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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맛 7작 - 제1.2회 테이스티 문학상 작품집
박지혜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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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항상 허기질까?

 

태어난 후 매일 매일 느껴왔으니 이제는 그만 익숙해져야 마땅한 감각이다. 그럼에도 매 세 끼 느껴지는 허기는 늘 짜릿하고 늘 새로워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 배고픔에 지치다보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까지배가 고픈 건지. 왜 계속 음식을 찾아 헤매게 되는지.

 

<77>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한참 배가 고팠다. 아침 점심 모두 거르고 일하는 오후, 퇴근까지는 아직 시계 반 바퀴가 남은 때. 배고파 소리를 사려물며 트위터를 열었는데 <77> 발매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음식을 소재로 가지각색 단편 모음. 푸드 프린터 미역국 이야기가 눈을 사로잡았다. 냉면, 스파게티. 카레. 배고플 때 음식 소설집이라니 이건 운명인가요. 돌이켜보면 언제나 배가 고프니까 언제든 이 책을 보게 되었겠구나 싶다.

 

작품집에는 제목처럼 일곱 가지 음식, 일곱 가지 소설이 담겨 있다. 다루어지는 음식은 미역국, 스파게티, 라면, 냉면, 카레와 (인도) 커리 등 대개 내게 매우 친숙한 메뉴였다. 그 흔한 음식에 작가만의 특별한 비법이 첨가되어 엉뚱기발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입이 출출할 때마다 뜯어먹는 간식처럼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씩 꺼내 읽었다. 이야기를 삼키고, 문장을 마시고, 단어를 오독오독 씹었다. 독서가 참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되었다.

 

 

1. 일상을 비추는 음식

 

첫 작품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은 독자를 훅 이입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연령대와 감성이 나와 얼추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30대의 매 마감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종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각박하다 못해 얄팍한 생활, 복사용지처럼 뽑혀 그때 그때 소모되는 나. 그런 내 단짝 푸드 프린터.

 

자판기와 3D 프린터를 합쳐놓은 듯한 이 기계덕분에 이야기는 독자의 일상에서 한 단 올라간다. 집집마다 들여놓은 푸드 프린터로 인간은 더욱 단절되지만, 오히려 그 푸드 프린터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푸드 프린터로 구현 불가능한 엄마의 손맛 미역국을 먹어야 할 대 위기에 놓이고 마는데!

 

기술 문명으로 인한 단절 / 기술 문명으로도 놓칠 수밖에 없었던 인명 / 기술 문명으로 다시 이어진 인연. 소설은 현대 사회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다루며 거기에 따스한 인간애를 부여한다. 주인공이 받은 기름지고 쫀득한 미역국처럼 따뜻한 결말이다.

매일 먹어야 하기에 시대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는 밥상으로 오밀조밀 맛있는 소설 한 편을 만들었다. 좋은 소재를 다룬 좋은 이야기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 작품을 도드라지게 하는 소재인 푸드 프린터 활용이 애매했다는 것이다. 푸드 프린터는 주인공을 돋보여주는 도구지만 메인 서사는 아날로그 미역국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보니 중요한 순간에는 존재감이 사라진다. 소설 초반에 눈맛을 끄는 소재이니만큼 마지막까지 맛이 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2. 누군가를 떠올리는 촉매제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에서 주목했던 또다른 꼭지는 음식이 잃어버린 사람을 회상하게 만드는 키워드로 기능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 번째 작품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과 마지막 작품 커리 우먼에서도 쓰이는 장치다.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은 정체불명의 스파게티교 신봉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찾는 남편의 이야기를, 그 수색 의뢰를 받은 탐정의 시점에서 쓴 산뜻 발랄한 이야기다.

 

평소 먹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 낼 때 가기 좋은 스파게티. 알고보면 자취생이 휘적휘적 해먹기 편한, 이색적이면서도 만만한 메뉴 선정과 문체가 잘 맞아 떨어졌다. 세상 무슨 일에도 심드렁해서 계약결혼도 덥석 해버린 남자가 아내를, 아내의 독특함을, 그 내면의 사정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귀엽게 그렸다. 이 작품에서 파스타는 아내에 대한 유일한 단서이자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커리 우먼은 주인공의 단골 중고 서점이 난데없이 커리집으로 변모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다. 주인공에게 카레는 미성년자인 자신을 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음식이다. 주인공은 이 신기한 커리집에서 냄비 가득 카레를 끓여놓고 사라져버리는 여자들이 자신의 어머니 외에도 여럿 있으며 그들을 커리 우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처음 읽었을 때 이해가 썩 잘되지 않았다. 작품은 카레가 가진 두 가지 위상을 소재로 했고, 매일 매일 관리해야 하는 가정 식단을 간단히 때우게 해주는 집밥 카레 / 이색적인 향과 재료, 먹는 방법으로 이국적 분위기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인도 커리를 여성의 처지와 접목시켰다.

 

혼자 아이를 기르며 일하는 미혼모든, 잘 나가는 자본가의 트로피 와이프든. 여성은 모두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의무에 강제로 붙들려 있다. 퇴근도 은퇴도 없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밥상을 해결해야 하고 결국 이 의무를 쉽게 이행할 수 있게 해주는 메뉴가 카레다. 그렇게 카레 끓이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녀가 그 자리를 떠나게 되면? 남는 건 한 냄비의 카레 뿐이다.

작품에서는 커리 우먼은 카레를 남겨놓고 문득 떠난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이를 카레를 끓이다 사라졌다고 받아들였다. 카레에서 커리로. 의무에서 일탈로.

 

해피버스데이, 3D 미역국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 커리 우먼의 문체는 제각각이다. 세 작품에서 회상되는 인물의 처지도, 주인공의 목적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음식을 통해 그들을 회상하는 것만은 같다. 음식이 누군가의 산 증거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문득 내가 먹는 음식 메뉴를, 내 주변 사람들을 돌이켜 보았다. 내 지인들은 나를 무슨 음식으로 기억할까? 매일 마시는 제로 콜라, 친구들과 둘러앉아 철없이 혼자 두 쪽 다 먹었던 치킨 다리, 체하면서도 자꾸 먹었던 쫄면. 지금 내가 떠올리면 죄 한심한 모습 뿐이다. 글쎄. 한심한 건 괜찮은데. 누군가 나를 음식으로 떠올린다면 웃어 줬으면 좋겠다.

 

 

3. 벗어날 수 없는 굴레

 

한편 다섯 번째 작품 하던 가닥은 위 세 작품과는 반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 세 작품이 음식으로 떠나보낸 사람을 회상한다면 이 작품은 국수 가닥의 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의 귀향을 다루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국숫집, 집에 돌아갈 때마다 엄마가 목이 메이도록 들이미는 음식, 스릴러 액션이 섞여 있는 이 작품은 독자의 입에 침보다는 구토감이 치밀도록 한다. 밀가루 음식을, 정말, 끝도 없이 먹이거든. 그 모든 음식을 익히고 지지고 삶는 과정과 입에 넣는 모습을 읽다보면 내가 다 후각을 잃는 것 같다. 온갖 음식 가판대가 다 있는 푸드 코트 한 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운명 앞에 다시 선 주인공을 볼 때는 차라리 홀가분한 심정이다.

 

 

4. 추리의 단서

 

음식이 누군가가 남기는 흔적이라면 누군가를 추적할 단서도 될 터다.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은 화자가 사설 탐정이다보니 간략하게나마 탐색의 과정을 끼얹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이나 추리 과정은 입맛을 돋워주기 위해 조금 얹는 허브 정도의 역할이다.

 

음식으로 상대를 추적하는 장치는 여섯 번째 작품 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에도 나온다. 제목 그대로 군대에서 귀신에게 라면 제삿밥을 바치게 된 주인공이 라면의 연도로 귀신의 사망연대를 짐작한다. 물론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입대부터 제대까지 귀신, 라면과 함께한 주인공의 경험담이므로 이 추적 과정도 그리 상세하지 않다.

 

라면 맛을 귀신이 구분해 내어 알아볼까 싶기도 하거니와, 60년대, 80년대에 나온 라면과 같은 상표라고 해도 2010년대 만들어진 라면은 맛이 다를 거라는 점 등등 덜컥거리는 부분들이 있지만……. 애초에 귀신이 왜 그렇게 라면에 환장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지만. 역시 넘어가자. 중요한 건 지옥 같은 군대를 주인공이 무사 제대했다는 거니까. 수십년 묵은 귀신까지도 제대 시켜준 라면 성인이여.

(그런데 타이밍 딱 맞춰 군 부대 앞까지 찾아오는 증손녀가 있다니 이 귀신 너무 영험한 거 아니냐)

 

음식과 추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건 작품집 네 번째 작 류엽 면옥이다. 이 작품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마치 1920년대에 정말 냉면집 배달부 생활을 해본 것처럼 사건 정황과 주인공의 직업, 소재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20년대 경성일보에 실린 기사 한 꼭다리를 가져왔다고 해도 그럴 법 하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 달리 음식의 조리, 음미 과정에 집착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당시 냉면가게 안팎의 풍경을 주목한다. 가게 안에서는 냉면 한 그릇을 내오기까지 반죽을 치고 육수를 내는 이들이 있고 가게 밖으로는 배달부 중머리들과 은밀히 정보를 주고 받는 독립군, 그들을 쫓는 경감이 있다.

 

단편이다보니 인물들의 사연을 대사 몇 마디로 처리하고 주인공의 마지막 결단도 너무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쾌속 전개가 냉면처럼 시원했다. 하필 요즘 겨울이라, 괜히 나까지 20년대 겨울 별미였다는 냉면이 땡겨서 아주 혼났다.

(난 원래 비빔 냉면 파인데 소설을 읽을 때는 동치미 냉면이 너무 땡기더라. 주변에 파는 곳도 없는데! 이럴 때야말로 푸드 프린터 필요한 것 아닌가요!!)

 

5. 조리까지의 기나긴 여정

 

한편 재료를 내오고,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이 중심 장면을 이룬 작품도 있었다. 두 번째 작품 비님이여 오시어와 다섯 번째 작품 하던 가닥이다.

 

비님이여 오시어는 작품집 중 유일한 판타지 역사물이다. 이 소설의 배경 모델은 세종 시대  극심한 가뭄기. 왕은 청룡을 잡아 비를 빌고자 하고 주인공 숙수가 청룡을 찾아 가는 여정이 아주 길게 다루어진다.

 

기아와 전염병 유행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여정은 곧 한 끼 한 끼를 이어가는 과제가 된다. 토끼부터 사람까지,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생물들이 서로를 사냥하고 먹기 위해 목숨을 건다. 마침내 용을 사냥하고, 조리하고, 임금의 앞에 대령하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위기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광기가 되고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예스러운 분위기를 잘 유지하고 옛 음식도 많이 등장하여 신선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리는 조선 왕과 숙수의 역할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닥친 상황에서, 가뭄 해결을 위해 용을 잡는데 달랑 둘만 보낸다는 점도 의아했다. 하지만 이는 판타지 퓨전이라는 장르를 보아 넘어갈 수 있는 문제다.

 

내가 가장 아쉬운 부분은 주인공 숙수를 보좌하기 위해 보내진 인물, 모량이다. 모량은 동물과 소통하는 이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실상 작품 내에서 역할이 없다. 모량의 액션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액션이 주인공에게 아무 울림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모량 때문에 어떤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나? 그런 적이 없다. 반면 모량은 별 설득 과정이 없어도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캐릭터가 휙휙 바뀐다.

 

갈등은 일단 두 캐릭터가 각자의 입장을 고수할 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모량의 입장이 쉬이 바뀌면서 갈등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더 첨예한 갈등이 일어났다면 주제도 더 심화되었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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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은 간만에 든 단편집이었다. 책 날개와 중간중간의 작가 소개란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느낀 건 결국 동질감이다. 나도 월급날 퇴근길에 있는 파스타 집에 들어가서 한 달 잘 버틴 걸 자축하곤 하는데. 여기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 그리 생각하며 오늘도 배를 두들긴다. 이 글 쓰다보니 어느새 점심 때가 지났다.

춥고 북적북적한 도시에서 매일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있을 우리, 작가와 독자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의미 있는 테마 공모전이었고, 이런 재미있는 공모전이 앞으로도 계속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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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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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낯설게 - 영화의 소설화 




 하지만……'시절'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비가 내리는 밤의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으면 친구들과 보낸 그 시절의 이미지가 스냅사진처럼 유리창에 비치곤 했다. 그것이 감상일 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재구성된 과거, 기억과 감정이 조한 과거. 하지만 그건 우리가 현재의 자신을 지탱하는 가난한 방편이기도 하다. 나는 차라리 그 환각을 즐기기로 했다. 


  이장욱, [천국보다 낯선], 63p 중


  이 소설을 즐기는 방법 자체가 나와있는 구문인 듯 하여 발췌했다.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은 그런 소설이다. 모든 문구는 단편화된 스냅사진의 중첩이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스냅사진을 넘기듯,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한적이다. 유명한 영화 제목을 딴 열 세 개의 챕터, 국도를 달리는 승용차 안이라는 제한된 세트, 역시 제한된 등장인물 세 명과 그들이 공유하는 '한 시절'. 


  이 소설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 김, 정, 최는 각자 닳고 닳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비록 김과 정은 부부 관계지만 그들의 기억은 독립되어 있다. 같은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지금 한 명의 친구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들의 기억은 다 별개로 흩어져 있다. A의 죽음은 그들의 기억이 산산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보여준 장치에 불과하다. 나뭇가지 세 개를 묶어 봤자 나뭇가지는 각자 별개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달까. 하지만 그렇게 각자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들은 본질적으로 같다. 


  이들을 실은 차는 A의 장례식이 열리는 K시를 향해 달리고, 이들의 기억은 갈수록 역주행한다. 자잘한 나뭇가지며 돌맹이가 호수에 파문을 그리듯 온갖 상념이 이어진다. 그리고 계속 언급되는 영화명. A에 대한 기억. 조금씩 엇나가는 그들의 대화. 반복되는 교통사고와 A의 영화, 김-정-최의 장례식행은 결국 동질성을 띠게 된다. 동화 작가 정, 속물적인 증권거래사 김, 사회학 강사를 하며 현학적인 세계에 빠져 있는 최의 상념은 결국 비슷하다. 모두 서로의 환각이며 서로의 뇌에서 재구성된 결과물인 것이다. 결국 이들을 여기에 모아놓은 주최자, 이 소설의 진짜 화자는 A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A는 괴 문자만을 남겨놓은 채 자신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장욱의 이 소설은 현대인의 존재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듯 하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의미화하는지 그 방식 자체를 글로 굳혀 놓았달까. 우리는 각자 여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우리를 여기에 앉혀놓고 한 밤 중 국도를 달리게 한 '그 존재'는 이미 없다. 우리는 그의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 가지만 끝내 종착역에 닿지 못한다. 작가의 스냅사진 속 현대인은 어두운 밤 캄캄한 터널을 끝없이 달리는 중인 모양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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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그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블랙스완그린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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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은 끝나지 않기에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얼마쯤은 완벽하지 못한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살아내기에 벅차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독특한지, 나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입 안에서 굴리고 쪽쪽 빨아먹고 있는 엿이 얼마나 달콤한지는 엿을 다 먹은 후 입안에 감도는 들쩍지근한 맛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창 엿을 먹을 때는 이나 손가락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엿을 처치하느라 정신이 없지 않은가. 


  데이비드 미첼의 소설 <블랙스완그린>은 막 고아내 굳힌 엿을 똑 똑 끊어 먹는 맛이 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의 영국 우스터셔 주의 촌마을 블랙스완그린, 주인공은 작가의 자전적 인물인 열세살 소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지금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표지 안쪽은 현실과 떨어진 또 하나의 세계고, 그 안에서 소년은 지금 열세 살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가 이 책의 첫장을 펼쳐 드는 순간 주인공 제이슨 테일러는 다시 열세 살의 1월, 블랙스완그린의 호숫가로 돌아갈 것이다. 


  1980년대 영국의 TV 프로그램과 상품, 광고, 유명한 배우와 가수들의 이름들 - 쉴 새 없이 언급되는 이 소도구들은 한 소년의 생생한 시선에 잡히면서 독특한 색을 얻는다. 나는 영국 사회에 대해 잘 모르고, 80년대에 대한 지식은 더욱 파편적이다. 나 자신이 80년대 중반에 만들어졌으니까. 뭐. 하지만 이 아이의 선명한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도 얼마든지 열세 살로 돌아가 이 아이와 대화를 트고 놀 수 있을 것 같다. 소년이 쓰는 단어, 그가 묘사하는 자그마한 촌마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이상 어른인 척 젠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읽는 내내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건지 놀랐다. 대체 뇌 속에 어떤 우물을 파 놓으면 이런 문장과 단락 연결이 끊임없이 나오나.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에는 정말 이렇게 떠올리기만 해도 침 고이는 소설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표지는 어쩐지 미스테리 소설틱하고 두께는 엄청 두꺼운데다 '자전적'이라잖아! 작가에게 가장 '이야기화'하기 어려운 게 아마 자신의 유년기 일상일 것이다. 자전적이란 말을 굳이 붙이는 순간 이미 나는 기대를 반 덜어 버린다. 그 단어에는 '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에 이미 콩깍지가 씌여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어린 시절 얘기를 할 때는 팔이 안으로 굽게 마련 아닌가.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대개 재미가 없지.' 라는 수식이 딸려 있다. 물론 정말 훌륭한 자전적 이야기도 많지만, '자전적'이라는 표시를 보는 순간 나는 이미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다. 조건반사적인 편견인데, 지금까지 고칠 마음이 별로 없었다. - 자전적인 이야기는 소재는 다 떨어진 작가나 쓰는 거지. 


  내 건방진 생각대로 데이비드 미첼이 할 이야기가 떨어져서 이 소설을 쓴 거라면 대체 이전의 그의 소설은 얼마나 꿀맛이었다는 걸까. 첫번째 챕터를 다 읽어갈 때에는 이 소설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 아까워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는 이 책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1980년대, 시골, 있을 건 다 있으면서도 어딘가 하나씩 어긋나고 불안한 중산층 10대의 성장기를 우리나라에서 쓴다면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아마도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널리 알려진 소설 중에서는 제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새의 선물>을 읽으며 이 소설만큼 몰입하지는 못했지만.(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13살 현재 진행형을 고수하지만, 새의 선물은 앞뒤에 어른이 된 내가 과거 회상에 빠져들었다 나오는 장치가 있다. 별로 효과적이지는 않은 장치다.) 어쨌든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얻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세가지를 추리라면 내가 너무 편협했다는 깨달음, 앞으로 얼마나 더 재미있는 책을 많이 접하게 될까 하는 흥분, <블랙스완그린> 꼽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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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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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백민석 소설집을 읽고


  이 소설은 한 방랑자의 귀환기이다. 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과 연을 끊어버린 자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에 대한 보고서. 빈 종이를 한 줄 한 줄 자기만의 언어로 채워 넣은 글. 읽는 내내 옛 폐허에 벽돌을 하나하나 직접 얹어 쌓은 집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집안은 어두컴컴하고 적막했다. 결코 유쾌한 글이 아니었다. 


  나는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이 작가가 처음 등장하고 활동하는 동안 그토록 많은 논란이 있었다는 데 말이다. 내가 이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그때 그런 작가가 있었는데, 절필했다더라. 정말 아쉽다.’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것과 그 작품에 대한 감상 정도였다. 그런데 이럴수가, 신간 목록에 이 작가 이름이 있다니! 돌아 왔다니.

  그렇게 펼쳐든 소설집 안에는, 정말 그 작가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나는 문학계에 무엇이 필요했는지, 이 작가가 그때 던진 게 무엇이었는지, 지금 이 작가가 뭘 주는지, 뭘 줄 수 있는지 판단할 능력은 없다. 다만 글쟁이는 결국 자기 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생히 깨달았을 뿐이다. 작가는 결국 돌아왔고 그의 방랑은 아주 긴 여행이 되었다. 사랑으로 가득 차려다 망가져버린, 끝없는 연옥에서의 여행. 식별할 수 없는 이정표 사이에서 허무맹랑한, 그래서 그럴듯한 희망을 전파하는 전도기가 되었다.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이 작가가 되고 절필을 선언했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무엇을 거쳐야 했는지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연옥이라고. 스스로를 매달아 화형식을 거행하고는 그 형대에서 제 발로 내려와 부활해야 하는 연옥. 


  책 마지막 평론가의 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 날 것 그대로의 분노가 허락받지 못한다는 것, 우리에게 그 분노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가가 머리에 인 불이 과연 어떻게 점화될지, 앞으로가 두렵다. 그의 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분신하는 것을 보며 더 타라, 죽기까지 타라라고 응원한다는 게 참 끔찍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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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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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 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을 읽고


[뻐꾸기의 알은 누구의 것인가]_ 다소 길고 새삼스러운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스키 선수들이 소재로 등장하는 범죄극이라니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듯도 했다. 첫 장 시작부는 밋밋하니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넘겼다. 그런데 넘기면 넘길수록 이 소설 꼭 스키 코스를 타고 내려가는 듯 재미있더라. 단번에 슉 눈을 지치고 나가는 듯한 속도감과 안정적인 코스 구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흥미로운 질문거리로 꼭꼭 다져진, 좋은 이야기.


유전자 연구와 응용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유전학을 연구하기 훨씬 전부터 다른 동식물의 유전과 진화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며 환경을 통제해 왔다. 아마 본 소설의 학자 유자키의 프로젝트, '유전자를 연구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재능을 효율적으로 계발하기'은 관련 연구 중 가장 소박한 목표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윤리 도덕'만으로는 인류가 자기 스스로의 코드를 분석, 교정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어떤 잣대로 판단해야 할까? 과연 '유전자 지도'가 한 인간의 인생 청사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결국 선천적으로 물려 받은 것, 원래 그렇게 되도록 결정된 것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만약 주어진 것에서 일탈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선택’일까?



 이 소설에서 제기된 질문이 그렇게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인가. 노력으로 변경-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인생의 관문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흔히들 해보는 질문이지 않은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오래된 질문을 '유전자'라는 소재를 통해 다시 한 번 던지고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기도 하다. ‘결국 뻐꾸기는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것’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지 선택하는 것은 재능도 환경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데도 딸을 자신과 같은 훌륭한 스키 선수로 길러낸 히다 부녀, 선천적 재능때문에 원하던 음악을 할 수 없는 가쓰야 부자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한다. 히다가 자신의 딸을 기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한 가미조,  심장이 약한데도 크로스 컨트리 스키 활동을 즐기는 연습생 등 주변인물들이 치고 빠지며 이야기를 매끄럽게 진행한다. 


  와중 이 소설의 서사를 끌어나가는 것은 이 소설의 ‘유전자 개념’이 동양식 '핏줄' 개념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굳이 '부모와 자식'의 유전자 공통점을 확인해 유전자의 능력을 밝혀 내겠다는 유자키의 연구 방향은 결국 ‘대물림’ 개념이다. 


  사실 선천적 재능을 밝혀내는데 꼭 '부모 자식을 함께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전 형질이라는 게 그렇게 부모 한 쪽의 능력을 받았다는 게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넘어가는데, 결국은 이 소설에서 유전자란 주제를 만들기 위한 설정이라는 게 티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만약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질문이 여기까지 였다면 이 소설은 그다지 흥미로운 이야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재능이 있는 게 아무 의미도 없다며 괴로워하는 가쓰야 신고의 고민도 결국 무엇을 타고 났든, 어쨌든 가진자들의 이야기 아니냐며 넘어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연습생들을 보면 가쓰야의 고민은 하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격인 히다 카자미는 아예 ‘주어진 재능’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전한 가치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히다 카자미는 자신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정작 완전히 보호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가 해야 할 고민은 그녀의 양아버지인 히다와 유자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복오빠가 나눠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뻐꾸기인 줄도 모르는 뻐꾸기 알인 것이다.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친아버지인 가조미와 이복오빠가 벌인 사건은 이 소설의 핵심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에 진실이 다 밝혀진 후에도 스릴러를 위한 스릴러, 설정을 위한 설정이라는 인상만 줄뿐. 


  하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조차도 다 답을 내리지 못한, 또 하나의 주요한 주제가 들어 있다. 좋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우리도 어디서 물려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뻐꾸기 알’이 있다 치자. 하지만 그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과연 우리가 스스로 우리 인생을 꾸리려 할 때 그 선택권은 우리 손에 놓이게 될까?


  이 소설의 배후는 ‘이 유전자가 누구에게서 온 것이냐’ ‘인생을 유전자로 타고난 대로 효율적으로, 정답에 맞춰 살 것인가. 그렇게 해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인가’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선천적인 재능의 계발’ 여부가 ‘자본’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은 애초에 한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꼬이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움직이는 동인은 바로 기업의 자본 지원이다. 히다 부녀, 가쓰야 부자 뿐만 아니라 연구를 기획한 유자키마저 기업의 소속원인 것이다. 

  유자키는 이 유전자 연구가 ‘기업의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히다 부녀는 유전자 연구에 협력하기를 원하지 않는데다, 협력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는데도 기업의 보호를 받기 위해 유자키가 내미는 미끼를 물고 만다. 가쓰야 부자에 와서는 이 문제가 훨씬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가쓰야 신도는 음악을 하고 싶은데도 아버지의 일자리와 자신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제 재능을 상품으로 내걸고’ 스키를 타야 한다. 그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기업의 또다른 상품인 ‘히다 카자미’를 해치려 한다. 기업의 상품을 해치면 손해를 본 기업이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는 마지막 순간, 기업 측 입장을 대변하는 유자키는 ‘우리는 가쓰야 부자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은 전적으로 가쓰야 부자의 몫이었다.’고 말한다. 히다 부녀의 일에 대해서는 제법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유자키가 가쓰야 부자의 건에 대해서는 싹 기업측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이것이 정말 가쓰야 부자의 선택이었다고 보는 독자는 아무도 없을 텐데도 말이다. 유자키 본인이 그 검은 거래를 주도 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며, 그것은 우리의 선천적 재능, 후천적 의지, 우리의 미지의 가능성/뻐꾸기 알/마저 마찬가지이다. 과연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소설은 히다 카자미가 선전하는 것을 아버지가 지켜보면서 깔끔하게 끝난다. 그러나 작가가 슬쩍 건드리고 간 질문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과연 기업이 우리의 선천적 재능을 상품화하여 계발하려 할 때, 우리는 그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그때 과연 ‘내가 바라는 건 음악이에요.’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에서는 재능 계발이 다른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여지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심장 약한 연습생마저도 그렇다. 따져보면 이 학생이 스키를 탈 돈이 없다면, 스키장에 오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가 스키를 타러 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우리의 뻐꾸기 알은 정말 우리의 것으로 남아 있는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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