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평전 - 경험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사만다 로즈 힐 지음, 전혜란 옮김, 김만권 감수 / 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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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에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거리가 됐는데, 2000년까지 이스라엘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위했던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 피고석에서 실제로 너무 평범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공무원이었으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냈다. 나이가 조금 있는 이라면 초등학교 때 반공 교육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교육중에는 공산당을 그리거나 묘사하는 일이 있는데, 당시 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머리에 뿔달린 괴물이었다. 한반도에서 이념 갈등이 한참이던 1950년 대, 적군을 맞이 했던 학도병들은 적군을 맞이한다. 적군의 머리에는 뿔이 달리지도 않았으며 괴물도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은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의 일생을 훑어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퓰리츠상을 두번이나 받은 월터 립맨(Walter Lippman)은 전체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곳에는 아무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해 '노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이며 이런 정치적 삶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녀가 뉴욕행 기니호에 승선했을 때 나이가 서른 다섯 살 이었다. 서른 다섯인 그녀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역사는 그녀에게 두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게 했고 망명자가 되게 했으며, 게슈타포에 체포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강제수용소를 탈출하기도 했다. 그녀의 복접한 인생사 닯게 그녀의 국적도 다양하게 변화했다. 그녀는 독일제국에서 태어났으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독일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무국적자로 한동안 존재해야 했다. 그 밖에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을 경험했다. 그녀는 개인이 적극적인 사유를 함으로써 의식을 깨치는 사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그녀의 철학의 필요성이 절실한 순간을 보게 된다. 몇 번의 군사독재를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 조차 전체주의로 흘러가곤 했다. 전 국민이 같은 시간이 되면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불러야 했으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신은 비록 고통과 불행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잘 되는 것을 '선'으로 두었다. 영화 변호인을 보면 두 종류의 '애국'이 부딪친다. 영화에서는 '박진우'와 그 친구들이 책을 돌려 보는 모임을 하다가 구속된다. 이에 '차동영 경감'은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국보법' 수사를 진행한다. 반대쪽에서는 송우석 변호사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송우석 변호사'와 '차동영 경감'이 '애국'과 '국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차동영은 독재 군부 정권을 옹호하며 공안정치를 신봉한다. 그는 공무원이며 자신이 따르는 군부 정권을 국가로 규정하고 충성을 다해 애국한다. 학생이 모여 책 읽고 토론한 것이 국보법에 해당되는지 무엇을 보고 판단하며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차동영은 '국가가 판단한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송우석은 '국가가 무엇이냐'고 묻고 여기서 이 둘이 국가를 바라보는 시점이 명확하게 다르다는 점이 나온다.

실제 '악은 평범하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전체주의가 만들어내는 무지성은 사유를 통해 경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몇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대인'이지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특별하게 다른 관점을 갖지 않았다. 스스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도 아니었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전체의 일부로 분류하지 않았다. '애국'이라는 단어는 가장 정치적인 단어다. 군사독재 시기에 '애국'과 독립운동 시기의 '애국'이 전혀 다르며, 애국과 애국의 갈등도 적잖게 역사에서 발생한다. 얼마 전, 우리는 '일본 제품 불매'에 통참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매국'으로 규정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전체주의'는 빼놓을 수 없는 사상이다. 군사정권에는 '3S정책'을 통해 '스크린, 섹스, 스포츠'를 장려했다. 대부분의 독재국가들이 하는 정책인 '우민화 정책'이다. 국민이 우둔해야 소수 정권이 이를 이용하기 쉽다. 대표적으로 과거 '중앙 아시아의 북한'으로 불리던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이다. 현재는 사망했지만 한때는 절대권력자였던 '니야조프'가 그렇다. 그가 했던 우민화 정책은 국민들을 제대로 바보로 만들었다. 그는 남학생들을 징집함으로써 군대 인구를 늘리고 연령을 낮춰 고등학교 2학년에 징병했다. 또한 국민들의 교육년도를 줄이고 박사나 유학생들을 추방했으며 다수의 도서관과 학교를 폐교시켜버렸다.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해야한다. 더 깊은 차원의 생각을 하는 사람을 추방시키거나 탄압해야 한다. 이렇게 다수가 비슷한 생각에 빠지고나면 전체가 평범한 '악'으로써 역사에 남겨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곤 한다. 신문 기사나 뉴스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지, 권력 있는자, 혹은 절대 자수가 하는 말에는 오류가 없는지. 자신의 생각과 철학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보며 '우리'라는 것은 다양한 사고를 하는 '나'의 집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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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 2022년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김준녕 지음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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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을 좋아했다. 태풍처럼 큰 바람이 함께 동반하면 더욱 그랬다. 천둥과 번개 치는 어느 여름 날, 아버지는 굵은 양초를 꺼내셨다. 전기가 나가자. 거실을 진동 시키는 TV소리가 멈췄다. 번쩍거리는 브라운관 불빛도 멈췄다. 저녁 8시가 되면 아버지가 즐겨보시던 뉴스가 입을 다물자. 더이상 내가 사는 세상에는 살인도, 강도도, 주가 폭락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 안을 가득 매운 것은 가벼운 순풍에도 살랑거리는 양초 위 촛불과 흔들 흔들거니는 그림자 뿐이었다. 얇은 샤시 창을 사이에 두고 몰아치는 태풍 뒤에서 나는 적막을 즐겼다. 낙뢰가 내리치고 하늘이 잠깐 밝아지면, 하나.. 둘... 셋... 하고 천지를 흔드는 천둥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무료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심심한 말을 했다. 밖에는 무시무시한 것들이 위협하고 있어도 얇은 창을 사이에두고 조용히 적막을 즐긴다는 것은 무언가 거대한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이 나를 가로막고 보호하고 있다는 안정감이 드는 것은 맑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이 산산조각나던 지랄같은 날씨였다. 하늘이 와장창 깨지고 굵은 빗방울이 옆으로 몰아치면 조용히 창을 닫고 살랑거리는 촛불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찾을 수 없는 안락하고 평온한 마음은 그런 환경의 반전에 극대화 됐다. 늦은 밤 일부러 공포영화를 찾아본다. 공포영화를 보기 적합한 시간은 잠들기 직전이다. 그 무시무사하던 '컨저링'을 나는 무려 5번이나 봤다. 다만 다른 이유로 그 영화를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영화가 공포의 극한이라고 말했지만, 중간정도를 볼 때 쯤, 꼭 골아 떨어지곤 했다. 수차례나 이 영화를 완주하겠다고 다짐했으나 4번을 실패하고 대략 10년이 흘렀지만 '컨저링'이라는 영화는 내게 자장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기억뿐이다. 극한의 공포가 되려 사람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현실과 괴리에 따른 안도 때문이다. 화면 뒷편 이야기는 삶에 실제하지 않는다는 믿음.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 관전자라는 안도. 이것은 공포를 통해 극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감정은 '안정'과 '위기'가 양극으로 나눠진다. '해칠 수 있느냐, 해침을 당하느냐'라는 우주이 설계한 자연법칙에 따라 '먹이사슬'의 중간 지점에서 우린 진화했다. 토끼나 고양이와 함께 있을 때는 안도감을 느끼고 호랑이나 사자와 함께 있을 때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앞서 말한 자연의 매커니즘 상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 내리는 일이 인간에게 평온한 감정을 주는 것은 고양이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며, 자신은 얼마든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현실에서의 안도와 반대로 자신과 관련없는 다른 상황의 관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을 좇던 사나운 개를 따돌려 높은 나무 위로 도망갔을 때, 인간은 안도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 본 '토끼'를 봤을 때와 사뭇 다르다. 위협적인 상대에게서 완전히 격리됐다는 안도감은 어린시절 내가 느꼈던 나쁜 날씨의 촛불 같은 존재였다. 김준녕 작가의 '막 너무에 신이 있다면'은 철저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여타 재난 혹은 SF소설이 서술하는 극한 상황에서 공격적인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진과 테러 등 극단의 상황에서 인간은 되려 침착했고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실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가장 기아 빈곤상태가 심각한 '차드, 라오스, 동티모르'의 살인 발생률은 세계 평균 보다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고프면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설정은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이것은 극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설정이다. 극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변할수록 그것이 실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반대편에서 들기도 한다.

소설은 꽤 염세적이다. 세계관은 충격적일 만큼 폭력적이다. 소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향해 달려간다기 보다, 세계관의 묘사에 더 깊은 신경을 쓴듯 보였다. 잔혹한 공포영화 중, 눈을 가리며 영화관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 스탭롤까지 지켜보는 심리라고 할까. 일단 진행된 소설은 불쾌할 정도로 잔혹하지만 속도감있게 진행된다. 작가가 독자의 멱살을 끌고 '휘리릭'하고 이야기를 끌고 다니듯 몰입감있다. 이런 염세적인 세상을 지켜보다가도 문뜩 문뜩, 따뜻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입을 위해 눈을 떼고, 눈 앞에서 재롱을 떠는 아이에게 눈을 마주친다. 몰아치는 태풍 한 가운데 얇은 샤시 창문을 닫고 촛불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렇게 전개된다. 2026년 극심한 지구온난화로 전세계가 식량위기를 겪는다는 설정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소설의 배경으로 끌고 들어왔다. 여기를 도망하기 위해 유전 조작된 어린이들을 우주선으로 쏘아 우주 끝에 있는 막에 도달시킨다. 다만 그 속에서 펼쳐지는 더 잔혹한 이야기들은 '도망친 곳에 천국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가 못마땅해 도망치는 대부분의 것들에 '신'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더이상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는 소설처럼, 영상을 꺼버리면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 공포영화처럼 눈을 감아버리면 혹은 바쁘게 돌아가는 부정적인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놓아버리면 사실 모든 것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공포를 즐기는 '관찰자'만 남게 되는 법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는 말이 있다. 공포를 즐기는 방법은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존재임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실로 안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망' 없이 현재를 담담히 맞이할 수 있게 한다. 끔찍한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은 되려 삶을 돌이켜보고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로 만든다. 망해버린 책을 덮으며 '오호. 내용 괜찮네!'라고 한마디하며 디스토피아가 주는 안정감을 다시 한 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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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만물관 - 역사를 바꾼 77가지 혁명적 사물들
피에르 싱가라벨루.실뱅 브네르 지음, 김아애 옮김 / 윌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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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유통업에 종사했던 건 행운이었다. '잡화점'은 오만가지 생활용품을 매입, 판매한다. 판매자에게 받은 '인보이스(Invoice: 송장)'를 취급하다보면 현지인들도 모르는 물건이 수두룩했다. 성인이 되고 유학 간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짜릿함은 당시 일하는 재미 중 하나였다. 물건의 원가와 판매 방식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재밌는 것은 '이름'을 아는 것이었다. 당시 매장에서 판매하던 제품에는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로 끈을 넣어 신는 슬리퍼인 '쪼리'가 있었다. 이 쪼리는 '플립플랍(flip-flop)'이라는 슬리퍼인데 해변에서 가볍게 신는다. 알고 있던 영어는 플립플랍(flip-flop)이다. 언젠가 여름이 되었는데, 미국인 관광객이 들어와 플립플랍(flip-flop)을 찾았다. 매장에 아직 진열되기 전이었다. 이후 상품을 들여오고 얼마 뒤, 한 뉴질랜드 백인 남성이 물었다.

"혹시 젠달있나요?(Do you have any Jandals here?)"

"젠달이요? 아니요 없는데요. (Jandal? Sorry, we don't have them.)"

대화는 끝이 나는가 싶었다. 남성은 그럴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매장을 훑어보더니 플립플랍(flip-flop)을 꺼내왔다. 그것을 젠달(Jandal)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이상한 슬리퍼의 유래는 최초 일본에서 시작한다. 실제는 비슷한 신발은 각 문화권마다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플립플랍(flip-flop)은 일본에서 유래했다. '쪼리'라고 부르는 이 신발은 'ぞうり (조우리)'가 어원이다. 일본인들은 발가락 사이에 끈으로 연결 고정시킨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이 신발은 뒷부분을 고정시키지 않으므로 걸어갈 때마다 '또각 또각'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미국인들은 플립플랍(flip-flop)이라는 의성어를 이용해 표현했다. 한국에서 일본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쪽발이' 또한 이 신발에서 유래했다. 한국에는 왼쪽, 오른쪽처럼 갈라진 것을 쪽(side)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일본인들의 의복 문화 중 '신발'의 형태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발이 갈라진 이 형태를 두고 '쪽바리'라고 멸칭했다.

젠달은 Japanese sandal을 일본에서 수입하면서 생겼다. 이는 1957년부터 skellerup이라는 회사가 일본 샌달을 수입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대일밴드'처럼 상표가 굳어져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경우다. 당시 Jandal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겨우 알게 된 사실은 '뉴질랜드 사투리'라는 정도였다. 가볍게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던 상품의 이름에 이런 역사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백인들과 섞여 지낸 기간이 10년이 가깝다보니, 그들의 문화에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인들이 '동양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이다. 실제로 백인들은 '동양인'들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혜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동양인들의 물건에는 알 수 없는 지혜가 숨겨져 있고 그들의 식문화는 굉장히 '웰빙식'이라는 인식이 있다. 실제 '초밥(Sushi)'가 대표적인 경우다. 백인들은 초밥을 먹는 이에 대해 '건강한 식문화'를 유지하는 현대적이고 자기관리가 뛰어난 엘리트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중식이나 일식에서 어설프게 젓가락을 쥐고 먹는 행위를 품격있는 것처럼 했다. 이런 젓가락 문화는 한, 중, 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양의 문화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서양인들의 제법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지만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처럼 보인다. 젓가락도 사실 각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국의 젓가락은 꽤 길고 뭉툭한 편이다. 일본은 짧고 끝이 뾰족하다. 한국은 그 길이가 중간정도 되고 끝도 약간 뭉툭하다. 아마 이것은 한중일 식문화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대게 중국인들은 여럿이 모여 식사를 했다. 이들의 젓가락은 비교적 커다란 식탁에서 먼거리의 음식을 집기에 편리했다. 일본의 경우는 어류를 즐겼고 생선뼈를 바르기 위해 비교적 끝이 뾰족하고 예리한 젓가락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세 국가 중 가장 젓가락 활용이 적은 편이다. 실제로 국이나 밥도 젓가락으로 먹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수저를 이용하여 국과 밥을 뜬다. 중국과 일본의 젓가락은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다. 반명 한국의 젓가락은 금속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김치나 젓갈 등 강한 양념을 먹는 한국인의 특성에 나무 젓가락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합리적이다.

인간은 정착생활을 하며 '사유물품'을 소유했다. 한 번 쓰고 버리던 떠돌이 시절을 벗어나 그 자리에서 같은 물건을 사용해야 하는 정착생활에서는 물건을 조금 더 자신에게 맞게 사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자녀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과 생각을 넘겨 주곤 한다. 부동산이 될 수도 있고 반지나 목걸이 같은 귀중품이 될 수 도 있지만, 이렇게 부모와 자식에게 넘겨주는 상하 교류 뿐만 아니라 옆 마을 혹은 옆 국가에서 넘어오는 좌우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졌겠다. 상하 좌우로 자신의 물건을 넘기고 받으며 점차 그것의 활용을 자신에게 맞게 바꾼다. 마치 '맥도날드'의 '불고기버거'처럼 어느 순간, 상대의 것과 내것이 적절히 융합하면 그것은 또다른 정체성이 된다. 가장 그 시대와 그 지역의 색깔에 적합한 것들이 남고 전달되다보면 거기에는 역사와 흔적, 이야기가 남는다. 역사를 배우는 방식은 다양한다. 전쟁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경제를 통해 배우기도 하며 대게 정치를 통해 배운다. 다만 정치는 그 시대를 온전하게 담아내기 적합하지 못하다. 현대 정치에 못마땅한 현대인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런 다수가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소수보다 훨씬 많다. 다수의 역사는 이처럼 정치, 경제의 거시적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물건처럼 사소하지만 다수가 쓰고 남긴 흔적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모든 것은 사실 연결되어 있다.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도 따지고보면 모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역사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과정도 역사와 이야기를 즐기는 하나의 포인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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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크럼볼츠.라이언 바비노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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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에서 6이 나올 확률은 16.7%다. 확률이 극히 적다. 이 확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주사위의 6면을 3면으로 만들거나 숫자를 모두 6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다만 그런 변칙적인 방법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가. 주사위를 2번 던진다면 33.4%, 3번 던지면 50%로 올라간다. 고정된 확률이 아니라 도전 횟수를 올릴수록 100%에 수렴한다. 즉 게임의 룰을 그대로 두고 도전 횟수만 늘리면 성공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실패라는 것은 다음 도전 시, 성공 확률이 2배 가까이 올라갔음을 의미하는 신호다. 실패를 두려워 한다는 것은 '도전'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고 앞서말한 16.7%의 확률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미다. 실패는 다음 도전 확률이 높아졌음을 알리는 신호다. 최대한 빨리 시작하고 실패하며 빈번히 도전해야 한다. 우리가 당면하는 대부분의 목적은 성공률이 낮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예측력을 자부한다. 이는 당연하다. 모든 상황은 부정적으로 예측할 때, 맞아 떨어질 확률이 높다. 우스께소리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예측할수록 우리의 예감은 맞을 확률이 높다. 누군가의 도전에 섣불리 예측하지 말라는 이유는 이와 같다. 누군가의 도전에 부정적인 예측을 하면 할수록 당신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다. 다만 생각해보면 '예측'이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미리 결과를 때려 맞췄다는 희열 말고는 그것이 주는 인생의 어떤 장점도 없다. 야구 선수가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홈런일 리 없다'라고 예측할수록 예측력은 높아진다. 다만 본질은 '미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어떤 도전을 할 때, 성공률이 극히 적음을 빨리 인정해야한다. 도전을 예측하는 이들에게 "나도 알아."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도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공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성공이 주는 달콤함 때문이다. 어떤 도전을 하더라도 실패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다.

누군가는 이를 긍정적인 마인드라고 말한다. 실패하더라도 심리적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1회 도전에 실패한다면 가차없이 포기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하하. 그럴 줄 알았지!"

성공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하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실패를 당연하게 생각할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이순신 장군은 이처럼 말했다.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자신있게 예측한 것과 결과는 언제나 반대로 진행된다. 그렇다.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어떤 일에든 기대치를 지나치게 낮춰야 한다. 인간은 기계와 다르다. 어떤 도전 뒤에 내려지는 성과에 심리적 데미지를 입는다. 자신의 기대치가 높다면 그것을 이루지 못할 때, 실망감을 갖는다. 실망은 사전적 의미로 희망을 잃어버렸음을 말한다. 이는 원하는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마음이다. 인간이 실패 뒤에 갖는 '실망'이라는 감정이 희망을 잃어 버렸을 때, 갖는 감정이라지만, 역설적으로 실패 뒤에는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실패할 확률'이 사라진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실패를 하면 할수록 성공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유튜브에 새제품의 리뷰를 몇 차례 업로드한 적 있다. 언박싱 영상들이다. 누군가 내 언박싱 영상을 보며 말했다.

"지금 막 구매한 새제품인데 너무 막 다루시네요."

그렇다. 나는 새제품일수록 막다룬다. 얼마 전, 출고를 오래 기다렸던 '전기차'가 나왔을 때, 출고하자마자 흙 묻은 '감귤 컨테이너'를 실었다. 스마트폰은 액정필름을 떼어버린다. 그밖에 값비싼 카메라나 전자기기, 소지품 등. 그 첫인상을 '막' 이용해 버린다. 이 철학은 사실, 학창시절 갖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학기를 새로 시작하면 접힌 곳 없는 반짝 반짝한 교과서를 받는다. 아버지는 반들거리는 흰 달력으로 교과서가 때묻지 않게 잘 싸주셨다. 그것을 소중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이유가 그것 때문인지, 어린시절부터 새로운 것을 접하면 더럽혀지지 않게 조심하게 사용했다. 새옷, 새책, 새가방 등. 그러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가령 책이 더러워질까봐 메모도 하지 않고 접거나 펴는 일도 조심스러워졌다. 가방이나 옷이 구겨질까봐 밖으로 나갈 때 잘 착용하지 않게 됐다. 어느날은 스프링 노트를 구매했다. 첫장을 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체 때문에 첫장을 찢었다. 처음처럼. 다시 첫장을 썼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그 장을 찢었다. 처음처럼. 그러다보니 거의 사용하지 않고 깨끗한 것들 투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용감'을 최소화하는 '사용'이 본질일리 없다. 그 뒤로 최대한 첫날 막 써버린다. 제품 박스나 포장지는 가차없이 뜯어버린다. 대상에게 주종관계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내가 주인이야. 내 손 때와 흔적이 묻는걸 더렵혀졌다고 여기지마!"

대상을 그렇게 대하면 물건은 '주종관계'를 확실히 이해하고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주인도 종을 편하게 쓴다. 물건을 모시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본질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실패'와 '성공'에서도 비슷하다. 가장 어설프고 멍청하게 시작한다. 그것이 당연히 실패할 것을 인지하고 도전하며 상대에게 내가 프로답지 못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실패확률 0%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 것보다 분명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성취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구글을 통해 찾은 바이어에게 메일을 보낸 적 있다.

"감귤은 있는데 살사람이 없다."

이런 식이다. 이 아마추어 같은 시작은 어떻게든 진행하게 만들었고 첫 메일을 보낸 주, 주말에 나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소매 마트 본사에서 '수출미팅'을 진행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고, 당연히 실패할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의 수많은 도전도 분명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뭐든 저지르면 시작은 된다. 시작이 되면 수정이 가능하다. 일단 시작하고, 차차 완성해 가면 그만이다. 최근 읽는 책들이 너무 좋다. 아마 다독의 장점일 것이다. 역시 다작이 답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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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 당신의 모든 선택에서 진짜 원하는 것을 얻는 법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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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나 자서전에는 함정이 있다. 판단하는 자가 한 명이라는 사실이다. 쉽게 자서전이 그렇다. 814만 분의 1의 확률이라는 로또를 예로 들어보자.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 분의 1의 확률이지만 1등 당첨자에게 묻는다면, 당첨될 확률은 100%일 것이다. 모두는 814만의 다른 실패자들보다 성공한 1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은 자신이 선택한 '성공 판타지'에 불과하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 정주영 회장에게 성공하는 법을 묻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노하우를 말할 것이다. 노하우는 놀라울 테고 실제로 그들은 그 방법을 통해 100% 성공했다. 그것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 성공한 이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편집적으로 듣는 것은 전체를 간과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사실'보다 '감정' 혹은 '도덕'의 영역에 더 영향을 받는다. 가령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거나 '술보다 독서가 행복을 증진시킨다'거나, '학력과 지능은 유전자와 무관하다'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등이 그렇다. 다만 이것은 다 틀렸다. 실제 이성에게 선택받기 위해서 마음보다 외모가 중요했고, 독서보다 술이 행복을 증진시키며, 학력과 지능은 유전자와 깊은 관련있다. 이것은 데이터가 말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상당수는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불쾌함을 주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불쾌한 감정을 갖는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위해 변해주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데이터'는 '도덕'과 '감정'을 배제한다. 다수의 정보를 취합하고 사실만 말한다.

부모의 학력과 직업, 소득은 자녀의 학력에 영향을 끼칠까. 이 물음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을 원한다. 다만 부모의 능력은 자녀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서울대 재학생 76%의 부모는 월소득이 922만원 이상이었다. 정시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의 78%가 수도권 출신이고 합격생 중 무려 36%가 강남 8학군 지역 학생이었다. 숫자가 말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부모의 영향력'은 무지막지하게 제한적이다. 서로 다른 부모에게 입양된 일란성 쌍둥이를 조사한 결과 이들은 각자 다른 환경과 부모의 영향력 밑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직업과 취향, 소득 등이 거의 같았다. '육아 서적'을 보면 어떻게 자녀를 교육했는지 알리는 방법론이 많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고 실제로는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본성에 영향을 더 끼친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사' 정도다. 부모의 육아방침이나 철학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동네'에 거주하는가다. 실제로 고소득,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데이터는 말한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가항력적 고민에 머리를 싸매고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실제로 아이의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4년제 나온 옆집 아줌마일 가능성이 크다. 그밖에 몸에 벌레가 기어가 듯, 끔찍한 사실들은 숫자로 보여준다. 실제 170cm의 남성이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기 위해선 190cm의 남성보다 연소득이 3억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사다.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아 남성은 고소득인 경우가 많지만 다양한 인종의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없다.

'사실'이라는 것은 '진실'과 다르며 그것에 '가치가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태양은 내가 싫다고 해서 빨리 떨어져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떠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객관적 사실'에 불쾌함을 갖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다수의 정보가 말하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데이터는 편견에서 자유롭다. 흥미로운 결과는 더 있다. 바로 '예술가'와 '작가'에 대한 관점이다. 사람들은 예술가와 작가가 가난하고 불안한 직업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만 의외로 예술가와 작가는 풍요로운 고소득인 경우가 많다. 사실 이들은 다른 조사에 따르면 직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이기도 하다. 물론 조사에 포함되지 않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가 숨어져 있지만 어쨌건 우리의 편견과 다른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부를 얻기 위해 사업과 취업 중 무엇이 맞냐는 질문에는 '사업'이 더 적합하다. 사업 중에서도 지루한 사업이 더 부자가 되기 적합하다. 가령 부동산이나 자동차 판매, 금융투자, 작가와 같은 분야에 종사할수록 부자가 될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업가들은 어린 나이에 창업하여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40대에서 60대 쯤에 창업한 이들이 우량기업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다. '남의 밑에서 일하기 싫다'고 창업하는 이들에 비해 실제로 창업 후 성공한 이들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해가는 편이 많으며 대부분 천재적인 선택보다는 무식할 정도의 다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세스 스티븐슨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다. 전작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데이터 베이스를 남겼다. 사람들은 전작에서 수많은 밑줄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했는데, 이 정보를 바탕으로 다수가 판단한 '자기계발서'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전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이유라고 본다. 여러가지 일이 오고가는 과도기에 너무 적절한 시기에 만난 행운과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두고 두고 읽어 볼 필요가 반드시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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