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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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그건 불가능해. 아이들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거야. 당신과 나는, 휴우, 우린 이미 과거야. 한순간의 분노,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일들, 그게 바로 우리라고.이 땅, 이 붉은 땅이 우리야. 지금까지 있었던 홍수, 흙먼지 바람, 가뭄이다 우리야.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없어. 고물상한테 우리가 팔아넘긴 쓰라린 심정, 고물상이 그 심정까지 가져갔는데도 우린 여전히 속이 쓰리잖아. 지주한테이제 떠나라는 소리나 듣는 신세, 그게 바로 우리야, 트랙터가 우리 집을 들이받은 것처럼, 우린 죽을 때까지 그런신세일 거야. 캘리포니아로 가든 어디로 가든 우린 모두 쓰라린 심정을 안고 행진하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맨 앞에 서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사람들이 쓰라린 심정을안고 똑같은 길을 지나겠지. 그 사람들이 군대처럼 발맞춰지나가면, 그 자리에 무시무시한 공포가 생겨날 거야.
- P183

"난 이 나라를 걸어서 돌아다녀 봤습니다. 다들 똑같은질문을 하더군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내가 보기에 우리는 결코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항상 무엇을 향해 가고 있을 뿐. 사람들은 왜 그걸 생각하지 않죠? 지금도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이유도 알고 방법도 알아요. 움직여야 하니까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움직이는 겁니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좋은 걸 원하니까 움직입니다. 뭔가 좋은 걸 얻으려면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요. 뭔가를 얻고 싶다면 직접나가서 얻어야죠. 사람들이 화가 나서 싸우려 드는 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난 이 나라를 걸어서 돌아다니면서 당신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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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매 시간 나로 살 수 있는 순간은 별로 없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디쯤 내가 서 있는지도 모를지경이다. 최진영이란 작가를 통해 과거의 나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나를 다시 본다.
나는 지금 뭘로 살고 있을까?

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들여야 한다. 아빠에게는 내게 들일 시간과 정성이 없다. 그래서 나름 지름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대신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나를 생각하는지름길. 내가 그 틀을 벗어나면 ‘네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라고 말하면서 틀을 벗어난 나를 비정상으로 잘라 버리는 거다. 아빠가 생각하는 틀 안의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 아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골치가 아플테니까. 자기 일이나 존재 말고 ‘자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니까. 아빠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자식‘이란 믿음을 선택했고 내가 그 믿음에세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자기 믿음을 의심하는 대신 나를 탓했다. 놀랍도록 편한 방식이지. 아빠는 자기 자신도 그런 틀 안에 가둔다.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사람을 자기라고 단정해 버린다. 내가 보는 아빠와 아빠 본인이 믿는 아빠는 너무 다르다. - P54

나는 요즘 만사 짜증 나고 귀찮고 다 망했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렇다고 뭔가를 새로 시작할 자신
도 없습니다. 어릴 때 나는 그런 어른들을 알았어요참을성도 배려도 없이 화부터 내는 어른들 말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끔찍합니다. 중요한 건・・・・・・ 큰 고통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나는 미루고만 있어요. 알기 때문입니다. 눈앞의어려움을 해결한다고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란 사실을 어질러진 방을 내 손으로 치우고나는 다시 방을 어지르겠죠. 먼지는 쌓이고 벽지는 낡아가고 어딘가에서 계속 나쁜 냄새가 올라오겠죠. 나는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겠죠. 이 권태와 환멸, 손쓸 수 없다는 우울과 허무,계속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은 대체 어디에서 흘러오는 겁니까. - P71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신은 신으로만 살까?신은 우주인가? 우주는 우주로만 존재할까? 우주조차 우주로만 존재한다면 우주도 갑갑하다. 너무따분하다. 세상은 칙칙한 해변과 먹먹한 하늘과거대한 바다와 곧 바다가 될 빗줄기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살면서 봤던 찬란하고 눈부신 것들은 모두 환상 같았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싶었다. 고함을 집어 던져서 눈앞의 풍경을 깨트리고 싶었다. 깨트릴 수 없다면 금이라도 내고 싶었다. 금을 향해 내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내 안에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 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 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가방에 국어사전이 있었다면 ‘허무‘가 딱 들어맞는 단어인지 확인해 봤을 거다. - P166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잏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 살, 열다섯 살, 스물세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 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경이로움에 빠져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는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쓰다보면 견딜 수 있다
<작가의 말 중>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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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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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의 모든 혐오는 어디에서 부터 출발하게 되었나? 정말 잘못된 결혼에서 시작되었나?
부모들에게서 부터 시작된 것인가?
결국 모든 혐오는 메리에게 향해서 죽음으로 해방된것인가.

진실이나 어떠한 다른 추상적 실제를 위하여 자신의 자료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이다. 삶을 계속 영위할수 있도록 해 줄 또 다른 자화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메리의 자화상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또다른 자화상을 만들어 내기에는 적합치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의 부담 없고 격의 없는 친분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진짜 쓸모없는 여인이라도 된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동정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메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심정을 느꼈다. 마음속이 공허하고 텅 빈것 같았고,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이러한 공허감 속으로 근원을 알 수없는 크나큰 불안감이 엄습해 들어왔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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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현대인을 위한 고대의 지혜 아날로그 아르고스 2
에픽테토스 지음, A. A. 롱 엮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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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도 있고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도 있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은 판단, 동기‘, 욕망, 혐오‘ 같은 우리의 능력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은 신체, 재산, 평판, 사회적 지위 등이다. 즉 우리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은 본래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으며 강제되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은 무력하고 노예적이며 방해받고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명심하라. 본래 노예적인 것을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으로 생각하면 좌절과 고통,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고 신들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을 찾으려 들 것이다. - P51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원인은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죽음이 두려운 것이라면 마땅히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생각했어야하지 않았겠는가!).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좌절하거나 힘이 들거나 고통스럽더라도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탓하도록 하자 못 배운 사람들은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남을 탓한다. 배움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탓한다. 그러나충분히 배운 사람은 자신이건 남들이건 누구 탓도 하지 않는다. - P58

자기 것이 아닌 특성은 자랑하지 말라. 만일 매력적으로 생긴 어떤 말이 "난 멋있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나는 멋진 말을 갖고있어"라고 사랑한다면 그때 너는 네 것이 아니라 말이 가진 좋은 특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것은 무엇인가? 인상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상의 관리가 자연과 조화를 이룰 때가 바로 너 자신을 자랑할 때이다. 그때 너는 너만의 좋은 것을 갖고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59

일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지 말고,
일어나게 되어있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무사할 것이다. - P61

병은 몸에는 장애이지만, 의지가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는 한 의지에는 장애가 아니다. 절뚝거림은 다리에는 장애이지만, 의지에는 장애가 아니다. 만사에이렇게 생각한다면 장애는 다른 것에 해당될 뿐 네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62

너는 연출가가 만들고 싶어 하는 연극 배우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연출가가 짧은 연극을 원하면연극은 많다. 그가 긴 연극을 원하면 연극은 길다. 명심하라. 너에게 거지 먹이 주어지면 그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절름발이나 관리 혹은 말 없는 사람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그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 너의 일이다. 하지만 역할의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다른 사람의 몫이다. - P72

사람들이 너를 홀대하거나 비난할 때는, 그들도 그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은 너의 생각을 따를수는 없고 자신들의 생각만을 따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만일 그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면 틀린 것은그들이므로 해를 입는 것도 그들이다. 참인 연언 명제를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명제가 해를 입지는 않는다. 잘못 생각한 사람만 해를입을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면, 홀대나 비난을받을 때마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이라며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질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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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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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던지는 질문 중> - P23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두번은 없다 중> - P34

어떻게 그처럼 과감하게
모든 걸 떨쳐낼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에 대한 집착과
낮과 밤의 질서와
내년에 내릴 눈과
사과의 붉은 빛깔과
아무리 곱씹어도 늘 부족하기만 한
사랑에 대한 끈끈한 미련을

<루드비카 바브쥔스카 부인을 애도하는 일 분간의 묵념 중> - P44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왜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경이로움 중> - P198

행복한 사랑.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상식과 판단력이 행복한 사랑에 대해 무조건 침묵을 강요한다.
마치 완벽한 인생에 느닷없이 끼어든 망측한 추문이라도 되는 양
행복한 사랑의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훌륭한 아이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다.
행복한 사랑이란 좀처럼 없기에
그것만으로 결코 지구를 채울 수 없다.

행복한 사랑을 모르른 이들이여.
행복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쳐라

그런 확신만 있으면 살아가는 일도, 죽는 일도
한결 견디기 쉬울 테니까

<행복한 사랑 중> - P213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중> - P217

Non omnis moriar‘시기상조에 불과한 근심 걱정.
정녕 내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으로 충분한지.
단 한순간도 충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지금은 더욱더 그러한데.
뾰족한 수가 없기에 끊임없이 버리면서 선택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버렸으니
그만큼 복잡하고, 그만큼 성가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상실한 대가는고작 시 한 구절과 한숨뿐,

<거대한 숫자 중> - P221

"우리는 결코 공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신(神)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길을 밝혀주소서....

<쓰지 않는 시에 대한 검열 중> - P247

양파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는 언제나 한결같다.
안으로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양파 중> - P252

인생이란.………… 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思考)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늘 엉망진창이다.
주어진 극의 템포를 나는 힘겹게 쫓아가는 중.
즉흥 연기를 혐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맞는 즉석 연기를 해야 한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물의 낯설음과 부딪쳐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내 삶의 방식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려 있다.
내 본능은 어설픈 풋내기의 솜씨.

<인생이란...... 기다림 중> - P257

증오는 새로운 임무에 항시라도 적응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필요하다면 언제나 끈질기게 기다린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고 수군대지만,
증오가 장님이라구? 천만의 말씀.
저격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건
오로지 증오뿐이다.

<증오 중> - P330

난 봄을 탓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나를 찾아온 데 대해서.
난 봄을 책망하지 않는다.
해마다 주어진 의무를충실히 이행하는 데 대해서.

난 잘 알고 있다.
내 슬픔이 신록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걸.
풀잎이 흔들린다면
그건 바람 때문이란 걸.

<풍경과의 이별 중> - P340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금방 되돌아와야 하고,
또 반드시 돌아와야 할
짧은 여행을 제안받았다.

영원성이 철저히 제거된
유한한 세월 속으로의 여행.
단조롭고 한결같은,
동시에 시간의 순환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의 여행.
어쩌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건들에 관한 해석 제1안 중> - P363

웅덩이 Katuza

어린 시절 두려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언제나 웅덩이를 피해 가곤 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뒤 새로 생긴 것일수록 더욱 조심했다.
겉보기에는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개중에는 한없이 깊은 것도 있으니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몸 전체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도약하는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좀더 깊숙이 밑바닥으로
수면에 비추어진 구름 저편까지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시간이 지나면 웅덩이는 마르고,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덫에 걸려버렸다.
공간 속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비명소리와 더불어.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세상의 법칙 속에는
항상 운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슬아슬 불운이 덮쳐올 듯해도
꼭 실제로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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