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분짜리 영상 렌더링을 걸어놓으니 시간이 한참 걸린다. 멍하니 있다가 문득 지난 석 달 동안 읽은 책이나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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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선고
모리스 블랑쇼 지음, 고재정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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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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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의 '트윗 육아'
서천석 지음 / BBbooks(서울문화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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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마디즘 2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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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읽고 있는 책이라고 해야 옳다. 꽤 예전에 읽다가 2권 중간에서 멈추었는데 다시 조금씩 읽어가고 있다. 예전보다 이해가 잘되는게 나도 그간 헛 살았던건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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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다소 지젝의 책 모음에 가까운 모습이다. 

지난번 읽었던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읽으며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들이 이번에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읽으면서 거슬러 올라가 좀 더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보인다. 같은 저자의 책을 이렇게 읽으니 이런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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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적 관점-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 마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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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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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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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11테러 이후의 세계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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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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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주식시장을 어떤 바보 같은 대회에 견주면서 이런 자기지시성을 절묘하게 제시한 바 있다.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미녀 사진 100장을 보고 그중 몇명의 미녀를 뽑게 되어 있는데 평균적 의견에 가장 근접한 여성들을 선태간 사라미 우승자가 된다. "이는 자시의 최선의 판단에 따라 정말로 가장 예쁜 얼굴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며, 심지어 평균적 의견이 가장 예쁘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얼굴을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다. 평균적 의견이 어떤 평균적 의견을 예상하고 있는가를 예견하는 데 지력을 쏟는 세번째 단계에 우리는 도달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훌륭한 선택을 가능하게 할 지식을 구비하지 못한 채 선택을 하도록 강요된다. 혹은 존 그레이의 말대로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듯이 살도록 강요된다." (25쪽)

 
   

 

   
   '말만 하지 말고 뭔가 행하라'는 옛말은 상식의 낮은 기준에 비추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말에 속한다. 오히려 근래의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자여네 개입하거나 환경을 파괴하거나 하는 등의 너무나 많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아마도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이리라. 물론 우리는 종종 무엇을 행하는 대신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기를 회피하려고 그것을 행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어달러를 쏟아붓는 것처럼. (27쪽)   
   

 

   
  (높은 수준의 누진과세 등을 통한) 평등주의적 재분배에 반대하는 표준적 논변인 저 '하방침투 효과'(trickle-down)론을 상기하라. 재분배가 빈자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부자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반개입주의적이기는커녕 실제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관하여 아주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빈자가 부유해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들을 직접 돕는 것은 역효과를 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요구되는 종류의 개입은 부자가 더 부유하게 되도록 돕는 그런 것이며, 그럴 때 이윤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빈자들 사이로 퍼질 것이다. (32쪽)  
   

 

   
 

"자본주의는 철학의 시늉을 내지 않는 체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하는 말은 오로지 이것이다: '자, 이건 제대로 작동한답니다.' 만일 사람들이 더 잘살기를 원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 텐데 이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효율성이다"[...]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명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4쪽)

 
   

 

   
 

다시 말하면 합법적 업무를 피라미드 사기로 '변형'시키려는 유혹은 자본주의적 순환과정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정확한 지점, 합법적 업무가 비합법적 계략으로 변형되는 정확한 지점은 없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자체가 '합법적' 투자와 '무모한' 투기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투자란 그 핵심에 있어 어떤 계략이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의 차용행위이기 때문이다. 상황의 어떤 통제 불가능한 갑작스런 변화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된 것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 이것이 자본주의적 '위험'의 핵심이다. (77쪽) 

 
   

 

   
  새로운 권리들에 대한 요구(이는 권력의 진정한 재분배를 의미했을 터인데)는 수용되었으나 이러한 수용은 오로지 이런저런 '허용'의 모양새를 취하였다. '관대한 사회'(permissive society, 허용하는 사회)란 주체들에게 실질적으로 권력을 더 나눠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할 수 있게 허락된 것의 범위를 확대하는 바로 그런 사회였던 것이다. [...]이혼, 낙태, 동성애 결혼 등등의 권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와 같다 -- 이것들은 모두 권리의 가면을 쓴 허용이며, 어떤 식으로도 권력의 분배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느나. (122쪽)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급진적인 해방정치와 포퓰리즘정치 사이의 궁극적 차이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 니체의 용어를 썻)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 즉 해방정치는 자신의 비전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으로서는 능동적인 반면 포퓰리즘은 불안을 야기하는 침입자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서 근본적으로 반동적이다. 다시 말해 포퓰리즘은 언제나 일종의 두려움의 정치다. 그것은 부패한 외적 행위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써 군중을 동원하는 것이다. [...]푸꼬와 대조적으로 라깡은 "근대에 있어 지식과 권력 사이의 이접(disjunction), 갈라짐, 불화를 제시한다. (...) 문명의 불안에 대한 라깡의 진단은 지식이 '권력의 효과에 비례하지 않는 성장'의 양상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126쪽)  
   

 

   
 

반면 물신은 사실상 징후의 일종의 이면(envers)이다. 다시 말해 징후는 거짓 외양의 표면을 어지럽히는 예외, 억압된 다른 장면이 분출하는 지점이며, 반면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진실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거짓말의 구현체다. [...]물신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로 나는 죽음을 '합리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만 물신에, 즉 내게 있어 죽음에 대한 부인을 구현하는 어떤 특징에 매달린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가혹한 현실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물신주의자는 자신의 개인적 세계에 빠져 있는 몽상가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자신의 물신에 매달림으로써 현실의 거대한 충격을 완화할 수 있기에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134쪽) 

 
   

 

   
  탈레반의 발흥과 같은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명제가 오늘날 여전히 진실일 뿐 아니라 어쩌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적실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는 좌파 우파 '근단주의'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맞는 말이지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어떻게 파시즘이 좌파 혁명을 문자 그대로 대체(자리를 대신)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파시즘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48쪽)  
   

 

   
  해방의 동력이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바뀐 이러한 역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진정한 맑스주의에서 총체성은 이상이 아니라 비판적 관념이다 -- 하나의 현상을 그 총체성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전체의 숨은 조화를 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 안에 그것의 모든 '징후들', 그 적대와 모순들을 체제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하나의 '총체'를 형성하느네, 왜냐하면 그들의 대립은 자유주의 자체가 그 대립항을 생성하는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주의의 핵심가치 --자유, 평등 따위 -- 는 언제 효과를 발휘하는가? 역설은 자유주의 자체는 자신의 핵심가치를 근본주의적 살육에서 구해내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문제는 제 힘으로 버티고 설 수 없다는 데 있다 -- 자유주의적 건축물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 자유주의는 바로 그 관념에 있어 '기생적'인데, 그것은 그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자신이 허물어뜨리는, 어떤 전제된 공동체적 가치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내속하는 실제적 결함에 대한 반동 -- 물론 허위에 찬 기만적 반동 -- 이며 이것이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의해 자꾸만 생성되는 이유다. 혼자 내버려두면 자유주의는 서서히 스스로 허물어져 갈 것이다 -- 자유주의의 핵심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일신(一新)된 좌파뿐이다(156쪽)  
   

  

   
  이러한 예가 명확히 보여주느 것은 냉소적 태도의 한계다. 냉소주의자는 속지 않으나 오류를 범하는 자로서, 그들이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환각의 상징적 효능, 환각이 사회적 현실을 생성하는 활동을 규제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는 대중적 지혜의 입장을 취한다 -- 전형적 냉소주의자가 당신을 따로 불러 비밀스러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 결국에는 다 [돈, 권력, 쎅스...] 문제라는 것을, 고매한 원칙이나 가치라는 건 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159쪽)  
   

  

   
  20개 이상의 국가에서 나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캠브리지와 예일 대학 연구자들은 이 국가들에 대한 IMF의 차관과 결핵 발생건수의 증가 사이에 뚜렷한 상호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 차관이 종료되자 결핵의 유행은 잦아들었다. 희한해 보이는 이런 상호연관성은 간단히 설명된다. IMF 차관의 조건은 그 수혜국이 '재정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 즉 공공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며, '재무건전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조치들의 첫번째 희생자는 바로 건강 자체, 다시 말해 공중보거써비스에 대한 지출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구 인도주의자들이 이 나라들의 의료써비스의 파국적 상황을 개탄하고 자선 형식으로 원조를 제공할 공간이 열린다. [...]분명한 목소리로 클린턴은 [...]수십년간 세계은행, IMF, 그밖의 국제기관들이 실행에 옮긴 서구의 장기적 정책들에 책임을 돌렸다. 이 정책들 이 정책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이 비료와 개량종자, 그밖의 농장 투입물에 대한 정부 보조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최상의 토지가 수출농작물의 재배에 이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그럼으로써 이 나라들이 식량생산에 있어서의 자급자족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자국농산물이 더 많이 수출될수록 나라들은 점점 더 수입식량에 의존해야 했으며, 한편 토지를 잃고 쫓겨난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슬럼가로 흘러들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많은 나라들이 탈식민지적 의존의 상태에 묶여 있으며 점점 더 시장변동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다[...] (164쪽)  
   

 

   
  다가오는 에너지 위기와 물 부족 사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문제들에 알맞게 대응하려면 대규모 집단행동의 새로운 형식으 발명할 필요가 있다. 국가개입의 표준적 형식들 또는 많은 칭송을 받는 지역적 자기조직화의 형식들은 이 일을 해내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그런 문제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을 경우 가장 그럴 듯한 씨나리오는 풍부한 식량과 물, 에너지를 누리는 세계의 외딴 지역이 널리 퍼진 혼돈과 기아, 그리고 끝없는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혼란스런 '바깥'과 분리되는 아파르트레이트(인종격리정책)의 새 시대가 될 것이다. 식량부족으로 고통받는 아이띠와 그밖의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격렬한 반란을 일으킬 완전한 권리가 그들에게 있지 않은가? 공산주의가 다시금 문 앞에 와 있다. [...]물, 에너지, 환경 그 자체, 문화, 교육, 건강 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인지를 -- 만일 그 결정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다면 -- 누구, 그리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금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170쪽)  
   

  

   
 

쏘비에뜨 국가의 성취들과 실패들을 열거한 후 레닌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레닌의 베케트(S. Beckett)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으로,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구절,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의 울림을 지닌다. 레닌의 결론 --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 -- 은 그가 말하려는 바가 단지 이미 성취된 것을 강화하기 위해 진보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더욱 급진적인 내용임을 명확히 해준다. 우리는 지난번 시도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수도 있는 정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쓰면, 혁명의 과정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반복적 운동, 몇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5쪽) 

 
   

 

   
 

다시 돌아가 말하면,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해서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 우리는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를 승인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는 그것이 무한정 재생산되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적대를 담고 있는가? (182쪽)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상징적 실체로부터 배제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싸께르(homo sacer)이며,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적으로 들린다면 우리는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대꾸하는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세가지 과정 각각이 어떻게 종말론적 종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생태계의 와해, 인간의 조작 가능한 기계로의 유전공학적 환원,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 디지털 제어......이 모든 차원에서 상황은 제로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하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는 무지에의 의지를 포함하는 위장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다. "위협 받는 인간사회들 사이에 일반적인 행위 패턴은 실패할수록 위기에 더 시선을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더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현 경제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86쪽) 

 
   

 

   
 

"자본주의는 세계의 비대칭과 불균형의 근원입니다" -- 이는 우리의 목표는 '자연적' 균형과 대칭의 회복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격과 배격의 대상은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킨 바로 그 과정, 실질적이며 '모성적'인 자연질서 안에 우리의 뿌리가 있다는 발상과 더불어 어머니 대지(및 아버지 하늘)라는, 성별이 주어지는 전통적 우주론을 페기하는 그 과정이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충실성은 아르뛰르 랭보의 말을 빌리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하며, 자본주의 비판을 '도구적 이성'이라든가 '근대 기술문명' 비판으로 왜곡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일반화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가 네번재 적대 --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라는 간극 -- 와 다른 세가지 적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네가지 적대의 계열에서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가 핵심적이다.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적대도 전복적 효력을 상실한다 [...] 우리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와 전혀 마주하지 않고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진정한 보편성은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칸트적 의미에서 '사적인' 관심사만 주어진다. '홀 푸즈'(Whole Foods)나 '스타벅스' 같은 기업은 반노조활동에 관여하고 있어도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계속 인기를 누리는데, 비결은 그들이 자기네 상품을 판매하면서 거기에 진보적 색채를 덧입히는 데 있다. [...] 

앞의 세가지 적대와 네번째 적대 사이에는 또다른 주요한 차이가 있다. 앞의 세가지는 사실상 인류의 (경제적, 인류학적, 심지어 물리적) 생존의 문제에 관여하는 반면 네번째는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에 해당한다. (197쪽)

 
   

  

   
 

[...]더 전통적인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푸꼬의 접근법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양면을 지닌 징후적 요소의 관념으로서, 그 한 면은 한 상황의 주변적 우발사건이며 다른 면은 바로 그 이 상황의 진리(를 표상하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배제된 자'는 물론 가시적인데, 역설적이지만 그들의 배제 자체가 그들의 포함 양식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사회조직체 안의 그들의 '고유한 자리'는 (공적 영역으로부터의) 배제의 자리인 것이다. 

라깡이 맑스는 이미 징후의 (프로이트적) 관념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맑스와 프로이트 양자에 있어 (사회나 심리) 체계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 체계의 '병적인' 주변적, 우발적 왜곡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가령 말실수, 꿈, 징후, 경제위기 등을 통과해 지나간다. (203쪽)

 
   

 

 

 

 

 

** 계속 업데이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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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일기>를 생각하다 문득 김태균 감독의 <크로싱> 떠올랐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국경을 넘은 아버지와 그를 만나기 위해 죽은 어머니를 묻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아들. <크로싱>은 북한 주민의 힘든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이 왜 탈북을 감행하는지를 얘기하고, 우리가 남한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며 누리는 것이 철책 너머의 그들에겐 목숨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온 탈북자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결코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바로 그것을 얘기하고자 <크로싱>이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재회와 함께 해피엔딩으로 빠져나간 자리에서 <무산일기>가 입을 연다. 이제 막 죽음의 사선을 넘은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125'로 시작하는 낙인과 같은 번호와 남한 사회의 냉랭한 시선 뿐이라고 <무산일기>는 싸늘하지만 쓸쓸한 어조로 말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남한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여 살고 있는 경철은 곤경에 처하자 승철에게 자신의 집에 있는 돈을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한다. 늘 정직하게 살고자 노력하던 승철은 친구를 배신하고 돈을 챙겨 버스에서 몸을 낮춰 그를 피해 달아난다. 이 순간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승철의 얼굴 정면을 시원스럽게 마주하지 못한다. 이 후반부 동안 승철은 대부분 옆모습이거나 뒷모습이다. 그나마 정면을 보일 때 조차도 다소 멀리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언뜻 보이거나, 창문이 그와 관객을 가로막아 그의 맨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처럼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관객은 다소 답답한 심정으로 그의 표정을 짐작할 뿐이다. 이것은 늘 맞기만하던 승철이 갑작스럽게 분노하여 자신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남자를 돌로 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결코 가까이 다가가 승철의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승철이 그에게 맞을 때에는 밝은 장소에서 가까이 다가가 그의 표정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정작 그가 때리는 입장이 되자 그를 어두운 다리 아래로 몰아놓고선 마치 이순간의 그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멀찌감치 훌쩍 물러나버린다. 교회에서 승철이 자신의 신분과 과거를 털어놓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는 결코 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컷을 나누지도 않은채 묵묵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본다. 이렇게 감독은 어느 순간에 마주치면 승철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은 선택을 하고 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끊임없이 다다른다. 혹자는 감독의 일은 선택이라고까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할 것인지 말것인지 선택을 해야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메라를 이쪽에 세울 것인지 저쪽에 세울 것인지, 씬을 여기서 시작할 것인지 좀 더 나중에 시작할 것인지, 인물을 이쪽에 세울지 저쪽에 세울지, 촬영을 이곳에서 할 것인지 저곳에서 할 것인지 등 영화를 찍어나가면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밀고 나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과 계속해서 맞닥뜨린다. 그리고, 관객은 그 선택과 결단의 끝에 감독이 완성한 영화를 마주하며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더 중요하게는 감독이 어떠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허우 샤오시엔에게는 '세상에 대한 예의'이고, <서편제>에서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먼 길을 떠나는 송화에게 길잡이 아이 하나를 붙여 보내며, 만일 그녀를 혼자 보낸다면 "그건 이미 사람 사는 땅이 아니"라고 말하는 임권택의 믿음이다. 첫 장편을 들고 나온 박정범 감독의 시선, 혹은 그가 어떠한 선택과 결단을 통해 영화를 만들어 갔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신인 감독을 바라보며 관객이 그의 더 큰 발전을 위해 한번쯤 가져 볼 필요가 있는 태도일 것이다. 

감독은 탈북자의 생활을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세워 고정시켜 놓고 멀리서 빳빳이 서서 훓어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서서 바라보는 길을 선택한다. 단단히 발을 디디지 못한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계속해서 불안하게 조금씩 흔들리며 승철과 그의 주변을 바라보고, 이 속에서 관객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탈북자들의 진짜 이야기를 알아간다. 승철을 비롯한 탈북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한으로 탈출하였으나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남한 사회와 섞이지도 그 속에 뿌리 내리지도 못한 채 차도 위에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버스를 피하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흔들리며 살아갈 따름이다. 카메라는 그러한 이들을 묵묵히 바라본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처럼 느껴지고 그것은 곧 관객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감독은 핸드 헬드의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을 승철에게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앉힘으로써 그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 줄 것을 부탁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들을 대부분의 경우 방관하고 있다. 이것이 아주 냉정하게 바라본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카메라는 승철을 비추지만 정작 거기서 관객이 생각해야 할 것은 관객 자신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남한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 승철은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몇 번에 걸쳐 대들듯이 질문을 한다. 그는 잘못을 한게 없다. 아니, 그가 생각하기에 그 자신은 전혀 잘못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짝사랑하는 여인은, 그가 목숨을 걸고 철책을 넘어 찾아온 지극한 짝사랑의 대상인 남한은 그가 무엇을 잘못한건지 모르는게 바로 잘못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반면 백구는 승철에게 잘못했다며 타박하지 않는다. 맥도날드 앞에서 햄버거를 나눠먹으며 정을 쌓은 개와 사람은 서로에게 어쩌면 유일한 친구이자 분신과도 같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우정도 결국 끝을 맞이한다. 그런데 이때 변하는 것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노래방에서 맥주가 떨어지자 승철은 가게 앞 편의점으로 맥주를 가지러 간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그를 따라오다 차에 치어 죽은 것으로 보이는 백구를 발견한다. 승철은 순간 놀라고 그의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의 한쪽 끝을 맥없이 툭하고 놓친다. 승철은 백구를 한참 서서 바라본다. 만일 승철이 여기서 죽은 백구를 끌어 안고 슬픔에 흐느낀다면 아직 그에겐 '무산 출신의 정직한 승철'로 남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감독은 승철이 백구를 버려둔 채 그냥 지나치도록 하는 쪽을 선택한다. 한참을 서서 백구를 바라보던 승철은 마치 결심이라도 한듯 백구를 지나쳐 노래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백구는 차가운 도로 위에 그대로 누워있다. 승철은 툭하고 떨어진 비닐봉지의 한쪽 끝과 함께 지금까지 그가 간직하던 '무산 출신 승철'의 마음을 그 길 위에 버리고 간다. 그는 간신히 잡은 남한 사회로의 편입의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자 지금까지의 그를 버리고 그가 배신한 친구 경철의 모습을, 그리고 동시에 남한 사회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제 승철은 다시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뒷모습 위로 감독은 이 사람을 여기까지 몰아간 것이 과연 누구인지 묻는다.

우리 사회엔 탈북자들 외에도 인권 사각지대에 위치한 수많은 빈곤계층이 존재한다. <무산일기>는 단순히 탈북자의 얘기라기 보다는 인권 사각지대의 소외계층에 관한 얘기로 받아들이는게 더 맞을 듯 하다. "탈북자가 등장하지만, 탈북자들만을 다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승철의 삶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봐줬으면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길 바란다." 인터뷰에서 밝힌 감독 자신의 말처럼 그는 탈북자의 생활을 정직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음 작품에서도  박정범 감독이 그의 정직한 시선만은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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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은 어쩌면 서울을 찍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괴테의 이야기를, 도스토에프스키의 이야기를 2008년의 한국에, 한국의 서울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2008년의 서울의, 21세기 지금 현재 우리 서울의 공기와 시간을 붙들어 담고자 하였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쇼트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쇼트들은 이후에도 종종 삽입되어 보여진다. 마치 물 위를 부유하듯이 카메라는 서울의 이곳 저곳을 흐르며 무심한 듯, 혹은 뭔가를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으로 서울을 바라본다. 서울을 향한 애도, 혹은 연민. 청계천을 따라 흐르던 카메라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이어지던 트래킹 쇼트가 교회에 이르러 문득 끝나는 순간, 청계천은 거기서 죽은 것이다.

영수가 죽은 후, 영수의 집 문에 등이 걸린다. 죽은 영수가 누워있고 어머니가 그를 부여잡고 서럽게 통곡한다. 사각의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 양쪽으로 조금씩 닫힌 방문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프레임 안으로 카메라는 둘을 바라본다. 프레임 안의 프레임. 그리고, 그 둘 뒤로 작은 창문이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그 작은 프레임 안으로 보이는 서울 타워. 죽음의 시간을 바라보는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서울 타워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극장전>에서 동수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아무데나 있는' 서울 타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냥 '서울.' 영수의 죽음. 혹은 서울의 죽음. 정성일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죽음을 미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영수의 죽음을 미루는 시간. 하지만, 어쩌면 서울의 죽음을 미루는 시간. 영화의 첫 쇼트. 아기를 임신한 어린 소녀는 죽기 위해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고 보도자료에 밝혀져 있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영수가 죽고 이제 영화가 끝난게 아닌가하고 느껴지는 순간 소녀는 다시 등장한다. 소녀는 친구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오른다. 이제 어떡할거야? 낳아야지. 그래서 어떡할건데? 길러야지. 낳아서 어떡할건데? 살아야지. 친구의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들고 떳떳이 앞을 바라보며 살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뱃속의 아이에게 인사한다. 해피 버스데이. 정성일은 어쩌면 지금 서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동시에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서울이 계속 살아나아가 주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소녀가 남산에 오르기 전 소녀를 임신 시킨 것이 분명한 소년을 찾아가 그를 때리려다 말고 문득 한번 껴안고서 떠나갈 때, 서울은 거기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남산을 올라가며 정성일은 서울이 거기서, 그러니까 어디서나 보이는 그곳에서 서울이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다시 새로 태어나 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지금 이명박의 시대에, 혹은 오세훈의 서울에서 개봉한 것은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밤중에 별을 잃고 선화여인숙 앞에 맥 없이 앉아 있는 저 동방박사 세 사람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일 없이 소녀와 함께 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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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봤는데요, 관람객이 너무 없어 정말 한산하더라구요. 정치 시스템 (이명박시대, 오세훈등)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이 거기에 미치지 않는 것 같아요.

허스키 2011-11-16 12:22   좋아요 0 | URL
영화는 어떠셨나요? 저에겐 작년의 영화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