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멜로디가 되고 싶다고. 탁 트인 공간을 흘러가는 한 줄기 바람이 되고 싶다고. 그저 그런 것들을 소망한다고.
정체성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부여받은 이름이 아니라 내가 찾을이름이라고. 그러니까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내가 원한 적 없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물정 모르는 여대생‘이었다가 ‘만만한 혼자 사는여자‘였다가 ‘애 딸린 아줌마‘가 되었다. 그런 이름들은 나의 어떤 부분을 제멋대로 확대해 전시하는 폭력적인 돋보기같았다. ‘작가‘나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붙인다고 해서 나의 모든 면이 제대로 조명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가 원한 온전한 정체성이 아니었다. 내가 ‘작가‘로만소개될 때 내 안의 ‘애 딸린 아줌마‘는 다쳤다. 내가 볼품없는 중년 여자‘로 호명될 때 ‘읽고 쓰는 사람‘은 어둠 속에 갇혔다.
시인 오드리 로드는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나는 흑인이고, 흑인 공동체에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억압에 위계란 없다"라는 말로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말했다. "내 침묵은 나를 지켜준 적이 없습니다." -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