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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끝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11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소설 작품 『죄의 끝』은 세기말, 인류의 종말을 연상케하는 아포칼립스 세상 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간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말 그대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50년 후 아메리카 대륙이 지리적 무대다. 2173년, 지구에 소행성 나이팅게일이 충돌하며 그 파편들로 전 세계는 초토화되고 만다. 정부는 피해를 받지 않은 지역을 「캔디선」으로 경계를 나누어 관리하고, 영하 40도의 혹한과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인해 캔디선 바깥의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된다. 결국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을 감행하고, 살기 위해 식인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성한 존재에게 구원받길 원하게 된다. 그렇게 세상을 구원할 식인의 신, 「블랙라이더」 너새니얼 헤일런이 탄생한다. 이 소설은 종말 이후 세계에서 신화가 되는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끔찍한 잉태의 순간에서부터 놀라운 대활약의 나날에 이르기까지 저자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상상력에 감탄을 거듭하며 읽다 보면 어느덧 결말에 이른다.
저자는 〈나오키상〉〈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일본 서점 대상〉〈와타나베 준이치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SF소설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 『류』에서 보여주듯 미래 세계의 역사를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소설 『죄의 끝』 역시 출간 직후 "끔찍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적인 정취를 잃지 않은 따뜻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제11회 〈중앙공론문예상〉을 수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인용되는 점도 흥미롭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을 성경 이후의 세계로 그리려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민경욱 역자는 「잿빛 황야를 가로지르는 SF 묵시록」이라는 제목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 "종말의 세계에 대만인 아버지와 라오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뉴저지주에 사는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란 네이선 발라드"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쓴 글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전해지는 형식을 취한다. 액자소설 구성 형식이다. 너새니얼 헤일런의 일생을 취재하는 과정을 논픽션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신약성경의 구원자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독자에게는 이해된다. 인류 멸망 이후 캔디선 내부에서 부흥하게 된 백성서파 교회는 혼란한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구세계의 범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킬러 「화이트라이더」를 캔디선 바깥으로 파견한다. 백성서파 교회의 네이선 발라드는, 살해 명단에 오른 너새니얼 헤일런을 화이트라이더와 함께 뒤쫓는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될수록, 캔디선 안에서는 끔찍한 살해범이라 알려진 너새니얼이 캔디선 바깥에서는 인류의 구원자로 칭송받는 이유를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관한 생각이 점차 바뀌게 된다. 과연 너새니얼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러 지상에 도래한 ‘신의 사자’일까? 아니면 괴이한 논리를 펼치며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살인범’일까?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를 죽인 냉혹한 존속 살인범이 중남부 일대에서 구세주로 널리 숭배되었다."(p.11) 이 살인범은 죽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그가 베푼 수많은 기적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어 500명의 배를 채웠다. 홀로 백성서파의 킬러들, 즉 화이트라이더를 차례로 처치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적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병자가 치유되었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었다. 등등. 예수가 로마 제국 초기 세상에 등장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앞서 설명한 대로 소설의 앞부분에 있는 〈서문〉에서 블랙라이더의 전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액자소설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야기의 화자는 화이트라이더 네이선 발라드이고, 소설의 주된 내용은 블랙라이더 너새니얼 헤일런의 활약하는 모습이다. 즉,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구원자로 떠올랐으며 어떤 활약을 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네이선은 책을 출간한다. 책의 〈서문〉은 네이선이 출간간할 때 내용만으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해 책을 쓴 이유를 추가한 부분이다. 2175년 7월 뉴욕에서 책이 출간됐으며 이 책은 인류의 종말 전후의 과정을 저자 네이선 발라드가 취재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담아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서문에 따르면 네이선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18년전 네이선은 18년 전 아내를 잃었다. 백성서파가 의뢰한 임무로 뉴욕을 떠나 있던 13개월 동안 아내 마리앤은 다름 아니라 그 백성서파의 목사에 의해 산 채로 등유를 뒤집어쓰고 불에 타 살해당했다. 교회의 연락을 받은 발라드는 빌 개럿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밤새 얼어붙은 뉴멕시코주의 황야를 달려 뉴욕까지 왔다. 그러나 지진과 눈보라, 이어진 습격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두 달 뒤에야 간신히 뉴욕에 도착하는 바람에 발라드는 아내의 시신을 보지도 못했다.
네이선의 머릿속은 '복수'라는 두 글자로 가득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케네스 모리아는 이미 법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목사였던 그가 어떻게 가련한 여자들에게 독니를 드러냈을까? 네이선은 가톨릭 신자였다면 바닥이 푹 꺼지는 참회실 같은 소도구가 등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짐짓 말한다. 신부가 바닥의 버튼을 누르면 참회실 바닥이 덜컹 열리고 사냥감이 바닥 아래 감금실로 낙하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없었다. 모리아는 어설픈 수작 없이 여자들에게 접근했다. 즉 예배가 끝난 뒤 여성들을 불러내 수면제를 탄 홍차를 마셔 잠들게 한 후, 침대에 묶고 악마 같은 욕망을 채운 것이다. 열두 명의 여성이 그의 독니에 걸렸고 마리앤은 열한 번째 희생자였다. 마지막 피해자가 운 좋게 탈주에 성공한 덕에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책에는 모리아가 판사에게 털어놓은 이상 성욕은 말 그대로 엽기적이다. 그는 살아 있는 여성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침대에 묶인 여성들에게 불을 붙여 불덩이가 되어가는 육체를 바라보며 자위를 했다. 불길에 의해 정화된 여성들을 '신의 디저트'라고 불렀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 백성서파 신자들 손에 죽었는데 성기만 탄화되어 시커멓게 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네이선의 정신은 무너졌다. 격렬한 착란 상태를 거쳐 끝 모를 허무함에 사로잡혔다. 서문에는 네이선 자신의 착란 상태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여러 가지 증상을 보여주며 기술되어 있다. 이때 네이선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약 마리앤이 케네스 모리아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살해된 것이었다면 충격이 덜했을 것 같다고 되뇌인다. 〈뉴욕 타임스〉 기자로 일하는 오랜 친구 잭 매코믹이 그런 네이선을 보다 못해 캔디선 밖을 여행했던 경험을 책으로 써보라고 권유한다. 모든 창작 활동은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다면서.
네이선의 복수심에는 이유가 있다. 구세계의 식인귀 대니 레번워스를 쫓아 1년 이상이나 캔디선(2175년 제롬 캔디가 설정한 전체 길이 900km에 달하는 구호선으로 동부 정부의 병력, 경제력, 인구 지지력을 바탕으로 해당 범위를 산출했다) 밖의 공기를 맡은 탓인지, 자신의 안에는 굶주림을 견디기 위한 희생은 우주의 커다란 진리의 일부로 자라있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친 목사의 자아와 성욕을 채우기 위한 죽음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부조리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네이선은 얼이 나간 상태로 10여 년을 지냈다.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채 심야를 배회하고, 싸움질에, 운 좋게 술이 생기면 있는 대로 다 마셔버렸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날들이었다.
즉각 잭의 조언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에마 도슨과 만남 이후로 네이선은 잭의 제안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캔디선을 경비하는 주병(州兵)으로, 얼마 전 월경자와의 처절한 전투에서 연인을 잃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단체 상담에 함께 참여했다가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아름다운 여성으로, 발라드의 여행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서로의 마음을 허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발라드는 말한다. 발라드에 따르면 전 아내였던 마리앤과 지금 만난 여성 에마는 정반대 타입이다. 두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발라드의 말도 매우 흥미롭다. "마리앤은 살랑살랑한 봄바람 같은 옷차림을 좋아했는데 에마는 늘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카고 바지에 카키색 밀리터리 재킷을 입었다. 마리앤과의 섹스는 배려로 가득하고 평온했는데 에마는 야생마 같았다."
네이선은 에피소드를 하나 덧붙여 소개한다. 에마와 이스트강 변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놓은 덧에 고양이 한 마리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사경을 헤매는 고양이는 사력을 다해 오히려 위협적인 행동을 취했다. 뒷다리는 이미 시커멓게 괴사했고 허리까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에마는 조용히 고양이를 내려보다가 느닷없이 품에서 글록을 꺼내 고양이의 머리를 쐈다. 네이선은 이미 자신이 겪은 캔디선 밖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인육을 먹었다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만큼 생각이 바뀌어 있다.
네이선은 캔디선 내부에서 아사와 동사의 걱정 없이, 선악을 쉽게 재단하며 살아왔다. 네이선은 일개 범죄자에 불과했던 너새니얼이 어떻게 바깥 세계의 구원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칭송받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따라간다. 네이선은 처음으로 자신을 두르고 있던 알을 깨고 나와 캔디선 바깥의 현실을 똑똑히 목격한다. 동시에 악한 범죄자를 처단하는 일이 ‘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신념은 뿌리째 흔들린다.
이 책 『죄의 끝』은 멸망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주인공이 아닌, 한 발짝 떨어져 그들을 관찰하는 인물을 화자로 설정해 가상의 청자와의 간극을 극단적으로 좁혀 독자로 하여금 네이선에게 깊이 이입하게 한다. 네이선은 다른 어떤 것보다 생존이 중요해진 세상에서, 극한에 몰린 인류가 어떻게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냈는지 그 역사의 필연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투명하고 이성적인 시선은, 독자를 『죄의 끝』의 세상으로 깊이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작중 네이선의 고민은 곧 현재를 사는 우리의 고민과 같다.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는 과연 불변의 가치인가?’, ‘선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하나의 물음을 낳는다. 대체 우리는 이 혼란한 세상에서 어떤 가치를 믿으며 살아가야 할까? 이 작품을 읽고 독자는 캔디선 밖의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과정에서 인류 문명이 선한 가치관과 희망의 세계관을 갖고 제대로 발전해 왔는가를 묻는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소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한 이들에게 너새니얼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을 먹었으면 두 사람을 구하라.” 최소한의 인간성을 저버린 채 식인을 한 이들은 너새니얼의 이 한마디에 구원받게 된다. 자신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아픈 사람을 치료하거나 아사하는 이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붕괴한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마을을 건립한 너새니얼은 또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되었어도 우리는 그냥 우리로 있을 수밖에 없어.” 엉망이 된 세계에서 ‘구원과 희망’은 대단치 않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 피어난 괴롭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면, 구원의 불씨는 곧 거대한 희망의 불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다만 올바른 방향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는 어려울 뿐이다.
저자 : 히가시야마 아키라(ひがしやま あきら, 東山 彰良, 본명:王 震緖)
1968년 대만 태생. 다섯 살까지 타이베이에서 지낸 후 아홉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때부터 후쿠오카 현에 거주하고 있다. 2002년 「터드 온 더 런」으로 제1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에서 은상과 독자상을 수상했고, 2003년 이 작품을 고쳐 쓴 『도망작법』으로 데뷔했다. 이후 2009년 『길가』가 제11회 오야부 하루히코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블랙 라이더』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14년’ 3위와 제5회 ‘AXN 미스터리 싸우는 베스트 텐’ 1위를 동시에 차지하며 일본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2015년 『류流』로 “20년만에 한 번 나올 만한 걸작”이라는 최고의 호평와 함께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하며 “지금 일본에서 가장 세계에 근접한 작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 밖에, 2016년에 『죄의 끝』으로 제11회 중앙공론문예상, 2017~2018년에 거쳐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으로 오다사쿠노스케상, 요미우리문학상, 와타나베준이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에도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역자 : 민경욱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관련 회사에 근무하며 1999년부터 일본문화포털 ‘일본으로 가는 길’을 운영했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문번역가의 길을 걷고 있다. 또 일본 관련 블로그 ‘분카무라(www.tojapan.co.kr)’를 운영하며 일본문화 팬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요시다 슈이치의 『거짓말의 거짓말』, 『첫사랑 온천』, 『여자는 두 번 떠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11문자 살인사건』, 『브루투스의 심장』, 『백마산장 살인사건』, 『아름다운 흉기』, 『몽환화』, 『미등록자』, 이케이도 준의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하늘을 나는 타이어』, 이사카 코타로의 『SOS 원숭이』, 『바이, 바이, 블랙버드』, 누마타 마호카루의 『유리고코로』,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야쿠마루 가쿠의 『데스 미션』,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 고바야시 야스미의 『분리된 기억의 세계』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