 현실이 되었다고 꼬집고 있다. 모두 목표가 단일한 사회에서는 같은 길을 내딛는 자로 가득찬 사회, 그리고 경쟁이 가장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회 구성원의 욕망이 합의된 경쟁 인플레이션 사회가 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리고 그 인플레이션을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은 경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저출생의 구조가 고착화되고 퇴보하는 최악의 상황을 예고한다. 독자가 '유치원 의대 준비반'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그 부분을 찾아 먼저 읽으려 목차를 찾아봤다. 1장 「시뮬레이션 과잉」에 작은 항목의 제목으로 나와 있다. '유치원까지 내려간 의대 준비반'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초등학교 아이들이 의대 간다고 학원을 드나들던 게 이젠 유치원부터 부모가 아이들에게 의대를 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학습을 독려하는 것인지 실제 프로그램을 갖고 실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현상은 '역기능적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회피적 시뮬레이션 부작용'이라고 저자는 지칭한다. 최선의 시나리오만을 생각한 최적화 알고리즘으로 삶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그 끝에는 최종적 위험 회피가 자리 잡는다고 한다. 가령 부모의 시뮬레이션으로 위험 회피에 성공할지라도 이는 아이의 성장 부재로 이어지고 점차 나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계하고 있다.

4장 「선택의 연대」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한 편의 영화 이야기로 말머리를 잡는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 30대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인물 최익현은 윤종빈 감독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주인공이다. 경주에 자리 잡은 최씨, 명문가 충렬공파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비리를 저질러 면직된 공무원임에도 자랑스러운 뿌리를 연줄로 조직폭력배에 가담하고자 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검사와의 인연 또한 '할부지의 9촌 동생의 손자'라는 정체 모를 촌수로 연결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혈연이나 지연으로 사회관계를 맺었던 90년대 이전까지의 우리 사회를 꼬집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는 배움의 현장에서도, 함께 일하는 회사에서도, 뜻을 모든 공동체에서도 '가족' 같은 관계가 기본이었다. 이 시대는 그래도 '낭만'의 시대라서 보상도 확실했다고 한다. 운명 공동체의 조직이라면 개인이 감내한 만큼의 암묵적 보상을 약속한 셈이다. 과거 세무조사를 받던 기업 임원이 장부를 들고 잠적한 뒤 감옥에 다녀와서 오히려 더 높은 자리로 영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던 시절이니까. 한국 사회의 '조직'과 '구성원'의 관계는 끈끈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하는 구호가 사라진 지도 30년이 훨씬 넘었다.

저자는 사회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에 '평등함'을 기반으로 한 '연대'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연대는 연좌의 끈을 끊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이다. 개인의 잘못이 공동의 잘못과 같다는 공동체적 결속은 모두를 침묵하게 하는 그늘과 같은 것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연좌를 경험해 왔다. 조선 시대 삼정(나라의정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로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양곡 대여와 환수)의 문란으로 가족이나 이웃의 군포를 대신 납부해야 했던 족징이나 인징부터, 근래에는 학교에서 한 학생의 잘못된 행동으로 전체 학급이 받았던 단체 기합 등이 그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까지도 가까운 이들의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금융기관의 빚보증 명칭은 '연대 보증'이었다. '연대'가 부정적 이미지를 얻게 된 사례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시스템을 창출한다. 첫 번째 도제 시스템의 몰락과 함께 나타나는 지식 전수 방식의 변화다. 두 번째는 취향을 중심으로 한 새롱누 정체성 공동체의 형성이다. 세 번째는 다정함의 중요성이다. 예전에 끈끈했던 가족 같은 관계는 그 막역함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예속과 연좌가 따라왔다. 이젠 대등함을 바탕으로 서로 감정적으로 연대하고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고 있다. 호명 사회의 앞날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이 책은 호명사회에 생존하기 위한 우리 개인의 대처법, 혹은 선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 임의의 번호를 붙여 독자가 나열해 본다. ① 호오에서 길 찾기. 나의 좋음과 싫음을 뜻하는 호오(好惡)를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조예와 취향을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새로운 본진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나의 조예와 취향이 벼려질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며 경험을 축적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자산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② 자립을 위한 도구 만들기. 장수의 혜택과 AI와 지능화의 도움은 복수의 직업, 이른바 N잡러의 증가를 가져온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고 이름을 되찾는 자립을 해야 한다. 이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지능화를 빠르게 수용하는 개방성과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는 주체성이다. ③ 느슨한 연대. 이제 세상은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연좌에서 개인의 선택이 강화된 대등한 연대로 변화한다.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과열되어 버리고, 너무 먼 관계는 차가워진다. 다정함과 적절한 거리감 사이에서 황금률을 찾는 느슨하지만 적절한 연대는 호명사회를 위한 전제라 할 수 있다.

④ 생존을 위한 증거주의. 지금은 각자의 업무가 단계별로 생산되고 유통되며 누구도 자신의 업무를 숨길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렇듯 모든 것들이 공유되는 ‘실시간 업무 스트리밍 시대’에는 자신을 증명할 근거를 모으려 노력해야 한다. 퇴사하였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해질 수 있는 이들의 근거가 그 증거의 집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 더 일찍 적응하고 자신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있던 이들은 모든 수식어를 다 버리고도 설명 가능한 ‘이름’으로 불리기에 유리한 고지를 점유해 나갈 수 있다. ⑤ 장인 정신, 호모 아르티장. 자신의 업을 고집스레 이어가는 고유함에서 자립이 탄생하고 감춰져 있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이제 도구의 인간인 호보 파베르(homo faber)가 AI와 3D 프린터로 강화되며 장인의 인간인 호모 아르티장(homo artisan)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버는 것으로 상승한다. 이때 자신의 일은 작업이 되고, 자신이 만든 것은 작품이 된다. 조직에서 함께한 일은 소모되지만 혼자 한 작업은 작품을 남긴다. 그 작품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나의 이름과 함께 남는다.


저자 : 송길영


송길영은 시대의 마음을 캐는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기록을 관찰하며 현상의 연유를 탐색하고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20여 년간 해왔다. 개인들의 행동은 무리와의 상호작용과 환경의 적응으로부터 도출됨을 이해하고, 그 합의와 변천에 대해 알리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저서로 《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 《상상하지 말라》, 《그냥 하지 말라》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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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인생도 실패는 아니라고 장자가 말했다
한정주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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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 어떤 인생도 실패는 아니라고 장자가 말했다』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여러 사상가 중 장자의 사상과 철학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저자 한정주가 집필했다. 장자가 활약한 시대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주나라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의 동주(東周: 기원전 771~256) 시대에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세력을 추구하면서 거리낌이 없어져서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춘추전국시대는 선진시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이 같은 시대적 혼란 속에서 역설적으로 중국의 사상과 철학은 개화결실의 시기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사회·경제·정치상의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이전의 씨족제적인 사회가 해체되며, 주나라의 봉건 제도와 그에 따르는 질서가 붕괴한다. 또한, 경제적·군사적 실력자들이 각 지역에서 등장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주 왕조의 권위 실추에 따르는 제후의 독립과 대립 항쟁 속에서 통일 왕조를 기다리고 있는 시기였다. 

전국시대인 기원전 260년께에는 연·위·제·조·초·한 등 7웅이 활약하는 군웅할거 시대다. 나라간 항쟁을 이겨내고 강자로 생존해 나가는 것을 우선하는 제후국들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또는 여러 가지로 면모를 바꾸고 있는 다양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각 나라의 왕들은 힘을 겨뤄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갖는 승자의 시대이다. 이때 여러 유파의 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가 춘추시대 공자의 뒤를 잇는 맹자와 도가로 분류되는 장자다. 책의 저자 한정주는 이 시대에 등장한 제자백가 중 장자의 가르침에 빠졌다고 밝힌다. 저자는 「인생의 강을 건너가는 모든 이에게」라는 제목의 〈서문(들어가는 말)〉을 통해 "철학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삶의 길잡이가 되거나 혹은 자신을 매료시켰던 철학자가 있다"고 전제한 뒤 저자의 경우 "20~30대에는 마르크스의 철학, 40대 초·중반에는 니체의 철학 그리고 4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른 지금에는 니체와 장자의 철학이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고 밝힌다. 장자는 삶에 지치고 사람들에 지쳐 버린 50세 후반인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길을 찾지 못한 삶의 근본 문제들을 다시 질문하고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새로운 안목과 정신의 자양분을 제공해 준 까닭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중년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거나 한복판을 지나온 세대다.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에 나라 재건에 나타난 시대적 요청이 경제 개발과 산업화다. 이때는 일밖에 몰랐다. 학생들은 공부를 위해 노동자는 일하기 위해 '새벽별 보고 시작해 저녁별 보고 귀가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잘살기 위해서다. 지금처럼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거나 또는 노후를 위한 설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개미처럼 일하고 공부했다. 민주화 투쟁도 마찬가지다. 다만 산업화를 위한 독재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산업 노동 현장으로 뛰어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많았다. 이는 나중에 우리의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주 세력으로 등장한다. 

저자가 50대의 나이라면 산업화 시대 출생한 태어난 분으로 추정된다. 민주화·산업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잘 알고 있을 듯하다. 자신의 철학적 경험이 토대로 대부분의 우리나라 중년 세대가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음을 잘 알 것이다. 이로 인해 니체의 필요성과 장자의 철학에 빠져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자의 철학이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저자의 집필 취지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저자는 장자의 철학을 번역·해석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비슷한 세대의 시대적 고민을 장자의 철학 속에서 풀어볼 수 있다는 점을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이 때문에 '저자가 바라본 장자의 철학'이다. 자신이 바라본 장자의 철학임을 강조하는 것은 저자의 장자 철학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단언하는 것처럼 읽힌다. "장자의 말대로 그것은 '옳다고 믿으면 옳은 것이고, 옳지 않다고 믿으면 옳지 않는 것'이라는 장자의 말을 적용해 집필 내용에 대해 윤곽을 그려놓는다. 저자는 장자가 '하나의 장자'만 존재하지 않고 '수천 수만의 장자'로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점이 여타 철학과는 다른 장자 철학의 독보성이고, 저자가 장자 철학에 매료된 궁극적인 이유다.

이 책은 장자의 가르침을 텍스트로 사용했다. 당연히 장자의 사상이나 철학이 묻어난다. 저자는 「세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가다운 삶을 살아가다」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장자의 철학은 '우화의 철학'이라고 단언한다. 다른 철학자와 달리 장자는 스스로 지어 내고 꾸며 낸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이유에서다. 장자가 지어 내고 꾸며 낸 이야기 즉, 우화를 통해 전하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자는 '좋은 삶'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올바른 삶'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에 저자는 올바른 삶과 좋은 삶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차이점이 곧 장자의 사상과 철학의 탁월한 점이라고 강조한다. 

우선 올바른 삶에는 절대적·객관적·사회적 기준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혹은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좋은 삶에는 애초에 그런 기준이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주관적·개인적 기준일 뿐이다. 또 올바른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을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올바른 삶의 가치와 기준을 자기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고 또한 무한히 확대 복제하려고 한다. 반면 좋은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이 고유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기준 역시 고유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자기 삶의 가치와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삶은 세상(천하)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 가치와 기준은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의 관습과 도덕 또는 규범과 규칙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삶은 세상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인 가치와 기준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세상을 위해 희생당해도 괜찮은 개인의 살과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을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큰 명예이자 영광으로 여긴다. 장자에게는 공자나 묵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른바 성인군자 혹은 도덕군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것은 장자가 유가나 묵가의 철학을 비판하는가장 큰 이유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장자가 공자의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 도덕과 삼강오륜 같은 관습, 도덕, 윤리, 규범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유다.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올바른 삶은 소외층 피지배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지배계층의 논리고 힘있는 자의 기준에서 내세운 사상이고 철학이라고 장자는 꼽집어 내고 있다. 일반 백성, 여성, 가난한 사람 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 즉 다시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는 삶이다. 도덕이나 규범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란 장자의 철학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처럼 올바른 삶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절대적·객관적·사회적 가치와 기준이라면, 좋은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개별적·상대적·주관적·개인적 가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장자는 올바른 삶의 가치가 지배하던 시대 좋은 삶의 가치를 역설한 거의 유일한 철학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자의 시대에만 올바른 삶이 지배했던 것은 아니다. 장자 이전의 시대에도 그랬고, 이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2,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삶의 관습과 도덕, 규범과 규칙에 훈육되고 또한 그것을 강요받고 그것에 복종하며 살고 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혹은 무엇인가의 노예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은 장자가 지어 낸 우화를 통해 질문하고 사색하고 탐구한 삶의 근본 문제를 추적하면서 좋은 삶의 길과 방법 그리고 지혜를 찾아간다. '운명, 욕망, 불안, 앎(지식), 삶과 죽음, 자유' 등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서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이제 삶의 방향은 결정되었는가?」, 2장 「무엇을 욕망하는가?」, 3장 「불안과 함께 사는 방법」, 4장 「명확하게 아는 것이 있는가?」, 5장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만드는 방법」, 6장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등이다.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주제가 각 한 장씩 배정돼 있다. 이 여섯 가지 주제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또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 가운데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근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수백 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는, 중국 통일 왕조가 세워지기 이전의 시기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혼란과 공포의 시대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당장 오늘 굶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 사람들이 넘쳐 났다. 철기 시대 농경작법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법하지만 전쟁 무기로 쓰고 남은 철기가 없어 철기 농기구 보급은 전국시대 말기에나 이루어진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매일 매일이 죽음과 기아의 공포가 엄습하는 시대다. 일반 백성들의 일반적이 삶이다. 

오늘날 현대는 기아의 공포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지역에 집중돼 있다. 기아와 전쟁의 공포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불안의 심리는 오히려 커졌다. 늘 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사회의 변화는 너무 빠르다. 이런 경쟁 사회에서 살아 남는다는 것은 전쟁에서 살아 남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현대인의 삶은 늘 불안하고 스트레스로 각종 정신질환 발병이 높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때도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대표적 정신적 우울증이란 '코로나 블루'가 생기지 않았던가.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몇 년 뒤에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발버둥치고, 또 다른 사람은 불안에 짓눌린 채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하며 체념한다. 한쪽에서 ‘갓생(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살고자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구직 활동을 포기하며 ‘그냥 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안한 현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길잡이로 삼을 만한 지혜는 없을까?

저자는 이 책 3장 「불안과 함께 사는 방법」에서 장자를 통해 '불안'을 짚어본다. 저자에 따르면 『장자』 「잡편」 ‘어부(漁父)’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사람의 우화’는 불안에 대한 반응과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철학적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자신의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한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매일 불안과 공포에 떨던 남자는 마침내 그림자를 피해 도망쳐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먼저 그는 발걸음을 빨리하면 그림자와 멀어져 자신에게서 그림자를 떨쳐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빨리할수록 그림자가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신의 몸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발걸음이 아직 느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더 속도를 빨리해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림자는 더욱 남자의 몸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는 속도를 더 올리면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서 멀어져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자 그는 더욱 빨리 달렸고, 그렇게 해도 그림자가 몸에 붙어 있자 더욱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욱 속도를 올려 달리고 또 달리다 마침내 기력이 다한 남자는 결국 숨이 멎어 죽고 말았다. 장자는 자신의 그림자가 무섭고 두려워 피해 달아나다 목숨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만약 그 사람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림자는 저절로 없어졌을 텐데······.”

이 우화는 불안이 두렵고 무서워서 벗어나려고 도망치다가 오히려 불안에 짓눌려 삶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저자는 짚어낸다. 불안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 삶에 항상 붙어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달리다가 목숨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가 불안을 떨쳐 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불안에 질식당해 삶을 망가뜨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자를 두려워한 남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내뱉은 장자의 철학적 메시지, 곧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림자가 없어졌을 것이라는 탄식 역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그 말은 불안을 경험할 때 도망치려고 하기보다는 도리어 불안 속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불안 속으로 들어가면 불안이 삶을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힘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한다. 하나는 불안을 삶의 그림자 즉,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불안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자 ‘자신의 삶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자기 삶의 그림자로 받아들이고, 불안을 만든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기 삶의 내면을 성찰해 봐야 한다.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깨닫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불안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질식시켜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불안을 터득하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삶에 ‘불안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저자 : 한정주


역사평론가, 고전연구가, 고전·역사연구회 뇌룡재雷龍齋 대표. 196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광주 석산고와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사마천의 ‘사필소세史筆昭世’(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 정신과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철학을 바탕으로 역사와 고전의 현대적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인사동 한 모퉁이에서 역사와 고전을 공부하는 모임 ‘뇌룡재’를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헤드라인 뉴스》에 인문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장의 온도』, 『이덕무를 읽다』, 『율곡 인문학』, 『천자문 인문학』,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 『글쓰기 동서대전』, 『한국사 전쟁의 기술』,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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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읽고 쓰다 - 독서인문교육을 말하다
이금희 외 지음 / 빨강머리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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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읽고, 쓰고, 말하다. 이 책을 통해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독서인문교육 전문가 10인의 생각에서 답을 찾는다.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가는데 우리의 교육은 과연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지 성찰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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