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방에 아무나 들이지 마라 - 불편한 사람들을 끊어내는 문단속의 기술
스튜어트 에머리 외 지음, 신봉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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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에 따르면 개인의 행동은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들러는 개인 행동이 주변과 상호 작용하며 만들어진다고 봤다. 즉, 개인은 타인과의 관계, 가족 구조,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진다. 즉 주변을 보면 스스로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변 인물의 평균이다. 다시말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주변이 어떤 인물로 채워져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주변이라는 것은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 거리를 말한다. 즉 나의 머릿속에 채워져 있는 인물, 그 인물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시간이 흐른다고 기억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신경생물학자 제프리 존슨에 따르면 사람은 특정 기억을 떠올리지 못해도, 뇌는 그 기억을 간직한다. 기억은 삭제되지 않고 해체되어 무의식의 일부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기억은 정확한 형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소화기관에 들어간 음식이 음식물 형태로 보관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기억은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 소화된다. 즉, 기억은 기억이 되기도 하고 감정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무의식에 쌓여 있으면 그것은 또다른 행동을 만들어낸다. 그 또다른 행동은 다시 비슷한 상황과 사람을 불러 들인다. 비슷한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만든다. 즉 다시 말해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누군가에 대해 파악해 내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 환경 속에 갇히고 만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억은 들어오는 '문'이 하나이고 나가는 '문'이 없는 방과 닮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들어오는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과 이미 안으로 들어온 이를 관리하는 관리자의 역할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 들어온 기억은 반드시 소화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삼킨 음식이 반드시 소화되는 것과 닮았다. 그것은 반드시 소화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몸속에 들어와 소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가 정한다. 어떤 누군가는 고칼로리 음식을 먹어도 늘씬하고, 어떤 누군가는 아무리 건강한 음식을 먹어도 건강하지 않다. 이는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누군가는 꾸준한 운동을 통해 들어온 음식을 소화한다. 다시 누군가는 그것을 소비하지 않고 축적하여 내장지방으로 변환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음식'을 탓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가 중요하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좋은 것으로 가득채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사람을 알게 된다. 갑자기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튀어나온 정치인을 알게 되기도 하고 인터넷 방송인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강사, 친구 등도 나의 방에 느닺없이 들어온다. 문지기가 그것을 막아낼 여력이 없을 정도다. 이미 받아들여진 그를 우리는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호모 사피엔스 수십 만 년 전, 겪었던 환경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십 만 년 전, 사피엔스는 말 그래도 자연환경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들은 기후가 어떻게 변화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 이는 지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생겨난 배경과 닮았다. 강수량에 따라, 인간의 거주환경은 바귀었다. 강수량이 많을수록 지붕의 처마가 길게 나왔다. 강설량이 높을수록 눈이 쌓이지 않도록 지붕은 뽀족하게 높게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어떤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짓고, 어떤 지역은 물이 부족하여 낙농업에 유리했다. 어떤 지역은 물이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물을 하루에 20리터나 먹는 '돼지'를 먹지 못하게 했고, 어떤 지역은 물이 아주 풍족했기 때문에, 수확량이 늘어서 운반을 도와줄 '소'를 먹지 못하게 했다. 환경은 문화를 만들었다. 이 문화는 다시 '사회'가 됐다. 이제 인간은 '자연환경'이 아니라 '사회환경'에 따르 영향을 받는다. 인간과 환경은 서로 '장군'하면 '멍군'하고 서로 그 변화와 변화를 주고 받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누군가는 조금 더 성공과 성장에 유리하게 바뀌고, 어떤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 '총균쇠'를 보면 인간 문명은 '지리적 위치'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애초에 환경에 따른 변화가 인간 문명 발전 속도를 다르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환경'의 변화도 인간을 크게 다르게 한다. 우리 주변을 어떤 인간으로 채워나가야 하는가.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인의 평균이다. 이 평균은 '물리적 위치'의 영향보다는 '심리적 위치'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나의 아파트 옆 동의 누군가가 아니라, 전화상으로 연락하고 있는 누군가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다면 어떻게 우리의 사회적 환경을 바꿀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유튜브나 블로그를 통해 나의 주변인물을 확장 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채팅이나 커뮤니티도 괜찮다. 다만 주변 인물을 확장시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검증'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검증하고 확인이 필요하다. 어떤 인물이던 그는 한번 들어오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증된 누군가를 신중하게 초대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독서'를 해야 한다. 거기에서 검증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며, 그의 심리를 가장 공감할 수 있다. 고로 최근 읽은 책의 저자가 나의 주변이 된다. 고로 최근 읽은 책은 나의 평균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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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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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소수는 다수를 움직일 방법을 고민했다. 어떻게 더 쉽고 효과적으로 다수를 움직일 것인가. 그것은 고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고심했다. 소수가 다수를 다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도구는 '언어'다. 개중 '문자'이다. '문자'는 소수가 작성하고 '다수'가 이용한다. 말하는 이는 소수고 듣는 이는 다수다. 이런 비대칭은 소수의에 권력의 집중을 만든다. 집중된 권력은 다수를 위한 듯 소수를 위해 작동한다. '대화'는 대면을 원칙으로 한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쌍방으로 의견을 주고 받는다. 다만 문자는 다르다. 문자는 말하는 소수와 듣는 다수가 존재한다. 소통은 없다. 그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책을 읽기보다는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인 주장을 직접적으로 펼치지는 않았다. 다만, 시민의 정치 참여 결정을 독려했다. 그의 토론 방식은 당대 민주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검토하는데 사용했으나 그의 철학 자체가 민주주의 사상과 관련 깊다. 반면 플라톤은 아니다. 플라톤은 '독서'와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결국 이것은 그의 이상향인 '엘레트주의'와 닮았다. 고로 '글'을 다룬다는 것은 '소수'가 권력을 가지고 '다수'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닮았다. 문자는 곧 '권력'을 상징한다.

조선 초기, 대왕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백성들의 계몽을 두려워 했던, 사대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문자가 어려워 소수에게 그 권력이 집중되기를 바랬다. 조선과 같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일수록, 권력의 집중은 필수적이다. 당시 시기에 따르면 한글은 권력의 분산을 의미하며 그것은 소수의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다루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지 오웰의 '1984'에는 '신어'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그 비중은 적지 않다. '신어'는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대체가능한 어휘만을 남긴다. 그것은 우민화를 닮았다. 사람은 어휘만큼 생각할 수 있다. 표현 방법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으로 사상까지 지배할 수 있다. 사용 언어를 제어하는 일은 결국 사람의 사상을 제어하는 일과 닮았다.

독재국가는 대체로 '우민화 정책'을 최우선한다. 이는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 비판적 사고를 못하는 다수는 다루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양날의 검이다. 주입식 교육을 통해 언어를 제어하면 정치는 '역사'를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있다. 생각을 움직일 수도 있다. 실제 역사란 '기록'에 의존한다. 과거부터 '역사'는 굉장히 정치적으로 활용됐다. 기본적인 역사를 아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통합된 하나의 역사를 필수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는 대외적으로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집 시키는 매우 좋은 수단이다. 또한 내부적인 결집의 명분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전혀 상관 없는 이들과 유대감을 갖는다. 다수가 하나처럼 결집하면 다루기 쉽다. 대체로 독재 정권은 역사, 언어, 정치선전을 통해 대중을 상대했다.

현재 창원시 정도의 인구 밖에 되지 않던 포르투칼은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패권국으로 거듭났다. 역사에서 소수가 다수를 장악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중국이 세계 패권을 장악하던 시절도 따지고보면 '여진'과 '몽골'의 지배 시기다. 이들 지배층의 인구는 기껏 해봐야 100만이 되지 않는다. 1616년 부터 1912년까지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인구 50만에 불과한 여진은 1억 5천명의 한족을 통치했다. 한족은 1115년에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청이 멸할 때까지인 737년 간, 248년을 제외하면 585년 동안 이민족 통치를 받는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이 역사적 현상은 고대, 중세, 근대, 심지어 현대에서도 있다. 고로 인간의 기술은 단순히 땅을 달리고 하늘 위를 날아가는 곳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다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대표적인 기술이라면 '선동'과 '세뇌'를 들 수 있다. 선동과 세뇌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사고 방식을 앗아간다. 전세계 인구의 0.2%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대인은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3% 배출했다. 특히 노벨경제학상의 65%가 유대인이다. 심지어 미국 아이비리그 교수의 30%도 유대인이며, 미국 대법관의 30% 또한 유대인이다. 이처럼 유대인이 현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게 된 이유에는 '문자'를 다루는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유대인은 꽤 종교적인 민족이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율법과 성경 교육을 중요시 했다. '조지프 헨릭'의 저서 '위어드'에 따르면 고대부터 중세까지 유대인의 문맹률은 매우 낮았다. 이유는 그들의 교육 체계 때문이다. 유대 사회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유는 성경의 구약에 대한 교육이 이유가 됐다. 유대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문자를 다뤘다. 비록 그것의 목적이 신앙심 강화와 윤리 규범을 정립하는 목적일 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크게 기어했다. 그들은 율법 교육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글과 알파벳 습득을 하도록 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교육을 받는다. 그들의 등장인물과 다양한 서사가 있는 '성경 구약'은 그들의 문해력을 크게 향상 시켰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은 과거부터 다루기 힘든 민족이었다. 그들은 통제에서 항상 벗어나길 원했다. 이런 모습은 나쁘게 보기에는 '통제불능'이지만 좋게 보기에 따라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이 우둔하면 통제하기 쉽다. 통제하기 쉽다는 것은 이용하기 쉽다는 의미다. 그래야 소수가 그들을 다루기 수월하다. 과거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은 북한과 더불어 대표적인 독재국가였다. 당시 절대 권력자였던 '니야조프'는 국민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남학생을 일찍부터 징집하여 군대 인구를 늘렸다. 그 연령은 꽤 낮아져서 고등학교 2학년 부터 징병이 시작됐다. 이것은 교육의 기회를 앗아간다. 이어 그는 박사와 유학생을 추방하고 도서관과 학교를 폐쇄시켰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통치'의 기본이다. 신문 기사나 뉴스 기사를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했고, 더 쉽고 빠르고 간단한 표어로 사람들은 선동하고 세뇌해야 했다.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 내부 결집을 이용해야 했고 그런 이유로 외부에 적을 만들었다. 외부의 적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는 때로는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도 있지만,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결집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고 정치 행동을 하게 되면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깨달아보자. 지배를 당할 것인가. 혹은 지배를 할 것인가. 설령 지배하지 않더라도 '자유'는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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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크리스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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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나쁘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편견은 나쁘지 않다. 편견은 쉽게 말해 일반화다. 다양한 정보를 인식하기 쉽도록 패턴화하는 일이다. 일반화를 위해선 수많은 빅데이터가 필요하다. 빅데이터를 이용해 '직관력'이 길러지면 이것을 '일반화'라 한다. 편견은 사전적 용어로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한다. 그런데 원래 모든 것은 어느쪽으로나 치우쳐져 있다.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은 전혀 똑같지 않다. 고양이와 개는 전혀 똑같지 않고 시금치와 코끼리도 전혀 똑같지 않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부분의 대상은 이처럼 각각의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이것이 모두 다르지 않다는 것은 유토피아적 상상력일 뿐이다.

얼마전 디즈니에서 개봉한 '인어공주'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인어공주가 왜 흑인이어 하는가에 대한 말이다. 얼핏 이 말은 듣기 좋다. 그렇다면 왜 인어공주는 '여자'여야만 하는가, 왜 머리가 아니라 '다리'가 인어'여야 하는가. 왜 물밖이 아니라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모두 편견으로 한다면 서른 일곱의 수염난 동아시아 청년이 인어 공주가 될 수도 있다.

PC사상은 '정치적 올바름'을 뜻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 민족, 언어, 종교, 성별 등에 의한 편견을 없애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모든 인종은 똑같고, 언어, 종교, 성별은 모두 같은가. 그렇지 않다. 모든 인종은 다르고, 민족도 다르다. 언어도 다르고 종교, 성도 모두 다르다. 다른 것을 보고도 다르다 말하지 않고 같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이라는 사상을 지키고자, 거의 모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낳는다. 쉽게 말해 스스로 다름을 보고도 같다 말하는 것이 그렇다. 이들은 또다른 의미의 차별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혐오주의에서 벗어나는 가장 기본된 자세다. 전혀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또다른 혐오를 낳는다. PC주의 사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다름을 다르다고 말하는 이에게 '선민의식'을 갖는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남들에게 보이려 한다. 이 도덕적 우월함은 필연적인 '모순'을 만들어낸다. 왜냐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은 똑같다'. 그렇다면 성별과 인종, 종교가 모두 똑같은 것 처럼, PC주의와 반PC주의도 같아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존중은 나온다. 인어는 여자여야 한다. 물속에 살아야 하고 백인이어야 한다. 머리보다는 다리가 인어여야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나 생각은 가끔 편견을 깰 때 발생한다. 지난 10년 남반구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산타가 눈오는 날,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온다는 편견이 깨졌다. 내가 살던 곳에서 산타는 언제나 반팔로 나왔다. 거기까지가 신선함의 영역이다. 여기서 정도를 벗어나 한 발 더 나아가게 되면, '산타'는 괴상망측해진다. '산타'는 왜 백인이어야 하는가. 피부를 검은색으로 바꿔보자. 산타는 '왜' 남자여야 하는가. 여자로 바꿔보자. 왜 노인이여야 하는가. 3살배기 아이로 바꿔보자. 왜 빨간 옷을 입어야 하는가. 파란색으로 바꿔보자. 왜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사슴'으로 바꿔보자. 왜 선물을 주어야 하는가. 훔치는 쪽으로 바꿔보자. 이제 편견을 완전히 배제한 순수무결한 산타가 완성됐다. 산타는 파란색 옷을 입은 3살 된 검은 피부의 암컷 사슴이 됐다. 이제 반대의 메커니즘으로 루돌프를 '빨간 옷을 입은 백인 노인으로 바꿔보자'. 이런 괴상망측함은 정도를 지날수록 '언어 와해'일 뿐이다.

편견은 나쁘다. 다만, 정도가 지나친 편견이 나쁘다. 우리 사는 세상은 일반론적이다. 우리의 뇌는 다양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인식하기 위해 '패턴화' 작업을 한다. 패턴화 작업은 새로운 정보를 처음부터 학습하지 않고 이전 경험을 활용하여 빠르게 판단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고로 경제적이다. 이것은 효율적으로 생각하고 두뇌자원을 활용하도록 돕는다.

이런 일반화는 새로운 상황이나 정보에 대해 빠른 적응력을 키웠다. 이에 대한 생존력을 향상시켜켰다. 수 세기 전,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왔던 백인을 마주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총, 균, 쇠'에 의해 멸종을 당했다. 완전히 새로운 이들과 마주하는 것은 일정의 위협이기도 하다.

일반화는 추상적인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 시킨다. 이것은 문제를 이해하고 관련성을 파악하는 속도를 높인다. 패턴을 인식하여 일반화하는 작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습'의 기본이다. 신경학적 연구에 따르면 뉴런 간의 연결성과 신경 회로 형성은 '반복'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복에 의한 패턴 학습은 '신경 회로'를 넓혀 학습능력을 크게 만든다.

2000년이 넘은 공자의 말은 지금도 널리 사용된다. 2000년이 넘은 구닥다리 격언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아직 사회 저변에 공자에 대한 신뢰는 남아 있다. 공자는 이처럼 '정의'하지 않는 사회를 경멸했다. 그는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질서가 무너진 사회를 경험했다. 그가 말하길 '군군신신부부자자'라고 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이것이 모두 편견이면 임금은 신하답고, 신하는 임금다우며, 아들다운 아버지, 아버지 같은 아들이 나온다. 그것은 얼핏 신세계지만, 결국은 분열이다. 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세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모든 것은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질서가 사라지면 사회는 분열된다. '정치적 올바름'은 결국 '올바름'을 말하는 듯 하지만, 분열의 '형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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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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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인간에게 쏟아진 정보의 양은 대략 85쪽 분량의 신문을 매일 40종 읽는 것과 같았다. 이 정보는 텔레비전, 라디오, 독서를 모두 합친 양이다. 다만 2007년에는 그 양이 3배로 늘었다. 대략 174종의 신문을 읽는 정도의 정보량이다. 이때가 스마트폰이 출현한 시기니, 그 뒤로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것이다. 정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도'가 떨어짐을 의미한다. 처리할 정보가 많아 대충 훑고 빠르게 넘긴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붐비는 슈퍼마켓을 뛰어다니며 필요하다 싶은 물건을 마구자비로 계산대 위에 올리는 바와 같다. 정보가 많으니 진득하니 살펴 볼 여유가 없다. 영양분은 어떤지, 가격은 어떤지, 경쟁사와의 차이는 어떤지에 대해 살펴 볼 여유는 없다. 합리적인 소비를 하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정보의 과부하에 의해 몰입을 상실한다. 사람들은 점차 긴글을 싫어하고 필요한 정보만 선별적으로 찾아낸다. 이런 훑기식 읽기를 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정보 선별 과정은 습관이 된다. 인간의 뇌는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스스로 자체 변형을 한다.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고 부르는데, 자주 사용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뇌의 구조가 재배치된다.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빠르게 캐치하기 위해서는 '망상활성계'라는 두뇌 필터 시스템이 가동된다. 고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확증편향'과 '정보의 비대칭'을 야기하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SNS는 이를 체계화하여 아예 알고리즘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고로 사용자가 본인의 관심사에 맞춰 필터링 된 정보 속에 갇히기 된다. 이를 '필터버블'이라고 한다. 흔히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렇다. 생각이 편협해지고 깊은 사고를 할 수 없는 뇌의 구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 등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SNS를 비롯한 IT기업들은 사용자로부터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수익 구조를 살펴보면 대체로 '광고주'로부터 수익이 발생한다. 광고 수익은 그들의 '체류시간'과 '클릭률'을 통해 계산된다. 고로 대체로 많은 IT기업들은 사용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체류시간을 늘리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한다. 이처럼 주의력을 끌려는 노력들이 많아지면 당연히 주의는 산만해진다. 그렇다고 이 IT기업들이 '사용자'의 '정신건강'까지 유념하진 않는다. 이들에게 직접적인 수익을 발생시키는 쪽은 '광고주' 쪽이지 '사용자' 쪽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용자는 IT기업의 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한다. 마치 그것이 공공재인 것 처럼 당연시 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광고를 이용해 수익을 창출한 기업들은 현재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 했다. 앞서 말한 IT공룡 기업들은 사용자의 '주의력'을 연료로 삼아, 성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주의를 끌어당겨 붙잡아두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자극을 주기 때문에 컨텐츠의 속도는 빠르고 분량은 짧다. 이 짧은 컨텐츠에는 많은 정보를 담을 수는 있지만, 생각할 여유는 주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한 주제에 대해 꽤 긴 시간의 논리 흐름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인 생각과 비교를 할 수도 있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고,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다른 생각에 빠질 때도 있다. 이렇게 정보와 함께 섞여 새로운 생각을 탄생시키는 전체의 과정을 '독서'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의 주의력을 빼앗을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그들로 부터 체류시간을 얻어 낼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면 수익성은 올라간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현대인의 대부분은 주의력을 상실했다. 우리는 그렇게 집중력을 도둑 맞는다. 가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실감하지 못 할 수도 있다. 또한 아주 천천히 오랜 기간 진행된 일이기에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마치 끊은 물의 개구리처럼 말이다. 피부에 와닿을 수 있도록 이 상황을 현실로 옮겨보자. 사회는 마치 '조지오웰' 소설의 '빅브라더'처럼 모든 상황을 감시한다.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정보를 취합한다. 이후 생각마저 읽어 낸다.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보다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의를 끌어 당긴다. 관심있게 지켜보던 상품을 매순간 옆에 진열해 두며, 싸게 판매한다고 구슬린다. 이들의 집요함은 밥 먹는 동안에도, 화장실에서도, 혼자 있을 때나 누구와 함께 있을 때도 여지 없다.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서 주의를 끌어 당긴다. 이들의 영업실력은 수준급이기에, 이들이 만들어내는 '영업소득'은 이들을 세계적인 마케팅 회사로 만들었다.

'주의를 끌어서, 오래 체류하게 하라, 그것이 돈이다.'

그들의 사업구조에 따르면 우리는 고객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그저 주의력만 사용되고 버려지는 이용자일 뿐이다. 고로 우리는 스스로 잠을 줄이면서 '정보'에 노출되고, '대충' 먹으면서 '정보에 노출된다. 그들에게 체류시간이라는 연료를 채워주느라 주의력을 모두 소진해 버린다.

인간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사용해야 할 집중력을 그들에게 써버리고 빈껍데기가 되어 우울증이나 주의력결핍장애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주의력 도둑질'에 의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이런 장애를 벗어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느려지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을 통해 몰입의 경험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집중력을 지키고 온전하게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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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고 이야기 - 공교육의 비밀 병기
임혜림 외 지음 / 포르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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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고등학교는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비평준화 일반고다. 이 학교는 교육환경이나 시설은 자사고와 비슷하다. 다만 일반고이기 때문에 기숙사비나 활동비를 제외하면 납부금이 적다. 설립 초기에는 군인 가족들을 위한 학교였다. 직업군인 특성상 근무지 이동이 잦은 편이라, 군인 자녀들은 전학을 자주 다녀야 했다. 이들의 정착을 위해 한민고는 설립됐고 기숙사도 운영한다. 한민고의 특징이라면 '철저한 공교육 중심'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하는 힘에 대해 굉장히 강조한다. 코로나 시기 대부분의 학생들이 많이 상실한 부분이 '자기주도학습'이다. 자기주도학습이란 본인 의사에 따라 선택하고 수행하는 학습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동기부여'가 함께 들어간다. '동기부여'라고 설명했지만, 이는 '행위의 본질'이다. '행위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철학'이라 한다. 고로 스스로 하는 행위에 대해 주체성을 갖고 있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쌍둥이를 기르고 있다. 쌍둥이에게 특별히 명문대 입학을 권고하고 싶진 않다. 살아보니, '명문대 입학'은 별로 중요하진 않아 보인다. 흔히 재벌 총수나 자수성가형 부자들의 학력은 좋다. 삶의 기준을 돈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어떤 분야, 어떤 목적에 달성한 이에게 '부'는 저절로 따라오기도 한다. 어쨌건, 그들을 볼 때, 학력을 통해 그 위치에 올라간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학과와 상관 없는 업종에서도 두드러진 업적을 갖는다. 가령 가수로 성공한 '박진영 프로듀서'는 연세대 지질학과를 나왔다. 요식업에서 성공한 백종원 대표는 연세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왔으며, 셀트리온이라는 제약회사 창업주 '서정진' 회장은 건국대 '산업공학'을 나왔다. 하이브의 '방시혁' 대표는 서울대 인문학과 출신이다. 그밖에 대한민국, 산업 전반에 걸쳐 명문대 출신들이 대다수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학교 이름을 등에 엎고 성공하지 않았다. 그들의 전공은 완전히 다른 분야의 것이며 그것은 대한민국에서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찰스 다윈은 '진화론'하면 떠오르는 인물이지만, 그는 지질학자였다. 빌게이츠는 수학과 법학을 전공했고, 마윈은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학교보다는 '전공'이 중요하다."

그것은 꽤 합리적인 말 같다. 다만 다시 생각해보면,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에 달성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는 모두 명문대를 자퇴했다. 둘 다 전공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 성공했다. 그들이 쌓은 '자산'의 가치를 차치하고 그들이 목적은 분명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알았다.

여기서 목적이란 '주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를 보면 그 가장 아래, '생리적 욕구'가 있다. 그 위로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는 많이 없다. 고로 현대인들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이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다. 그것은 분명하게도 '주체성'과 연관된다.

나의 인생의 가장 큰 지향점은 '주체성'이다. 꿈을 물어보면 '직업'을 답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우리 아이의 꿈은 '주체성'이길 강력하게 바란다. 얼마 길지 않은 세상을 살아보니, 삶은 '선택'의 연속이지, 미리 짜 둔 계획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열 살에 했던 생각이 스무살에 달라지고, 서른에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생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롯데 신격호 회장의 꿈은 '문학가'였으나, 결과적으로 '사업가'가 됐다. 조금 잔인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철학'이 분명한 이들은 다른 분야에도 분명 두각을 들어냈을 것이라고 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한 사람이 하나를 갖기에도 부족한 능력을 십 수개나 가지고 있었다. 신은 공평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재능을 부여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을 살펴보면, 그저 목적을 달성하는 이들이, 다른 목적에 달성하는 방법도 수월하게 알기도 한다.

만약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분명하게 있다면 나는 우리 아이가 '고졸'이라도 괜찮다고 본다. '고졸'이라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졸'이 더 낫다고 보여진다. 사람을 만나다보면 '직함 가득한 명함'을 받을 때가 있다. 너무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은 도대체 그 사람에 대한 가늠도 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신을 수식하기 위해, 직함, 가짜 팔로워, 허세 가득한 이름들을 붙이는 것은 '허영심'이다. 때로 우리 사회는 명품 가방을 매고 다니는 것처럼 '학력'이라는 '허영심'을 채우고자 스무살부터 4년 간, 원하지 않는 전공 과목을 꾸역 꾸역 배워 졸업한다.

대학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대학 이름은 목적을 달성하는 연습을 하는 과정에 주어질 뿐이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읽고 생각하는 일'이며 주도적으로 행동하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경기도에 위치한 '한민고'는 학생들에게 주도적인 학습을 강조하고 독서를 강조한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교는 가지 않아도 좋지만, 저런 교육 과정에 놓였으면 하는 부러움이 있다. 다만 한민고는 경기도권 학생을 위한 전형과 군인 가족을 위한 전형 밖에 없다고 하니, 조금은 아쉽다. 나중에라도 타지역 학생을 위한 전형이 나온다면 잊지 않고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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