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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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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가볍지 않고 버겁지 않다. 첫장부터 끝장까지 화려한 묘사 한 줄 없이 시선을 잡아놓는다. 읽어나갈 수록 계단을 한 단 한 단 올라가는 기분이랄까. 문장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지면을 내리누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분의 1의 우연>은 대말뚝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어떤 불필요한 서술도, 농담조차도 없다. 작업용구는 사용자의 미감을 반영하지 않는다. 강도며 모양, 색깔까지도 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는 오로지 ‘10만분의 1의 우연’이라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소설은 마술이며 마약이고 합법적인 사기극이다. 관건은 얼마나 그럴듯하게 독자를 속여 넘기느냐이며, 그 기교가 화려할수록 감탄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렇게 내세워진 '그럴 듯 함'이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묵묵히 공들여 이야기를 쌓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획기적인 메시지도 반전도 없다. 과장도 비약도 없다. 소설 속 세계는 그저 확고하게 다져질 뿐이다. 작가에 의해서,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소설 속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는 '10만분의 1의 우연'을 연출하기 위해 공들여 트릭을 마련한다. 덕분에 그는 구경꾼이나 경찰이라는 ‘현실’에 훼손당하지 않은 순수한 ‘순간’을 포착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한수 앞선 이가 야마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누마이다. 그의 약혼녀는 야마가가 놓은 함정에 휘말려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절명하고 말았다. 소설은 누마이가 능수능란한 연기와 철저한 준비로 야마가의 트릭을 깨고 복수를 하는 과정을 쭉 짚어 나간다. 

  반전은 없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다. 그가 쓴 트릭마저도 세세히 설명된다. 수수께끼도 자극적인 추가 사건도 없다. 범인은 범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복수 역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피도 절규도 통쾌함도 없다.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는 비밀도 없다. 이 소설은 내가 요즘 본 소설 중 가장 '스포일러'가 무의미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작가가 다 알려주는데, 대체 뭘 스포일러하고 말고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 소설은 정말 '솔직하다.' 마치 '한 순간을 온전히 담아낸 사진'을 들여다 볼 때처럼.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를 모두 파악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범인도 범죄도 그 결과마저도 다 밝혀졌는데, 대체 그 외에 더 밝혀져야 할 게 뭐가 있는가?

  그런데 이 소설을 쓴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미스터리 계의 한 파를 만든 거장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펼쳐든 후 한번도 놓지 않고 내리 읽었다. 미스터리류를 많이 읽지 않아서 그 장르 법칙은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끝까지 부족한 게 없었다. 읽는 내내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하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트릭 없이 솔직한 이야기'가 어떻게 미스터리가 되는 걸까?

  누마이는 야마가에게 접근해 진실을 듣기 위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대비한다. 작가 역시 이 과정을 '아무 방해 없이 진실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한 가지 전략을 고수한다. 그 전략이란 바로 '외부 관찰자 시점 고수하기'. 이 소설의 소재 '사진'의 속성과도 일통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서사 중심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그 심리가 묘사된다. 소설에서 내내 중심 사건을 한 단계 한 단계 진행시키는 누마이의 심리에 대해서는 절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독자는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과 포즈로 상황을 유추하듯, 그의 행동에 관한 서술을 보고 그의 심정을 파악한다. 물론 그 행동 서술에서 이미 심정에 대한 단서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누마이는 슬펐다. 괴로웠다. 분노했다.' 라고 쓰인 부분이 없다. 기껏해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전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죄인 그룹인 야마가와 공모전 심사위원 후루야의 경우에는 심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일련의 사건에서 철저히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는 이들의 심리 묘사를 철저히 남의 것으로, 이 인물의 것으로 읽는다. 즉 사진을 들여다보듯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이다. 결코 독자나 화자의 이입을 위한 심리 묘사가 아니다. 오직 '피사체' 묘사일 뿐. 

  누마이가 야마가와 후루야에게 접근하는 과정은 '누구인지 뻔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누마이가 만든 가명으로만 표기하는 것도 재미있는 장치다. 야마가가 1년 종합 대상을 탄 공모전과 교통사고 기사, 공모전 결과에 대한 독자들의 반박글은 그림까지 실어서  표기했다. 야마가가 어떤 트릭으로 연쇄추돌사고를 일으켰는지 추리하는 과정은 현장 검증과 탐사를 하나 하나 다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누마이가 행동에 나설 때에는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고 카메라가 훌쩍 뒤로 물러난다. 둘 다 '꼼꼼한 행동 서술'인데도 '렌즈를 갈자' 완전히 달라진다. 작가는 아무 것도 속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는 철저하게 숨겨진 누마이를 읽어 나간다. 가면 겉만 찍는다면 아무리 선명하게 찍는다 해도 어떻게 가면 안의 사람을 볼 수 있겠는가? 누마이가 직접 움직일 때 독자는 절대 누마이 자신의 시점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의도를 일부러 알려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더욱 재미있는 건 야마가의 심경을 다루는 와중에도 '이 소설의 메인 사건: 야마가가 일으킨 연쇄추돌사고'에 대한 심경 묘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마가가 희생자의 언니 미요코를 소개 받을 때 당황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 때에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죄책감? 아니면 자기 정당화? 어느 것 하나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라이벌 사진 작가의 평가와 심사위원 후루야의 언급에서 동기 부분이 드러날 뿐이다. '공명심'이라든가 '기획-계획적 연출의 필요성'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표현은 야마가가 직접 한 게 아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해준 것이다. 야마가는 '심사위원 후루야를 극구 치켜세우고 존경심을 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가 후루야가 말한 '우연 연출하기'를 실행하게 되기까지의 갈등, 각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체 판단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 기이할 정도로 그 부분에 대한 얘기가 없어서, 나는 초반부를 읽을 때 정말로 야마가가 범인이 아닌 건가 싶기까지 했다. 일반인이 사람을 여섯 명이나 죽인 것 치고는 너무 담담하다. 자신의 행동을 전혀 회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그 담담함이 오히려 누마이가 준비한 덫에 꼼짝없이 걸려들게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작가는 사진 작가가 백장의 필름을 버려가며 한 장의 사진을 건지는 정성으로, 꼼꼼히 준비하고 치밀하게 제시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무리 큰 사진이어도 끄트머리에 이르면 잘려나가듯 이야기가 끝나자 서사도 가차없이 끝맺어진다. 영원히 번갈아 빛나는 등대 불빛을 스트라보 삼아.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 낸다.
  흔히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들 한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려지고 피사체인 내 모습도 변한다 해도, 매정하리만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 주는 사진들. '그 순간'을 강제로 남겨버리는 '사진의 힘은 과연 가공할 만 하다. 그러나 그런 사진의 힘은 정말 '진실'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진에 진정 생생한 순간을 담기 위해서는 '10만분의 1의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그 사진이 생생하면 할수록 결과물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야마가의 사진은 '우연임을 역설한다.'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아무런 가공도 되지 않은 순간을 포착해 냈다는 것'이 그의 사진에 대한 첫번째 찬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은 상황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사진이 '우연한(진실한, 어떤 의도도 없는) 한 순간'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사진의 거짓말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신문 기사와 비평문, 이야기 속 사건 현장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더하면 더해질 수록 사건의 실체 누마이는 더 꼭 꼭 숨어 버린다. 야마가와 후루야의 눈에 누마이의 가짜 신분이 그럴듯 해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누마이의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누마이는 야마가를 '진짜 같은' 장난감 뱀으로 속여 죽인다. 후루야는 누마이가 준비한 대마를 복용하고 진짜만큼이나 생생한 환상을 보다 죽는다. 누마이가 기껏 그의 죄를 털어 놓아도 그는 듣지 못한다. '더 없이 진짜 같은 것들'에 눈이 멀면 아무도 진실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진짜 같은 게 이미 있는데 무엇때문에 진실을 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작가는 사실적으로, 속임수에 대한 허구를 만들어 냈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반복되는 스트라보 빛만이 우리의 눈을 찌를뿐. 우리는 '보도 사진'을 볼 때마저도 진실보다는 '진실성'을 추구하게 되어 버렸다. 허구가 분명한 소설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생생한, 현실같은, 진짜 있을 법한 -인 것 역시 돌이켜 볼 일이다. 과연 진실성을 추구하는 걸로 진실을 좌시하는 걸 정당화할 수 있을까? 진실하려 했다-는 것은 진실에 준하는 것인가? '진실 같음' 앞에서 진실이 퇴색해 버린다면 우리가 사진을, 언어를 이용하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단 한 장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사진, 단 한 권으로 파문을 던지는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앞으로 몇 권의 소설을 읽어도 한동안 이 강렬한 빛의 대비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순하고 묵묵한, 그러나 치열한 글 세계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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