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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이전과 이후의 감각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우리는 아주 쉽게, 모든 일의 변명을 감정으로 돌리곤 한다. 감정이란 인간만 지니고 있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감정은 모든 발견과 창조를 가능하게 했다. 어쩌면 에덴의 이야기에서, 뱀이 더 악한 존재로 표상되는 이유는 뱀이 하와에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뱀은 하와마저도 속여 넘겼다. 그래서 뱀은 모두에게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만약 하와가 신과 동등해지는 지혜를 얻었더라면, 그녀는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거나 쫓겨났더라도 척박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뱀이 알려준 사과는 지혜가 아니라 그들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하와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그녀는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전까지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고, 그 감정을 토대로 ‘낯선 황무지’로 나아가 살게 되었다.
인간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법은 그러한 시도들 중 하나다. 인간을 보호하는 틀로 작동하지만, 법은 완전한 기둥이 되지 못한다. 언제쯤 쓰러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지지대와 같다. 법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고려와 판단이 되고자 한다. 법은 하나의 진리가 될 수 없으며,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를 내세우는 함무라비 법전이 고대의 유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 그러한 모토가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명제로는 모든 사례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함무라비 법전의 심플한 법령은, 두꺼운 법전들로 늘어나고 변형되었다.
법은 점차 비대해지고 강력해졌다. 법에 의해 감정은 단점이 된다. 감정은 법에 비해 비합리적인 근거이며, 개인의 주관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편견과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한 사람의 존재를 근거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인 체계를 주장하는 법의 사회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된다. 이들은 계속 하찮은 ‘감정’을 고려해 주어야 하고, 형을 어느 정도 마지못해 탕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혐오와 두려움을 구분하고 혐오는 범죄에 필요충분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두려움은 당사자들을 쉬이 동정하게 만든다. 감정은 이들에 의해 인간의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모든 주관성과 비합리성을 배제한 인간, 그 끝에는 ‘로봇’ 밖에 없다. 로봇은 두려움도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입력된 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회로들이 다 맞아떨어진다는 것, 그건 결국 로봇의 기능을 ‘한정짓는’ 처사가 되어버린다.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저자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들의 자유가 과연 어떤 자유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인지 아니면 타인을 위한 자유인지를. 결국 법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의 사고에 불과하다.
과도하게 말하면 개인의 사고, 조금 더 완화해 말하면 몇몇의 사고다. 법은 모든 이들을 다 포옹하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이 배심원제이고, 배심원들은 그들의 능력을 다해 ‘마음’으로 느끼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법의 냉정한 판단은 법의 전문가인 판사와 검사가 할 일이다. 배심원들은 ‘고민한다’. 그들은 어떤 판결을 명확하게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정과 연민의 구분이 필요한 지점은 이 때부터다. 연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시선이며, 이해하는 척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는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반면 동정은 기존의 부정적인 함의와 다르다. ‘
동정의 서술어는 동작을 포함한다. ‘거리를 둔 동정’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닥칠 수밖에 없었던 일과, 그에 대한 반응에서 발생한다. 물론 이 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질 수 없으며, 결국 실패라는 타이틀을 달 수도 있다.
하지만 동정은 혐오와 수치심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혐오가 사건 전의 감각이라면, 수치심은 사건 후의 감각이다. 판결은 혐오와 수치심을 온전히 판단해낼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의 선택이 필요한 셈이다. 죄를 짓게 된 원인과 죄를 마무리하는 끝. 수치심의 발생은 인간 존재 기반을 흔들리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에 대해서 더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 수치심 때문이다. 그들은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울어져 가는 배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삶에 대한 혐오를 지니게 되었다. 삶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봤자 남는 건 방치일 뿐이다. 수치심은 전국에 만연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다시 혐오의 사이클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고 동시에 자신을 혐오하면서 이 세상을 견뎌나가야 한다. 세상은 전쟁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