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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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던지는 질문 중> - P23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두번은 없다 중> - P34

어떻게 그처럼 과감하게
모든 걸 떨쳐낼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에 대한 집착과
낮과 밤의 질서와
내년에 내릴 눈과
사과의 붉은 빛깔과
아무리 곱씹어도 늘 부족하기만 한
사랑에 대한 끈끈한 미련을

<루드비카 바브쥔스카 부인을 애도하는 일 분간의 묵념 중> - P44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왜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경이로움 중> - P198

행복한 사랑.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상식과 판단력이 행복한 사랑에 대해 무조건 침묵을 강요한다.
마치 완벽한 인생에 느닷없이 끼어든 망측한 추문이라도 되는 양
행복한 사랑의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훌륭한 아이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다.
행복한 사랑이란 좀처럼 없기에
그것만으로 결코 지구를 채울 수 없다.

행복한 사랑을 모르른 이들이여.
행복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쳐라

그런 확신만 있으면 살아가는 일도, 죽는 일도
한결 견디기 쉬울 테니까

<행복한 사랑 중> - P213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중> - P217

Non omnis moriar‘시기상조에 불과한 근심 걱정.
정녕 내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으로 충분한지.
단 한순간도 충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지금은 더욱더 그러한데.
뾰족한 수가 없기에 끊임없이 버리면서 선택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버렸으니
그만큼 복잡하고, 그만큼 성가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상실한 대가는고작 시 한 구절과 한숨뿐,

<거대한 숫자 중> - P221

"우리는 결코 공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신(神)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길을 밝혀주소서....

<쓰지 않는 시에 대한 검열 중> - P247

양파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는 언제나 한결같다.
안으로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양파 중> - P252

인생이란.………… 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思考)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늘 엉망진창이다.
주어진 극의 템포를 나는 힘겹게 쫓아가는 중.
즉흥 연기를 혐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맞는 즉석 연기를 해야 한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물의 낯설음과 부딪쳐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내 삶의 방식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려 있다.
내 본능은 어설픈 풋내기의 솜씨.

<인생이란...... 기다림 중> - P257

증오는 새로운 임무에 항시라도 적응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필요하다면 언제나 끈질기게 기다린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고 수군대지만,
증오가 장님이라구? 천만의 말씀.
저격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건
오로지 증오뿐이다.

<증오 중> - P330

난 봄을 탓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나를 찾아온 데 대해서.
난 봄을 책망하지 않는다.
해마다 주어진 의무를충실히 이행하는 데 대해서.

난 잘 알고 있다.
내 슬픔이 신록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걸.
풀잎이 흔들린다면
그건 바람 때문이란 걸.

<풍경과의 이별 중> - P340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금방 되돌아와야 하고,
또 반드시 돌아와야 할
짧은 여행을 제안받았다.

영원성이 철저히 제거된
유한한 세월 속으로의 여행.
단조롭고 한결같은,
동시에 시간의 순환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의 여행.
어쩌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건들에 관한 해석 제1안 중> - P363

웅덩이 Katuza

어린 시절 두려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언제나 웅덩이를 피해 가곤 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뒤 새로 생긴 것일수록 더욱 조심했다.
겉보기에는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개중에는 한없이 깊은 것도 있으니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몸 전체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도약하는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좀더 깊숙이 밑바닥으로
수면에 비추어진 구름 저편까지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시간이 지나면 웅덩이는 마르고,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덫에 걸려버렸다.
공간 속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비명소리와 더불어.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세상의 법칙 속에는
항상 운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슬아슬 불운이 덮쳐올 듯해도
꼭 실제로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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