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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단편집을 읽으며 이제야 그녀가 "소설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란 일상에 기반을 두면서도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 되어 "아, 이럴 수도 있겠다" 하면서
독자들을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즐거움도 있어야 하니.
난 이 단편집을 읽는 동안 작가 은희경이 생각났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라든가, 하는 은희경의 단편집들. 은희경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나는 < >을 쓰는 동안 키득키득 웃었다. 즐거운 상상으로 글을 쓰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는 요지의 말.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 실린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들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이제 와 그녀가 변했을까, 너무 젊은 모습이다 생각하였더니, 역시나 이 단편들은 예전에 쓴 것들이다. 역시나 그런 상상력 감상은, 젊은 나이에 싱싱한 것이다 ㅋㅋ
평소의 에쿠니가오리를 좋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이후의 이야기라 해서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한 모양이지만, 나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모습, 작가로서의 면모, 변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내용 또한 흡족했다.
뭐 에쿠니 특유의 슬픔에 침잠한 면면들 따위는 즐겁지 않지만, 그건 그녀의 글이 지닌 매력이니까.
아, 난 이 책을 번역한 이가 평소의 에쿠니 번역자와 다른 것에도 주목했다.
분명 번역자도 작품의 분위기에 한 몫 한다고 본다. 에쿠니의 작품들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소망 출판사에서 다른 번역자를 이용한 이유를 명확히는 모르나, 예전과 다른 분위기의 작품에 다른 번역자가 일을 한 것은 유효했다고 본다. ^^
- "러브 미 텐더" : 어느날 갑자기 엘비스프레슬리에 빠진 아내를 위해 늙은 남편은 밤마다 공중 전화에서 "러브 미 텐더"를 불러주고 사랑을 속삭인다. 그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과 따스함은 차치하고, 그는 "왜?" 그 자신이 아니라 타인으로서 자신의 아내에게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지를 생각할 때 씁쓸하기도 하다. 생각으론 그가 그 자신으로서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그가 아닌 사람이 되었을 때에만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일 수도 있는 거다. 게다가 엘비스에 푹 빠진 아내를 위한 그의 배려. 상상의 선물 ^^
-"선잠" : 고스케 씨가 아내와 별거 중일 때 만난 여자 히나코, 그녀는 6개월간 그와 동거를 하지만, 그의 아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자리를 비켜준다. 갑자기 맞은 이별 아닌 이별에 히나코는 힘겨워 하고 유체이탈을 하여 매일 밤 그를 찾아가 스탠드든, 이불이든 그 무엇이 든 되어 그를 가만히 지켜 본다. 아아 사랑의 속성.
그렇게 힘겨운 나날이 흐르고 어느날 그녀는 "말 없는 전화 걸기"를 한다. 하룻밤새 11번이나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침묵을 들어준다. 사랑하는 이들간에 오가는 무언의 대화와 배려, 오가는 마음. 그날 밤 그녀는 오랫만에 푹 잘 수 있게 된다.
뒷날 고스케 씨는 히나코에게 "그날의 전화가 고마웠노라" 말한다. 비정상적인 관계, 그 속의 사랑, 갑작스런 이별. 고스케 씨도 힘들었고, 그도 그녀를 그리워했음을 알려주는 말.
기본은 불륜이기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소설이니까 남녀간의 사랑의 마음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갔다.
작가는 "자업자득"이란 말로 글 중에 변명도 한다. 그 자업자득이란 말은 독자들이 느낄 불쾌감도 녹여준다.
그리고 고스케와 헤어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는 고등학생 애인과 그의 동생........
-"포물선" : 누군가들의 일상 한 토막을 보는 기분. 난데없고 뜬금 없는. 친절하지도 않은 이야기 전개.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 그러나 소설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불안한 그들의 분위기"
-"재난의 전말" : 후훗. 키우는 고양이가 옮아온 벼룩에 물려 전전긍긍하고, 미쳐버릴 듯한 여자 "교코"에 대한 이야기. 미친 듯이 청소를 하고 침구류를 세탁하고 약을 뿌려도 늘 벼룩에 물리는 여자. 밖에 나가서 용변을 보는 깔끔한 고양이의 습성 때문에 집안에서 볼 일을 보면 벼룩을 옮겨오지 않을 거라 고양이용 실내 변기를 준비하지만, 고양이가 밖에서 볼일을 보도록 훈련 시킨 것은 그녀.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소원은 예전처럼 연인과 키스하고 몸을 감는 것. 하지만 옷 아래 숨긴 벼룩의 흔적 때문에 연인의 손길을 거부 하고, 어느 순간 진지하게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벼룩과 상관 없이. 사람의 사고의 흐름,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이라는 내용.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벼룩에 물린 사람과 물리지 않은 사람. 그녀의 연인은 우유 한 잔 만큼의 위로도 주지 않고, 우유 한 잔처럼 이 선 안으로 넘어오지도 못한다. ㅋㅋ
이 이야기를 잃을 때 강하게 은희경이 생각 나더라.
-"녹신녹신" : 사랑 하는 남자 앞에, 그의 맑은 눈빛 앞에, 한 없는 그의 부드러운 사랑에 늘 녹신녹신한 여자가 그 무한한 사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 바람 피우는 이야기. 다른 남자를 만나며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님을, 필요한 사람임을 깨닫기 위해 다른 남자가 필요하다고. 그녀의 연인도 그녀의 바람을 아는 듯 하지만 묵인한다. 그런 사랑.
자신을 녹신녹신하게 하는 애인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남자들은 그의 존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더욱 그가 그립게 하고, 그녀는 늘 그가 그립고, 그를 너무 사랑하기에 슬프다.
-"밤과 아내와 세제" : 약 한 장 반에 이르는 짧은 이야기. 이혼을 하겠다는 아내 앞에 생필품을 잔뜩 사오는 남편. 그들이 이혼할 수 없는 이유. ㅋㅋ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조금 아는 사람 ㅋㅋ
그래 그런 게 사는 거지. 그런 거기도 해.
-"시미즈 부부" : 낯 모르는 사람들의 장례식에 찾아가는 부부와 그에 동참하는 그녀의 "장례식"에 매료된 이야기. 죽음을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과,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그에 매료된 그녀에겐 일반적 사랑이 마음에 차지 않아라. 나이든 부모나 조부모님이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이 단편을 더욱 이해할 수 있으리라.
-"맨드라미의 빨강과 버드나무의 초록" : 그들의 이야기, 로 정의할 수 있을까? 얽키고 설킨 관계. 조금은 삐걱이지만 다 같이 사이 좋게 지내는 관계.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향쯤 될까? 헤어진 애인의 연인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기묘한 장소" :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왠지 웃기는 이야기. 새해를 앞두고, 마트들이 문을 닫을 것을 대비해 엄청난 양의 물건을 사는 세 모녀의 웃기는 쇼핑 모습. "풍요로운 기분이 드니까", "이 나이가 되면 육류는 당기지 않으니까." 온갖 이유를 대며 청과물이니 고기니 잔뜩 사는 그녀들의 모습이 재미 있다. 일 년에 한 번 이뤄지는 그녀들의 약속, 새해를 앞둔 쇼핑.
쇼핑을 마친 그녀들이 하는 말 " 좋은 하루였지." "좋은 일 년이었어." "내년에도 다시 유쾌하게 살아보자고요."
무사히 일 년을 살아낸 그들의 이 말 앞에 먹먹해지기도 하고.... 그런 거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대로 그녀들의 행동을 보고 말을 듣고, 조금쯤 생각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