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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인생도 실패는 아니라고 장자가 말했다
한정주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9월
평점 :

이 책 『그 어떤 인생도 실패는 아니라고 장자가 말했다』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여러 사상가 중 장자의 사상과 철학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저자 한정주가 집필했다. 장자가 활약한 시대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주나라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의 동주(東周: 기원전 771~256) 시대에는 종주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세력을 추구하면서 거리낌이 없어져서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국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춘추전국시대는 선진시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기원전 221년의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뜻한다. 이 같은 시대적 혼란 속에서 역설적으로 중국의 사상과 철학은 개화결실의 시기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사회·경제·정치상의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이전의 씨족제적인 사회가 해체되며, 주나라의 봉건 제도와 그에 따르는 질서가 붕괴한다. 또한, 경제적·군사적 실력자들이 각 지역에서 등장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주 왕조의 권위 실추에 따르는 제후의 독립과 대립 항쟁 속에서 통일 왕조를 기다리고 있는 시기였다.
전국시대인 기원전 260년께에는 연·위·제·조·초·한 등 7웅이 활약하는 군웅할거 시대다. 나라간 항쟁을 이겨내고 강자로 생존해 나가는 것을 우선하는 제후국들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또는 여러 가지로 면모를 바꾸고 있는 다양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각 나라의 왕들은 힘을 겨뤄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갖는 승자의 시대이다. 이때 여러 유파의 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가 춘추시대 공자의 뒤를 잇는 맹자와 도가로 분류되는 장자다. 책의 저자 한정주는 이 시대에 등장한 제자백가 중 장자의 가르침에 빠졌다고 밝힌다. 저자는 「인생의 강을 건너가는 모든 이에게」라는 제목의 〈서문(들어가는 말)〉을 통해 "철학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삶의 길잡이가 되거나 혹은 자신을 매료시켰던 철학자가 있다"고 전제한 뒤 저자의 경우 "20~30대에는 마르크스의 철학, 40대 초·중반에는 니체의 철학 그리고 4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에 이른 지금에는 니체와 장자의 철학이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고 밝힌다. 장자는 삶에 지치고 사람들에 지쳐 버린 50세 후반인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길을 찾지 못한 삶의 근본 문제들을 다시 질문하고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새로운 안목과 정신의 자양분을 제공해 준 까닭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중년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거나 한복판을 지나온 세대다. 일제 강점기와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에 나라 재건에 나타난 시대적 요청이 경제 개발과 산업화다. 이때는 일밖에 몰랐다. 학생들은 공부를 위해 노동자는 일하기 위해 '새벽별 보고 시작해 저녁별 보고 귀가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잘살기 위해서다. 지금처럼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위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거나 또는 노후를 위한 설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개미처럼 일하고 공부했다. 민주화 투쟁도 마찬가지다. 다만 산업화를 위한 독재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산업 노동 현장으로 뛰어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이 많았다. 이는 나중에 우리의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주 세력으로 등장한다.
저자가 50대의 나이라면 산업화 시대 출생한 태어난 분으로 추정된다. 민주화·산업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잘 알고 있을 듯하다. 자신의 철학적 경험이 토대로 대부분의 우리나라 중년 세대가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음을 잘 알 것이다. 이로 인해 니체의 필요성과 장자의 철학에 빠져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자의 철학이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저자의 집필 취지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저자는 장자의 철학을 번역·해석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비슷한 세대의 시대적 고민을 장자의 철학 속에서 풀어볼 수 있다는 점을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이 때문에 '저자가 바라본 장자의 철학'이다. 자신이 바라본 장자의 철학임을 강조하는 것은 저자의 장자 철학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 단언하는 것처럼 읽힌다. "장자의 말대로 그것은 '옳다고 믿으면 옳은 것이고, 옳지 않다고 믿으면 옳지 않는 것'이라는 장자의 말을 적용해 집필 내용에 대해 윤곽을 그려놓는다. 저자는 장자가 '하나의 장자'만 존재하지 않고 '수천 수만의 장자'로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점이 여타 철학과는 다른 장자 철학의 독보성이고, 저자가 장자 철학에 매료된 궁극적인 이유다.

이 책은 장자의 가르침을 텍스트로 사용했다. 당연히 장자의 사상이나 철학이 묻어난다. 저자는 「세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가다운 삶을 살아가다」란 제목의 〈프롤로그〉를 통해 장자의 철학은 '우화의 철학'이라고 단언한다. 다른 철학자와 달리 장자는 스스로 지어 내고 꾸며 낸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이유에서다. 장자가 지어 내고 꾸며 낸 이야기 즉, 우화를 통해 전하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자는 '좋은 삶'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올바른 삶'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에 저자는 올바른 삶과 좋은 삶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차이점이 곧 장자의 사상과 철학의 탁월한 점이라고 강조한다.
우선 올바른 삶에는 절대적·객관적·사회적 기준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혹은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좋은 삶에는 애초에 그런 기준이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주관적·개인적 기준일 뿐이다. 또 올바른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을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올바른 삶의 가치와 기준을 자기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고 또한 무한히 확대 복제하려고 한다. 반면 좋은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이 고유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기준 역시 고유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자기 삶의 가치와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올바른 삶은 세상(천하)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 가치와 기준은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의 관습과 도덕 또는 규범과 규칙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삶은 세상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인 가치와 기준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세상을 위해 희생당해도 괜찮은 개인의 살과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을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큰 명예이자 영광으로 여긴다. 장자에게는 공자나 묵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른바 성인군자 혹은 도덕군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것은 장자가 유가나 묵가의 철학을 비판하는가장 큰 이유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장자가 공자의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 도덕과 삼강오륜 같은 관습, 도덕, 윤리, 규범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유다.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올바른 삶은 소외층 피지배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지배계층의 논리고 힘있는 자의 기준에서 내세운 사상이고 철학이라고 장자는 꼽집어 내고 있다. 일반 백성, 여성, 가난한 사람 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 즉 다시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는 삶이다. 도덕이나 규범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란 장자의 철학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처럼 올바른 삶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절대적·객관적·사회적 가치와 기준이라면, 좋은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개별적·상대적·주관적·개인적 가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장자는 올바른 삶의 가치가 지배하던 시대 좋은 삶의 가치를 역설한 거의 유일한 철학자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자의 시대에만 올바른 삶이 지배했던 것은 아니다. 장자 이전의 시대에도 그랬고, 이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2,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삶의 관습과 도덕, 규범과 규칙에 훈육되고 또한 그것을 강요받고 그것에 복종하며 살고 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혹은 무엇인가의 노예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은 장자가 지어 낸 우화를 통해 질문하고 사색하고 탐구한 삶의 근본 문제를 추적하면서 좋은 삶의 길과 방법 그리고 지혜를 찾아간다. '운명, 욕망, 불안, 앎(지식), 삶과 죽음, 자유' 등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서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이제 삶의 방향은 결정되었는가?」, 2장 「무엇을 욕망하는가?」, 3장 「불안과 함께 사는 방법」, 4장 「명확하게 아는 것이 있는가?」, 5장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만드는 방법」, 6장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등이다.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주제가 각 한 장씩 배정돼 있다. 이 여섯 가지 주제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또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 가운데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근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는 수백 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는, 중국 통일 왕조가 세워지기 이전의 시기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혼란과 공포의 시대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당장 오늘 굶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 사람들이 넘쳐 났다. 철기 시대 농경작법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법하지만 전쟁 무기로 쓰고 남은 철기가 없어 철기 농기구 보급은 전국시대 말기에나 이루어진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매일 매일이 죽음과 기아의 공포가 엄습하는 시대다. 일반 백성들의 일반적이 삶이다.
오늘날 현대는 기아의 공포에서 벗어난 듯하지만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지역에 집중돼 있다. 기아와 전쟁의 공포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불안의 심리는 오히려 커졌다. 늘 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사회의 변화는 너무 빠르다. 이런 경쟁 사회에서 살아 남는다는 것은 전쟁에서 살아 남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현대인의 삶은 늘 불안하고 스트레스로 각종 정신질환 발병이 높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때도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대표적 정신적 우울증이란 '코로나 블루'가 생기지 않았던가.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몇 년 뒤에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발버둥치고, 또 다른 사람은 불안에 짓눌린 채 더 나은 미래를 포기하며 체념한다. 한쪽에서 ‘갓생(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살고자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구직 활동을 포기하며 ‘그냥 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안한 현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길잡이로 삼을 만한 지혜는 없을까?
저자는 이 책 3장 「불안과 함께 사는 방법」에서 장자를 통해 '불안'을 짚어본다. 저자에 따르면 『장자』 「잡편」 ‘어부(漁父)’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사람의 우화’는 불안에 대한 반응과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철학적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자신의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한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매일 불안과 공포에 떨던 남자는 마침내 그림자를 피해 도망쳐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먼저 그는 발걸음을 빨리하면 그림자와 멀어져 자신에게서 그림자를 떨쳐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빨리할수록 그림자가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신의 몸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발걸음이 아직 느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더 속도를 빨리해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림자는 더욱 남자의 몸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는 속도를 더 올리면 그림자가 자신의 몸에서 멀어져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자 그는 더욱 빨리 달렸고, 그렇게 해도 그림자가 몸에 붙어 있자 더욱더 속도를 내어 달렸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한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욱 속도를 올려 달리고 또 달리다 마침내 기력이 다한 남자는 결국 숨이 멎어 죽고 말았다. 장자는 자신의 그림자가 무섭고 두려워 피해 달아나다 목숨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만약 그 사람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림자는 저절로 없어졌을 텐데······.”
이 우화는 불안이 두렵고 무서워서 벗어나려고 도망치다가 오히려 불안에 짓눌려 삶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저자는 짚어낸다. 불안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 삶에 항상 붙어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달리다가 목숨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가 불안을 떨쳐 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불안에 질식당해 삶을 망가뜨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자를 두려워한 남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내뱉은 장자의 철학적 메시지, 곧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림자가 없어졌을 것이라는 탄식 역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 그 말은 불안을 경험할 때 도망치려고 하기보다는 도리어 불안 속으로 들어가라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불안 속으로 들어가면 불안이 삶을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힘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한다. 하나는 불안을 삶의 그림자 즉,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불안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자 ‘자신의 삶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을 자기 삶의 그림자로 받아들이고, 불안을 만든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기 삶의 내면을 성찰해 봐야 한다.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깨닫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불안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질식시켜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불안을 터득하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삶에 ‘불안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저자 : 한정주
역사평론가, 고전연구가, 고전·역사연구회 뇌룡재雷龍齋 대표. 196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광주 석산고와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사마천의 ‘사필소세史筆昭世’(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 정신과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철학을 바탕으로 역사와 고전의 현대적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인사동 한 모퉁이에서 역사와 고전을 공부하는 모임 ‘뇌룡재’를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헤드라인 뉴스》에 인문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장의 온도』, 『이덕무를 읽다』, 『율곡 인문학』, 『천자문 인문학』,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 『글쓰기 동서대전』, 『한국사 전쟁의 기술』,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