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의 근본적인 성격이나 생각이 바뀔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남성의 특성을 역으로 이용해 즐겁게 이득을 보고 살자 마음먹었어요. 이런 탓에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려는 페미니즘 운동의 직접적 주체는 될 수가 없었지요. 마음속 어딘가에 '아무리 올바른 말로 호소해도 남자들의 선택은 변치 않아'라는 싸늘한 관점이 있었습니다.
... 페미니즘 담론과 주장에는 언젠가 남자들이 반드시 바뀔 거라 지나치게 기대하는 면이 있다고 봤고, 그게 저는 짜증도 나고 초조하기도 했습니다."12
"그렇지만 가까이서 봐온 여성들, 제가 당사자로 체험한 여성인 저 자신은 좀 더 강하고 재밌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의 성욕으로 인해 단지 상처만 입었다기보다는 좀 더 현명하게 진화한 것 같았고, 싸울 무기를 갖췄다고 여겼습니다. ... 심지어 피해자라는 말이 방해가 된다고 여겼어요."19
다음 주 여행을 앞두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다 반납하고 희망도서도 받아왔다. <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 우에노 지즈코와 함께 이 책을 쓴 스즈키 스즈미 씨는 1983년생으로, 유흥업소, AV 배우를 거쳐 학위를 따고 신문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작가라고 한다. 흥미로워서 신청했다. 슬쩍 들춰본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 남자들이 바뀌리라 믿지 않는 본인의 냉소적인 태도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의 직접적 주체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 쓰여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난데없이 내가 피해자(라니?!)임을 알게 된 불과 몇 년 전부터 후련함과 억울함 사이, 극단적인 온도를 오가며 페미니즘 책을 조금씩 읽어왔는데 요샌 자주 같은 물음에 봉착한다. 읽다 보면 아, 난 억압의 피해자고 현재진행형임-> 공부해서 떨쳐야 함-> 오 좋아조아쓰.. -> 한줄로 이해되네, 명쾌함! 역시 -> 아니 근데 내가 왜!!! 머릿속에서 아직 나는 팔팔하고, 기득권(?!)인데 ㅋㅋㅋㅋㅋ
이 당사자성을 벗어던질 수는 없는걸까? 공감능력이 하이퍼발달해버려서 요즘 나오는 어떤 (한국) 소설을 읽어도 아프거나 화가 나는데 예전처럼 되는대로 아무 소설 읽으며 생각 없이 낄낄대거나 질질 짜던 때로 돌아갈 순 없나?

한계에서 시작한다는 두 저자의 서간문이 나의 한계에도 가이드가 되어주진 않을지, 일말의 기대 품으며.. 읽기 시작.
하지만 저는 의문이 듭니다. 여성의 삶의 방식이 한정되어 있던 시대에 비해, 적어도 제도적인 면에서는 갖가지 선택지가 준비된 오늘날, 여성은 고민이나 불안이 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요? ... 게다가 성차별적인 사고방식은 명문화되지 않고 교묘하게 숨겨진 형태로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개별 남성에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 P10
"저는 유흥업소 여성, 포르노 배우로 일하면서, 또 대학원을 거쳐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이중 기준을 포착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 이들은 자기 성욕을 채울 여자와 부하 직원으로 고용한 여자를 같은 생물이라고 보는 감각이 희박할 겁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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