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 듯 다시 도하고 소리 낸 뒤 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벽 사이론 오후의 볕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 - P9

만두 집을 했던 엄마가 어떻게 피아노를 가르칠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욕심이거나 뭔가 강요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배움이 짧았고, 자신의 교육적 선택에 늘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다만 그때 엄마는 어떤 ‘보통‘의 기준들을 따라가고 있었으리라. 놀이공원에 가고, 엑스포에 가는 것처럼,
어느 시기에는 어떠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풍문들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어릴때 엑스포에 가고 박물관에 간 것이 그렇게 재밌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엑스포에 보내주고, 놀이공원에 함께 가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누구나 겪는, 평범한 유년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무지한 눈으로 시대의 풍문들에 고개 끄덕였을, 김밥을 싸고관광버스에 올랐을 엄마의 피로한 얼굴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이따금 내가 회전목마 위에서 비명을 지르는 동안, 한 손으로얼굴을 가린 채 벤치에 누워 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 P13

그녀는 후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유세를 떠는 것 같고, 그런검열과 의식적인 배려를 해야 하는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녀는 지각한 탓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쁜 배역을 억지로 맡아버린 학생처럼 연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내뱉는다. 이제 그만 후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예감에서부터 체념까지 사람과 헤어지는 과정을 순간 끝내버리는 듯한 훈련된 눈빛이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다. 후배는 궁둥이에 커다란 얼룩을 단 채, 화장실에 가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 그녀가 후배를 달랜다. 언니가 몸도 안 좋고 요즘 신경이 예민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생각해온 문제다. 서로를 위해 더 이상 함께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이번 달까지 여유를 갖고 정리하자.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후배가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알았어요. 그녀가 후배를 바라본다. 후배가 말한다.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언니. 그녀는 아무 말도 않는다.
‘저 아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자기가 먼저 괜찮다고 해버리는 걸까?‘  - P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약한 정당-강한 당파성이라는이분법의 핵심이다. 위협은 사랑만큼 강력한 정치적 동기다. 2016년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구조사 결과 클린턴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강력히 지지하기 때문에 투표했다고 답한 유권자들의 표 53%를 얻었지만, 트럼프는 상대편에 반대하기 위해 투표했다고 답한 유권자들 사이에서 11% 차이로 앞섰다. 즉, 트럼프의 승리는 클린턴에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들 덕분이었다. 실제로 일부 선거 전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지지자들 대다수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보다 클린턴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동기였다고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진보주의자라면, 클린턴에게 투표하기 위해 꼭 그를좋아할 필요는 없었다. 트럼프가 하고 말한 모든 것은 공화당이 제정신이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화당에 권력이 넘어가면 안 된다는 증거였다. 클린턴 선거운동의 상당 부분은 그러한 시각에서 진행되었다. 왜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되면 안 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트럼프와 같은 역할을 했다. 클린턴은 현대에 들어 가장 양극화한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인종과 젠더 문제에서 버니 샌더스보다 더왼쪽으로 달림으로써 예비선거에서 이겼고, 공화당 선거운동은 클린턴을 말 그대로 ‘감방에 처넣어야 할 범죄자‘로 보이도록 하는 데 집중됐다. 만약 당신이 공화당 지지자거나, 단순히 민주당 권력 연합체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트럼프에게 표를 주기 위해 꼭 그를 좋아할 필요는 없었다. - P242

투표할 때 당신은 한 후보, 한 연합체, 한 사회운동, 한 미디어 생태계, 일련의 기부자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우려하는족속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투표한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지지 후보에 대한 애정을 키울 이유를 제공하고, 애정을 갖지 못하더라도 어찌 되었건 그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을 정당화할 이유를 제공한다. 한 후보의 인격보다 소속 정당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정치는 개인이 아니라 정당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로 인해 미국이 처한 현실을 보라. 정당들, 특히 공화당은후보 지명과 관련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 하지만 일단 한 정당이누군가를(누구라도) 지명하면, 그 사람은 당 엘리트들과 유권자 모두의 지지를 보장받게 된다. 표 분할이 흔했던 골드워터나 맥거번 시절과달리, 당의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후보라면 그 누구라도당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아주 좋은 기회를얻게 된다.
이는 어쩌면 더 무서운 일일 수 있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선동적인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더 큰 힘을 얻기 때문이다. 2016년 1월 오랫동안 보수주의를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해온 《내셔널 리뷰》는 "트럼에 반대하며"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트럼프가 행여 대통령이나공화당 지명자, 심지어는 보수 진영의 강한 지지를 업은 실패한 후보가 된다면, 그것이 보수주의자들과 관련해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이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소련을 서서히 해체하고 잠시나마 사회주의의 빛을 흐려지게 만들었던 운동이 장사치 뒤로숨어버렸을 것이다. 입헌 정치, 결혼, 생명권과 같은 ‘영구적인 것들‘과관련한 운동은 트위터 피드를 위한 박수 부대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 - P244

1990년 린스는 「대통령제의 위험성 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이라는논문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안정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다수는 입법권을 가진 쪽이 행정권을 획득하는 의원내각제 체제였다.‘ 하지만 미국은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였다. 대통령은 의회와별개로 선출되고 종종 의회와 의견 충돌을 겪는다. 이 시스템은 이전에도 시도된 적이 있었으나 걱정스럽게도 이 시스템이 살아남은 곳은 미국이 유일하다.
문제는 간단하다. 의원내각제에서 수상은 입법부를 장악하는 연합체의 지도자다. 만약 그 연합체가 선거에서 진다면, 권력을 잃는다. 어떤 순간에도 오직 한 정당이나 연합체만이 권력을 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통령제에서는 한 정당이 입법부를 장악하고 다른 정당이 대통령직을 장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정당 모두 민주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린스는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민을 대신해서더 큰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가? 대통령인가 아니면 입법부 내 다수당인가?"
대통령과 의회가 다른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실시된 투표로 뽑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통령은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되는 경향이있지만, 입법부는 작은 마을들과 시골 지역들에 더 큰 힘을 주는 상황에서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린스는 지적했다. 단일 유권자들 사이의 민주적 의견 차이를 해결하기만도 어려운데 하물며 다른 유형의 유권자들을 반영하는 의견 불일치에 직면할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것은 답이 없는 질문이다. 보통 우리는 이러한 시스템이 타협을장려한다고 가정하는데, 경쟁하는 정치적 연합체들이 타협에 열려 있을 때라면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스템은 위기를 부추길수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군부가 중재자로서 정치에 개입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종류의 위기다. - P252

린스가 주장한 것처럼, 권력이 다른 부들(정부를 구성하는 3부인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옮긴이) 사이에 분배되는 대통령제는 이 부들을 통제하는 정당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을 때 작동하며, 이것이 20세기 대부분 기간 동안 미국 정치 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정당들은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또한, 이 점이 중요한데,
‘전국화‘되어 있다. - P259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강한 지역 감각에 기반하고 있다. 하원은 두 정당의 회의를 개최하는 곳이 아니라 435개 선거구의 회의를 여는 곳이다.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을대표하는 곳이 아니라 50개 주의 이익 균형을 맞추는 곳이다. 이것은 미국의 정치적 정체성이 국민이라는 더 추상적인 결합이 아니라 각자의 도시와 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화국 설립자들의 믿음(그 당시에는 옳았다)을 반영한다.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논집 46에서 "많은 고려사항을 볼 때 (•••) 모두의 최초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애착은각 주의 정부에 대한 애착일 것이다"라고 썼다.
주와 지역 정치가 국가 정치의 중심이라는 점은 양극화에 대해 미국정치 시스템이 가진 제동장치 중 하나였다. 양당 경쟁의 제로섬적인 힘은 특정 지역에 뿌리를 둔 정치인들의 지역적 이익 앞에서 완화되었다. 당신은 공화당 의원이고, 법안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민주당 의원들일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오클라호마주 공화당 의원이고, 그리고 젠장, 이법안이 오클라호마주에 도움이 된다면? 당은 당신이 그 법안에 반대하길 바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찬성한다면 당신의 지역구는 절실히 필요했던 다리를 건설할 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그 다리에 새기는 것은 동료 의원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
최소한 과거에는 그랬다.
대니얼 홉킨스는 ‘점점 더 미합중국이 되어 간다에서 미국 정치의 골치 아픈 전국화를 추적했다. 전국화의 핵심은, ‘우리는 국가보다우리의 고향과 더 깊은 일체감을 가질 것이다‘라는 미국 건국자들의 가장 분명한 가정을 뒤집는 것이다.  - P261

분류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대칭적으로 들릴 수 있다. 공화당은백인 유권자의 정당이 되었고, 민주당은 비백인 유권자의 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그 둘의 정당 구조는 매우 달라졌다. 분류는 민주당을 서로다른 이들의 연합체로 만들었고 공화당원은 더 같게 만들었다.그 결과 민주당에 호소하려면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한다. 이는 뉴햄프셔주의 진보적인 백인들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전통주의적 흑인들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보스턴에 사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과 캘리포니아에 사는 불교 수행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은 지지를 얻기 위해 넓게 움직여야 하며, 권력을 얻기 위해 우파 영역까지 손을 뻗어야 한다. 반면 공화당은 깊이를 추구할 여유가 있다.
이는 여론조사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을 보수라고 부르는 미국인의 비율은 오랫동안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압도했다. 1994년,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38% 대 17%로 압도했다. 이 격차는 최근 몇 년 동안 좁혀졌지만, 2019년 1월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이 35% 대 26%로 앞서고 있다. 공화당원들 중 4분의 3이 자신들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민주당원들 가운데 절반만이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한다. 그리고 민주당에 이것은 역사적인 고점이다. 2008년까지 민주당 안에서는 자신을 중도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보다 많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공화당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당원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그럴수 없었다. 그들은 백인들과 흑인, 진보주의자와 중도파, 고정된 사람들과 유동적인 사람들로 구성되는 연합체의 요구를 들어야 했다. 민주당은 서로 다른 집단에 서로 다른 정책을 약속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정당 구축에 있어서 이념적 접근법 이상의 교류주의적 접근법을 내놓았다. - P286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의 정치 시스템은 지리적 단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이 모든 단위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보다인구가 적은 시골에 특혜를 준다. 이는 버몬트가 뉴욕과 같은 권력을행사하는 상원을 보면 명확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선거구 획정 방식 때문에 하원에서도, 그리고 선거인단 때문에 백악관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대통령 선거와 상원의원 선거 결과를 반영하는 대법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권력은 권력을 낳는다. 공화당은 당파적인게리맨더링, 친기업적인 선거자금법, 엄격한 유권자 신분증 요건, 반도조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다수당 지위를 이용하고 있고,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민주당이 선거에서 더 불리하게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이 아니다(물론 그렇다고 믿지만). 대신 나는이 시스템이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양극화를 억제하고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양극화를 확산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 P297

정체성 마음챙김
모든 정치는 정체성의 영향을 받는다. 모든 정치가 말 그대로 정체성 정치이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정체성의 영향을 받고, 정치는 인간 인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상황에서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처한 맥락이 얼마나 우리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는지 우리는 결코 완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자랐는지, 누구를 믿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존경하고 무시하는 법을 배웠는지. 이런 것들은 의식의 차원을 넘는 영역이기도 하다. 정체성이 활성화되는 데 걸리는 1000분의 1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신적 프로세스는 우리가 간단히 떼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체성이 휘두르는 힘을 통제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이용할 수는 있다. 기억하라. 우리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다. ‘공화당원‘이나 ‘민주당원‘은 정체성이다. 하지만 ‘공정한 사람‘, ‘기독교인‘, ‘호기심 많은 사람‘, ‘뉴요커‘도 정체성이다. 자신을 가난한 사람, 동물, 아동권리의 옹호자로 보는 것은 한 정당의 당원이 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정체성이다. 정치적 연합체들에는 정체성을 정의하고, 통제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거대한 기구가 있다. 당신이 이 상부 구조에서 벗어나고자한다면,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 P317

우리가 모든 정보를 회피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내직업적 이익에 반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단도직입적으로 하겠다. 우리는 국가 정치에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이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적다. 반면 우리는 지방 정치에는 너무 적은 관심을 쏟고 있다. 주와 지방에서는 우리의 목소리가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트럼프가 올린 트윗에 분노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은(분명 이 행위가그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며, 핵심은 그가 대화를 통제할 수 있도록 모든 미디어 산소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이웃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데 쓰는 것이 더 낫다.
대니얼 홉킨스는 "미국에는 50만 명이 넘는 선출직 공직자가 있으며, 그중 537명만이 연방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다"라고 썼다‘ 537명의연방 공직자들은 가장 많은 유권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가장 적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직자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그들은커피 한잔으로도 기꺼이 우리를 만나줄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이건 우리가 게으르고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미디어가 전국화되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주와 지역 차원에서 특별한 결과물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주와 지역 저널리즘을 되살리는 것은 그 자체로 책 한 권이 필요한 주제이다). 그저 노력하라는 말 외에는 해줄 말이 없다. 당신의 미디어 식단에 지역 뉴스 매체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지역 관련 정치적 정체성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도움이 된다. 특히나 소셜미디어 친구들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전국 단위 출판물들이 당신이 사는 지역이나 주에 관한 이야기를 떠밀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 P321

우리가 종종 미국 민주주의의 황금기로 떠올리는 시대는 오늘날보다 훨씬 덜 민주적이고 덜 진보적이었고, 덜 점잖았다. 트럼프의 가장 무절제한 감정 분출과 가장 외설적인 생각도 역사 앞에서는 빛이 바랜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정치 기관들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할 수 있는, 통치를 잘했던 체제들과 비교해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가내일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훨씬 더 잘하고 있을 것이다. - P3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거 자금과 정치적 양극화Campaign Finance and Political Polarization에서 규제가 돈이 정치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게 아니라, 돈이 들어오는 길이 정치를 바꾼다고 주장한다. 정당 기부에 제한을 가하면, 사람들은 후보자에게 기부하기 시작한다. 후보자 기부에 제한을 가하면, 그들은 슈퍼팩PAC (정치행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는 특정정치인이나 법안 등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단체를 말한다. 슈퍼팩은 일반 PAC과는 달리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 직접 자금을 대주는 방식이 아니라면, 무한정으로 돈을 모으거나 쓸 수 있다-옮긴이)에 기부한다. 이것은 다른 주들의 다양한 규정들을 이용하면 다양한 모금 규칙이 정치를 상당히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각 정당이 막대한 자금을모금해 후보에게 나눠주는 주와, 후보들이 스스로 기금을 모금해야 하는 주를 비교할 수 있다. 그래서 라 라자와 샤프너는 50개 주의 1990년부터 2010년 사이 자료를 모아서 정당에 대한 기부 제한이 양극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연구 결과가 주는 교훈은 명확했다. 정당이 강할수록 주 의회의 양극화가 덜했다. 이러한 경향은 돈의 액수가 큰 주에서 주로 나타났다. 36개의 가장 ‘전문적‘인 입법부들(국회의원이 실제로 보수를 받는 직업인 주들)을 살펴보면서 라 라자와 샤프너는 1997년과 2007년 사이에 정당 기부를 제한했던 주와 그렇지 않은 주를 비교했다. 그들은 "정당기부를 제한한 28개 의회는 무제한 기부를 허용한 8개 의회보다 거의 3배에 달하는 양극화 증가 양상을 보였다"라고 썼다. - P2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괴벨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그래요, 그건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이해해요. 하지만 다른 건 너무 비겁한 짓이었어요. 특히 아이들까지 희생시킨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그런 일만 없었다면 지금도 어엿한 성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 아니에요.
너무 잔인한 짓이었어요. 그것도 자기 배로 낳은 아이들을어머니가 죽이다니! 물론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자발적인 죽음은 간혹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죄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이들을 죽인 건 전쟁 자체만큼이나 큰 범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모든 일을 야기한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도망을 치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건 내가 보기엔 너무 비겁해요. 그 인간들은 약을 먹고 죽었어요. 괴링도 음독자살을했고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했어요.
진짜 책임자는 저 위에 있는데도요. 히틀러죠! - P186

물론 어리석었다는 면에서는 책임이 있어요. 하지만 원래 어리석게 행동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을 약속했고, 처음 몇 년 동안은 실제로 그리될 것도 같았어요. 전쟁에 패배한 뒤 도저히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배상 협정에 묶여 있던 낙담한 국민들에게 민족의 부흥을 약속하는데 누가 마음이 동하지 않겠어요?
나치의 잔학한 행동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은 주로 그런 시설이나 감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랬다가는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게 두려웠던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전부 당원은 아니었어요. 그중 상당수는 그냥 평범하고 소박하고, 어쩌면 약간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이었죠.
나는 동조자가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더 많은 것을 알고있어야 했겠죠. 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간 그 미련한 당에 별 생각 없이 경솔하게 끌려 들어간 것뿐이에요. - P189

나는 인간들이 똑같은 것에 다시 한번 속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일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대중이라고 생각해요. 숙고하고 비판하는 일에는 좀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배만 부르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정치판에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의 걱정을 일부라도 해결해 주면 만족해해요. 그러지 못하면요? 그다음은 아무도 모르죠!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문제들에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보이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그러지 못했어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죠. 내가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성숙해요. 그건 백번 인정해요. 나는 우리도 그런 교육을 받고 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우리 때는 무조건 복종해야 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아주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따끔한 벌을 받았죠. 그러다 보니 모든 게 순조롭게 잘 흘러갔고, 질서도 잘잡혔어요. 그게 바람직한 일인지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 P210

에바 같은 경우는 많았을 거예요. 유대인을 돕던 독일인친구 중에는 그 일로 위험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었어요.
나중에 드러난 바에 따르면 말이에요.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몰라요. 당시에 우리가 탄압받던 그 불쌍한 유대인들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고 말이에요. 물론 선의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 사람들도 막상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로는 온 나라가 거대한 수용소 같았어요. 자유라고는 없이 모두가 감시 속에서 살았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로는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었어요. 다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유대인탄압도 그중 하나였지만, 그 밖에 다른 일도 많았어요. 거기다 전쟁에 나간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늘 달고 살았죠. 사죄할 일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 P215

완전히 잘못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호도한 나치 자신들,
즉 나치 지도부만 빼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었어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계층만의 무관심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에도 늘 반복해서 볼수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무관심을 말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끔찍한 일들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어요. 또 수백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죽는 것도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방송이 끝나면 금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즐겁게 저녁을 보내죠. 그런 걸 본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지도 않아요. 그런 게 인생이겠죠. 모든 게 그렇게 섞여 있는 게 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 P216

브룬힐데 폼젤은 나치 정권의 다른 어떤 산증인들보다더 솔직하게 자신의 기회주의를 인정한다. 그녀가 정치에대한 자신의 무관심과 훗날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청소년기의 이기심과 개인적인 욕망이다. 가난의 경험, 사회적 추락에대한 공포, 부와 출세에 대한 동경, 이것이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기까지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폼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적 출세였다. 그랬기에 상사인 요제프 괴벨스의 행위들을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서 뭔가 개인적인 출구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그냥 손쉽게 외면하는 쪽을 택하고 말았다. - P223

브룬힐데 폼젤의 이야기는 독재 체제의 출현을 간과하다가 나중에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즉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기회를우리에게 제공한다. 또한 오늘날의 포퓰리스트들이 서구적 색채의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것을 팔짱만 끼고 지켜보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기도 한다. 우리가 현재 백여섯 살의 브룬힐데 폼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녀의 노골적인 <비겁함>과 비정치적인 태도속에서 현재에도 오래전부터 다시 번성하기 시작한 무언가를 뚜렷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범하게 퍼져 있는정치적 무관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하자면 난민들의 운명,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타오르는 증오, 그리고 민주주의와 유럽의 통합에 강력한 투쟁을 예고한 우익 포퓰리즘의 새로운 비상에 대한 정치적 태만과 무감각이다.
브룬힐데 폼젤의 노골적인 이기심, 나중에 방송국 기자가 된 불프 블라이의 매력적인 이직 제안, 출세욕과 상류층에 끼고 싶은 욕망, 이것들이 그녀가 나치당에 가입하고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게 된 주된 동기였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나치 핵심부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다음 괴벨스가 연단에 올라갔어요. 연설을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대중을 휘어잡는 기술이 뛰어났죠. 실제로 그날도 괴벨스는 서서히 자기 말에 스스로 도취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화산 폭발과 같은 순간이 찾아왔어요. 무슨 정신 병원에서 일어난 광란의 폭발 같았어요. "이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괴벨스가 이렇게 외치는 순간이었어요. 그러자 마치 다들 말벌에 쏘인 것처럼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고 두 팔을 미친 듯이 휘둘러댔어요. 귀청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나랑 같이 온 동료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어요. 우린 둘 다 숨조차 쉴 수 없었어요.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경악한 거죠. 괴벨스 때문만도 아니고 이 군중때문만도 아니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던 거죠. 우리 둘은 군중의 일부가 아니었어요. 우린 아마 유일한 관객이었을 거예요.
나는 괴벨스 자신도 그 순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수백 수천 명을 동시에 일어나게 해서 함성과 환호를 지르게 할 수 있는지 정말 표 현할 말이 없어요. 어쨌든 괴벨스는 그렇게 했어요.
본인도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 우린 가만히 서 있었어요. 서로 손을 꼭 잡은 채로요. 나와 자그마한 체구의 동료 둘이 말이에요. 우린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었어요. 그때 뒤에 서있던 친위대원 하나가 우리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말했어요. 박수라도 따라 쳐요.」 순간 우리는 화들짝 놀라며 함께 박수를쳤어요. 그래야만 했죠. 당연히 그 친위대원은 이런 말도 했어요. 이런 순간에는 혼자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요.
우리는 박수를 쳤어요. 그것도 미친 듯이요. 우리 둘은 이 섬뜩한 광경에 정말 깊은 충격을 받았어요. - P136

나는 괴벨스에 대해 이렇게만 말할 수 있어요. 아주 뛰어난 연기자였다고요. 아주 훌륭한 배우였다고요. 예의 바르고 진지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나운 선동가로 변신하는 역할을 아마 그 사람만큼 잘하는 배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쪽 면만 보고는 절대 다른 면을 상상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체육관 사건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안겼던 그 모습이 그랬죠. 평소 사무실에 있을 때는 그렇게 기품 있고 단정하게 행동하던 멋쟁이가 완전히 돌변해서 미쳐 날뛰는난쟁이가 되는 걸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어요? 한 사람 속에 그렇게 상반된 모습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그 순간 나는 그 사람한테 소름이 끼쳤어요 무섭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도 곧 지워 버렸죠 나는 괴벨스한테 열광하지 않았어요. 어떤 것에도요. 나중에 그 사람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와서 우리한테 다정하게 뭔가를 물어볼때도 그랬어요. 그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 사람이 체육관에서 소리치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저 사람은 지금 세련되게 옷을 입은 부드러운 민간인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거죠. - P140

히틀러의 자살을 다들 개인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어요. 어쨌든 그러고 꼬박 하루가 지나갔어요.
당시 나는 그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어요. 불과 하루밤낮에 불과했는데 말이에요. 그때 다시 슈배거만이 와서말했어요. 괴벨스도 목숨을 끊었다고요. 괴벨스 부인도요아이들은요? 하고 물었더니 아이들도 죽었다고 했어요.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어요.
아, 정말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우리는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어요. 정말 술이 필요한 시간이었으니까요. 물론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계속 술만 마셨어요. 취하기라도 해야 했으니까요. 그거 말고 다른 무슨 일을 하겠어요? 분위기가 어땠는지 아세요? 공포였어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절망감이 팽배했어요. 게다가 이제는 될 대로되라는 심정도 있었어요. 갈 때까지 간 거죠. 여기서 어디까지 더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다끝난건 분명했어요.
러시아 군인들이 나를 총으로 쏴 죽일까? 강간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런 건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심적으로 감각이 죽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공포를 느낀 적은 자주있었지만 이번엔 아니었어요. 그냥 얼음처럼 차가웠어요. 아무 감정이 없었어요. 그냥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고밖에 말하지 못하겠어요. 공포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어요. 대신 이런 감정만 가득했죠. 모든 게 끝났어. 더 이상은 없어. 끝났어. 모든 게 끝이야. - P164

나는 내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당시엔 그런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저 난 항상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줬어요. 그만큼 성실하게 잘했고, 항상 정확했어요. 어떤 자리에 있건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완수했어요. 평생 그랬죠. 당시도 물론이었고요. 그 일이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상관없었어요. 방송국에 근무하건 선전부에서 일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디에 있건 마찬가지였어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당시 난 항상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휴,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구나. 집이 완전히 망가져도, 아, 아직 살아 있구나,
창문이 부서지고 문이 닫히지 않아도, 아직 살아 있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런 생각으로 살아갔을 거예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그게 위안이었죠. - P170

그러나 나는 풀려나지 못했어요. 처음에 나와 함께 구금된 사람은 백러시아 여자였어요. 부모님이 1918년 러시아혁명 때 러시아에서 도주했다고 하더군요. 베를린에는 백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이 백러시아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에겐 나치보다 더 나쁜 인간들이었어요. 자신들을 배신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 여자의 남편은 기자였는데, 남편도 어딘가에서 러시아 군인들에게 검거되었다고해요. 아무튼 이 여자는 계속 불려 가 심문을 받았어요. 불쌍한 여자였어요. 정말 많이 시달렸죠. -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