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도착하지 않는다
유래혁 지음 / 포스터샵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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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혁' 작가 님의 '장편소설 '바람은 도착하지 않는다'는 도입이 매우 매력적이다. 천사의 형상을 한 존재가 등장한다. 천사하면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와는 다르게 '천사'의 등장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굉장히 기이하며 불쾌하다. '탯줄을 잘근잘근 씹는다'라는 묘사에서 이 소설이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만 보여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첫 장면이 주는 냉정함으로 소설의 진행이 동화같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굉장히 인상적인 도입으로 소설은 시작과 동시에 몰입된다.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연차적으로 나오는 듯하다. 아이를 빼앗긴 소녀, 해변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 기계 심장 소리를 들은 청각 장애 소녀, 돈이 든 캐리어를 묻는 소년.


인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건은 자세한 설명이 있지 않다. 책을 읽다가 몇번을 표지로 넘어간다.

'잠깐만, 이 소설이 단편이었던가?' 하고 앞으로 넘어갔다가, '아 장편소설이네'하고 뒤로 돌아온다. 일단 그렇게 파편적인 내용들을 읽어가다보면 이야기는 어느새 '스르르' 섞이며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사건들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닮아 있다.'바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감정과 관계, 상처 같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들은 도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결된다.

이 소설의 장점이라면 '모호함'이다. 뭐든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관련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극 막바지'가 되면 모든 일이 마법처럼 해결되어버리는 '해피엔딩'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기적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다. 마치 화성에 감자를 심어 생존해 내는 것보다 더 판타지적인 것이 '해피앤딩'이다. '유래혁' 작가의 특징이라면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내는 인위적임 혹은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결말'이 없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여운이 남는 소설을 훨씬 더 좋아한다.


소설은 마치 고급 사진첩에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질감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책과 다르게 '소설'의 경우에는 책을 만졌을 때, 겉표지와 속지의 질감도 매우 중요하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활자로 만들어낸 누군가의 '추억'을 이식받는 행위와 같다. 실제로 '유래혁'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한 장면 한 장면이 정지된 사전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 파편을 이식 받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고로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감정만은 선명하게 남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실종된 존재'들이 있다. 사라진 아이, 사라진 관계, 들리지 않거나 심장이 없는 듯. 다들 무언가 잃어 버렸고 상실한 채 살아간다. 그 상실은 어떤 방식으로도 회복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여타 문학의 판타지와는 다르게 실재하는 삶에서는 '해결'보다 '수용'이 더 중요한 부분이 많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어떤 상실을 경험했다. 이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해결책을 찾았던 적도 있다. 그 소모적인 시간 뒤에 내가 깨달은 바는, 세상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회복'은 없다. 다만 '수용'만 있을 뿐이다. 이겨 내는 것보다 받아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된 지금에서야 이런 소설이 제대로 읽힌다.


'유래혁 작가'의 다른 소설 '수족관'을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소설은 줄곧 즐겨 읽어왔던 '일본 소설'을 닮았다. 다만 일본 소설의 직관적임보다는 한국 소설의 감성적 서술방식이 더 돋보였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넷플릭스'보다 재밌는 소설은 어디에나 있다. '유래혁 작가'의 '바람은 도착하지 않는다'는 대략 3~4시간 정도의 시간이 들어간다. 글의 문체가 워낙 시처럼 감성적이기에 훑어보기에 적절하지는 않다. 한문장 한문장 수채화를 그리듯 묘사하는 전개 방식은 내용과 무관하게 소설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이지 않을까 싶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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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말하면 기적처럼 이루어진다 - 무의식과 현실을 바꾸는 긍정 확언의 힘
이유진 지음 / 유노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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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이자 가수, 제작자인 '윌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허세라고 말했지만 결국 나는 그곳에 도달했다."

그는 '혼잣말'을 스스로에게 거는 일종의 '계약'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한 말에 맞는 선택과 행동을 반복했고 실제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전설적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 복서인 무하메드 알리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위대해지기 전에, 이미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상대를 마주하기 전에 스스로를 마주하는 습관을 가졌으며 거기서 마주한 자신에게 '확언'이라는 형태의 주문을 끊임없이 걸헜다. 주문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됐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말'대로 위대한 인물로 나아갔다.

할리우드 배우 '짐캐리'도 그렇다. 그는 '나는 1천만 달러를 수표를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자신은 1천만 달러를 받을 것이라는 주문을 스스로 넣었다. 한때는 거의 노숙자에 가까운 삶을 살던 가난한 예술가는 이후 그 액수의 출연료 게약을 맺었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NBA의 전설적인 농구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도 그렇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NBA 우승 인터뷰를 상상하며 거울 앞에서 답변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그 꿈을 이루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같은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만 잘하면 '그렇게 되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모두 그 말에 '상응'하는 노력을 수반했고 아마 그 노력에 '말'을 빼더라도 스스로 목표했던 바가 이루어질 만큼의 독한 실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좋은 말을 스스로에게 할수록 더 좋은 일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온 우주가 말의 주파수를 받아 마법처럼 그것을 실행시켜주기 때문일까. 아마 아니다. 원인은 '마법'이 아니라 '무의식'에 있다.

앞서 말한 인물을은 모두 '확언'을 했다. 확언은 아주 강력한 자기 암시다. 종교도 마법도 아니다. 요즘 자기계발서나 유튜브, 명상 앱, 심지어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서도 '확언'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나는 성공할 수 있다.", "돈이 나에게 온다.", "나는 뭐든지 잘할 수 있다."

말만 하면 정말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확언을 하는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목표'에 대한 굉장히 강한 갈망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도달하게 하는 인자는 강력한 하나의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여러가지 인자가 복합적으로 혹은 상호작용하며 생각지 못한 다른 작용을 만들어낸다. 이런 확언을 하는 사람의 특징이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주간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월간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찬물샤워'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매일 운동을 하거나 독서를 하는 등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고로 고로 '확언'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력한 목표의식의 발현 중 하나일 것이고, 그것이 다시 선순환되어 그 목표에 강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고 있을 것이다.



확언의 심리적 기반에는 이러한 것들이 있다.

첫째, 자기 암시, 반복적으로 말하면 잠재의식에 스며든다. 이는 최면 요법의 원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반복적인 자극'에 예민하게 받아 들인다. 우리의 망상활성계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정보 중에서 중요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나누는데, 개중 반복적인 정보를 '중요정보'로 두고 이를 '무의식 프로세스'로 넘겨 둔다. 그렇게 의식이 '무의식'으로 넘어가면 어떤 이들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목표'로 다가간다. 꿈에서 나오기도하고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목표와 관련된 이유도 그렇다.

둘째, 인지부조화,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 사이에 불일치를 느낄 때, 행동이 아니라 인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조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다니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자신이 했던 말이 비록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말과 행동 사이의 불일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행동을 바꾸어낸다. 이는 실제로 '사이비 종교'나 '사기'처럼 부정적인 곳에서도 많이 사용되지만 '확언'과 같이 '스스로를 속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지고 있다.

셋째, 자기충족적 예언, 자기충족적 예언은 자신이 믿고 예언한 바가 실제 현실에서 발현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말하는대로 이루어내는 자기충족적 예언은 그 예언 적중률이 낮은 편이 아니다. 고로 자기 스스로에 대해 확언을 하고 예언은 놓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갖게 되고, 스스로가 한 말에 실제로 속아 넘어가서 예언대로 행동할 확률이 높아진다.

실제로 스탠퍼드 대학교에서는 자기긍정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시험을 보기 전에 자기 긍정 확언을 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을 했는데 스스로 자기 긍정 확언을 한 이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훨씬 낮았다. 또한 그들이 받은 점수도 유의미할 정도로 차이를 보였다.

또한 금연, 다이어트, 운동에도 이런 확언을 접목하여 실천 지속률이 높아졌다는 실험도 종종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허무맹랑',

'얼토당토'하지 않은 목표의식을 세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산에 있으면서 낚시를 하고 싶다'고 하거나 '사막'에 있으면서 '수영'을 하고 싶다고 하는 바와 같다. 이는 강력한 '확언'이나 '끌어당김의 법칙'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망상'을 갖는 셈이다.

어떤 일을 이루고저 한다면 '말'만큼이나 자신을 어디 두어야 하는 지 알아야 하며, 그 환경에서 어떤 목표를 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극지방에서 '눈'을 보고 싶다고 하거나, '사막'에서 '더위'를 기대하는 편이 훨씬 더 이루어지기 쉽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메타인지' 능력이다. 그리고 현실 범위 내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행동단위'의 확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진 작가는 생각만 많고 행동은 미루는 사람들을 돕는 '생동력 연구소' 소장이다. 생각이 행동이 되는 생동력에 관한 강의를 하며 누구나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파한다.

결국 '확언'이란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향을 결정 짓는 선언과 같다. 고로 말하는 대로 살고 싶다면 일단 먼저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말을 뱉고나면 행동은 말을 따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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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를 책임지는 초3 수학 캠프 - 고학년 되기 전, 상위 1% 수학머리를 완성하라!
류승재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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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우는 과목 중에서 '절대진리'를 가르치는 과목은 '수학' 단 하나다.

역사는 해석이고, 윤리는 관점이고 과학은 분류와 정의의 학문이다. 즉 다시말해서 대부분의 과목은 '언어' 위에 '해석'이라는 도구가 사용된다. '언어'라는 것은 '모호한 것'을 '정의'하면서 발전해 나간다.

최초의 세상에는 '언어'가 없다. 인간이 태어 났을 때도 그렇다.

막 태어난 아이는 하늘에 떠 있는 밝고 둥근 물체를 문화에 따라 '태양'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Sun'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즉 대상에 이름을 짓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태양은 뚜렷하게 보이지만 실제 그 구체 덩어리는 뜨겁게 흩어지는 플라즈마 덩어리일 뿐이다. 겉과 속은 경계가 흐릿하고 거기서 발산되는 빛은 수십만 km로 확장된다. 고로 정확히 '칼로 자르듯' 어디서부터 '태양'이라고 부를 수 없고 '태양'이라는 것은 애초에 '우주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가 그리 모호하니, 언어를 이용하는 거의 모든 학문은 전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단 수학은 다르다.

내가 사과를 하나 가지고 있고 상대가 사과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이 사과를 한 바구니에 담는다면 바구니 속 사과는 총 몇개가 존재하는가.

거기에는 모호함 없이 '둘'이라는 답이 나온다. 그것은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고, '파키스탄'이나 '이스라엘'에서도 그렇다. 아마 이 '수'에 대한 개념을 태양계 밖으로 가지고가 안드로메다 은하에 존재할지 모를 지적 생명체에게 물어도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고로 수학은 '절대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과목인 셈이다.

이 '진리의 언어'를 아이는 서서히 익혀 나간다.

'영어는 외국인을 만날 때 쓸 수라도 있는데 수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틀렸다. 수학은 매우 실질적인 학문이다. 단순히 입시를 위한 기초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데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즉 생각의 뼈대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수학'의 기본은 대체로 '초등학교 3학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A마트에서 사과 3개에 5천원에 판다고 하자, B마트에서는 사과 5개에 8천원이다. 여기까지는 조금 생각해보면 계산할 수 있겠다. 단, A마트에서는 포인트 적립이 4%, B마트에서는 포인트 적립이 5%라고 했을 때, 우리는 어느 마트를 이용해야 하는가.

이렇게 발생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차이가 모든 아이템과 모든 결정에서 평생에 걸쳐 발생했을 때, 그 차이는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이들은 '세금'에서 관련된 계산이 필요하고 어떤 이들은 '급여'에서 '고정지출'을 줄일 수가 있다. 또한 '시간'을 쪼개어 사용하는데도 이런 전략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대수의 법칙'을 이용하여 시행횟수를 무한대로 늘릴 경우에 수학적 확률에 무한대로 가까워진다는 내용도 진리에 가깝다.

이런 대부분의 것들은 꼭 쓸모가 없어보이지만 분명 쓸모가 있다. 사고하는 연습을 제대로 하는 것은 단순히 '중간고사 시험에서 90점이냐, 95점이냐의 차이를 넘어선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수에 대해 자유롭게 바라 볼 수 있는 시각을 무려 12년을 연습한다. 이 12년의 훈련 과정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12년의 기간동안 어떤 학습과 훈련을 했는지에 따라 주어진 정보를 '받아들이는 사고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저 딱! 보면 그냥 그렇다!라는 것이 직관적으로 보여진다. 그것을 우리는 '통찰력'이라고 부른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중요한 '수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노출이 될 수 있을까.

'입시를 책임지는 초3 수학 캠프'의 저자 ' 류승재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을 수학 학습의 골든 타임으로 보고 수학 정서와 습관, 계획의 중요성을 말한다.

초3이라는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렇다. 수학이 '놀이'에서 '개념'으로 바뀌는 첫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딸과 같이 초등학교 2학년의 경우에는 연산 위주의 직관적 계산만 배울 뿐이다. 다만 초3이 되는 내년부터는 분수, 도형, 단위 등 수학이 추상화되기 시작한다.

 즉 눈에 보이는 수에서 눈에는 없는 관념에만 존재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구조로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이해하는 것보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에 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이유도 '보통명사'와 '추상명사'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나무'를 그림으로 그리고 '돌'을 사진을 보고 알 수 있지만 '미움', '증오', '믿음', '신용'이라는 것은 그런것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초3은 동물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 수에서 인간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인 관념을 이해하게 된다.입체, 평면, 각도 등이 나온다. 즉 초3이 되었을 때 수학은 '언어'와 '사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으로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시기다.

 '함수'와 '확률', '비례', '방적식 등을 배우게 된다. 어떤 침팬지와 돌고래, 코끼리들은 훈련만으로도 '덧셈과 뺄셈'을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지능 동물들은 '통분'과 '소수' 따위의 개념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즉 초등학교 3학년에 수포자가 된다는 것은 '코끼리, 침팬지, 돌고래'의 수학능력만 가지고 인간 사회에 던저지는 것이다. 고로 수학은 단순히 공식을 외워서 덧셈 뺄셈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추론능력'을 학습하고 '관념'과 '추상적인 개념'을 머릿속으로 훈련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입시'라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물'에 가깝다.

21세기북스에서 출간한 입시를 책임지는 초3 수학 캠프에서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수학에 흥미를 갖고 대입까지 갈 수 있을지, 그 초입인 초3의 전략들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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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미래 - 완전판
타츠키 료 지음, 전경아 옮김 / 도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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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마야의 달력'을 근거로 지구가 종말을 한다고 했을 때, 인터넷에 적잖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노스트라다무스'라던지 '마야의 달력'이라던지. 그러나 2012년에는 '종말'이 아니라, 2012라는 헐리우드 영화가 대신 찾아왔고 해당 루머의 확산에 맞게 적정한 흥행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종말 대비 생존 키트가 팔렸고 지구 종말 전날에는 각종 커뮤니티는 떠들썩 했다.

이런 예언들은 정확성보다는 사람들의 불안이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예언이라는 것은 모호성을 가지고 꾸준히 '현실'에 대입하여 답을 얻어내는 과정에 가깝다. 실제로 '난카이 대지진'은 향후 30년 안에 발생할 확률이 80%가 넘는다고 한다. 그말은 어느 누군가가 '앞으로 일본에서 큰 지진이 발생합니다'라고 말할 경우, 그 예언이 언젠가 들어맞을 가능성은 80%에 육박한다는 의미다. 예언의 적중확률이 30년 사이에 80%라면 굉장히 높은 확률이다. 고로 어떤 이들은 이를 계기로 '스타'가 되곤 한다.

과거 1954년 미국 중서부에 '도로시 마틴'이라는 여성이 있었따. 그녀는 외게인으로부터 텔레파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지구에 1954년 12월 21일 대홍수가 일어나고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이 예언을 믿는 자들은 UFO를 타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예언에 소규모 추종자가 생겼다. 추종자들은 주변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며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다면 1954년 12월 21일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다 아무 일어나지 않았다. UFO도 오지 않았고 종말도 없었다. 비는 커녕 되려 맑은 하늘의 날이 왔다고 한다. 보통 이런 전개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었던 신념'을 포기하고 '내가 잘못 알았구나'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이와 반대로 여겼다.

"우리의 기도가 강력하여 재난을 막았다. 우리는 인류를 구한 영적 존재들이다."

당일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고치기는 커녕 더 강하게 신념을 굳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적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페스팅거'는 이러한 과정을 관찰하면서 이런 반응에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인지부조화'

'인지부조화란 사람이 두 개의 모순된 인지를 동시에 가질 때, 느끼는 심리적 불편함을 말한다. 고로 이러한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서 되려 '사고'를 왜곡하거나 '태도'를 바꾼다.

일본에서 떠도는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의 대지진은 7월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2025년 7월 5일. 즉, 지금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오늘'이라고 한다. 현재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인 2025년 7월 5일 18시 45분까지,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이 '예언'이 틀렸음을 받아들일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사람들은 예언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상징적인 날짜'가 달랐다라고 말하며 진짜 날짜는 아마 다음 언제라고 찝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일본 지진에 관한 루머가 얼마나 극성 맞은지, 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지진'을 키워드로 검색하고 있다. 또한 일본 여행자의 수가 10%이상 감소하는가 하면 항공티켓이 아주 저렴하게 나온다고 한다.

2012년 헐리우드 영화가 '개봉'하여 대박을 내었듯, 2021년 복간 후에 '내가 본 미래'라는 책은 5개월 만에 50만 부가 팔렸고, 현재까지 거의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예언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뉴스'와 커뮤니티에서 해당 도서를 언급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추가 상승 여력이 더 있다.

7월이 되면서 일본에 지진이 날 것인지에 대한 예상은 할 수 없겠으나 아주 높은 확률로 '내가 본 미래'의 작가, '타츠키 료'는 부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해당도서는 이미 한국어판, 영어유튜브 해설 영상, 중국 등지에서 유사 컨텐츠로 확장된다.

개인적으로 일본에 가까운 미래에 대지진이 일어날 것에는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만화'에 기록된 예언이 적중할 것이라고는 그닥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공포를 이용한 마케팅은 언제나 성공을 거둔다. 그것을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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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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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한다. '가로 지르다'라는 '디아'와 '씨앗처럼 '씨앗을 뿌리다'라는 '스포라'가 합쳐진 말이다. 다시말해서 어떤 이유로 씨앗처럼 흩뿌려진 이들의 이야기다. 고로 '디아스포라'를 소재로 한 '폴 윤' 작가의 '벌집과 꿀'에는 '시대'도, '지역'도, '언어'도 다른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재가 그렇듯 소설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해피앤딩'이나 마냥 밝은 분위기의 '작품'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어두운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두운 분위기'의 소설이 주는 묵직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선정할 때도 그렇다. 어떤 영화들은 주인공에게 '시련'과 '도전'을 던지지만 '러닝타임'이 끝나갈 중반 이후가 되면 갈등이 고고조에 이르다가 갑자기 모든 갈등이 마법처럼 풀려 버린다. 마치 모든 문제가 하나도 없어지는 것처럼 깔끔하게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극은 마치 '디즈니 만화의 엔딩'처럼 '그렇게 모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고 끝나 버린다. 그 얼마나 비현실적인 결론인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은 이런 비현실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봤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치 SF소설처럼 오히려 비현실이기에 더 극을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반대다. 모든 갈등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그런 비현실성은 외계인이 침공해 오는 일보다 더 있을 수 없다. 적당한 현실성을 바탕으로 비현실성을 그릴 때 더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화창한 날씨'보다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폭풍우의 날씨를 좋아한다. 물론 '일상'이 아닌 '주말'의 경우 그렇다. 번쩍 거리며 '우르르 쾅'하고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 몰아치는 바람과 비를 창문 밖에서 바라 볼 때, 나는 때로 안정감을 느낀다.

적정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등,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창밖의 폭풍을 바라보면 지붕과 벽이라는 안전한 장치로부터 보호된다는 안정감을 갖게 된다.

'폴윤'의 벌집과 꿀은 그런 의미의 소설이다. 고통이나 상실, 외로움, 침묵, 단절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활자 밖으로 눈을 꺼내면 쌍둥이 아이들이 시끄럽게 싸우고 놀고 있다. 일종의 이런 안정적인 대비감에서 '편안하게 비극'을 즐기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이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삶이 안정적일수록 '공포, 불안, 비극을 담은 콘텐츠를 잘 감상하고 즐긴다고 한다. 안정적일 수록 '공포'나 '비극'이 주는 편도체의 활동이 적고 '전두엽'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에 통제 가능한 공포나 비극에 대해 '오락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지구촌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넷플릭스'라는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통해 '오징어게임'을 감상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아마 실제 그와 비슷한 생존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영상 컨텐츠는 즐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벌집과 꿀'은 '편함' 속에서 읽는 '비극'이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어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름은 있지만 국적은 모호하고 가족은 있지만 함께하지 않으며 삶은 있지만 거기에 소속감 따위는 없다.

이들 대부분은 대부분 조용하게 살아간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러시아', '일본', '스페인'처럼 그 배경은 다르지만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감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단순히 외국에 '이민'한 '이주민'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어디에도 두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극이나 슬픔은 마음껏 떠들어댈 때보다 숨기고 침묵했을 때 더 깊어진다. 작가는 인물의 감정을 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조차 드러나지 않는 장면도 많다. 그저 인물의 움직임이라던지, 시선, 말 없는 동작을 통해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독자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동정할 의지를 주지 않는다. 고로 이 책은 꽤 얇지만 읽는데 시간이 걸린다. 한 줄 한 줄 그 고통을 음미하며 온전히 느끼고 마치 무거운 돌을 하나 하나 들어 옮겨내듯 문장이 주는 삶의 무게를 감내해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초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 묵직하지면 결국 모두가 적당한 고통을 안은 채 묵묵히 삶을 이어가는 이 이야기가 '몹시' 현실적이다.

무더운 여름 날, 조용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 밑에서 이런 비극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안정감이 꼭 어쩌면 '지금의 삶'을 만족시키는 반전의 효과도 지니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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