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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을 만난 세계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정창조 외 지음, 비마이너 기획 / 오월의봄 / 2021년 12월
평점 :
친구들과 함께 읽는 6월의 책으로 읽었다. 여덟 명 장애해방운동 열사의 삶과 죽음을 조망한다. 초반에는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고인들의 인생 면면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가이드에 따라 일부는 쫓아가더라도 나머지는 독자가 채워가며 읽어야 한다. 혹은 “유언”으로밖에 그들을 만나지 못한 내 무지함 때문도 있겠지.
“노점상 운동”, “분신”, “의문사”, “폭력 진압과 시신탈취”와 같이 굵직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사건들이 사실은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한 장애인의 투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책의 내용도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울고 웃고 노래하고 투쟁하는 장애인들의 일상이 우리에게 철저히 비가시화된 영역이었다가 유언을 읽으며 부끄러움과 함께 눈이 밝아지는 것처럼. 함께 읽은 친구들 모두 “노점”이 장애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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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아도, 최옥란 열사에 대해서는 다들 꼭 읽어봤으면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는 최저생계비 현실화 요구 농성을 하며 본인의 “모든 것”인 기초생활수급비를 보건 복지부 장관의 집에 찾아가 반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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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기초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저에게 노점과 수급권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의료비 때문에 수급권을 선택하고 노점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조차도 포기한 저에게 정부는 월 26만원(생계급여)을 지급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시청과 구청 그리고 동사무소를 찾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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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의 유서는 최옥란 열사의 것이다. 고인이 되시기 한 해 전에 썼다고 한다. 생전에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는 아들의 이름을 한번, 두번 적으며 보고싶구나.. 너와 같이 살고 싶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써두고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문제를 제기하며 일년을 더 투쟁했다. 26만원 수급을 받기 위해 최옥란이 포기해야 했던 것을 생각해본다. 아픈 몸을 치료받는 것. 일하러 가는 것.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것.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건강하였다면 대학교 3학년이 될지도 모르고 직장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이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현실을 사랑할 수가 없다. 좌절밖에는 없다.” - 최옥란의 일기 중에서
최옥란 열사 챕터의 제목은 “이르게 온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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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은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 뱉어낸 천둥 같은 말이다. 생生이라는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이 낯선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선 생의 씨줄과 날줄까지 읽어내야 한다. 유언의 속성은 지시성에 있다. ‘복수해달라.’ 그러므로 유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듣는 자’가 있을 때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말’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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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스스로가 주변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고 말을 모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왜 티비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을까. 매체에서 가끔 보이는 시각장애인 주인공은 왜 젊고 예쁜 여배우가 연기하는지, 장애인이 주인공인 몇 안 되는 드라마에서조차 왜 낭만적으로만 재현되는지. 가족구성원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비장애인 주인공의 앞날을 순탄치 않게 만드는 고민거리로만 빈번하게 그려지는지.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생계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장애인을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점, 지하철 시위에 대해 잠시잠깐 들었던 생각도. 열사의 유언은 우리 인생에서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듣는 자’였던 적이 없다.
버틀러는 신간에서 “애도가치의 평등”을 얘기한다. 주류사회에 구속받지 않는 평등한 “애도될 권리”를 구현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이 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유언을 만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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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 그 지속가치와 애도가치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의 이상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자유를 새롭게 정의하는 방향으로, 곧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성을 사회적 자유의 정의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투쟁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투쟁을 위해 모종의 평등주의적 상상계, 곧 모든 살아 있는 유대 관계에 잠재해 있는 파괴성을 감안할 수 있는 상상계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상호의존성이야말로 우리의 사회적 세계이니(아니 우리의 사회적 세계이어야 하니), 폭력으로 망가지는 게 바로 그 상호의존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이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인지가 분명해진다.”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서문
"그러나 사실은 삶만큼이나 죽음에도, 나아가 사후의 삶에도 등급이란 게 있다. 죽음은 불평등으로 채워진 삶의 연장이지, 삶과의 전적인 단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도될 권리‘는 죽은 자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바깥으로 내몰린 이들 중 죽음을 통해 그 존재가 사회적으로 음미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설령 죽어서야 겨우 존엄성을 회복한 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주류 사회‘의 주목은 보통의 애도와 어딘가 결이 다르다." 기획의 말, 정창조
"장애인의 존엄과 삶의 권리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는 가족들에게 모든 돌봄의 짐을 지웠고, 마음에 자책감마저 새겨 넣었다. 그들의 가슴엔 깊고 검은 상처가 패였고, 고통은 오로지 사적인 것이 되어 그 틈 속에 봉인되었다." 박기연 열사, 유서가 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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