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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 2022년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김준녕 지음 / 허블 / 2022년 8월
평점 :
비 내리는 날을 좋아했다. 태풍처럼 큰 바람이 함께 동반하면 더욱 그랬다. 천둥과 번개 치는 어느 여름 날, 아버지는 굵은 양초를 꺼내셨다. 전기가 나가자. 거실을 진동 시키는 TV소리가 멈췄다. 번쩍거리는 브라운관 불빛도 멈췄다. 저녁 8시가 되면 아버지가 즐겨보시던 뉴스가 입을 다물자. 더이상 내가 사는 세상에는 살인도, 강도도, 주가 폭락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 안을 가득 매운 것은 가벼운 순풍에도 살랑거리는 양초 위 촛불과 흔들 흔들거니는 그림자 뿐이었다. 얇은 샤시 창을 사이에 두고 몰아치는 태풍 뒤에서 나는 적막을 즐겼다. 낙뢰가 내리치고 하늘이 잠깐 밝아지면, 하나.. 둘... 셋... 하고 천지를 흔드는 천둥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무료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심심한 말을 했다. 밖에는 무시무시한 것들이 위협하고 있어도 얇은 창을 사이에두고 조용히 적막을 즐긴다는 것은 무언가 거대한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이 나를 가로막고 보호하고 있다는 안정감이 드는 것은 맑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이 산산조각나던 지랄같은 날씨였다. 하늘이 와장창 깨지고 굵은 빗방울이 옆으로 몰아치면 조용히 창을 닫고 살랑거리는 촛불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찾을 수 없는 안락하고 평온한 마음은 그런 환경의 반전에 극대화 됐다. 늦은 밤 일부러 공포영화를 찾아본다. 공포영화를 보기 적합한 시간은 잠들기 직전이다. 그 무시무사하던 '컨저링'을 나는 무려 5번이나 봤다. 다만 다른 이유로 그 영화를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영화가 공포의 극한이라고 말했지만, 중간정도를 볼 때 쯤, 꼭 골아 떨어지곤 했다. 수차례나 이 영화를 완주하겠다고 다짐했으나 4번을 실패하고 대략 10년이 흘렀지만 '컨저링'이라는 영화는 내게 자장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기억뿐이다. 극한의 공포가 되려 사람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현실과 괴리에 따른 안도 때문이다. 화면 뒷편 이야기는 삶에 실제하지 않는다는 믿음.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 관전자라는 안도. 이것은 공포를 통해 극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감정은 '안정'과 '위기'가 양극으로 나눠진다. '해칠 수 있느냐, 해침을 당하느냐'라는 우주이 설계한 자연법칙에 따라 '먹이사슬'의 중간 지점에서 우린 진화했다. 토끼나 고양이와 함께 있을 때는 안도감을 느끼고 호랑이나 사자와 함께 있을 때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앞서 말한 자연의 매커니즘 상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 내리는 일이 인간에게 평온한 감정을 주는 것은 고양이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며, 자신은 얼마든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현실에서의 안도와 반대로 자신과 관련없는 다른 상황의 관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을 좇던 사나운 개를 따돌려 높은 나무 위로 도망갔을 때, 인간은 안도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 본 '토끼'를 봤을 때와 사뭇 다르다. 위협적인 상대에게서 완전히 격리됐다는 안도감은 어린시절 내가 느꼈던 나쁜 날씨의 촛불 같은 존재였다. 김준녕 작가의 '막 너무에 신이 있다면'은 철저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여타 재난 혹은 SF소설이 서술하는 극한 상황에서 공격적인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진과 테러 등 극단의 상황에서 인간은 되려 침착했고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실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가장 기아 빈곤상태가 심각한 '차드, 라오스, 동티모르'의 살인 발생률은 세계 평균 보다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고프면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설정은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이것은 극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설정이다. 극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변할수록 그것이 실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반대편에서 들기도 한다.
소설은 꽤 염세적이다. 세계관은 충격적일 만큼 폭력적이다. 소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향해 달려간다기 보다, 세계관의 묘사에 더 깊은 신경을 쓴듯 보였다. 잔혹한 공포영화 중, 눈을 가리며 영화관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 스탭롤까지 지켜보는 심리라고 할까. 일단 진행된 소설은 불쾌할 정도로 잔혹하지만 속도감있게 진행된다. 작가가 독자의 멱살을 끌고 '휘리릭'하고 이야기를 끌고 다니듯 몰입감있다. 이런 염세적인 세상을 지켜보다가도 문뜩 문뜩, 따뜻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입을 위해 눈을 떼고, 눈 앞에서 재롱을 떠는 아이에게 눈을 마주친다. 몰아치는 태풍 한 가운데 얇은 샤시 창문을 닫고 촛불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렇게 전개된다. 2026년 극심한 지구온난화로 전세계가 식량위기를 겪는다는 설정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소설의 배경으로 끌고 들어왔다. 여기를 도망하기 위해 유전 조작된 어린이들을 우주선으로 쏘아 우주 끝에 있는 막에 도달시킨다. 다만 그 속에서 펼쳐지는 더 잔혹한 이야기들은 '도망친 곳에 천국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가 못마땅해 도망치는 대부분의 것들에 '신'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더이상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는 소설처럼, 영상을 꺼버리면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 공포영화처럼 눈을 감아버리면 혹은 바쁘게 돌아가는 부정적인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놓아버리면 사실 모든 것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공포를 즐기는 '관찰자'만 남게 되는 법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는 말이 있다. 공포를 즐기는 방법은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존재임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실로 안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망' 없이 현재를 담담히 맞이할 수 있게 한다. 끔찍한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은 되려 삶을 돌이켜보고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로 만든다. 망해버린 책을 덮으며 '오호. 내용 괜찮네!'라고 한마디하며 디스토피아가 주는 안정감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