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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한다. '가로 지르다'라는 '디아'와 '씨앗처럼 '씨앗을 뿌리다'라는 '스포라'가 합쳐진 말이다. 다시말해서 어떤 이유로 씨앗처럼 흩뿌려진 이들의 이야기다. 고로 '디아스포라'를 소재로 한 '폴 윤' 작가의 '벌집과 꿀'에는 '시대'도, '지역'도, '언어'도 다른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재가 그렇듯 소설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해피앤딩'이나 마냥 밝은 분위기의 '작품'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어두운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두운 분위기'의 소설이 주는 묵직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선정할 때도 그렇다. 어떤 영화들은 주인공에게 '시련'과 '도전'을 던지지만 '러닝타임'이 끝나갈 중반 이후가 되면 갈등이 고고조에 이르다가 갑자기 모든 갈등이 마법처럼 풀려 버린다. 마치 모든 문제가 하나도 없어지는 것처럼 깔끔하게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극은 마치 '디즈니 만화의 엔딩'처럼 '그렇게 모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고 끝나 버린다. 그 얼마나 비현실적인 결론인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은 이런 비현실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봤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치 SF소설처럼 오히려 비현실이기에 더 극을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반대다. 모든 갈등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그런 비현실성은 외계인이 침공해 오는 일보다 더 있을 수 없다. 적당한 현실성을 바탕으로 비현실성을 그릴 때 더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화창한 날씨'보다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폭풍우의 날씨를 좋아한다. 물론 '일상'이 아닌 '주말'의 경우 그렇다. 번쩍 거리며 '우르르 쾅'하고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 몰아치는 바람과 비를 창문 밖에서 바라 볼 때, 나는 때로 안정감을 느낀다.
적정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등,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창밖의 폭풍을 바라보면 지붕과 벽이라는 안전한 장치로부터 보호된다는 안정감을 갖게 된다.
'폴윤'의 벌집과 꿀은 그런 의미의 소설이다. 고통이나 상실, 외로움, 침묵, 단절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활자 밖으로 눈을 꺼내면 쌍둥이 아이들이 시끄럽게 싸우고 놀고 있다. 일종의 이런 안정적인 대비감에서 '편안하게 비극'을 즐기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이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삶이 안정적일수록 '공포, 불안, 비극을 담은 콘텐츠를 잘 감상하고 즐긴다고 한다. 안정적일 수록 '공포'나 '비극'이 주는 편도체의 활동이 적고 '전두엽'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에 통제 가능한 공포나 비극에 대해 '오락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지구촌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넷플릭스'라는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통해 '오징어게임'을 감상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아마 실제 그와 비슷한 생존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영상 컨텐츠는 즐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벌집과 꿀'은 '편함' 속에서 읽는 '비극'이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어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름은 있지만 국적은 모호하고 가족은 있지만 함께하지 않으며 삶은 있지만 거기에 소속감 따위는 없다.
이들 대부분은 대부분 조용하게 살아간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러시아', '일본', '스페인'처럼 그 배경은 다르지만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감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단순히 외국에 '이민'한 '이주민'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어디에도 두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극이나 슬픔은 마음껏 떠들어댈 때보다 숨기고 침묵했을 때 더 깊어진다. 작가는 인물의 감정을 과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조차 드러나지 않는 장면도 많다. 그저 인물의 움직임이라던지, 시선, 말 없는 동작을 통해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독자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동정할 의지를 주지 않는다. 고로 이 책은 꽤 얇지만 읽는데 시간이 걸린다. 한 줄 한 줄 그 고통을 음미하며 온전히 느끼고 마치 무거운 돌을 하나 하나 들어 옮겨내듯 문장이 주는 삶의 무게를 감내해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초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 묵직하지면 결국 모두가 적당한 고통을 안은 채 묵묵히 삶을 이어가는 이 이야기가 '몹시' 현실적이다.
무더운 여름 날, 조용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 밑에서 이런 비극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안정감이 꼭 어쩌면 '지금의 삶'을 만족시키는 반전의 효과도 지니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