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일기>를 생각하다 문득 김태균 감독의 <크로싱> 떠올랐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국경을 넘은 아버지와 그를 만나기 위해 죽은 어머니를 묻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아들. <크로싱>은 북한 주민의 힘든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이 왜 탈북을 감행하는지를 얘기하고, 우리가 남한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며 누리는 것이 철책 너머의 그들에겐 목숨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온 탈북자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결코 희망적이지만은 않다. 바로 그것을 얘기하고자 <크로싱>이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재회와 함께 해피엔딩으로 빠져나간 자리에서 <무산일기>가 입을 연다. 이제 막 죽음의 사선을 넘은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125'로 시작하는 낙인과 같은 번호와 남한 사회의 냉랭한 시선 뿐이라고 <무산일기>는 싸늘하지만 쓸쓸한 어조로 말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남한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여 살고 있는 경철은 곤경에 처하자 승철에게 자신의 집에 있는 돈을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한다. 늘 정직하게 살고자 노력하던 승철은 친구를 배신하고 돈을 챙겨 버스에서 몸을 낮춰 그를 피해 달아난다. 이 순간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승철의 얼굴 정면을 시원스럽게 마주하지 못한다. 이 후반부 동안 승철은 대부분 옆모습이거나 뒷모습이다. 그나마 정면을 보일 때 조차도 다소 멀리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언뜻 보이거나, 창문이 그와 관객을 가로막아 그의 맨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처럼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관객은 다소 답답한 심정으로 그의 표정을 짐작할 뿐이다. 이것은 늘 맞기만하던 승철이 갑작스럽게 분노하여 자신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남자를 돌로 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결코 가까이 다가가 승철의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승철이 그에게 맞을 때에는 밝은 장소에서 가까이 다가가 그의 표정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정작 그가 때리는 입장이 되자 그를 어두운 다리 아래로 몰아놓고선 마치 이순간의 그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멀찌감치 훌쩍 물러나버린다. 교회에서 승철이 자신의 신분과 과거를 털어놓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는 결코 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컷을 나누지도 않은채 묵묵히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본다. 이렇게 감독은 어느 순간에 마주치면 승철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은 선택을 하고 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끊임없이 다다른다. 혹자는 감독의 일은 선택이라고까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할 것인지 말것인지 선택을 해야하는 것을 시작으로, 카메라를 이쪽에 세울 것인지 저쪽에 세울 것인지, 씬을 여기서 시작할 것인지 좀 더 나중에 시작할 것인지, 인물을 이쪽에 세울지 저쪽에 세울지, 촬영을 이곳에서 할 것인지 저곳에서 할 것인지 등 영화를 찍어나가면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밀고 나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과 계속해서 맞닥뜨린다. 그리고, 관객은 그 선택과 결단의 끝에 감독이 완성한 영화를 마주하며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더 중요하게는 감독이 어떠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허우 샤오시엔에게는 '세상에 대한 예의'이고, <서편제>에서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먼 길을 떠나는 송화에게 길잡이 아이 하나를 붙여 보내며, 만일 그녀를 혼자 보낸다면 "그건 이미 사람 사는 땅이 아니"라고 말하는 임권택의 믿음이다. 첫 장편을 들고 나온 박정범 감독의 시선, 혹은 그가 어떠한 선택과 결단을 통해 영화를 만들어 갔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신인 감독을 바라보며 관객이 그의 더 큰 발전을 위해 한번쯤 가져 볼 필요가 있는 태도일 것이다.
감독은 탈북자의 생활을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세워 고정시켜 놓고 멀리서 빳빳이 서서 훓어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그들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서서 바라보는 길을 선택한다. 단단히 발을 디디지 못한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계속해서 불안하게 조금씩 흔들리며 승철과 그의 주변을 바라보고, 이 속에서 관객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탈북자들의 진짜 이야기를 알아간다. 승철을 비롯한 탈북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한으로 탈출하였으나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남한 사회와 섞이지도 그 속에 뿌리 내리지도 못한 채 차도 위에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버스를 피하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흔들리며 살아갈 따름이다. 카메라는 그러한 이들을 묵묵히 바라본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의 시선처럼 느껴지고 그것은 곧 관객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감독은 핸드 헬드의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을 승철에게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앉힘으로써 그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 줄 것을 부탁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들을 대부분의 경우 방관하고 있다. 이것이 아주 냉정하게 바라본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카메라는 승철을 비추지만 정작 거기서 관객이 생각해야 할 것은 관객 자신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남한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 승철은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몇 번에 걸쳐 대들듯이 질문을 한다. 그는 잘못을 한게 없다. 아니, 그가 생각하기에 그 자신은 전혀 잘못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짝사랑하는 여인은, 그가 목숨을 걸고 철책을 넘어 찾아온 지극한 짝사랑의 대상인 남한은 그가 무엇을 잘못한건지 모르는게 바로 잘못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반면 백구는 승철에게 잘못했다며 타박하지 않는다. 맥도날드 앞에서 햄버거를 나눠먹으며 정을 쌓은 개와 사람은 서로에게 어쩌면 유일한 친구이자 분신과도 같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우정도 결국 끝을 맞이한다. 그런데 이때 변하는 것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노래방에서 맥주가 떨어지자 승철은 가게 앞 편의점으로 맥주를 가지러 간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그를 따라오다 차에 치어 죽은 것으로 보이는 백구를 발견한다. 승철은 순간 놀라고 그의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의 한쪽 끝을 맥없이 툭하고 놓친다. 승철은 백구를 한참 서서 바라본다. 만일 승철이 여기서 죽은 백구를 끌어 안고 슬픔에 흐느낀다면 아직 그에겐 '무산 출신의 정직한 승철'로 남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감독은 승철이 백구를 버려둔 채 그냥 지나치도록 하는 쪽을 선택한다. 한참을 서서 백구를 바라보던 승철은 마치 결심이라도 한듯 백구를 지나쳐 노래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백구는 차가운 도로 위에 그대로 누워있다. 승철은 툭하고 떨어진 비닐봉지의 한쪽 끝과 함께 지금까지 그가 간직하던 '무산 출신 승철'의 마음을 그 길 위에 버리고 간다. 그는 간신히 잡은 남한 사회로의 편입의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자 지금까지의 그를 버리고 그가 배신한 친구 경철의 모습을, 그리고 동시에 남한 사회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제 승철은 다시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뒷모습 위로 감독은 이 사람을 여기까지 몰아간 것이 과연 누구인지 묻는다.
우리 사회엔 탈북자들 외에도 인권 사각지대에 위치한 수많은 빈곤계층이 존재한다. <무산일기>는 단순히 탈북자의 얘기라기 보다는 인권 사각지대의 소외계층에 관한 얘기로 받아들이는게 더 맞을 듯 하다. "탈북자가 등장하지만, 탈북자들만을 다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승철의 삶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봐줬으면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길 바란다." 인터뷰에서 밝힌 감독 자신의 말처럼 그는 탈북자의 생활을 정직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음 작품에서도 박정범 감독이 그의 정직한 시선만은 놓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