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으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된 말에 '톨레랑스'가 있다. 나 역시 우리 사회의 폐쇄성과 지나친 민족주의적 성향에 자괴감을 느끼며 프랑스적 관용에 대해 부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3 언어영역 문제를 풀다 보면 다양한 지문들을 접하게 되는데, 가끔은 사회과학 서적에서 이름 꽤나 익숙한 사람들의 글도 실려 반갑게 읽게 된다. 그리고 드뎌.. 박노자의 글까지 접하게 되었다. 글 내용도 나의 습자지만한 지식을 바로잡아 주는 내용이었던지라, 출제 의도나 문제 풀이와는 무관하게, 이 사람이 누구인지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침 튀겨가며 애들에게 소개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기억할 만한 글이라 여겨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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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똘레랑스와 같은 표현은 나에게 귀에 거슬린다. 17~18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의 주요 문명권 중 유럽에서 톨레랑스가 가장 부족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러했다면 문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재의 유럽이 보여 주는 모습도 톨레랑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데도 흔히 사람들은 ‘톨레랑스’ 하면 유럽을 떠올리는데, 그런 생각은 시정되어야 한다.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톨레랑스가 사회적 가치로 받아들여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파시즘의 광기에 반발하는 측면도 있었고, 노동 계급의 꾸준한 투쟁의 성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945~1973년에 전례 없던 경기 호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호황의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파트너’로 삼아 잉여 가치의 일부분을 나눠 줄 여유도 있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새 노동력이 필요했다. 현재 유럽 연합 총인구의 약 5.5%에 이르는 이슬람계 인구는 그 당시 알제리 출신들의 프랑스 이민, 모로코 출신들의 네델란드 이민, 터키 출신들의 독일 이민 등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독일의 경우 해마다 난민 신청자의 85%에게 체류 허가를 내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난민에게 비교적으로 덜 잔혹한 노르웨이에서마저 80%의 신청자가 퇴짜를 맞는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신화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그 때가 바로 ‘톨레랑스의 황금기’였다.

유럽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오일 쇼크에 빠져 성장률과 이윤율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에 탈산업화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제조업이 동유럽, 중국 등지로 이전되었다. 그에 따라 유럽 지배자들에게 미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동유럽 등지의 ‘문화․인종적으로 동질적’인 노동의 단기적 수입, 이용이 가능해졌다. 이때 실업의 화살은 이슬람 계통 이민자들에게 날아왔다. 유럽 현지 수준의 월급을 요구하고 노조에까지 가입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아프리카, 중동 출신 이민 노동자들을 쓰느니, 차라리 우크라이나 출신 노동자를 6개월 간 들여와 한 달에 700~800달러만 주고 실컷 부려먹은 뒤에 보내 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유럽 자본가들의 계산이었다. 톨레랑스는 겉으로만 존재할 뿐 속으로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이용 가치를 상실해 게토(예전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은 거주 지역)에 몰려 사는 복지망에 의존해서 살게 된 이슬람 계통 빈민 이민자들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붙어 버렸다. 덴마크, 네덜란드 등지의 극우 정권들은 반이슬람 광풍을 이용해 집권했고, 이민자 청년들을 ‘쓰레기 인간’으로 명명해 구설수에 오른 프랑스 정치인도 같은 전략을 구사해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다. 톨레랑스는 빈 명분이 되었고, ‘엥톨레랑스(불관용)’이야말로 정치판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지경이다.

경제적 침체기와 첨예해진 경쟁 시대에, 유럽 지배자들에게 톨레랑스는 허구이다. 그러나 만약 유럽 백인 노동 계급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연대만이 살 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에 나선다면 톨레랑스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 지난 여름에 영국 항공 기내식 납품업체 게이트 구르메가 주로 이민자 여성인 수백 명의 노동자를 전격적으로 정리 해고하자, 주로 백인 남성인 수화물 처리 노동자들이 주동이 되어 들고 일어나 런던 공항이 마비되어 악덕 기업주인 영국 항공사가 4천만 파운드 정도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요즘 특히 영국에서 이와 같은 연대 투쟁의 고무적인 사례들이 발생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톨레랑스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박노자 (출전은 잘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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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7-09-2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블로그에 이 글에 대해서 간략한 논평을 해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