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
해리 클리프 지음, 박병철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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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 번만 소개하는 건, 핵분열 에너지로 라면 끓여 먹는 것과 같다. 지금껏 아무리 벽돌 같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완독하기 전에는 절대 리뷰하지 않았다. 그것이 철학이었으나 이번은 그것을 깨겠다. 책은 절반이 조금 넘은 정도를 읽었다. 나머지 절반은 내일 완독할 예정이다. 우주 만물의 역사와 원리를 담았는데, 고작 그것을 한 장으로 요약하는 일은 내 능력 밖이다. 책의 깊이를 감탄하려면 사실 두 번의 리뷰도 부족할 정도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과파이를 만드려고 한다면, 먼저 우주를 만들어야 한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괴짜 같은 건 알고 있었지만, 책은 정말 사과파이로 부터 우주를 만들어 나간다. 우주라고 표현했지만 만물을 이야기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생각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도대체 이 잡다한 구성이 우주랑 뭔 상관이야'였지만 사실상 우주는 우리을 뛰어 넘어 대기권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주는 우리 손톱 밑이나 발가락 사이에도 존재하고 모든 순간과 티끌, 모든 공간이다. 진짜 사과파이를 만들어보자. 사과를 먼저 구해야 하겠지만 아니다. 진짜 사과파이는 사과를 먼저 기르는 것 부터 시작한다. 농장에서 시작할까. 아니다. 사과나무가 열리기 위해선 토양과 태양광에서 출발해야 한다. 태양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태양은 헬륨과 수소로 이뤄져 있다. 그럼 수소는 무엇이고 헬륨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어디서 왔을까. 사과파이를 만들기 위해서 분자를 알아야 하고, 분자를 알다보니 원자를 알아야 한다. 원자를 구성하는 것이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 임을 알아야 하고 다시 그것 또한 공간 임을 이해하며 그 공간에는 위쿼크, 아래쿼크, 야릇한 쿼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재료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한다는 것을 보면 이 엄청난 분량의 우주 물리학 도서가 사실은 '사과파이 레시피북'으로 분류해야 하나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소와 탄소, 수소와 헬륨 따위를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해보면 학교 과학시간에 그것을 알려주진 않았다. 과학 시간에는 아득한 주기율표에 영문과 한글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문자의 나열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있으니 일단 외우라는 지도를 받았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됐는지 물론 궁금해 하지도 않았지만 알려주지 않았고 왜 궁금해 하지 않는지 묻는이도 없었다. 세상 모든 지식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학교에서 받은 교육에는 '호기심'이 없기 때문에 내 눈에는 '사과파이'는 그저 '사과파이'로 존재했을 것이다. 다양한 원자와 구성을 밝히는 일들은 이 책에 의하면 역시나 사과파이에서 시작한다. 사과파이를 통해 탄소를 얻는 실험. 탄소를 통해 이산화탄소와 산소를 확인하는 과정. 헬륨과 수소를 통해 핵융합이 일어난 과정. 도서 제목은 '다정한 물리학'이지만 개인적으로 원제인 'How to make an apple pie from scratch'가 참 센스 넘치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원제에서 '물리학'을 가늠하지 못할지 모르는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이 들지만, 개인적으로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해결하지 못한 현대 물리학의 나머지 퍼즐을 맞춰 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처음 책을 집어들고 100 페이지를 읽었을 때, 드는 생각은 이랬다.

"우리 아이가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어쩌지..."

두 번 째 생각은 이랬다.

"읽었으나 이해를 하지 못하면 어쩌지..."

물론 나또한 천재 물리학자들의 업적을 최대한 쉽게 표현했음에도 다양한 용어가 익숙치 못해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역시 책이란 '기호'이기 때문에 어떤 누군가가 미지근한 리뷰를 올리는 것들도 봤다. 나의 시선에서는 책을 읽을 때마다 '경이롭다'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우주의 조각을 맞추는 물리학자들의 도전이 경이롭다. 이것은 유튜브에서 보게 되는 황당한 우연 모음집 같다. 수 백 번의 도전 중 우연히 성공한 영상만 짜집어 편집한 영상 말이다. 생각없이 보는 영상 중에는 그런 영상들이 있다. 정확히 같은 사이즈의 구멍에 구슬을 집어 넣거나, 보지 않고 던진 공이 농구 골대에 들어가는 깔끔하게 달성되는 우연들. 서로 다른 과학자들이 아무렇게나 던진 공이 정확히 목표 지점에 깔끔하게 떨어져 들어가는 희열은 현대 물리학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근원'을 생각하지 않고 행하는 것들이 참 많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며 가거나, 어디서 왔는지 모르니,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른다. 물리학이 중요한 이유는 오른쪽으로 던진 공이 왼쪽으로 가지 않는 것처럼 '신'이 만들어낸 규칙에 '근원'을 고민하는 '지적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일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에 대한 탐구가 없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우주의 움직임을 숫자로 풀어내는 이들을 바라보며 신의 위대함을 탐구하는, 인간의 위대함도 알게 된다. 우주를 이해하다 보면 칼 세이건의 말처럼 우리가 별에서 부터 시작했음을 느껴 볼 수 있다. 어떤 별이 터지며 흩어진 원자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가 됐다. 다시 말하자면 하찮은 발 뒤꿈치의 굳은 살 조차 경이로운 우주의 조각 중 하나이며 우리는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서 발생한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만들어낸 복합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가치는 그렇게 매겨진다. 나뿐만 아니라, 바닥 위를 기어가는 개미 새끼 한마리도 우주의 한 조각이다. 오늘 저녁, 내일 어쩌면 일과 시간과 휴식시간 틈틈히 이 책을 놓지 못할 것이다. 남은 반절도 너무 기대가 된다.

*내일 도서 완독 후 두번째 리뷰 작성하겠습니다.

(처음으로 리뷰를 두 번에 나눠 쓰네요)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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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하는 마음 - 이상하고 아름다운 블로그 세계
이효진(새벽보배)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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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신동엽은 말했다.

"저는 내기를 하면 '한국이 진다'에 겁니다." 그는 어떤 스포츠 국제 경기에서 언제나 한국이 진다는 쪽에 건다고 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한국이 이기면 돈은 잃지만 기쁘고, 한국이 지면 슬프지만 돈을 따게 된다. 그 논리는 가벼운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뾰족하게 다가왔고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 지금의 나의 철학이 된 이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라는 산문집에서 실패담을 하나 소개한다. 비자 없이 중국으로 떠났다가 공항에서 추방되는 내용이다. 그의 산문집은 역시나 훌륭했으나 다른 모든 기억들을 상쇄 시킬만큼 이 실패담은 크게 다가왔다.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기간 중국에 체류할 예정으로 떠났던 여행에서 어이없게 그는 추방됐다. 황당하고도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또한 소재가 됐다.' 그렇다. 좋으면 좋은대로 좋고, 나쁘면 나쁜대로 좋아야 한다. 블로그는 그런 역할을 한다. 최악의 하루는 굉장히 스펙타클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타이타닉'은 재난 영화지만, 보는 입장에서 '재밌다'라고 평가하고 본다. '라이언 일변 구하기'는 전쟁 영화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흥미롭게 본다.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한 영화나 드라마보다 무언가 역동적인 이야기가 말 그대로 '이야기'가 된다. 힘든 하루는 어쩌면 그냥 힘든 하루로 내 안에 쌓여 곪을 수 있다. 다만 이것이 글이 되면 '수필'이 되고 누군가의 오락거리가 된다. 20대 초반부터 10년에 가까운 기간 해외생활을 하며, 상상조차 하지 못할 시련이 있었다. 신발이 찢어져서 신발을 사러 가야하는데, 신을 신발이 없었다는 이야기부터 영양실조에 걸려서 아파트 바닥에 쓰러져 한 동안 누워 있던 이야기, 돌아 올 버스비 없이 알바를 떠났다가 버스에서 잠들어서 다섯 시간을 걸어 돌아온 이야기 등. 이 이야기들은 당시에 죽을 만큼 힘든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다만 당시 썼던 일기들을 잘 모아 출간된 것이 나의 첫 책인 '앞으로 더 잘 될거야'다. 좋으면 좋은대로 좋고, 나쁘면 나쁜대로 좋아야 한다.

운 좋게 블로그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된 적 있다. 당시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쓸게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만 메뉴만 분류해주면 알아서 지속하여 썼다. 블로그 수업 첫날, 내 주문은 이랬다. 펜과 노트를 꺼내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으라고 했다.

1. 내가 좋아하는 것(3가지)

2. 내가 잘하는 것(3가지)

3. 내가 해야 하는 것(3가지)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는다. 고민해 보지 않는다기보다 일상의 급류에 휩쓸려 정신없이 노를 젓다보니 그런 정리를 할 새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무엇을 잘 하는지 모르며, 무엇을 해야하는지 몰랐다. 혹은 자신이 해야 하는 것만 명확하게 알고,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으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블로그는 결국 자신을 들들 볶고 뼈와 골수까지 우려 완전히 내야 한다. 글쓰기라는 장기 전에서 초기 몇 번은 상대를 속일 수 있으나 1년, 2년, 3년이 지나가는 와중에는 어쩔 수 없이 자신만 아는 '찌질함'과 '열등감', '무능함'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미국의 수필가 '리베카 솔닛'은 글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사람들이 함께 공감해 줄 것이고, '내가 잘하는 것'은 사람을에게 정보를 줄 것이고, '내가 해야 하는 것'에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 블로그에 메뉴 설정을 할 때, 글의 갯수가 몇 개인지 보이도록 설정해 둔다. 이유는 앞서 말한 3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만해서도 안되고, 잘 하는 것만 해서도 안되며, 해야 하는 것만 해서도 안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책읽기'고 잘 하는 것은 '영어'이며, 해야 하는 것은 '육아'다. 이것은 균형이 필요하다. 만약 메뉴의 갯수가 '책읽기'만 비정상적으로 많다면 이 균형이 깨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을 했었다.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 연주를 좋아했고, 물리학을 잘 했지만, 생활을 위해 취업을 해야 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과학 저널에 올린 4편의 현대 물리학 논문은 1905년에 완성됐는데, 이를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 기간 아인슈타인은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며 논문을 작성했다. 누군가가 물었다.

"블로그로 돈 벌 수 있나요?"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떠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은퇴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듯 말하고 다닌다. 사람들은 그것을 '경제적 자유' 혹은 '파이어족'이라고 하지만 별로 그 말을 좋아하진 않는다.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회는 '돈벌기'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게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이미 보통의 우리보다 일하는 시간이 길다. 일론 머스크는 주 120시간의 일을 했고 이는 대략 하루 17시간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돈에 대한 욕심'이나, '뜨거운 열정'을 기대했으나 그의 대답은 '그냥 하는 겁니다.'가 전부였다.

앞서 말한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글쓰기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 대게 일과를 마치고 편안한 복장으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장문 나열한다. 영화 리뷰나 도서 리뷰인 경우도 있고 때로는 삶의 철학을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날은 맥주 한 잔하고 알딸딸한 상태로 쓰는 경우도 있고 아이와 콩순이를 함께 보며 대충 휘갈기는 적도 있다. 이런 저런 글들은 대게 혼자 조용한 시간에 쓰여지지만, 간혹 내 글들은 여기 저기 퍼져 공유되기도 하고 출간되어 수 천 명이 보기도 했다. 많진 않지만 가끔 나의 글을 필사하는 분도 계시고 알림 설정을 통해 찾아 보는 분도 계시다. 조용히 혼자하는 일이지만 그 밖에 세계 이곳 저곳에서 소통하는 분들도 더러 생겼다. 누군가는 메일을 통해 협업 제안을 주시기도 하고 출간 제의도 받는다. 이런 일들은 바쁘게 명함을 돌리고 얼굴을 알리려 발품발고 뛰어 다녀서가 아니라, 일과가 끝난 저녁 조용하게 글을 써서 발생한 일들이다. 누군가가 기대하듯 애드포스트를 통해 큰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방송사에서나 취급하는 '광고'가 내 넋두리 앞과 뒤에 붙어 소소한 광고료 수입도 만들어 낸다. 큰 돈은 아니지만 쓰지 못한 커피 쿠폰도 적잖게 쌓인다. 누군가는 "광고 포스팅 한 번에 얼마쯤 받으세요?"라고 묻지만 대답은 '받지 않는다'이다. 100명에게 1만원을 받으면 100만원이지만 10만명에게 20원을 받으면 200만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돈의 특성은 사람을 복종 시키는 일이다. 한 사람에게 1000만원을 받으면 그 사람에게 복속되지만 1000 사람에게 1원을 받으면 누구에게도 복속되지 않는다. 나에게 돈을 주는 사장님이 착한 사람일지, 나쁜 사람일지 나는 관여할 수 없다. 운 좋게 좋은 사람을 만난 경우에는 '월급'이나 '큰 광고료'를 받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더 많이 알려주세요'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적은 비용을 받는 편이 낫다. 나에게 블로그는 '돈'과 전혀 상관없다. 스스로를 정리하고 누군가에게는 선의의 영향력을 줄 수 있으며, 나 자신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가 꾸준히 일기 쓴 댓가로 출간제의와 강의 제의, 협업제의를 한다면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일기를 쓰는 이유는 돈벌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정리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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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평전 - 경험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사만다 로즈 힐 지음, 전혜란 옮김, 김만권 감수 / 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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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에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거리가 됐는데, 2000년까지 이스라엘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위했던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은 재판 피고석에서 실제로 너무 평범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공무원이었으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냈다. 나이가 조금 있는 이라면 초등학교 때 반공 교육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교육중에는 공산당을 그리거나 묘사하는 일이 있는데, 당시 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머리에 뿔달린 괴물이었다. 한반도에서 이념 갈등이 한참이던 1950년 대, 적군을 맞이 했던 학도병들은 적군을 맞이한다. 적군의 머리에는 뿔이 달리지도 않았으며 괴물도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은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의 일생을 훑어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퓰리츠상을 두번이나 받은 월터 립맨(Walter Lippman)은 전체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곳에는 아무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진정한 삶의 가치에 대해 '노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이며 이런 정치적 삶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녀가 뉴욕행 기니호에 승선했을 때 나이가 서른 다섯 살 이었다. 서른 다섯인 그녀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역사는 그녀에게 두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게 했고 망명자가 되게 했으며, 게슈타포에 체포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는 강제수용소를 탈출하기도 했다. 그녀의 복접한 인생사 닯게 그녀의 국적도 다양하게 변화했다. 그녀는 독일제국에서 태어났으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독일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무국적자로 한동안 존재해야 했다. 그 밖에 한 번의 이혼과 한 번의 사별을 경험했다. 그녀는 개인이 적극적인 사유를 함으로써 의식을 깨치는 사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그녀의 철학의 필요성이 절실한 순간을 보게 된다. 몇 번의 군사독재를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 조차 전체주의로 흘러가곤 했다. 전 국민이 같은 시간이 되면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불러야 했으며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자신은 비록 고통과 불행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잘 되는 것을 '선'으로 두었다. 영화 변호인을 보면 두 종류의 '애국'이 부딪친다. 영화에서는 '박진우'와 그 친구들이 책을 돌려 보는 모임을 하다가 구속된다. 이에 '차동영 경감'은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국보법' 수사를 진행한다. 반대쪽에서는 송우석 변호사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송우석 변호사'와 '차동영 경감'이 '애국'과 '국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차동영은 독재 군부 정권을 옹호하며 공안정치를 신봉한다. 그는 공무원이며 자신이 따르는 군부 정권을 국가로 규정하고 충성을 다해 애국한다. 학생이 모여 책 읽고 토론한 것이 국보법에 해당되는지 무엇을 보고 판단하며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차동영은 '국가가 판단한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송우석은 '국가가 무엇이냐'고 묻고 여기서 이 둘이 국가를 바라보는 시점이 명확하게 다르다는 점이 나온다.

실제 '악은 평범하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전체주의가 만들어내는 무지성은 사유를 통해 경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몇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대인'이지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특별하게 다른 관점을 갖지 않았다. 스스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도 아니었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전체의 일부로 분류하지 않았다. '애국'이라는 단어는 가장 정치적인 단어다. 군사독재 시기에 '애국'과 독립운동 시기의 '애국'이 전혀 다르며, 애국과 애국의 갈등도 적잖게 역사에서 발생한다. 얼마 전, 우리는 '일본 제품 불매'에 통참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매국'으로 규정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전체주의'는 빼놓을 수 없는 사상이다. 군사정권에는 '3S정책'을 통해 '스크린, 섹스, 스포츠'를 장려했다. 대부분의 독재국가들이 하는 정책인 '우민화 정책'이다. 국민이 우둔해야 소수 정권이 이를 이용하기 쉽다. 대표적으로 과거 '중앙 아시아의 북한'으로 불리던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이다. 현재는 사망했지만 한때는 절대권력자였던 '니야조프'가 그렇다. 그가 했던 우민화 정책은 국민들을 제대로 바보로 만들었다. 그는 남학생들을 징집함으로써 군대 인구를 늘리고 연령을 낮춰 고등학교 2학년에 징병했다. 또한 국민들의 교육년도를 줄이고 박사나 유학생들을 추방했으며 다수의 도서관과 학교를 폐교시켜버렸다.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해야한다. 더 깊은 차원의 생각을 하는 사람을 추방시키거나 탄압해야 한다. 이렇게 다수가 비슷한 생각에 빠지고나면 전체가 평범한 '악'으로써 역사에 남겨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곤 한다. 신문 기사나 뉴스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지, 권력 있는자, 혹은 절대 자수가 하는 말에는 오류가 없는지. 자신의 생각과 철학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보며 '우리'라는 것은 다양한 사고를 하는 '나'의 집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봐야겠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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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 2022년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김준녕 지음 / 허블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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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을 좋아했다. 태풍처럼 큰 바람이 함께 동반하면 더욱 그랬다. 천둥과 번개 치는 어느 여름 날, 아버지는 굵은 양초를 꺼내셨다. 전기가 나가자. 거실을 진동 시키는 TV소리가 멈췄다. 번쩍거리는 브라운관 불빛도 멈췄다. 저녁 8시가 되면 아버지가 즐겨보시던 뉴스가 입을 다물자. 더이상 내가 사는 세상에는 살인도, 강도도, 주가 폭락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 안을 가득 매운 것은 가벼운 순풍에도 살랑거리는 양초 위 촛불과 흔들 흔들거니는 그림자 뿐이었다. 얇은 샤시 창을 사이에 두고 몰아치는 태풍 뒤에서 나는 적막을 즐겼다. 낙뢰가 내리치고 하늘이 잠깐 밝아지면, 하나.. 둘... 셋... 하고 천지를 흔드는 천둥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무료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심심한 말을 했다. 밖에는 무시무시한 것들이 위협하고 있어도 얇은 창을 사이에두고 조용히 적막을 즐긴다는 것은 무언가 거대한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이 나를 가로막고 보호하고 있다는 안정감이 드는 것은 맑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이 산산조각나던 지랄같은 날씨였다. 하늘이 와장창 깨지고 굵은 빗방울이 옆으로 몰아치면 조용히 창을 닫고 살랑거리는 촛불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찾을 수 없는 안락하고 평온한 마음은 그런 환경의 반전에 극대화 됐다. 늦은 밤 일부러 공포영화를 찾아본다. 공포영화를 보기 적합한 시간은 잠들기 직전이다. 그 무시무사하던 '컨저링'을 나는 무려 5번이나 봤다. 다만 다른 이유로 그 영화를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 영화가 공포의 극한이라고 말했지만, 중간정도를 볼 때 쯤, 꼭 골아 떨어지곤 했다. 수차례나 이 영화를 완주하겠다고 다짐했으나 4번을 실패하고 대략 10년이 흘렀지만 '컨저링'이라는 영화는 내게 자장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기억뿐이다. 극한의 공포가 되려 사람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현실과 괴리에 따른 안도 때문이다. 화면 뒷편 이야기는 삶에 실제하지 않는다는 믿음.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 관전자라는 안도. 이것은 공포를 통해 극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감정은 '안정'과 '위기'가 양극으로 나눠진다. '해칠 수 있느냐, 해침을 당하느냐'라는 우주이 설계한 자연법칙에 따라 '먹이사슬'의 중간 지점에서 우린 진화했다. 토끼나 고양이와 함께 있을 때는 안도감을 느끼고 호랑이나 사자와 함께 있을 때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앞서 말한 자연의 매커니즘 상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 내리는 일이 인간에게 평온한 감정을 주는 것은 고양이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며, 자신은 얼마든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현실에서의 안도와 반대로 자신과 관련없는 다른 상황의 관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을 좇던 사나운 개를 따돌려 높은 나무 위로 도망갔을 때, 인간은 안도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내려다 본 '토끼'를 봤을 때와 사뭇 다르다. 위협적인 상대에게서 완전히 격리됐다는 안도감은 어린시절 내가 느꼈던 나쁜 날씨의 촛불 같은 존재였다. 김준녕 작가의 '막 너무에 신이 있다면'은 철저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여타 재난 혹은 SF소설이 서술하는 극한 상황에서 공격적인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진과 테러 등 극단의 상황에서 인간은 되려 침착했고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실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가장 기아 빈곤상태가 심각한 '차드, 라오스, 동티모르'의 살인 발생률은 세계 평균 보다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고프면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설정은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이것은 극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설정이다. 극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변할수록 그것이 실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반대편에서 들기도 한다.

소설은 꽤 염세적이다. 세계관은 충격적일 만큼 폭력적이다. 소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향해 달려간다기 보다, 세계관의 묘사에 더 깊은 신경을 쓴듯 보였다. 잔혹한 공포영화 중, 눈을 가리며 영화관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 스탭롤까지 지켜보는 심리라고 할까. 일단 진행된 소설은 불쾌할 정도로 잔혹하지만 속도감있게 진행된다. 작가가 독자의 멱살을 끌고 '휘리릭'하고 이야기를 끌고 다니듯 몰입감있다. 이런 염세적인 세상을 지켜보다가도 문뜩 문뜩, 따뜻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입을 위해 눈을 떼고, 눈 앞에서 재롱을 떠는 아이에게 눈을 마주친다. 몰아치는 태풍 한 가운데 얇은 샤시 창문을 닫고 촛불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렇게 전개된다. 2026년 극심한 지구온난화로 전세계가 식량위기를 겪는다는 설정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소설의 배경으로 끌고 들어왔다. 여기를 도망하기 위해 유전 조작된 어린이들을 우주선으로 쏘아 우주 끝에 있는 막에 도달시킨다. 다만 그 속에서 펼쳐지는 더 잔혹한 이야기들은 '도망친 곳에 천국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가 못마땅해 도망치는 대부분의 것들에 '신'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더이상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는 소설처럼, 영상을 꺼버리면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 공포영화처럼 눈을 감아버리면 혹은 바쁘게 돌아가는 부정적인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놓아버리면 사실 모든 것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공포를 즐기는 '관찰자'만 남게 되는 법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는 말이 있다. 공포를 즐기는 방법은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존재임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실로 안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망' 없이 현재를 담담히 맞이할 수 있게 한다. 끔찍한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은 되려 삶을 돌이켜보고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로 만든다. 망해버린 책을 덮으며 '오호. 내용 괜찮네!'라고 한마디하며 디스토피아가 주는 안정감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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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만물관 - 역사를 바꾼 77가지 혁명적 사물들
피에르 싱가라벨루.실뱅 브네르 지음, 김아애 옮김 / 윌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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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유통업에 종사했던 건 행운이었다. '잡화점'은 오만가지 생활용품을 매입, 판매한다. 판매자에게 받은 '인보이스(Invoice: 송장)'를 취급하다보면 현지인들도 모르는 물건이 수두룩했다. 성인이 되고 유학 간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짜릿함은 당시 일하는 재미 중 하나였다. 물건의 원가와 판매 방식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재밌는 것은 '이름'을 아는 것이었다. 당시 매장에서 판매하던 제품에는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로 끈을 넣어 신는 슬리퍼인 '쪼리'가 있었다. 이 쪼리는 '플립플랍(flip-flop)'이라는 슬리퍼인데 해변에서 가볍게 신는다. 알고 있던 영어는 플립플랍(flip-flop)이다. 언젠가 여름이 되었는데, 미국인 관광객이 들어와 플립플랍(flip-flop)을 찾았다. 매장에 아직 진열되기 전이었다. 이후 상품을 들여오고 얼마 뒤, 한 뉴질랜드 백인 남성이 물었다.

"혹시 젠달있나요?(Do you have any Jandals here?)"

"젠달이요? 아니요 없는데요. (Jandal? Sorry, we don't have them.)"

대화는 끝이 나는가 싶었다. 남성은 그럴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매장을 훑어보더니 플립플랍(flip-flop)을 꺼내왔다. 그것을 젠달(Jandal)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이상한 슬리퍼의 유래는 최초 일본에서 시작한다. 실제는 비슷한 신발은 각 문화권마다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플립플랍(flip-flop)은 일본에서 유래했다. '쪼리'라고 부르는 이 신발은 'ぞうり (조우리)'가 어원이다. 일본인들은 발가락 사이에 끈으로 연결 고정시킨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이 신발은 뒷부분을 고정시키지 않으므로 걸어갈 때마다 '또각 또각'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미국인들은 플립플랍(flip-flop)이라는 의성어를 이용해 표현했다. 한국에서 일본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쪽발이' 또한 이 신발에서 유래했다. 한국에는 왼쪽, 오른쪽처럼 갈라진 것을 쪽(side)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일본인들의 의복 문화 중 '신발'의 형태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발이 갈라진 이 형태를 두고 '쪽바리'라고 멸칭했다.

젠달은 Japanese sandal을 일본에서 수입하면서 생겼다. 이는 1957년부터 skellerup이라는 회사가 일본 샌달을 수입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대일밴드'처럼 상표가 굳어져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경우다. 당시 Jandal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겨우 알게 된 사실은 '뉴질랜드 사투리'라는 정도였다. 가볍게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던 상품의 이름에 이런 역사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백인들과 섞여 지낸 기간이 10년이 가깝다보니, 그들의 문화에서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인들이 '동양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관점이다. 실제로 백인들은 '동양인'들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혜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동양인들의 물건에는 알 수 없는 지혜가 숨겨져 있고 그들의 식문화는 굉장히 '웰빙식'이라는 인식이 있다. 실제 '초밥(Sushi)'가 대표적인 경우다. 백인들은 초밥을 먹는 이에 대해 '건강한 식문화'를 유지하는 현대적이고 자기관리가 뛰어난 엘리트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중식이나 일식에서 어설프게 젓가락을 쥐고 먹는 행위를 품격있는 것처럼 했다. 이런 젓가락 문화는 한, 중, 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양의 문화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서양인들의 제법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지만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처럼 보인다. 젓가락도 사실 각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국의 젓가락은 꽤 길고 뭉툭한 편이다. 일본은 짧고 끝이 뾰족하다. 한국은 그 길이가 중간정도 되고 끝도 약간 뭉툭하다. 아마 이것은 한중일 식문화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대게 중국인들은 여럿이 모여 식사를 했다. 이들의 젓가락은 비교적 커다란 식탁에서 먼거리의 음식을 집기에 편리했다. 일본의 경우는 어류를 즐겼고 생선뼈를 바르기 위해 비교적 끝이 뾰족하고 예리한 젓가락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세 국가 중 가장 젓가락 활용이 적은 편이다. 실제로 국이나 밥도 젓가락으로 먹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수저를 이용하여 국과 밥을 뜬다. 중국과 일본의 젓가락은 나무를 이용해서 만든다. 반명 한국의 젓가락은 금속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김치나 젓갈 등 강한 양념을 먹는 한국인의 특성에 나무 젓가락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합리적이다.

인간은 정착생활을 하며 '사유물품'을 소유했다. 한 번 쓰고 버리던 떠돌이 시절을 벗어나 그 자리에서 같은 물건을 사용해야 하는 정착생활에서는 물건을 조금 더 자신에게 맞게 사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자녀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과 생각을 넘겨 주곤 한다. 부동산이 될 수도 있고 반지나 목걸이 같은 귀중품이 될 수 도 있지만, 이렇게 부모와 자식에게 넘겨주는 상하 교류 뿐만 아니라 옆 마을 혹은 옆 국가에서 넘어오는 좌우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졌겠다. 상하 좌우로 자신의 물건을 넘기고 받으며 점차 그것의 활용을 자신에게 맞게 바꾼다. 마치 '맥도날드'의 '불고기버거'처럼 어느 순간, 상대의 것과 내것이 적절히 융합하면 그것은 또다른 정체성이 된다. 가장 그 시대와 그 지역의 색깔에 적합한 것들이 남고 전달되다보면 거기에는 역사와 흔적, 이야기가 남는다. 역사를 배우는 방식은 다양한다. 전쟁을 통해 배우기도 하고, 경제를 통해 배우기도 하며 대게 정치를 통해 배운다. 다만 정치는 그 시대를 온전하게 담아내기 적합하지 못하다. 현대 정치에 못마땅한 현대인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런 다수가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소수보다 훨씬 많다. 다수의 역사는 이처럼 정치, 경제의 거시적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물건처럼 사소하지만 다수가 쓰고 남긴 흔적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모든 것은 사실 연결되어 있다. 거시적 역사와 미시적 역사도 따지고보면 모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역사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과정도 역사와 이야기를 즐기는 하나의 포인트가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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