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시작시인선 185
이운진 지음 / 천년의시작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슬픈 환생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 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가만히 꼬리뼈를 만져 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 P13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타로카드 한장을 뒤집었을 때
무표정한 점술사는 내게
슬픔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와 같다고
영원히 나의 바위를 향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계절이
동쪽에서 왔다가 서쪽으로 가고
새들이 남쪽과 북쪽으로 집을 옮겨 다녀도
바위는 나의 운명보다 강할 거라고,

그때 나는
별조차 아무런 이유 없이 떨어지는 곳
내가 불시착한 이생에서
슬픔의 대문자로 이름을 썼다

슬픔은 마음에서만큼이나 가슴에서
몸에서만큼이나 삶에서
나를 베는 연장이 되어

구르는 바위와 나 사이
무엇을 세워도 슬픔을 이기는 튼튼한 벽이 되지 않았다

웃고 그리워하고 싶은 보잘것없는 저녁과
내가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던 하루를
내게서 영원히 가져간 건 누구인지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바위에게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게 하는 건 무엇인지

눈물 하나하나가 바위처럼 굴러 떨어지는 밤

신의 유머 같은 내 운명의 타로 카드에
나는 슬픔을 섞지 않은 빛깔로 몆 번이고 덧칠을 했다. - P23

아름다운 복수

신도 자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는 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그의 지옥이라는 말,


올해의 마지막 벚꽃이 지는 나무 아래서 생각한다
이 봄과 이 나무 사이만큼의 밀어도 없이
꽃잎처럼 훨훨 날려 본
가벼운 웃음도 없이
봄을 보내는 하루
뼈를 겉으로 입은 듯
부끄럽고 아픈 하루를 보내는 봄날
서럽고 사무쳐
꽃잎을 줍다가 생각한다
내년에도 신은 또
봄의 모래시계를 다시 거꾸로 세워 줄 것이다
새 벚꽃은 피고
지고
나는 똑같은 봄을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흘러내리겠지만
그다음 해에도 신은 또,
- P49

모두 옛말

부처의 제자 중 한 사람은 마당을 비질하는 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는데,

봄에는 꽃잎을 쓸고
여름에는 빗물을 쓸고
가을에는 낙엽을 쓸고
겨울에는 눈을 쓸어 낸다

꽃잎은 봄의 쓰레기
빗물은 여름의 쓰레기
낙엽은 가을의
흰 눈은 겨울의 쓰레기

일년 내내 아파트 단지를 쓰는 경비 아저씨는
빗자루처럼 기대 쉴 낡은 벽이 없다
깨달음은 모두 옛말, - P97

욕을 먹다

사람들은 쉽게 욕을 한다
짐승 같은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이라고

그 순간 초원의 한복판
사자와 가젤이 달려간다
가젤 한 마리를 뒤쫓는 사자와 사자로부터 도망가가젤이
몇 번째인지 모를 생을 헤아리며 달린다
사자나 가젤이나
먼먼 조상을 원망하지 않고
신이 편들지 않는 게임에서
서로의 운명을 팽팽히 당기며
짐승의 삶을 지킨다

빌딩 숲에서 나는 달린다
사자가 결코 부러워하지 않을
행복을 얻기 위해 발톱을 세우고
가젤보다 위험하게
사자보다 숨차게 검은 밤을 헤맨다
사람 같은 놈, 이라고
사자에게 욕먹는다 - P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독특한 소설이라니.
찝찝하지만 계속 읽어가게 하는 힘은 뭘까.
어른들의 욕망에 이끌려 다니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우리,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들에게 색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이 죄악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죄악에 몸을 담그게 되면, 그때는 기대할 수 있다. 우리와 그들이 뒤섞이게 되리라고. 그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나는 이해했다. 또한 이 죄악으로 인해 그들이 추악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들의 젊음, 그 싱싱함은, 비록 죄의 빛깔을 띠게 될지라도, 우리의 시든 손에 이끌려 타락으로 인도될지라도, 그리하여 우리와 뒤섞여 혼탁해질지라도, 그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풍요하고 충만해지리라는 것도 나는알고 있었다. 아무렴! 나는 알고 있었다! 온순하게 말 잘듣는, 그저 귀엽기만 한 젊음 따위가 무슨 재미가 있는가!
중요한 건 그런 젊음을 재료로 또 다른 젊음. 우리 어른들과 비극적으로 얽힌 젊음을 제조해 내는 일이었다.
열광! 이런 생각으로 나는 열광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온갖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반짝이는 유혹의 그물을 쳐보는 일 따윈 엄두도 내지 못할 나이였다. 매력 없는, 누군가를 매혹하기란 어려운, 자연의 본성과는 거리가 먼 나이..... 아, 비록 감탄할 능력은 여전히 갖고 있다 해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내 감탄은 더 이상 누군가를 감탄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내게 허용된 삶이란 두들겨 맞은 개, 비루먹은 개 꼴로 살아가는 삶 그 이상도 아니었다. 바로 이런 나이에, 성적 타락의 대가로라도 새삼 자신을 꽃피울 기회, 젊음으로 돌아갈 기회가 온다면, 추함이 여전히 아름다움에 의해 이용되고 흡수될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렇다면.... 이건 모드 장애물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저항할 수 없는 유회이었다! 그렇지, 열광, 아니 그보다는 광기, 숨이 막혀오는.....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스본행 야간열차 2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3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레고리우스처럼 다르게 사는 삶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아직은 그런 선택이 두렵다.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멋지않기를 바랐다. 영원히 멈추어 버리지 말기를, 절대 그런일이 없기를. - P232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베른의 고전문헌학자인 문두스가 세상의 끝에서 갈리시아의 어부들에게 삶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었다…………. 그는이 상황을 즐겼다.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는지금까지 모르던 해방감이 섞인 이 상황을 그는 한껏 즐겼다.
어부들이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는 더듬거리는에스파냐어로 두 번 더 물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 P262

그레고리우스는 기꺼이 쓰기 시작했다. 태초에 말씀이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실우베이라는 성서를 가지고 와서 요한복음의 첫 구절들을 읽었다.
"그러니까 언어가 사람들의 빛이로군. 사물은 말로 표현되고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거군."
실우베이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는 리듬이 있어야 하지. 여기 이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레고리우스가 덧붙였다.
"말은 시(詩)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수가 있어. 변화하는 말의 빛 속에서는 같은 사물도 아주다르게 보이지." - P286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 P293

내가 사랑하는 자기기만의 대가(大家).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망과 생각들을 스스로도 모를 때가 많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때도 있소. 이와 다르게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없소. 다른 사람과 함께 살며 숨 쉬고 있는 사람이라면모두 이렇게 생각하오. 우리는 서로 육체도, 말의 아주 미세한 떨림까지도 잘 알고 있소.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지. 특히 우리가 보는 것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의 사이가 견딜 수 없을만큼 클 때 더더욱 그렇소. 정말 솔직하게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강인함이 필요하오.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이 정도는 알고 있소. 이 말이 독선일 이유는 없소. - P321

어두워지는 길을 운전하여 병원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가 썼던 글이었다. - P33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모모 2024-06-2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들이 좋네요.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몽이엉덩이 2024-06-26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지루할지도 몰라요.
 
리스본행 야간열차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뒤를 쫒아서 결국 리스본에 오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32

우리둘 모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존경하지요. 그의 명상록 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 영혼아, 죄를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 P51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아름다운 무음(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 P65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갈망.......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 P224

‘이름이 뭐지?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가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 P253

난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범속함에 맞설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필요하니까. 반짝이는 교회의 유리창을 올려다보며 그 천상의 색에 눈이 부시고 싶다. 더러운 제복의 단조로운 색깔에 맞설 광채가 필요하니까. 교회의 혹독한 냉기로 내 몸을 감싸고 싶다. 병영의 단조로운 고함 소리와 들러리 정치인의재기 넘치는 수다에 맞설, 명령을 내리는 듯한 그 정적이필요하니까. 행진곡의 새된 천박함에 대항할 물 흐르는 듯한 오르간의 울림이, 흘러넘치는 그 숭고한 음색이 듣고싶다. 난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필요하니까. 난 성서의 강력한 말씀을 읽고 싶다. 언어의 황폐함과 구호의 독재에 맞설, 그 시(詩)가 지닌 비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싶지 않다. - P263

현재에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시간이 된다. 모든 것을안다는 신이 왜 이것은 모르는가? 견딜 수 없는 단조로움을 의미하는 무한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P263

"공포는 새로운 인식 때문이 아니야. 무엇에 대한 인식인지가 문제야. 미래의 것이긴 하지만 현재 확실하게 알수 있는 내 인생의 불완전함, 지금 이미 결핍이라고 느끼는 이 불완전함이지. 이 결핍이 너무 커서 늘 알고 있었던사실이 내 안에서 공포로 변해"
삶이 완전하지 못할 거라고 미리 생각만 해도 이마에 땀이 솟는다. 완전한 삶. 그건 과연 뭘까?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변하기 쉬운 우리 인생을 생각해볼 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한 삶을 구성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조르지를 괴롭힌 것은 반짝이는 스타인웨이 앞에 앉아스스로 작곡이라도 한 듯 바흐의 음악을 제 것으로 만들수 없다는, 성취할 수 없음에 대한 고통이었나? 아니면 우리 인생이 완전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경험을 충분하게 하고픈 욕구였나?
결국은 자화상의 문제인가? 동의할 수 있는 인생이 되 - P325

려면 경험하고 이루어야 한다고 오래전에 생각해두었던결정적인 상상? 그렇다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생기는죽음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내 손에 있는 듯이 보인다. 내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상(像)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므로, 생각보다 더 가까운 것이 어디있으랴? 지금 내 삶이 이미 상에 상응하도록 생각을 바꾸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여전히공포가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 상이 변덕스러운 기분에서 나왔다거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나를 나로 만드는 감각과 사유의 놀이에서 자라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P326

_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 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나더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예감은 틀렸다.
도대체 찌질한 토니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 P81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 P141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한걸까. - P144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P162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P165

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한결 총체적인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 P173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백이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비극까지도 - P180

‘축적의 문제‘라고 에이드리언은 썼었다. 축적의 문제. 어떤말에 돈을 걸고, 그 말이 이기면, 그 상금을 다음번 경기의 다음번 말에게 건다. 이런 식으로 승리는 축적된다. 그렇다면 패배도 축적되는 걸까? 경마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저 첫 번째노름 밑천을 잃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는? 다른 법칙을적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관계에 승부를 걸었으나 실패로끝난다. 계속해서 다음번 관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이때 잃는 건 단순히 두 번 뺄셈을 하고 난 값이 아니라, 우리가 내걸었던 것의 배수이다. 아무튼 그런 기분일 것이다.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 P181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 P1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