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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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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온 과거, 바라보는 미래, 부재한 현재.

 -강신주, 이상용의 '씨네샹떼'를 읽고-

 

 

 

 

 

 

통증

    

  뤼미에르 형제와 멜리에스가 찍은 영화에서부터 버스터 키튼, 에이젠슈타인과 이스트우드에 이르면서 영화라는 예술의 바다는 점점 깊어지고 넓어진다. 단순히 장르나 표현 방식을 횡적이라고 표현해서는 안된다. 영화에 담아낼 수 있는 소재들은 점차 넓어진다. 타르코프스키는 시를 영화로, 부뉴엘과 달리는 미술작품을 움직이는 모빌에 이어 좀 더 다채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영화의 깊이는 어디에서 측정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는 표현을 중점으로 영화라는 굴로 들어간다. 앨리스가 떨어진 토끼굴의 끝은 어디일까. 영화가 이 세상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표현에 다다른다면, 그 끝은 언제쯤 오는가? 영원한 끝은 없다. 앨리스가 도착한 줄 알았던 토끼굴의 끝은 꿈의 공간이 아니라 계속 수수께끼를 풀고 부조리와 싸워나가야 하는 공간이었다. 사유의 완성은 없다. 제스쳐에서 어트랙션, 몽타주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통증에 대한 사유였다. 사회와 인간, 관계, 운명, 필연과 우연은 서로 뒤섞이면서 통증이라는 선명한 감각으로 회귀한다.

  채플린이 목소리 없이 제스쳐와 미장센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건 단순한 희극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영화를 멀리서 볼 수도 있고 가까이서 볼 수도 있었다. 그건 그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정서상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콧수염 속 실룩거리는 입을,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끝내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 어떤 말을 들어야 한다. 통증의 끝은 알 수 없는 신음소리이며, 그 신음소리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 신음소리는 유언이 될 수 있다. 매 순간 우리는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말들을 듣는다. 실생활에서 들리는 유언이 될 수 있을 말들은 단지 실용적이지 않다거나 생활고의 문제로 인해 무시된다. 결국 우리는 모든 말을 듣지만 아무 말도 듣지 못한다. 아도르노가 염려했듯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혹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영화는 어떤 제국주의나 국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세뇌될 수 있을 어둠의 공간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벤야민이 주목한 바처럼 긴장과 유지에 집중하라고 강요하는 일상으로부터 배제되어 우리가 망각했던 통증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그 통증은 타인의 통증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통증이다. 히치콕의 사이코, 노먼의 안에 있던 어머니의 자아가 노먼을 위해 자신이 죗값을 치루겠다고 하지만 결국 그건 노먼의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처형당하는 건 노먼, 죽는 것도 노먼, 사망했다고 기록에 남는 것도 노먼이다. 그는 사회의 즉결처분을 거부한 채 어머니로서 죽으며, 그래서 그는 사회부적응자아인 사이코가 된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간혹 아무르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걸작 25편에는 최근 영화들은 들어가 있지 않다. 그나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최근 영화에 손꼽힌다. 선정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고독하며,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고, 한치 앞을 모르는 긴장 상태에 빠져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는 센이라는 이름에서 애정어린 호명인 치히로로 되돌아오지만, 하쿠가 있는 온천을 떠나야 한다. 치히로는 이 세상에서 하쿠 없이 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존 포드의 수색자또한 마찬가지다. 인디언을 증오하는 이든은 인디언과 한데 어울려 사는 자신의 조카딸을 끌어안지만, 끝내 그 속에 섞이지 못한다. 그의 손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다가 몰락에 이른다. 그 몰락은 자초한 것이며, 그들은 저항하다가 끝내 그 끝을 받아들인다. 마치 죽어가는 남자를 그린 그림처럼, 그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반면 현재 나오는 영화들은 어떠한가인물들은 평온하게죽음을 받아들이는가? 이 책의 틀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영화들의 경우 그 몰락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그 몰락은 그들이 선택하고 자초한 몰락이 아니다. 사회와 관습, 비틀린 것들이 그들을 몰락의 절벽으로 끌고 가 내팽개친다. 델마와 루이스처럼 멋지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선 절벽으로 차를 몰고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졌다. 우디 앨런은 애니를 통해 자신의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을 충족시켜 줄 사랑을 원했지만 끝내 그 일방적인 소망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민감함때문에.

  이제 나카시마 테츠야의 갈증과 같은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그러한 결말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민감한 곳을 발견한 사람들은 사회 시스템을 통해 그 곳을 억누르고 폭력을 휘둘러 왔다. 민감한 곳은 이제 고쳐야 할 부끄러운 것이 되거나 악이 되어버렸다. 우디 앨런은 이 강력한 부정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갈증의 인물들, 그 중 여주인공 카나코는 다른 사람들이 억제해 온 민감한 곳을 자극해 깨닫게 하고, 날카로운 칼로 찔러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이를 통해 그들은 사회가 조장한 몰락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초한 혼돈으로 인해 몰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그들이 속여왔던 어떤 갈증이 드러났고, 그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카나코는 행복하게죽었다. 이제는 위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승화는 어불성설이 되어버린다

 이 책이 현재를 담지 않은 이유는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도덕적 유예때문이 아니라, 강신주 특유의 돌리기일 수도 있다. 강의는 끝났으며, 이제 우리는 밟아온 과거와 바라본 미래상에서 고개를 돌려 강의실 밖의 현재를 파악해야 한다. 그건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받은 숙제

 

 

 

   

노인관람가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아이들을 영화의 렌즈 안에 담았다. 보통은 어른의 시선 높이에 맞춰 세상을 잡던 카메라 렌즈는 이제 아이들의 어깨에 머무른다. 과거 집 안의 이방인으로 취급받았던 아이들의 세상이 어른에 비해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순수한 것으로 주목받으면서 아이의 시선천국과 일치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명왕성이나 한공주처럼 아이들의 세계는 이제 소사회가 되어버렸다. 따돌림 앞에서 어른들은 아직도 아이들의 순수함을 믿고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게 있으며,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수많은 영화들은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실상 청소년 영화는 순수한 어린이의 시선으로 사회를 보고 판단하는 지점에서 그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른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충격의 기능을 한다.

 로제타에서 나온 로제타 플랜은 어른들이 믿는 순수함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로제타 플랜이라는 정책을 통해 그들은 순수한 젊은이의 이상을 회복하려고 했다. 나라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은 아직 서로를 믿고 서로를 사랑해도 된다고.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로제타는 많지만 리케는 없을 수도 있다. 리케의 순수한 호의란 경계해야 할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다만 리케가 끝내 로제타를 이해했듯이, 그 이해의 순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리케는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국한되고 명왕성이나 한공주가 성인 관람 영화가 되어버린 건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한 어른들의 방어작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믿음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하는가? 아미드가 친구 네마자데가 매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받을 벌을 무릅쓰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네마자데의 숙제까지 해오는 호의’, 무상의 호의’-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의 가능성은? 이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그 대안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사회의 소황제가 되었다면, 노인들은 사회의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다루어지고 아이들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무르에서 부부는 불행을 맞은 두 노인이 아니라 조르주와 안느다. 조르주와 안느는 사람들이 소홀히 다루거나 골칫거리로 여기는 그들 자신의 불행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과 싸우면서 그들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애쓴다. 조르주가 마주하는 건 자신의 불행이 아니다. 그가 마주하는 건 안느가 필사적으로 조르주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다. 조르주만이 그 불행을 안느의 불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노망난 노인의 불행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안느를 구해주고’, 그 순간, 그는 안느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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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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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비게이션이 아닌 지도

 -박점규 '노동여지도'를 읽고-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우리의 일은 당신의 돈보다 아름답다.’ 한국 사회에서 물건에 관련된 인간은 기존의 분류와 다른 양상을 띤다. 기존의 분류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두 축이었다면, 이제는 노동자와 소비자로 나뉜다. 생산자였던 사람들은 노동을 하는 입장이 되거나 노동을 소비하는 생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이분법은 동시에 계급화 과정을 수행한다. 노동자는 소비자에 비해 하층 계급이 된다. 이 계급적 표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은 노동자를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로 나누면서 노동권을 면제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 사무직은 공부를 잘 한 이들의 성과이고,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 땡볕에서 일하는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의 상해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더 많이 드러난다. 육체의 질환의 원인도 스트레스로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가 노동자이며,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완벽한 소비자가 될 수는 없다.

  기존의 한국 현대사에서 노동자를 조망하는 시선이 주로 용역이나 공사장의 인부들, 공장에 머물렀다면 노동여지도의 시선은 그 편견을 극복하고자 한다. 가령 대전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소위 공부를 잘하는 박사들’, 그리고 회사원들까지. 공부 잘하고 성실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은 헛말이 되어버렸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한강 물줄기는 마르기는커녕 점점 더 깊게 강바닥을 파내려갔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강남 좌파였던 사람의 고백은, 그가 태생적으로 강남주민이었으며 김진숙 위원장 등 노동자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그 시간에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토로한다. 이는 아주 사소하면서도 경악스러운 고백이다. 누군가는 생을 위해 투쟁할 때 누군가는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자신들이 철저한 소비자라고 배워온 사람들은 그들이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문의 자극적인 보도에서 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과는 아예 상관이 없다고. 그들은 부당해고를 당할 일도 없으며 원하는 일을 취사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집안에서는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지지해줄 것이라고. 그들은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 자신도 노동자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가능한 미래이거나, 멀어도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이 당하는 현재이다.

    

 

번복되는 세기

    

  노동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모토였다면, 흔한 운동권의 도덕에의 강요에 그쳤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데스크톱이었던 컴퓨터가 태블릿 PC로 바뀌는 등 기술은 점차 진화해 왔다. 그렇다면 현실 또한 어떠한가. 토마스 모어가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한 끝 주저함이 없이 주장했던 유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19961127일 평택시 에바다 농아원에서 농아원생들이 시위를 했다. 재단운영자가 다시 풀려 나와 재단을 장악하자 노동자와 학생들이 일어나 농아원생의 권리를 주장했다. 덕분에 최성창 일가를 축출하고 에바다 농아원은 진정한 복지기관이 되었다. 이어 2006년 평택시로 미군기지의 이전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투쟁했다. 이 반대투쟁의 주축이 된 건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왜 이 투쟁에 참여했는가? 산업 발전을 외치며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 공순이들과 공돌이들은 사회의 도구가 되었다.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출 산업을 위해, 달러를 위해 마음대로 쓰이고 내던져졌다. 그들이 생산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그들이 만든 것들을 온전히 다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부당함을 알기 때문에 그 부당함을 이해하는 이들과 연대했다. 그 당시의 한국문학에서 지식인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무력함을 자책하는 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노동자의 본질과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었다. 혹은 노동자들이 놓쳐버린 어떤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지적은 어느새 노동자의 우둔함을 부각시키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설령 의도가 그게 아닐지라도, 그들의 인본주의무식함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쌍용자동차가 대한민국 1호 자동차 회사이고 그 공원들이 평택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위에 참여하며 사회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항의했지만 결국 그들 자신이 내쫓길 처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부당함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21세기의 노동사를 그렸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과거를 언급한다. 현재 뿐만이 아니라 과거도 언급하면서, 과거가 번복되는 양상이 현재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현재를 또다시 번복해 미래라는 현재를 만들어 낼 것인지 아니면 이를 깨닫고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지, 그 선택은 누구에게 달려 있을까.

 

 

 

 슬픈 열대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뿌듯함 뿐 아니라 이 책을 시간 내서 읽을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 특권은 잘 쓰면 좋은 특권이 되지만, 나쁘게 쓰면 다른 사람을 해하는 특권이 되어버린다. 동정은 금물이다. 동정은 결국 사회가 원하는 계급화를 납득하게 만든다. 노동여지도가 원했던 건 굽어 살피는 동정이 아니다

 이 책의 말미에서 나오는 파주출판단지의 노동자와 편집자들은,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들은 저항하고 있으며, 그 저항을 책으로 펴내고 있다. 책은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지침서가 아니라 경고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빚이 있거나 상환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통지서로 깨닫는다. 카프카의 요제프 K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법정에 출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날 아침 찾아온 불청객 사내들로 인해 알게 된다. 이건 부당한 진실인가? 아니면 우리가 여태껏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를 천천히 조여 오고 있었던 목줄인가? 책은 인간의 지혜와 노고를 담은 정수라고 하지만, 책은 어떤 고귀한 상황에서 계시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저 깊은 바닥, 바위와 흙이 뒤섞인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지는 약수와 같다.

  완벽한 포식자는 존재하는가? 적어도, 이 책을 경고장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은 포식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동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완벽한 포식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아직 자신들이 포식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그에 따른 운동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어떤 것도 완벽해진 것이 없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도 계속 진화해야 한다. 그 진화를 가로막는 건 완벽의 신화다. 이미 완벽함은 신화로 도래했고, 우리는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들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부한다. 우리는 거부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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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후마니타스. 2015.5

 ->현대 사회는 불안 사회다. 모든 감정에는 불안이 수반되고, 아무 것도 믿을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부를, 사회를, 우리 주변 사람들을, 심지어 가족과 자기자신마저도 믿지 못한다. 불안은 불신을, 모든 불들을 낳는다. 불안이 이 세계에 불을 지르고 있다. 어디에서 이 불안이 나오는가? 레나타 살레츨은 이 불안이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이미 잠재되어 있었으며, 그 기폭제로 터진 지점에 대해 논의한다. 이 미시사로서 다루는 불안의 역사가 어떤 효력을 발휘할 지 현 상황에서 한번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2. '예외', 강상중, 문학과지성사, 2015.5

 ->이유없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고들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인간이 초래한 사건이 되어버린다. '예외'라고 칭하는 행위는 우리로부터 그것들을 배제해 안전해지려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김상중은 경계의 사유를 통해 그동안 기민하게 그 모순을 지적해 왔으며, 이번 책에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까지 더불어 '예외'로 만드는 권력의 작동 체계와 그로 인해 소외되는 것들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3. '오늘도 괜찮으십니까', 울리히 벡, 도도, 2015.5

 ->'위험사회'와 '사랑은 지독한 혼란'을 쓴 울리히 벡의 칼럼 모음집. 울리히 벡은 '짧은 글'로서 일상을 '따라 읽기'nachrichten를 시도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괜찮은지', 그게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아주 가벼워보이는 글들일지 모르나 어떤 무게를 담기에 울리히벡은 정중하며, 또한 사실 울리히 벡의 시선은 날카롭기 때문에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의제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4. '보통이 아닌 몸',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그린비, 2015.5

->미국에서 장애가 어떻게 제시되어 왔는지 그 문화사를 들춰보는 책. 사람들은 쉽게 '정상'이라는 말을 쓰며 장애인들을 배제해 오려는 시도를 했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희화화하거나 지나치게 극화시키면서 그들을 하나의 소재로 삼은 바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인권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전부터 너무나도 당연시되어 온 장애인의 문제에도 당연히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사실상, 우리는 그렇다면 정상인인가?

 

 

5. '중국인 이야기' 4권, 김명호, 한길사, 2015.5

->현대 사회에서 중국은 점점 끓어오르고 있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는 쉽고 간결하게 중국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현 시대의 중국까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중요하다. 단순히 중국 문화사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이제는 세계사와 관련된 문제로 조망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6. '점심메뉴 고르기도 어려운 사람들', 베리 슈워츠, 예담, 2015.5

->'선택'의 문제, 이 페이퍼를 쓸 때도 선택에 고민했었다. 우리는 이제 가장 유리하고 가장 똑똑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 하에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봐 왔다. 결국 우리는 이로 인해 타인에게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우리 자신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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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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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과 이후의 감각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우리는 아주 쉽게, 모든 일의 변명을 감정으로 돌리곤 한다. 감정이란 인간만 지니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감정은 모든 발견과 창조를 가능하게 했다. 어쩌면 에덴의 이야기에서, 뱀이 더 악한 존재로 표상되는 이유는 뱀이 하와에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뱀은 하와마저도 속여 넘겼다. 그래서 뱀은 모두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만약 하와가 신과 동등해지는 지혜를 얻었더라면, 그녀는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거나 쫓겨났더라도 척박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뱀이 알려준 사과는 지혜가 아니라 그들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하와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그녀는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전까지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고, 그 감정을 토대로 낯선 황무지로 나아가 살게 되었다.

 

 인간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법은 그러한 시도들 중 하나다. 인간을 보호하는 틀로 작동하지만, 법은 완전한 기둥이 되지 못한다. 언제쯤 쓰러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지지대와 같다. 법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고려와 판단이 되고자 한다. 법은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없으며,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를 내세우는 함무라비 법전이 고대의 유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그러한 모토가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명제로는 모든 사례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심플한 법령은, 두꺼운 법전들로 늘어나고 변형되었다.

 

 법은 점차 비대해지고 강력해졌다. 법에 의해 감정은 단점이 된다. 감정은 법에 비해 비합리적인 근거이며, 개인의 주관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편견과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한 사람의 존재를 근거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인 체계를 주장하는 법의 사회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된다. 이들은 계속 하찮은 감정을 고려해 주어야 하고, 형을 어느 정도 마지못해 탕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혐오와 두려움을 구분하고 혐오는 범죄에 필요충분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두려움은 당사자들을 쉬이 동정하게 만든다. 감정은 이들에 의해 인간의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모든 주관성과 비합리성을 배제한 인간, 그 끝에는 로봇밖에 없다. 로봇은 두려움도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입력된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회로들이 다 맞아떨어진다는 것, 그건 결국 로봇의 기능을 한정짓는처사가 되어버린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저자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들의 자유가 과연 어떤 자유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인지 아니면 타인을 위한 자유인지를. 결국 법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의 사고에 불과하다.

 

 과도하게 말하면 개인의 사고, 조금 더 완화해 말하면 몇몇의 사고다. 법은 모든 이들을 다 포옹하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이 배심원제이고, 배심원들은 그들의 능력을 다해 마음으로 느끼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법의 냉정한 판단은 법의 전문가인 판사와 검사가 할 일이다. 배심원들은 고민한다’. 그들은 어떤 판결을 명확하게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정과 연민의 구분이 필요한 지점은 이 때부터다. 연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시선이며, 이해하는 척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는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동정은 기존의 부정적인 함의와 다르다. ‘

 

 동정의 서술어는 동작을 포함한다. ‘거리를 둔 동정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닥칠 수밖에 없었던 일과, 그에 대한 반응에서 발생한다. 물론 이 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질 수 없으며, 결국 실패라는 타이틀을 달 수도 있다.

 

 하지만 동정은 혐오와 수치심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혐오가 사건 전의 감각이라면, 수치심은 사건 후의 감각이다. 판결은 혐오와 수치심을 온전히 판단해낼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의 선택이 필요한 셈이다. 죄를 짓게 된 원인과 죄를 마무리하는 끝. 수치심의 발생은 인간 존재 기반을 흔들리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에 대해서 더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 수치심 때문이다. 그들은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울어져 가는 배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삶에 대한 혐오를 지니게 되었다. 삶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봤자 남는 건 방치일 뿐이다. 수치심은 전국에 만연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시 혐오의 사이클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고 동시에 자신을 혐오하면서 이 세상을 견뎌나가야 한다. 세상은 전쟁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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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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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 읽는 음식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를 읽고

 

 

 

 

 

 

 

앙트레의 가치

  

앙트레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프랑스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랑스어가 메뉴에 쓰인다는 건 가격대가 상승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식의 도시가 프랑스로 대표된 만큼, 프랑스어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는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훌륭한 대상이다. 앙트레의 어원과 현대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왔는지 그 맥을 짚어본다는 것은 과거의 시장에서 지금의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까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역사를 짚어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가격대가 높을수록 단어는 점점 길어지면서 근사해 보이는 단어를 쓰고, 진짜라고 주장하는 대신 암시한다. 반면 싼 음식은 긍정적이고 모호한 형용사를 쓰고 진짜라고 주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격대의 차이를 변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그들의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얄팍한 술수에 대해 메뉴판을 제대로 읽어낼 것을 주장한다. 언어에게 휘둘리는 대신 언어를 파악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어를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포장지처럼 몇 번이고 둘러서 안에 있는 걸 쓸데없이 기대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기점은 미국-아메리카로, 모든 음식들이 모이고 흩어진다고 여겨지며 결국 모든 음식의 기원을 없애고 자본으로 환산한다. 이로 인해 언어는 압살당한다. 언어가 압살당하면서 음식 또한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 언어와 음식 간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모든 것이 아메리카가 되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안은 바로 언어의 회복에 있다.

이는 음식의 이름, 언어가 명명된 순간을 되짚어 올라가는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이름이 붙여진 장소와 유래를 알게 된다면 영어식 표기는 힘을 잃는다. 가령 케쳡의 경우, 우리가 흔히 아는 토마토 케첩이 아닌 중국의 오래된 생선 소스라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케첩이 KETCHUP이 아니라 케(오래 저장된 생선)+(소스)이라는 중국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통해 케첩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케첩이 아메리카에 오게 된 건 자본주의가 벌린 시장이라는 경로 덕분이었다. 외국의 음식들은 새로이 변종되면서 새로운 맛을 이끌어냈다. 이걸 가능하게 한 건 부르주아였다. 언어의 회복은 동시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자본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자본은 바로 새로운 융합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돌멩이 수프의 가능성

  

돌멩이 수프의 일화는 사실 단추 수프 일화의 변용처럼 읽힌다. 한 나그네가 굶주린 채 어떤 마을에 당도한다. 그 마을은 너무 인색해서 나그네에게 빵 한 조각도 주지 않는다. 나그네는 사람들에게 가장 맛있는 수프를 끓여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단추를 끓이면 맛있는 수프가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는 어떤 재료들을 조금씩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홀려 이것저것 집어넣는다. 수프의 건더기는 풍성해지고 국물은 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수프를 나눠먹는다. 그들은 가장 맛있는 수프를 끓이는 방법을 알아냈다. 바로 공동체였다. 서로를 배려하고 도우며, 함께 살아나가고자 하는 마음’. 그게 수프를 맛있게 만든 것이다. 또한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강한 마음도 그 요인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끊임없이 상하관계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걸 접하고 계급이라는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세비체가 덴푸라였고 시크바즈였다는 맛의 뿌리는, 어떤 경계도 없이 거대한 바다를 자유로이 오가는 생선들처럼 그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발견에서 온다. ‘이민은 새로운 삶을, 새로운 타자들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배제하고 거부하면서 안온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불리는 피시앤드칩스는 한때 모든 사람들에게 타자로 머물렀던 유대인들의 생선 튀김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그로서 영국인이 된다. 국경은 사라지고, 맛있는 음식으로 통일된다.

어떤 음식의 유래를 찾는다는 건 그 음식의 소유권을 어떤 특정한 나라에 귀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령 소시지는 독일 것이라거나 이탈리아 것이라는 다툼은, 그 나라에서 지니는 소시지의 규격의 고유성을 강조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가능성은 부여하지 못한다. 코코넛 매커룬이 프랑스의 고급 과자 마카롱이 된 것처럼, 새로이 번역되고 복사본이 없는 대상-시뮬라크르로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셰프의 경우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아오던 한 셰프가 평론가의 공격에 무너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는 늘 주어진 메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갈등하며, 결국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간다. 그는 평론가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요리는 이게 아니며, 요리는 조금도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가 행복해질 수 있는 수단은 푸드 트럭도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다. 바로 국경과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요리의 가능성이었다.

 

    

 

 

폴리애나 효과-마무리는 디저트

  

불꽃놀이와 화약에 사용되었던 초석 기술은 달콤한 셔벗과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전쟁이 아닌 먹을 것에 귀중한 초석을 쓴다는 것이 낭비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덕분에 웃는다.’ 덥고 짜증이 나는 와중 시원하고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불행은 각자 다르고, 일반화할 수 없으며, 쉽게 공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서로의 불행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하고 싸운다. 불평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아주 쉽게 불행해지곤 한다. 부정적인 단어는 이미 부정적인 현실을 가정한 다음 행사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쉽게 상품이 되지 않기 위해 의심하고 애쓰려고 한다. 가령 레스토랑에서 진짜 우유 생크림이라고 걸어 놓았다면, 우리는 다시 점원에게 묻는다. 이게 진짜 생크림이냐고. 그리고 우유 생크림에 대해 아는 모든 의심들을 점검해 본 뒤 거들먹거리면서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린다. 이를 통해 그들은 속지 않으려고한다. 속지 않는다는 게 좋은 것이라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또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일까? 좋은 것과 행복한 것은 다르다. 달콤한 디저트가 이를 썩게 만드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우리는 모두가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유 생크림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고 이를 암기하고 속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우유 생크림을 산다. 그런데 우리가 우유 생크림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우유 생크림이나 생크림보다는 버터 크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음식의 가치는 사실상 자본이 세워놓은 계급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종족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현대 사회는 디저트를 금지한다. 살이 찔 수 있다는 것과, 낭비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화답하듯 디저트가 비싸지는 것은 단순히 손이 많이 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디저트는 자본의 기준을 뛰어넘는다. 아주 조그만 주제에 손이 많이 가고, 재료도 쉽게 낭비된다. 우리는 달콤한 콤포트를 만들기 위해 설탕 반 그릇을 후라이팬에 붙고 그게 다 졸아서 자작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디저트는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르는 척 금가루를 두르거나 유명한 셰프에게서 나오는 척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에 위배되는 음식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냥 잊지 말고 디저트를 주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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