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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레산드로 다베니아 지음, 이승수 옮김 / 소소의책 / 2018년 1월
평점 :
요즘 예쁜 표지로 눈을 잡아채는 책들이 많이 나오는 데 비해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표지로 담담히 세상에 나왔다.
사실 책 읽기보다 책 모으기를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나는 책 이미지를 처음 봤을 땐
'출판사가 신경 좀 쓰지' 싶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젊은 소설가 알레산드로 다베니아'라는 작가의 소개가 흥미로웠고
책장을 펼쳤을 땐 소박하고 담담한 표지에 담긴 조용하고 호소력 짙은 이야기에 빠져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시작은 이와 같다.
"지옥은 뭘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난 지옥을 이렇게 정의한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고통."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난 지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난 지옥에 있다.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지옥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는 작가가 겪은 실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빛나는 조상들의 수많은 유적들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나라, 이탈리아.
하지만 관광지를 벗어나 이탈리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남부와 북부의 빈부 격차와 그로 인한 테러,
이 모든 것의 뒤에서 자신들의 이익(돈)을 위해 혼란을 조장하고 키우는 마피아가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마피아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남부 도시 팔레르모의 브란카치오이다.
팔레르모는 항구 도시로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남부 시칠리아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이다.
하지만 팔레르모 지방의 브란카치오 사람들에게 바다는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고
그 감옥에서 군림하며 왕처럼 사람들을 다스리는 마피아는 코사 노스트라다.
팔레르모의 가난한 동네 브란카치오에서 더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미혼모, 빈곤한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옥스퍼드로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 피노 신부의 권유로 잠깐 이곳에 들린
열 일곱 소년 페데리코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나라의 전혀 몰랐던 면을 알게 된다.
브란카치오와 팔레르모를 나누는 철길 건널목을 건너는 순간, 그는 지금껏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
터진 입술과 잃어버린 자전거는 그 세계로의 입장료이다.
페데리코는 교육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거리의 지혜를 배우며 생존해 나가는 아이들을 만난다.
진창 같은 삶 속에 있지만 언젠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겠다는 희망을 가진 아이들.
마피아에 희생된 가족때문에 두려움과 슬픔 속에 빠져있는 아이들.
힘과 권력에 충성하는 댓가로 허락받은 한 줌밖에 안되는 우월감에 거들먹거리는 사람들.
정부와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페데리코는 루치아를 만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이곳에 머물며 사랑의 씨앗을 심겠다'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돈 피노 신부의 말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사랑을 느낀 페데리코는
신부를 도와 마피아가 지배하는 브란카치오의 거리에서 아이들을 빼내기 위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중학교를 만들고, 뛰놀며 아이다운 감성을 키울 수 있는 공원을 만들려 한다.
어두운 현실에 고개를 들고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
꿈을 꿀 수 있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다른 사람과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돈 피노 신부가 브란카치오의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것은 큰 것들이 아니었지만
그런 작은 희망이 어둠의 세계를 붕괴시킬 수 있는 무서운 싹이 될 것을 안 마피아는
신부의 생일에 그를 살해한다.
자신을 죽이러 온 자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담담히 생명을 내어준 돈 피노 신부의 희생으로
브란카치오 마을은 드디어 조만간 소진되어 없어질 어른들의 세상에서부터 벗어나
돈 피노 신부와 그가 심어준 희망을 마음에 품은 아이들이 만들어나갈 시간을 맞이 한다.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거창한 구호나 스쳐가는 위로가 아닌
어둠에서 빛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는 희망을 심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돈 피노 신부는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지옥에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지옥에 머물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자신이 본 아름다움이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임을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한다.
암울하고 어두운 긴 터널 속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나와
마침내 화창한 이탈리아의 햇살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 안는 듯 따뜻해지는 소설을 만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