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샹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평점 :
지나온 과거, 바라보는 미래, 부재한 현재.
-강신주, 이상용의 '씨네샹떼'를 읽고-
통증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가 찍은 영화에서부터 버스터 키튼, 에이젠슈타인과 이스트우드에 이르면서 영화라는 예술의 바다는 점점 깊어지고 넓어진다. 단순히 장르나 표현 방식을 횡적이라고 표현해서는 안된다. 영화에 담아낼 수 있는 소재들은 점차 넓어진다. 타르코프스키는 시를 영화로, 부뉴엘과 달리는 미술작품을 움직이는 모빌에 이어 좀 더 다채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영화의 깊이는 어디에서 측정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는 표현을 중점으로 영화라는 굴로 들어간다. 앨리스가 떨어진 토끼굴의 끝은 어디일까. 영화가 이 세상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표현에 다다른다면, 그 끝은 언제쯤 오는가? 영원한 끝은 없다. 앨리스가 도착한 줄 알았던 토끼굴의 끝은 꿈의 공간이 아니라 계속 수수께끼를 풀고 부조리와 싸워나가야 하는 공간이었다. 사유의 완성은 없다. 제스쳐에서 어트랙션, 몽타주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통증에 대한 사유였다. 사회와 인간, 관계, 운명, 필연과 우연은 서로 뒤섞이면서 통증이라는 선명한 감각으로 회귀한다.
채플린이 목소리 없이 제스쳐와 미장센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건 단순한 희극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영화를 멀리서 볼 수도 있고 가까이서 볼 수도 있었다. 그건 그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정서상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콧수염 속 실룩거리는 입을,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끝내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 어떤 말을 들어야 한다. 통증의 끝은 알 수 없는 신음소리이며, 그 신음소리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 신음소리는 유언이 될 수 있다. 매 순간 우리는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말들을 듣는다. 실생활에서 들리는 유언이 될 수 있을 말들은 단지 실용적이지 않다거나 생활고의 문제로 인해 무시된다. 결국 우리는 모든 말을 듣지만 아무 말도 듣지 못한다. 아도르노가 염려했듯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혹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영화는 어떤 제국주의나 국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세뇌될 수 있을 어둠의 공간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벤야민이 주목한 바처럼 긴장과 유지에 집중하라고 강요하는 일상으로부터 배제되어 우리가 망각했던 ‘통증’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그 통증은 타인의 통증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통증이다. 히치콕의 사이코, 노먼의 안에 있던 어머니의 자아가 노먼을 위해 자신이 죗값을 치루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건 노먼의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처형당하는 건 노먼, 죽는 것도 노먼, 사망했다고 기록에 남는 것도 노먼이다. 그는 사회의 즉결처분을 거부한 채 어머니로서 죽으며, 그래서 그는 사회부적응자아인 사이코가 된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간혹 ‘아무르’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걸작 25편에는 최근 영화들은 들어가 있지 않다. 그나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최근 영화에 손꼽힌다. 선정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고독하며,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고, 한치 앞을 모르는 긴장 상태에 빠져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는 센이라는 이름에서 애정어린 호명인 치히로로 되돌아오지만, 하쿠가 있는 온천을 떠나야 한다. 치히로는 이 세상에서 하쿠 없이 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존 포드의 ‘수색자’ 또한 마찬가지다. 인디언을 증오하는 이든은 인디언과 한데 어울려 사는 자신의 조카딸을 끌어안지만, 끝내 그 속에 섞이지 못한다. 그의 손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다가 몰락에 이른다. 그 몰락은 자초한 것이며, 그들은 저항하다가 끝내 그 끝을 받아들인다. 마치 ‘죽어가는 남자’를 그린 그림처럼, 그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반면 현재 나오는 영화들은 어떠한가. 인물들은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가? 이 책의 틀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영화들의 경우 그 몰락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그 몰락은 그들이 선택하고 자초한 몰락이 아니다. 사회와 관습, 비틀린 것들이 그들을 몰락의 절벽으로 끌고 가 내팽개친다. 델마와 루이스처럼 멋지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선 절벽으로 차를 몰고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졌다. 우디 앨런은 ‘애니’를 통해 자신의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을 충족시켜 줄 사랑을 원했지만 끝내 그 일방적인 ‘소망’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 ‘민감함’ 때문에.
이제 나카시마 테츠야의 ‘갈증’과 같은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그러한 결말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민감한 곳’을 발견한 사람들은 사회 시스템을 통해 그 곳을 억누르고 폭력을 휘둘러 왔다. 민감한 곳은 이제 고쳐야 할 부끄러운 것이 되거나 악이 되어버렸다. 우디 앨런은 이 강력한 부정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갈증’의 인물들, 그 중 여주인공 카나코는 다른 사람들이 억제해 온 ‘민감한 곳’을 자극해 깨닫게 하고, 날카로운 칼로 찔러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이를 통해 그들은 사회가 조장한 몰락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초한 혼돈으로 인해 ‘몰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그들이 속여왔던 어떤 ‘갈증’이 드러났고, 그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카나코는 ‘행복하게’ 죽었다. 이제는 위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승화는 어불성설이 되어버린다.
이 책이 현재를 담지 않은 이유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도덕적 ‘유예’ 때문이 아니라, 강신주 특유의 ‘돌리기’일 수도 있다. 강의는 끝났으며, 이제 우리는 밟아온 과거와 바라본 미래상에서 고개를 돌려 강의실 밖의 현재를 파악해야 한다. 그건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받은 ‘숙제’다.
노인관람가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아이들을 영화의 렌즈 안에 담았다. 보통은 어른의 시선 높이에 맞춰 세상을 잡던 카메라 렌즈는 이제 아이들의 어깨에 머무른다. 과거 ‘집 안의 이방인’으로 취급받았던 아이들의 세상이 어른에 비해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순수한 것으로 주목받으면서 ‘아이의 시선’이 ‘천국’과 일치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명왕성’이나 ‘한공주’처럼 아이들의 세계는 이제 소사회가 되어버렸다. 따돌림 앞에서 어른들은 아직도 아이들의 순수함을 믿고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게 있으며,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수많은 영화들은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실상 청소년 영화는 순수한 어린이의 시선으로 사회를 보고 판단하는 지점에서 그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른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충격’의 기능을 한다.
‘로제타’에서 나온 ‘로제타 플랜’은 어른들이 믿는 ‘순수함’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로제타 플랜’이라는 정책을 통해 그들은 ‘순수한 젊은이’의 이상을 회복하려고 했다. 나라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은 아직 서로를 믿고 서로를 사랑해도 된다고.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로제타는 많지만 리케는 없을 수도 있다. 리케의 순수한 호의란 경계해야 할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다만 리케가 끝내 로제타를 이해했듯이, 그 이해의 순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리케는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국한되고 ‘명왕성’이나 ‘한공주’가 성인 관람 영화가 되어버린 건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한 어른들의 방어작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믿음’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하는가? 아미드가 친구 네마자데가 매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받을 벌을 무릅쓰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네마자데의 숙제까지 해오는 ‘호의’, 그 ‘무상의 호의’-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의 가능성은? 이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그 대안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사회의 소황제가 되었다면, 노인들은 사회의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다루어지고 아이들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무르’에서 부부는 불행을 맞은 ‘두 노인’이 아니라 조르주와 안느다. 조르주와 안느는 사람들이 소홀히 다루거나 골칫거리로 여기는 그들 자신의 불행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과 싸우면서 그들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애쓴다. 조르주가 마주하는 건 자신의 불행이 아니다. 그가 마주하는 건 안느가 필사적으로 조르주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다. 조르주만이 그 불행을 안느의 불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노망난 노인의 불행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안느를 ‘구해주고’, 그 순간, 그는 ‘안느’를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