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호모 사피엔스 - 700만 년을 달려온 몸과 마음에 새겨진 진화의 설계
배환국 지음 / 소금나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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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라던지, '음악', '지능'이라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분류할 수 있는 그 고유한 기능들은 과연 인간에게 '신'이 어느 날 갑자기 선물한 재능이었을까.



'호모 사피엔스'가 허리를 펴고 두 발 걷기를 시작하면서, 다른 영장류에 비해 더 가늘고 짧은 '털'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 오래, 길게 걸을 수 있게 됐다. 털복숭이 다른 포식자들에 비해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근육은 없지만 강인한 체력을 기반으로 우리는 더 오래 걷고 오래 뛸 수 있게 됐다.



이 '지구력'이라는 장점은 '지능'보다 먼저 우리에게 찾아온 선물이었다. 땀배출이 용이해지면서 인간의 사냥법은 '도구'가 아니라 '체력'이 우선시 됐다. 이어 단백질 공급이 용이해지며 지능은 조금더 크게 발달됐고 이 지능으로 인한 '도구 이용'이 가능하게 됐다.



우리는 동물을 쫒기 위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소리를 질러댔고 피식자들은 인간 무리를 피해 빠르게 도망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고서 체력소진으로 최후을 맞이 하게 된다. 연약한 피부를 밖으로 노출하고 있던 인간이 다른 인간과 협동하며 무리를 지어 다니고 걷고 뛰기 위해 우리는 '심박동'에 맞는 '발걸음'을 가졌다.



오른발 왼발이 심장 박동에 맞게 땅을 딛고 떼면서, 우리는 자연히 '리듬'을 얻게 됐다. 더 빠른 리듬은 더 빠른 발걸음을 만들고, 더 빠른 발걸음은 더 빠른 심박동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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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진화'와 상관없이 고귀하게 신에게서 선물 받았을 법한 '음악'이라는 재능은 그렇게 수십만년 진화의 산물 중 하나다.



우리 인간이 두발로 걷고 서기 시작하면서 '시야'는 몹시 넓어졌다. 인간의 또다른 재능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인간의 높아진 시선은 '포식자'로부터 경계와 '피식자'를 발견하는 두 가지의 장점을 갖게 했다.



넓게 펼쳐진 시야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오래된 진화에서 자연스럽게 얻게 된 우리의 재능이다.


1980년대 환경 심리학자인 카플랜 부부가 제시한 '주의회복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집중력은 배터리처럼 소모된다. 다만 자연환경이 그 집중력을 회복시킨다.



넓은 초원과 수평선, 멀리까지 보이는 자연 경관은 인간에게 단순한 '심미적 아름다움'의 존재를 위한 존재가 아니다. 이는 오랜 시간 생존과 연결된 감각에 가깝다. 먼 곳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포식자를 먼저 발견하고 먹잇감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인간이 닫힌 공간보다 열린공간에서 안정감을 갖도록 진화한 이유다.



인간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걷기'와 '달리기'라는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의 심장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사슴을 쫒던 선조들의 심장이다. 우리 현대인이 소비하는 '당', 끊임없이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 타인과 연결되어 있을 때 느끼는 소속감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결과물에는 '걷기'가 있었다.



어쩌면 인간 문명의 대부분은 단순한 '직립'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불과 그림, 도구를 만들고 문자를 발명했다. 곧은 허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기 좋은 시야각을 만들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더 추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구름과 별의 모양을 보고 날씨와 계절을, 그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로써 우리는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종교와 철학, 과학 역시 걷고 뛰는 과정에서 발생된 진화의 부산물이다.



인간은 이상하게 걷는 동안 생각이 깊어진다. 실제로 칸트, 니체, 아인슈타인 모두가 규칙적으로 걷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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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본래 의자 위에 장시간 고정된 채 형광등 아래에서 모니터만 응시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일정한 리듬으로 몸을 움직이며 주변을 천천히 살피는 과정 속에서 더 안정적인 사고의 확장이 일어난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걷는 동안 인간의 시선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주변 풍경을 스캔한다. 좌우 균형을 잡기 위해 소뇌와 전정기관이 작동한다. 일정한 박자의 움직임은 심박과 호흡을 안정시키고 인간의 사고를 지나치게 한 곳으로 고착되지 않도록 한다.



이동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환경을 만들고 더 많은 피식자의 발견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포식자로부터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안정감도 줬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걷고 뛰는가.


현대인들의 많은 정신적 문제 역시 단순 의지력 부족이 아니라 진화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생활 습관의 반복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근현대 인간의 역사는 고작해야야 수백년 밖에 되지 않는다. 사피엔스 탄생 30만년의 역사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진 일상은 얼마나 진화에서 역행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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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크 딥 - 가짜 생각에서 벗어나 진짜 생각이 시작되는 순간
유디트 베르너 지음, 배명자 옮김 / 페이지2(page2)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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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언제나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생각'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도록 몇몇 계발서는 말하고 있지만 다른 장기와 마찬가지로 '뇌' 역시 꾸준하게 작동되며 작동되지 않는 '뇌'는 죽은 '뇌' 밖에 없다.



'생각'은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은 우리가 먹은 음식이 꾸준하게 '소화'되어 배변으로 나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먹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눈, 코, 피부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흡수하고 그 흡수된 정보는 '뇌'라는 장기로 이동하여 끊임없이 소화되고 배출되어야 한다.



취식된 음식이 장기로 들어와 소화되지 않고 멈춰 있는 것이 위험하듯, 받아들여진 정보 역시 멈춰 있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뇌'라는 기관에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소화하여 '루미네이션(Rumination)되야 한다.


'루미네이션(Rumination)'은 '반추'라는 의미로 소와 같은 가축이 이미 먹은 음식물을 다시 끄집어내어 되새김질 하는 행동이다. 이것은 불필요한 작업이 아니라 해당 동물에게 어쩌면 꼭 필요한 행동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생각중독'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뇌'라는 기관이 하는 일을 멈추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흔히 말하는 SNS 혹은 자기계발서에서 '생각을 멈추세요'라고 말한다.



'과도한 생각은 독이 됩니다. 생각을 멈추세요'



이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다른 현상에 빗대어 보면 알 수 있다.


살을 빼고자 하는 이들에게 '소화 멈추세요.' 라던지, 피곤으로 잠이 쏟아져 오는 사람들에게 '피곤함을 멈추세요', 병을 앓고 있는 이에게 '고열은 위험합니다. 열나는 것을 멈추세요'는 불가능하다. 고로 '생각을 멈추세요'는 '뇌'라는 기관의 매커니즘에 역행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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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과잉은 의지력이 관여하는 분야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뇌'라는 기관이 '끊임없이 작동'할 것이라는 전제를 둔 조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조언은 '생각을 멈추세요'가 아니라. 어차피 작동할 생각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과잉 생각은 '생각'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방향성'의 문제다. 가령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도 누군가는 '발전기'를 돌려 유의미한 생산능력을 만들어내는 반면, 누군가는 그냥 의미없이 '모터'를 돌려 같은 자리를 맴돌게 하여 방전도록 하기도 한다.



어차피 멈춰지지 않는 생각이라면 그 '생각'의 동력을 무한대로 에너지 방출의 형태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고찰'을 통하여 '그 주도권'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이 '유디크 베르너'의 주장이다.



많이 생각하지말고 깊게 생각해라, 사유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피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본질에 대해 '고찰'해라.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한 제대로 된 사용법이다. 팔을 잃거나 다리를 잃어도 '나'라는 '자아'가 유지되지만 '생각'을 잃으면 '자아'가 상실하는 것처럼, '생각'은 곧 '자아'를 의미한다. 즉 우리의 정체성 그 자체인 생각에 '주도권'을 가지고 날카로운 철학적 사유를 발판 삼아 진짜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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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오늘의 젊은 작가 54
박서영 지음 / 민음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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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도입을 몇 번이나 읽다가 말했다. 소설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시작해서 그렇다. 어떤 소설은 대략의 '줄거리'를 알기 때문에 도입의 이해가 쉬운 반면 어떤 소설은 '감'도 잡히지 않는 제목과 표지만 가지고 시작한다.



'다나'는 후자이다.



소설은 난데없이 '자신'의 어머니가 '짐승'이라고 고백하며 시작한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처럼 도발적인 도입이다. 어떤 은유적 표현이 담겨 있을까, 하고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짐승'이라는 표현이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표현 그대로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실제 '짐승'이다. 이 무논리적 도입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정도의 참을성이 필요하다. 소설이 페이지가 거듭되고 좌측으로 넘어간 페이지가 도톰하게 잡히기 시작하면 '오호라'하고 작가가 전개하려고 하던 설정의 가닥이 잡힌다.


그 뒤로 소설은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고 빠르게 흘러간다.



소설은 '소나무 해충'을 옮겨 다니는 '다나'라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다. '다나'는 '해충'을 옮겨 다닌다. '소나무 에이즈'로 알려진 '소나무재선충병'을 옮겨 다니는 존재다. 다나의 흔적은 '살림'과 마을을 파괴한다.


'외지'에서 온 인종(?)에 대해 '짐승'이라는 비유를 하고 그들이 사회의 악을 옮기는 나쁜 것이라 표현한다. 그들은 곧 '재난'이고, '침입자'이며, '짐승', '박멸해야 할 대상'이다. 심지어 그의 핏줄마저 그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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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의 '딸'은 스스로가 '다나'의 '딸'이라는 것을 숨긴다. 그것이 결국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며 그로인해 '보통의 사회구성원'이라는 이름표를 얻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핏줄에 대한 '증오감'을 키워간다.



도서에서 '다나'는 끝까지, '짐승'으로 묘사되지만 생물학에서 교배를 통해 생식이 가능한 자손을 낳을 수 있으려면 '종' 혹은 '목'이 가까워야 한다. 현재 알려진 과학 기준으로 '인간'과 안정적으로 교배해서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동물은 없다.



이는 확인된 사례도 없거니와 현대 생물학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소설' '다나'에서는 외국에서 포획한 '다나'라는 짐승을 대한민국 동물원에서 기르며 시작된다. 인간은 분명 아니라고 하지만 '다나'를 담당하는 '동물원 사육사'와 '다나'와의 사이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나오게 된다.



과연 다나는 '짐승'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표현은 명확하다. 소설에서 '다나'에 대한 언급으로 '짐승'만이 유일하게 사용될 뿐이다. 이에 대해 인류, 인종에 대한 그 어떠한 표현방법도 없다. 단지 짐작만할 뿐이다. '다나'는 과연 '짐승'이었을까.



'다나'와 '사육사'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다나의 과보호 속에서 꽤 심적, 육체적 상처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다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나의 아이에게 했던 꽤 잔인한 폭력은 '외부'에서 '자식'을 보호하고자 했던 잘못된 모성애의 일부라고 굳이 이해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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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다나의 딸은 다나를 벗어나 '사회'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녀는 반인반수임에도 '반쪽'의 피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인간'이 되고자 노력한다. 스스로 자신이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를 매순간 느끼고 어떤 경우에는 질투한다.



사회에 악을 끼치는 '다나'에 대한 증오감도 함께 커진다. '다나'를 직접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점차 커진다. 스스로도 사회가 만들어낸 '증오감'에 철저하게 '세뇌'되며 그 절대악을 처단하기 위해 가장 앞서 나간다. 소설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다나'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근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커져버린 '증오감'은 이제 근거가 없어도 저절로 작동된다.



정치와 사회가 만들어낸 증오의 대상에 완전히 세뇌된 채, 자신의 어머니를 '짐승'으로 취급하며 직접 사냥하러 다니는 '딸'의 이야기에서 자칫 '허무맹랑한 소재'일 수 있는 글이 꽤 현재 우리의 어떤 모습을 닮고 있다는 동질감을 가지게 한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이어지며 읽고 있는 독자로 하여금 다시 묻는다.



'자, 이제 과연 누가 짐승이었는가'



해충을 옮긴다고 믿어졌던 '다나'였는가, 아니면 근거조차 없는 희미한 공포를 증오로 증폭시키고, 그 증오를 정의로 소비하던 우리 사회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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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부터 SKY는 시작됩니다 - 기적의 최상위 초중고 공부 전략서
하지원 지음 / 다산에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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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제목이다. 개인적으로 다른 부모처럼 엄청난 교육열을 올리며 '학원'을 보내거나 아이에게 학습 강요를 하진 않는다. 다만 아이에게 '구몬'이나 '학교숙제'와 같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반드시 하라'라고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아이가 학교에 숙제를 놔두고 온다면, 나는 부모로써 반드시 아이를 학교로 다시 돌려 보낸다. 비가 오더라도, 너무 덥거나 눈이 오더라도 그렇다. 나는 반드시 아이를 다시 학교로 돌려 보낸다. '실수'는 용서할 수 있지만 실수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스스로 져야 한다.

예전 법륜 스님의 강의를 보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상대의 잘못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답이 너무 명쾌했다.

'상대를 용서한다' 그러나 '법적인 절차는 밟는다'

감정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과 '법률'의 대처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상대가 혹은 사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화'를 내며 감정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일단 상황과 상대,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소'할 것은 '고소'하고 '고발'할 것은 '고발'하여 스스로를 감정에게 좀먹지 말라는 것이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이동 중에 아이가 '읽어야 할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외출시 내가 정한 규칙은 몇이 되지 않는데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책'을 챙겨 나가도록 이야기 했다.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책은 챙기라고 이야기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고 아이가 '깜빡'하고 안가지고 왔어, 라고 말한다면 나는 군말 없이 다시 돌아간다.

융통성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약 '우리가 가던 길이 더 멀어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물론 그 비용에 대한 감당은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마 평생 그 뒤로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고 인생 전체로 봤을 때, 비용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와 여행을 떠나도 반드시 그날 해야 할 분량을 면제 받는 일 없이 챙겨가도록 하고 있다. 아이가 '상하이', '경주', '서울' 등 여러 곳을 여행했었지만 그때도 매번 풀어야 할 학습지를 찢어 가방에 챙겨 갔다. 그런 일은 생일, 어린이날, 고열로 인해서 병원을 다녀 온 날에도 예외라는 것은 없다. 예외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계산법에서는 아무리 그 연산이 큰 수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마지막에 곱한 값이 0이면 0이 되버린다. '복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꾸준히'다.

그러면 됐다. 그러면 공부는 잘하면 좋고 못해도 괜찮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잘하면 좋겠다'라는 인식이 있어서 아이가 받아오는 평가지의 점수를 물어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 언제나 열심히 했다고 칭찬한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몹쓸' 믿음이라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전자'가 아닐까,하는 부분이다.

실제 사람은 모두 다르다. 애당초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근육이 더 빨리 붙는 사람이 있고, 같은 음식을 먹어도 더 빨리 찌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이는 흔히 '체질'이나 '성향'에 관련된 이야기일지 모른다. 운동에 대한 '센스'는 길러지는 것도 있지만 타고나는 부분이 있다. '음치'나 '몸치'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인정하면서 '공부'가 타고 나야 한다는 사실은 잘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 대부분이 '학력'에 대한 컨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않을까 싶다.


교육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노력을 통하여 전보다 더 나아지도록 지도하는 것에 있겠다. 다만 거기에 '열등감'이 지나치게 주입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SKY와 의대가 학업 경쟁에서 유일한 승자가 된다면 대한민국의 절대 다수는 패자로 살아가며 그 모든 기회를 '패자부활전'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며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이들에 의해 돌아간다.

'초3'이 되자, 아이의 '학업'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우리 아이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좋은 습관'과 '성실함'이다. 얼마전 다녀가신 구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이들이 '수학'에 관해서는 분명히 '타고난 수학머리'는 없어요, 간혹 타고난 아이들이 있거든요."

그 말이 꽤 섭섭했지만 얼마전 받아온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실제로 우리 아이의 수리력이 대한민국 평균 이하라는 사실을 보고 인정하기로 했다.

'뭐... 그럴 수 있지'

어릴 때부터 나의 컴플렉스가 하나 있다. 어린시절 부모님은 처음 키워보는 아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고 포용적이셨다. 나는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웅변학원, 주산학원 등' 다녀보지 않은 학원이 없었으나, 피아노 학원에서는 '바이엘' 정도를 치고 그만 두었고 태권도 도장에서는 '흰띠'를 마지막으로 했던 것 같다.


약간의 '자기고백적 자책'을 해보자면 나는 무언가 끝까지 성취해 본 경험 없이 성인이 됐다. 그 패배적 학습의 경험을 아이에게 물리고 싶지 않다. 아이가 하는 '구몬'은 앞으로 고3까지 이어질 것이다. 모든 경험은 신중히 선택하되 선택을 했으면 끝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초3부터 SKY'가 중요하기보다 세살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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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식사 혁명 - 먹어서 병을 예방하는 아주 작은 식습관의 힘
하마야 리쿠타 지음, 오시연 옮김, 김민지 감수, 김혜민 감수도움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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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품은 심한 불면증과 신경 과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교감 신경을 자극하여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예민하게 하여 깊은 수면이 힘들도록 할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혈압을 올리는 효과가 있어서 고혈압 환자의 증상을 악화시키고 심하면 두통이 발생하고 얼굴 열감이 있으며 가슴이 답답하게 할 수 있다.

위 점막을 자극하고 공복 섭취 시에는 속쓰림과 메스꺼움, 설사 발생 빈도를 높이며 호르몬 교란을 하여 여성의 경우에는 생리주기를 변화 시키기도 한다.

위의 식품은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홍삼'의 부작용이다.

자, 다음의 식품의 효과를 살펴보자.

이는 노르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을 자극하여 순간 집중력을 높이고 반응 속도를 올리는 효과가 있다. 특히 피로 상태에서는 그 효과가 크게 체감된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시상하부 신경계를 조절하여 포만 신호를 강화시키고 음식 섭취 욕구 자체를 낮추는 방식으로 자용한다. 고로 식욕을 떨어뜨려서 체중감소의 효과가 있다. 또한 기초대사률을 높여 지방 분해를 촉진하고 같은 섭취량에도 체중이 덜 증가 하거나 체지방이 감소하는경향을 만들기도 한다.

위 식품은 위해식품으로 알려진 '담배'의 부작용이다.

어떤 식품 할 것 없이, 과학적 근거는 믿고 싶은 방향을 이미 정해 둔 검색자의 '확증편향'을 보조할 뿐이다. 이는 현대 검색 환경에서 더욱 강화되는데 흔히 알고리즘 추천 구조과 검색어 정보 상위 노출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냥 별 생각없이 오늘 아침에 먹었던 아무런 식사 메뉴를 쓰고 그 뒤에 '효과'라는 키워드만 붙여 넣더라도 그 식단은 꽤 건강 식품으로 바뀐다.

그냥 가볍게 떠오르는 '단무지' 정도를 떠올려봐도 그렇다. 단무지는 '탄수화물 분해'를 돕고, 소화를 도와주며 수분과 전해질 보충에 기여한다고 적혀 있다. 포만감 대비 열량이 낮고 발효 방식으로 인해 장내 환경에 간접적인 영향이 가능하다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몇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여 홍보하면 현대 식품산업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냥 단무지를 꽤 유용한 건강식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것이다.

식품산업은 세계 산업 규모에서 사실상 세계 1위 수중의 규모다. 흔히 '선진국'이라고 하면 '기술집약접 산업'이 가장 큰 산업일 것 같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 선진국들의 주요 산업은 여전히 '의식주' 산업이다.

가령 손톱깎이를 예로 들어보자.

손톱깎이를 하나 만들어 생산하면 대략 5000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해보자. 반면 5000원짜리 치즈버거를 생각해봐라. 우리는 하루 3회 치즈버거를 소비하는데 큰 고민을 하지 않지만 하루 3회 손톱깎이를 구매하는 것은 굉장히 바보 같은 일일 것이다.

여기서 소비의 빈도와 반복성이 발생하는데, 손톱깎이는 한번 사면 몇년을 쓰는 구조이지만 치즈버거는 하루에도 몇번을 소비시킬 수 있다. 여기에 '콜라'라는 소화제를 함께 섭취하면 '콜라'의 당이 빠르게 혈당을 높여 다음 식사의 양을 늘릴 수 있는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무리 기술 집약된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교체주기가 길고 소비 빈도가 낮다면 시장 전체의 크기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커피나 생수, 유제품 등을 판매하는 '네슬레'는 그 매출이 수준이 '소니 그룹'보다 더 크다.



고로 어떤 것을 먹는다는 것은 현대 산업 구조상 단순히 개인의 기호나 성향,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최대 수재들이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각축장의 무대에서 강요되는 경우가 많다.

카페인, 당, 지방은 뇌의 보상 시스템을 자곡하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다양한 문장들이 과학적 사실의 일부를 확대 재생산하게 하고 검색, 추천, 광고 등이 사용자의 관심을 학습시킨다. 즉 사용자는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정렬된 정보만 반복 접하게 된다.

결론은 이렇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식품산업'이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배고픔과 습관, 욕망 이런 것들은 선택이 아니라 반응에 가깝고 현대의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다양한 심리학적 과학적 기술의 집약체다. 그것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강박을 버리고 단순하게 식단을 점검해 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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