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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은 12월 신간 추천이니, 사실상 추천하는 책은 2013년생들이지만.:)


12월에도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왕창 나왔다. 책 소개를 읽다보니 저자가 더 흥미로워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 그러고보면 책은 정말 징검다리 같다. 한 번 읽게 되면 그 책을 딛고 다음 책 또 다음 책 옮겨 가게 되니.











동방 순례 

헤르만 헤세 / 이제하 삽화/ 이인웅 옮김 / 이숲


헤세의 헤세가 쓴 '싯다르타' 의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자신이 접한 동양에 대한 진지한 존경심과 성찰이 엿보이기 때문에. 게다가 대가와 고전은 어느 시대에도 길을 제시하는 법이라. > 1932년 출간되어 양차 세계대전 사이 급변하는 정치.사회.문화 환경에서 인류가 나아갈 길과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하고 있다. < 라는 책 소개가 눈에 걸린다. 기대되면서도 걱정된달까. 어찌되었든 양차세계대전에 뒤틀린 세계를 바라보는 헤세의 시선이 궁금하다. 



도시와 나 - 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 

성석제, 함정임, 정미경, 서진, 백영옥, 윤고은, 한은형  /바람 


우리나라 작가 엔솔로지, 여러 분야의 작가 참가 _ 라는 점에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한 소설집. 해외 도시라는 소재가 내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지만, 독서 겸 눈으로 하는 여행 겸 해서 기분 전환하기 좋을 것 같다. 




이 사람을 보라 

마이클 무어콕 / 최용준 옮김 / 시공사 


이 작가의 작품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책 소개 첫 줄: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를 이어 그랜드마스터에 오른 거장 마이클 무어콕의 예수에 관한 가장 대담하고 기발한 상상. 시간여행을 소재로 인간의 굴절된 심리와 종교를 정면으로 다룬 문제작. / 이 첫줄에 낚였다. 이 책 소개가 정직하다면 정말 읽을 맛 나는 작품일 듯 하다. 예수에 대한, 가장, 대담한 상상이라는 데 동의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일단 그건 읽어보면 알 수 있을 듯! 




마치 계시처럼 

이명행 / 문학과지성사 


관계와 이야기에 대한 설화풍 이야기_ 저자의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도 읽어보고 싶다.



로맨틱 블랑제리

질 르가르디니에, 김도연 옮김 / 달콤한책


구성 탄탄하고 잘 짜여진 서사가 고팠던 요즘이라, 소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코믹한 분위기라는 것도 마음에 듬. 요즘같은 때야말로 블랙 유머가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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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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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두 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꾹꾹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문장 아래 작은 활자로 추가된 글자 몇 개를 보고 당황한다. - 1부 끝 - 맙소사. 이게 1부라고? 즉 2부가 나올 거란 말인가? 아. 정말 다행이다. 그가 2부를 나중에 내 줘서. 덕분에 2부는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만세. 만세. 만세. 

  적당한 기발함을 적당히 배포할 줄 아는 센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내 감상이다. '적당한 기발함'이라는 게 성립 가능한 표현이라면 말이다. 이 소설은 가볍고, 심각하지 않고, 적당히 심심풀이로 보기 좋다. 적당한 유머 감각과 밉보이지 않을 지성, 감성을 갖춘 인물들이 나와 몇가지 착상을 주고 받는다. 그 와중 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상식 사전이 '에드몽 웰즈' - 주인공의 증조부라는 신선격 존재를 빌어 마구 투입된다.  이런 구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베르베르는 이야기를 매끈하게 술술 풀어나가는 작가다. 내가 적당히라는 말을 적당한 정도를 넘어서 남발하고 있는데, 적당히가 왜, 나쁜가? 소설은 일차적으로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이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면 그건 장점 아닌가.  
  
  비록 이 소설이 '진화'와 '현세계의 편견을 뛰어넘는 시도'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극히 '편견'에 휩싸여 있으며, 편견이 으레 그렇듯 자화자찬과 팔 안으로 굽기가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작가는 '공평'하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편견에 휩싸인 무리들을 까내린다. 자신들도 인종 차별 당했음에도 어느새 백인들처럼 피그미 족 사람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는 반투족이라든가, '여성 인권 묵살의 상징'인 차도르를 옹호하여 프랑스 출신 페미니스트와 드잡이하는 이슬람권 여성들 말이다. 작가는 신문에서 보도되는 그런 사건들을 싹 모집해 자신의 책 안에서 신나게 섞었다. 쉐킷 쉐킷~.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전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냐고? 그렇게 보일 만한 증거가 책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가치를 알아 보는 이들은 '소르본 대학의 공모전'에 입상한 프랑스 백인 학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지적이고 일정 이상 부유한 백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적어도 그들이 이 세계에서 약자 계층에 속하지는 않는다. (남녀간 차별을 제외하고 본다면 말이다.) 이들은 그 부모들에게서 너희가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 계시에 따르든, 반하든 결국 그들은 정말 그렇게 해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깨달은 이, 이자 주제를 전하는 이들은  '중산층 이상 백인 인텔리' 사회의 일원인 것이다. 이 소설을 그렇게 보는 건 쿨하지 못하다고? 이 소설은 그런 얘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라고? 실컷 이 세계의 편견과 아집을 보여주면서 왜 주인공에게는 그걸 적용하면 안되나? 그럼 공평하게 주인공 남녀가 그런 자신의 소속을 뛰어넘는 인식을 보여줬는지 살펴 보자고. 음. 어디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허덕이는 걸 보고 한심하다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 가는 곳이 '무려 전생으로의 회귀'니까 하는 말이지. 작가가 짜놓은 틀에서는 그런 인식을 벗어날 필요조차 없다. 이미 그들의 쿨함과 진보적 태도만으로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이 소설에서는 세계의 편견을 깨닫는 것마저 (서양 세계의 사고관으로 무장한) 백인들인 것이다. 그들이 체험하는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의식은 또 어떤가. 새삼 말하는 게 허무할 만큼 신비주의에 쩔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는 그런 '초월적인 해결책'을 알아 보는 것마저 백인들의 역할인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남녀의 그 기발한 영감은 그들이 팔천년 전 전생에 '위대한 거인들'이었을 때 이미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순환 고리란 거다. 이 소설은 진화를 얘기하지만 그 '진화 방법'은 '옛날 옛적에 있었던 일의 재현, 반복'이다. 법칙에 따르는 순환이 어떻게 진짜 변화란 말인가? 그 법칙이 바로 지금의 모순을 찍어낸 틀인데. 

  그런데 적어도 이 두 권 짜리 '1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섯 명의 주요 인물 중 아무도 자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한 지성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구태의연한 문제 제기도 나오지 않는다. 아, 그 문제는 너무 구닥다리라 아예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들이 쿨한 과학자들이자 아마조네스 전사,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되뇌는 군인들이기 때문에, 진보의 첫발을 내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할 필요조차 없는 건가 보다.
  진보란 가장 뻔한 문제들의 답부터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소설이니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니까 다룰 필요가 없다고 할 수는 있다. 솔까말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미니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거지 걔네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겪는 - 혹은 실험체들이 겪게 되는 윤리적, 정신적 문제가 아니란 건 나도 안다. 그 문제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다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런 문제들을 떠올렸고, 그게 떠올랐다는 게 이 소설의 구멍으로 느껴졌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소설은 정말, 구멍 천지니까.

  심지어 그들은 미니 인간들을 만들어 놓고 아주 뻔한 신 롤플레이도 한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지구의 멘트도 공허하고 별 맛이 없다. 지구의 자기 역사 서술은 차라리 과학 교양서 쪽을 보는 게 훨씬 재미있을 정도다. 원래 신화적 서사란 클리셰 난무라지만, 이 소설은 그게 '뻔하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사상누각이랄까. 공들이지 않은 탑이랄까. 대충 이런 건물에는 이 쯤에 창문이 있고 문은 이쯤에 있겠지 / 하고 슥슥 구멍을 뚫어 놓은 집을 구경하는 것 같다.  베르베르 쯤 되는 다작 작가면 이제 그런 법칙들에는 이골이 나있긴 할테다. 그렇다고 읽는 나한테 '이골이 났다는 걸' 어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 소설은 '재미있게 풀 수도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뻔한 사건들을 연속시킨다. 베르베르 식의 글쓰기 방식을 쭉쭉 펼쳐 나가기는 하지만, 그 안이 텅 비어 있다. 이 소설은 지푸라기 공이다. 그 표면에 지구과학, 생물학, 역사, 문학, 신학, 심리학 등등 온갖 상식들이 잡초 나부랭이들이 붙어 있다. 문체가 가볍고 읽기 편해서 쑥쑥 읽히지만, 따져보면 이 잡초들이 붙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아무 잎이나 한두 잎 쯤 떼어내도 지푸라기 공에는 아무 영향도 못 미칠 것 같은 걸. 적당히 재미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시간 떼워야 할 때 읽기 좋은 소설. 2부가 나올 모양임.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떼워야 할 만큼 시간이 많이 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내가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흥분한 채 쓴 내 리뷰는 엄청 조잡하고 건방져 보일 거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이게 베르베르의 글이 아니었거나, 베르베르가 쓴 글이라는 걸 모르고 봤다면 이렇게 툴툴 거렸을까 계속 자문했다. 어차피 이프 온리에는 답이 없으니까, 과연 어땠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글에 그런 문제들이 있고, 베르베르라는 저자 이름을 단 채 우리 집에 배송되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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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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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가볍지 않고 버겁지 않다. 첫장부터 끝장까지 화려한 묘사 한 줄 없이 시선을 잡아놓는다. 읽어나갈 수록 계단을 한 단 한 단 올라가는 기분이랄까. 문장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지면을 내리누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분의 1의 우연>은 대말뚝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어떤 불필요한 서술도, 농담조차도 없다. 작업용구는 사용자의 미감을 반영하지 않는다. 강도며 모양, 색깔까지도 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는 오로지 ‘10만분의 1의 우연’이라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소설은 마술이며 마약이고 합법적인 사기극이다. 관건은 얼마나 그럴듯하게 독자를 속여 넘기느냐이며, 그 기교가 화려할수록 감탄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렇게 내세워진 '그럴 듯 함'이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묵묵히 공들여 이야기를 쌓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획기적인 메시지도 반전도 없다. 과장도 비약도 없다. 소설 속 세계는 그저 확고하게 다져질 뿐이다. 작가에 의해서,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소설 속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는 '10만분의 1의 우연'을 연출하기 위해 공들여 트릭을 마련한다. 덕분에 그는 구경꾼이나 경찰이라는 ‘현실’에 훼손당하지 않은 순수한 ‘순간’을 포착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한수 앞선 이가 야마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누마이다. 그의 약혼녀는 야마가가 놓은 함정에 휘말려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절명하고 말았다. 소설은 누마이가 능수능란한 연기와 철저한 준비로 야마가의 트릭을 깨고 복수를 하는 과정을 쭉 짚어 나간다. 

  반전은 없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다. 그가 쓴 트릭마저도 세세히 설명된다. 수수께끼도 자극적인 추가 사건도 없다. 범인은 범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복수 역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피도 절규도 통쾌함도 없다.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는 비밀도 없다. 이 소설은 내가 요즘 본 소설 중 가장 '스포일러'가 무의미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작가가 다 알려주는데, 대체 뭘 스포일러하고 말고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 소설은 정말 '솔직하다.' 마치 '한 순간을 온전히 담아낸 사진'을 들여다 볼 때처럼.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를 모두 파악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범인도 범죄도 그 결과마저도 다 밝혀졌는데, 대체 그 외에 더 밝혀져야 할 게 뭐가 있는가?

  그런데 이 소설을 쓴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미스터리 계의 한 파를 만든 거장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펼쳐든 후 한번도 놓지 않고 내리 읽었다. 미스터리류를 많이 읽지 않아서 그 장르 법칙은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끝까지 부족한 게 없었다. 읽는 내내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하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트릭 없이 솔직한 이야기'가 어떻게 미스터리가 되는 걸까?

  누마이는 야마가에게 접근해 진실을 듣기 위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대비한다. 작가 역시 이 과정을 '아무 방해 없이 진실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한 가지 전략을 고수한다. 그 전략이란 바로 '외부 관찰자 시점 고수하기'. 이 소설의 소재 '사진'의 속성과도 일통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서사 중심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그 심리가 묘사된다. 소설에서 내내 중심 사건을 한 단계 한 단계 진행시키는 누마이의 심리에 대해서는 절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독자는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과 포즈로 상황을 유추하듯, 그의 행동에 관한 서술을 보고 그의 심정을 파악한다. 물론 그 행동 서술에서 이미 심정에 대한 단서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누마이는 슬펐다. 괴로웠다. 분노했다.' 라고 쓰인 부분이 없다. 기껏해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전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죄인 그룹인 야마가와 공모전 심사위원 후루야의 경우에는 심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일련의 사건에서 철저히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는 이들의 심리 묘사를 철저히 남의 것으로, 이 인물의 것으로 읽는다. 즉 사진을 들여다보듯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이다. 결코 독자나 화자의 이입을 위한 심리 묘사가 아니다. 오직 '피사체' 묘사일 뿐. 

  누마이가 야마가와 후루야에게 접근하는 과정은 '누구인지 뻔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누마이가 만든 가명으로만 표기하는 것도 재미있는 장치다. 야마가가 1년 종합 대상을 탄 공모전과 교통사고 기사, 공모전 결과에 대한 독자들의 반박글은 그림까지 실어서  표기했다. 야마가가 어떤 트릭으로 연쇄추돌사고를 일으켰는지 추리하는 과정은 현장 검증과 탐사를 하나 하나 다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누마이가 행동에 나설 때에는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고 카메라가 훌쩍 뒤로 물러난다. 둘 다 '꼼꼼한 행동 서술'인데도 '렌즈를 갈자' 완전히 달라진다. 작가는 아무 것도 속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는 철저하게 숨겨진 누마이를 읽어 나간다. 가면 겉만 찍는다면 아무리 선명하게 찍는다 해도 어떻게 가면 안의 사람을 볼 수 있겠는가? 누마이가 직접 움직일 때 독자는 절대 누마이 자신의 시점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의도를 일부러 알려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더욱 재미있는 건 야마가의 심경을 다루는 와중에도 '이 소설의 메인 사건: 야마가가 일으킨 연쇄추돌사고'에 대한 심경 묘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마가가 희생자의 언니 미요코를 소개 받을 때 당황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 때에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죄책감? 아니면 자기 정당화? 어느 것 하나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라이벌 사진 작가의 평가와 심사위원 후루야의 언급에서 동기 부분이 드러날 뿐이다. '공명심'이라든가 '기획-계획적 연출의 필요성'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표현은 야마가가 직접 한 게 아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해준 것이다. 야마가는 '심사위원 후루야를 극구 치켜세우고 존경심을 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가 후루야가 말한 '우연 연출하기'를 실행하게 되기까지의 갈등, 각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체 판단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 기이할 정도로 그 부분에 대한 얘기가 없어서, 나는 초반부를 읽을 때 정말로 야마가가 범인이 아닌 건가 싶기까지 했다. 일반인이 사람을 여섯 명이나 죽인 것 치고는 너무 담담하다. 자신의 행동을 전혀 회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그 담담함이 오히려 누마이가 준비한 덫에 꼼짝없이 걸려들게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작가는 사진 작가가 백장의 필름을 버려가며 한 장의 사진을 건지는 정성으로, 꼼꼼히 준비하고 치밀하게 제시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무리 큰 사진이어도 끄트머리에 이르면 잘려나가듯 이야기가 끝나자 서사도 가차없이 끝맺어진다. 영원히 번갈아 빛나는 등대 불빛을 스트라보 삼아.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 낸다.
  흔히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들 한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려지고 피사체인 내 모습도 변한다 해도, 매정하리만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 주는 사진들. '그 순간'을 강제로 남겨버리는 '사진의 힘은 과연 가공할 만 하다. 그러나 그런 사진의 힘은 정말 '진실'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진에 진정 생생한 순간을 담기 위해서는 '10만분의 1의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그 사진이 생생하면 할수록 결과물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야마가의 사진은 '우연임을 역설한다.'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아무런 가공도 되지 않은 순간을 포착해 냈다는 것'이 그의 사진에 대한 첫번째 찬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은 상황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사진이 '우연한(진실한, 어떤 의도도 없는) 한 순간'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사진의 거짓말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신문 기사와 비평문, 이야기 속 사건 현장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더하면 더해질 수록 사건의 실체 누마이는 더 꼭 꼭 숨어 버린다. 야마가와 후루야의 눈에 누마이의 가짜 신분이 그럴듯 해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누마이의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누마이는 야마가를 '진짜 같은' 장난감 뱀으로 속여 죽인다. 후루야는 누마이가 준비한 대마를 복용하고 진짜만큼이나 생생한 환상을 보다 죽는다. 누마이가 기껏 그의 죄를 털어 놓아도 그는 듣지 못한다. '더 없이 진짜 같은 것들'에 눈이 멀면 아무도 진실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진짜 같은 게 이미 있는데 무엇때문에 진실을 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작가는 사실적으로, 속임수에 대한 허구를 만들어 냈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반복되는 스트라보 빛만이 우리의 눈을 찌를뿐. 우리는 '보도 사진'을 볼 때마저도 진실보다는 '진실성'을 추구하게 되어 버렸다. 허구가 분명한 소설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생생한, 현실같은, 진짜 있을 법한 -인 것 역시 돌이켜 볼 일이다. 과연 진실성을 추구하는 걸로 진실을 좌시하는 걸 정당화할 수 있을까? 진실하려 했다-는 것은 진실에 준하는 것인가? '진실 같음' 앞에서 진실이 퇴색해 버린다면 우리가 사진을, 언어를 이용하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단 한 장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사진, 단 한 권으로 파문을 던지는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앞으로 몇 권의 소설을 읽어도 한동안 이 강렬한 빛의 대비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순하고 묵묵한, 그러나 치열한 글 세계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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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신간들 중 책장 들춰보고 싶어지는 책들. 반가운 책, 반가운 작가가 보여서 설렌다. 




1.  스마일리의 사람들 l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 조영학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 11


표지의 제목과 작가 이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의 그 작가 그 주인공 그 시리즈 일곱번째 작품이다.영화화도 된다고 들어서 매우 기대됨. 책을 산 사람들이 올리는 인증샷을 볼 때마다 부럽다. 



2. 혀끝의 남자

백민석 / 문학과지성사 / 2013. 11


데뷔작 '내가 사랑한 캔디'로 한바탕 논란을 일으키고 2003년 절필한 작가. 뒤늦게  이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작가를 찾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절필한지 10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그의 글은 눈 안에 박혀 들어갔던 모양이다. 일단 그런 작가가 돌아왔다는 것이 반갑고, 10년만에 푼 이야기가 궁금하다. 




3. 아 아이이치로의 도망 

아와사카 쓰마오 / 권영주 옮김/ 시공사  /2013. 11


알록달록하고 '위트 있어 뵈는' 표지에 끌렸다. 추리소설이되 유머 감각 넘친다는 설명을 보니 더욱 끌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초밥 보는 기분이랄까. 만일 탐정 명단이 만들어진다면 일본어, 알파벳 어떤 순서로 정렬하더라도 맨 앞에 올 수 있도록 '아 아이이치로'라고 이름 지은 것' 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귀엽기도 하고. 30년 전 쓰인 작품인 모양이지만 요즘은 갈수록 오래 전 작품의 유머 센스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4. 해마도시 

김휘 / 새움 / 2013.11


우리의 기억을 편집한다 - 편집이라는 고되고 지루한 업무가 다른 어감을 발산한다. 도마 위에 올라온 횟감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나의 기억'이라는 것만으로. 

 꿈, 기억 등 의식을 손보는 것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 특유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자아에게 어떤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가. 수술 후 잘려나간 기억덩이, 그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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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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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과의 이름은 여러 단편집에서 자주 보곤 했다. 워낙 이름이 눈에 띄니까. 하지만 작품을 직접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장편을! 감상을 한마디로 줄이라면: 오, 의외인데?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생각났다. <사물들> 은 ‘그럭저럭’ ‘교양있는 속물’로 살아가는 현대 유럽 젊은 부부의 일상을 관찰하는 소설이다. 사물들을 나열하는 것은 그들 부부의 일상을 박제하고 확대한다.  그들 부부의 작은 찻잔 속 같은 일상에서는 아무런 폭풍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세계 안에서 끝없이 부유하다 가라앉는 그들 부부, 자신의 삶에 대해 한없이 피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들의 모습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사물들>보다는 성기지만 좀 더 커다란 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훌륭한 부분은 ‘외국 가족의 삶’을 세대별로 그린 부분에서 작가가 오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중 나오는 말대로 유럽이고 한국이고 다를 거 없이, 사람 사는 곳 다 그렇게, 자신에게 필요한 키워드를 쭉 뽑아 늘어놓았다. 그 스크랩 결과물은 딱히 흥미로울 것이 없는 중산층 일대기다. 작가의 시각 역시 그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저 이 ‘소비위주 사회’에서 공공연히 소비되는 것들을 다시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로운 것 - 자아 정체’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소비하고 또 소비하며 소진되는 젊은이들이 있을 뿐이다. 아마 이들은 소비를 멈추지 않는 한 계속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쿨할 수 있는 건’ 소비뿐이고, 이 싸구려 쿨함은 젊은이들만의 전매 특허 아니겠는가.
  소설은 특별히 서사를 만들어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야기들을 그 자체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한번쯤 필요한 일인 게 분명하다. 나는 이 소설이 끝까지 제 키워드를 놓치지 않고 가주어 고맙다. 소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채, 그저 소비하는 현재의 자신만을 볼 수 있는 우리를 보여주므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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